새 공지 및 대문

[Charles Ier insulté par les soldats de Cromwell
크롬웰의 병사들에게 조롱당하는 처형 하루 전의 찰스 1세.
이폴리트 들라로슈, 캔버스에 유화. 1836. 300 cm × 400 cm]


"I must tell you ... A subject and a sovereign are clean different things. If I would have given way to an arbitrary way, for to have all laws chang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word, I needed not to have come here, and therefore I tell you...that I am the martyr of the people."

"신하와 군주는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다. 만약 짐이 무력에 의해 모든 법률이 좌지우지되는 독단의 방식을 받아들였더라면, 짐이 이 자리에 설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선언하건데, 짐은 이로써 국민의 순교자가 되었다."


-영국왕 찰스 스튜어트, 찰스 1세Charles I of England, 1600~1648.
1648년 1월 30일, 단두대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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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

트레비아 - 1장. 슈니빌드부르크의 거리 : 3

3.

시데르 로크 대위의 임무는 사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혁명군과 협조하여, 조사단이 슈니빌드부르크에 도착하기에 앞서 최소한 수도 방면 공국군의 공화국군으로의 재편 문제를 정리해 놓는 것이었다. 여러 병영과 요새들을 방문해 협상을 하고 행정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그것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지지부진했던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 공화정부와 트레비아 외무성 간의 협상은 체스터 아크벨 소령의 설득이 유효했는지 막판에 타결되었고, 덕분에 군 재편은 장해물 없이 수행될 수 있었다. 베켓 대사의 도움으로 트레비아 외무성에서 인가해준 추가 예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슈니빌드부르크 인근에는 중대급과 대대급의 약 4천여명 정도의 구 공국군 주둔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운용실태는 다양했다. 자체 운영은 계속 하고 있으되 사태를 그저 관망 중이던 부대도 있었고, 혁명군 세력에 의해 제압, 무장해제 되어 병영 내에 사실상 연금 중인 부대도 있었다. 아예 병영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흩어져버린 부대도 있는가 하면 장교들의 통제가 느슨해져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가버린 자들이 많아 편제의 절반도 안 남은 부대도 많았다. 시데르는 부대를 유지하지 않고 흩어진 자들의 경우 나중에 산적화 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왔지만 일단은 당장의 일이 줄어든 것을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공국군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쉽게 협상에 응했고, 부대재편에 몇 가지 조건들을 내세우긴 했어도 흔쾌히 동의했다. 이대로라면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 공화국군은 안정적으로 편성되어 갈 것으로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간단히 처리될 일이 혁명 발발 후로도 몇 달 씩이나 지연된 건지 잘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너무’ 쉽게 일이 풀리게 된 이유는 어느 공국군 중대장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아아, 트레비아 분들은 역시 말이 잘 통하고 계산도 확실하단 말입니다. 역시 상업과 자본주의의 나라여서 그렇겠지요? 아, 민주주의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저희 나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난 것이 참 다행입니다. 덕분에 저도 이득을 많이 봤습니다. 허허”
“이전에도 트레비아 사람과 같이 일 해보셨나보죠?:
“예? 아니, 한 달 전에 트레비아 정부에서 온 분 말입니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여성분이 공직자인데다 그리 당당하고 명석한 것에 여러모로 놀랐습니다. 트레비아의 여자들은 다 그런가요? 허허”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공국군 중대장의 모습에 시데르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 트레비아 여자란 사람이 누구였으며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아주 즐겁고 흥미로운 대화였던 모양인데.”
시데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은 차가운 어투로 말하자 공국군 장교는 그제서야 뭔가 생각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 이런, 이미 다 알고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전 또 다 얘기가 되어 있는 줄로만 알고... 이거 큰일이네,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했는데..”

시데르는 여러번 다그쳐 묻고 나서 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 말인 즉슨,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신을 트레비아 외무성의 파견 요원이라고만 소개한 여성 한 명이 한 달 전부터 구 공국군 병영과 요새들을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회유했다는 것이었다. 요구 조건은 신정부 또는 트레비아 측 군인이 다시 협상하러 올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현상을 유지하라는 것으로,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그냥 주둔지에서 대기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 대가는 막대한 양의 트레비아 은화였다. 반혁명 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대기상태를 유지하자 같은 양의 은화가 추가로 배달되어 왔다고 했다. 그것도 은 함량이 높은 트레비아 국립 은행 발행의 공인 켄트 은화였기 때문에 구 공국군 장교들은 지시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의심하고 있었지만 트레비아 켄트화에 대한 대목에서 시데르는 확신을 굳힐 수 있었다. 시데르는 그 여성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지만 그 소속 기관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외무성 좋아하시네!’ 그녀는 분명 외무성Ministry of Foreign Affairs이 아니라 대통령 직속의 국무성Ministry of State Affairs 소속일 것이라고 시데르는 짐작했다. 왜냐하면 국무성 산하에는 다름 아닌 트레비아의 정보분석실, 즉 TIAO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스터가 말해준 그대로였다.

이후 몇몇 다른 공국군 지휘관들과 더 대화해 보면서 캐물어 그때마다 트레비아 정보요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시데르는 큰 실망감과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임무라는 것에 아무 의미도 없는가 싶었고, 한편으로는 뭐든지 돈으로 매수하려는 수법이 참으로 '트레비아 스럽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다. '그렇게 돈이 썩어난다면 사회복지 같은 거창한 얘기는 바라지도 않으니 빈민구제 사업에라도 돈을 풀어줄 수 없나?' 시데르는 안타까웠다. ‘챠오’에서 은화를 뇌물로 받은 장교들은 은화의 대다수를 독차지했을 터였다. 일반 병들의 밀린 봉급은 시데르가 받아온 트레비아 외무성 예산을 통해 집행될 터였지만 그것도 전부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게 다 무슨 낭비란 말인가! 그러나 얼마나 허무하건, 또는 돈이 아깝건 간에 할 일은 계속해야했다.

그 이름 모를 정보요원 덕택인지는 몰라도, 9월 27일에 이르러 슈니빌드부르크 근방 30마일 내에 있는 공국군 수도연대 예하 부대들은 공화국군으로의 재편성이 거의 완료되는 중이었다. 구 공국체제 충성파 사관들과 병사들에게는 공화정부에 대한 충성 맹세만 한다면 넉넉한 퇴직금과 함께 전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충성 맹세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퇴직금도 거부되었다.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 시민이 아닌 국외 출신 병사들에게는 트레비아 군으로의 입대 권유가 행해졌다. 일부 불평분자들은 설득을 거쳐 공화국군으로의 재편을 유도하고 교육시켰다. 시데르는 이 과정에서 금전 문제는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할지 궁금해졌다. 애국심이나 전우애보다 연체된 봉급의 일시불이 더 중요한 결정 요소일까?

그런데 시데르는 그 '금전 문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난처한 경우를 계획 상 마지막 방문 부대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4백여명 정도의 병사가 소속되어 있었던 구 공국군 수도 연대 제 7대대였다. 그러나 이 의외의 발견에 대해 시데르는 그다지 기뻐할 수 없었다. '더러운 트레비아 돈 따위 필요 없다'는 삿대질과 함께 돌이 날아오는 경우는 상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런 놈들이 우리 국토를 짓밟고 우리 형제자매들을 총칼로 해쳤단 말이지? 정말 수치스럽군!”
“신정부는 우리와 제대로 대화 할 의지가 있긴 한가? 저런 놈팡이들밖에 보내지 못한다는 건가?”
“이미 무슨 소리 할지 다 알고 있어! 우리가 돈에 미쳐 나라를 배신할 거라곤 생각지 말라!”
“트레비아와 그 꼭두각시 정부에 본 때를 보여줘야 해! 마침 잘 됐다, 저 놈을 끌어내자고!”
“이야, 민주 공화정이란 게 남자는 계집처럼, 여자는 사내처럼 만드나 보지? 우린 그런 민주주의 따위 필요 없다!”
“우리는 트레비아의 암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트레비아의 개들을 죽여라!”


7대대 주둔지에 도착해 그 병영 중앙 연병장에 들어서자마자, 검붉은 색 공국군 제복을 입은 7대대의 장병들이 시데르 일행을 에워싸고 야유와 폭언을 퍼부었다. 장교 몇 명이 그들을 통제하는 시늉을 하긴 했으나 별로 노력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시데르와 동행했던, 파란색 혁명 완장을 찬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 공화국군 장교 한 명이 목청을 높여 그들을 상대하려 했다.

“진정해라, 이 반동분자 놈들! 신정부의 공식 명령으로, 그대들도 혁명의 물결에 동참할 기회를 주러 왔으니 기뻐하고 예를 갖추라!”

하지만 7대대의 장병들은 지금까지 마주쳤었던 구 공국군 병사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매국노는 닥치고 있으라’는 욕설과 함께 그들은 진정하기는커녕 총칼을 뽑아 혁명파 장교에게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그 서슬에 놀란 공화국군 장교는 파리하게 질려 땅에 주저앉았다.

그와는 대도적으로 시데르의 호위 자격으로 따라왔던 전령 폴 베르티유 이등병은 짐짓 용감하게 허리춤의 피스톨을 뽑아들고 시데르의 앞을 막아섰다. 소년병의 피스톨에 공국군 병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그 용기는 가상해 보였다. 그러나 시데르는 자신의 기병도를 뽑지 않았다. 다만 차분하게 어린 전령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폴, 그 총 그냥 집어넣고 내 뒤로 오는 게 좋겠다.”
“하지만 대위님! 전 대위님을 지켜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야 이 바보야, 장전도 하지 않은 총으로 뭐 어쩌겠다는 거야?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원래 어른이 꼬마를 지켜주는 거지, 그 역이 아니라고. 앞길 막지 말고 어서 비켜.”

시데르의 부드러운, 그러나 단호한 말에 베르티유 이등병은 머뭇머뭇 거리며 물러났다. 아직 쭈뼛대는 소년을 완전히 등 뒤로 보내고서는, 시데르는 점점 더 과격해지는 야유와 폭언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병사들의 독자적인 판단화 행동으로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터무니없는 오합지졸이 아닌 이상, 제대를 유지하고 도시로부터 격리된 주둔지에 있는 병사들은 그 지휘관의 의지에 휘들리기 마련이었다. ‘이 대대의 지휘관은 [챠오]의 뇌물에 만족하지 못했나?’ 어찌 되었든 시데르는 가슴을 펴고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자신이 기죽거나 허리를 굽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있겠지만.

“그래, 내가 트레비아인이다. 본관은 트레비아 공화국군 근위연대의 시데르 로크 대위다. 너희들을 돈 몇 푼으로 구슬리러 온 사람이지.”
시데르가 하도 당당하게 외치자 야유하던 병사들은 주춤거렸다.

“뭐.. 뭐야?”
“그래, 우리 군대가 슈니빌드부르크를 제압했고 그 시민들도 죽였다. 불만이라도 있나? 9월 9일에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 누구 있나? 있다면 거 미안하게 되었군.”

시데르의 레만어 실력은 약간 서툰 편이었지만 그 뜻과 빈정대는 어투는 선명하게 전달 될 수 있었다. 공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노기를 느낀 폴 베르티유가 당황해 시데르의 등 뒤에서 ‘대체 어쩌려고 그러시느냐’며 잡아 당겼지만 시데르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의 귀중한 자원도 전부 트레비아에서 가져가게 될 거다. 너희들 따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말이야. 그래! 너희들 말대로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는 트레비아의 암캐가 되어버렸다고.”
“이 개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다시 흥분한 병사들의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시데르는 그들을 가리키며 더 크게 외쳤다.

“분한가? 하긴 분하겠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이건 전부 그저 네놈들이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벌어진 일인데!”
“으아아아!”

참지 못한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시데르에게 달려들었다. 병사는 머스켓 총의 개머리판으로 시데르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했다. 그러나 시데르는 마치 산들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듯 매끄럽게 공격을 피했다. 전력으로 달려들었다가 목표를 놓친 병사는 기우뚱하며 잠시 당황하다가 이번에는 총구를 앞으로 향해서 창처럼 잡아 내질렀다. 총검을 꽂지는 않았기에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구리 코팅이 된 총구와 총구 밑에 달린 총검 소켓은 묵직한 타격으로 상처를 입히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시데르는 이번에도 공격을 피하여 뒤로 빙글 돌았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허리띠에서 자신의 기병도를 칼집 째 떼어내 허둥대는 병사의 등과 목덜미를 내리쳤다. 이어서 그는 비틀거리는 병사의 정강이를 다리로 걷어차 넘어트렸다.

그러자 그때까지 멍하니 보고만 있던 또 다른 병사와 하사관 하나가 노성과 함께 시데르에게 머스켓 총을 들고 덤볐다. 그러나 시데르는 그들이 총을 움켜 쥔 자세 자체부터 허점이 너무 많다고 느꼈고, 같이 오래 춤을 춰 줄 생각도 없었다. 시데르는 여전히 칼집에 꽂힌 채의 기병도로 두 공국 군인을 힘 있게 찌르고 때렸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병사는 급소를 찔려 신음하며 엎어졌고 하사관은 팔을 얻어맞아 총을 떨어트렸다. 시데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하사관을 기병도의 힐트 부위로 가격해 때려눕혔다.

순식간에 세 명이 제압당하자 공국 군인들은 놀라서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몇몇 병사들은 칼집에서 검을 뽑아들었고 어떤 하사관은 연병장 한 구석 무기대에 거치되었던 할버드를 떼어 들고 뛰어왔다. 시데르와 폴은 긴장하며 각각 기병도와 단검을 칼집에서 꺼낼 준비를 했다. 다행히도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7대대의 장교들이 호통을 치며 병사들 앞을 막아선 덕분에 싸움은 유혈사태로까지는 번지지 못하게 되었다. 시데르에게 두들겨 맞은 세 명은 끙끙거리면서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를 떴다.

냉정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보던 시데르는 기병도를 다시 허리띠에 부착시켰다. 전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들을 죽일 의도는 없을 거라 예상한 대로였다. 시데르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았다. 소란이 있었던 덕분에 연병장에는 이제 7대대 대부분의 병사가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시데르는 약간 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제군들은 보다시피 세 명이 나 같은 트레비아 인 한 명도 쓰러트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트레비아 군대가 백 수십 마일을 뚫고 슈니빌드부르크까지 깊숙이 들어오는데도 누구하나 막는 이가 없었다. 어째서인 줄 아나?”
시데르는 잠깐 뜸을 들였지만 물론 대답은 없었다.

“제군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군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무능한 군주 한 명이 나라 하나의 살림을 통째로 망치고 있는데도 그걸 옆에서 제지할 사람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강한 나라였던 트레비아에게 국운을 좌지우지 당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에는 이제 기회가 주어졌다. 더 강한 나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기회가. 이 나라는 민주 공화국이 되었고, 국민들 스스로가 나라가 향할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시데르의 허스키한,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는 연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웅변을 배운 적은 없지만 포성 가득한 전장에서 명령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 정도는 알았다. 그는 잠깐 쉬었다가 얘기를 계속했다.

“트레비아는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이곳을 점령하거나 합병하지도 않을 것이다. 딱히 보호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득만 취하고 도망갈 거란 말이다. 제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신 민주 공화국의 군인으로서, 내 조국 트레비아가 고혈을 다 빨아먹기 전에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트레비아나 또는 다른 나라에게 잠식당하지 않도록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나는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를, 제군들이,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길 바란다. 본관은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 귀관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새로운 체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이다.”

시데르는 이쯤에서 그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충분히 진정된 것으로 보였다. 더 이상 속삭이는 이도 없이 수백 명이 모인 연병장에는 고요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절반밖에 믿지 않았다. 사상가 몰로치 벨리나크가 그랬다던가, 자기가 하는 말을 전부 진심으로 믿는 자는 최악의 기만자거나 구제불능의 정신병자뿐이라고. 그러나 시데르는 아무리 그래도 위선자가 되는 기분은 꽤나 역겹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얘기를 남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시데르는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가 다른 나라, 또는 외부 권력에 좌우되지 않고 그 시민들이 스스로 자립해 미래를 개척하게 되길 기원했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나라로 되돌아가길 바랐다. 트레비아 같은 나라가 되어서도 안 되었다.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의 ‘자립’이 트레비아의 이익에 반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시데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공국군 7대대의 병사들은 다시 웅성이기 시작하면서도 자신들이 방금 들은 변설의 내용을 곱씹어보는 듯 했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폴 베르티유 이등병은 시데르에게 무한한 존경과 선망이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어서 시데르는 살짝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느닷없는 박수 소리였다. 짝. 짝. 짝. 군중 속에서 단 한 사람이 치는 박수였다. 소리가 그치자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대대-차렷!”

갑자기 얼어붙어 부동자세를 취한 병사들 사이를 지나 한 장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시데르의 앞에 도달해 멈춰선 남자는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30대 초, 중반으로 보였는데, 시데르와 비슷한 정도로 키가 컸다. 그 공국군 소령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시데르는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하게 응시하다가 뒤늦게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차렷 자세를 취하고는 손을 올려 경례를 했다. 소령은 절도 있게 경례에 답하고서 손을 내밀어 시데르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7대대의 대대장 대리, 콘라트 리프크네히트Conrad Liebknecht 소령입니다. 심금을 울릴 멋진 연설, 잘 들었습니다.”
“트레비아 근위연대 시데르 로크 대위입니다. 별 말씀을.”

시데르는 빙긋이 웃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긴장했다. 만만한 자가 아니구나 싶었다. 맞잡아 악수하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리프크네히트 소령은 슬며시 손을 놓았다.

“더 이상 연설을 하실 것이 아니라면, 제 방으로 가시죠. 손님 대접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

리프크네히트와 시데르는 연병장을 떠나 7대대 막사 건물의 대대장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하게 되었다. 견고하고 오래된 석조 병영이었는데, 4백여명을 수용하기에는 조금 작았다. 대대장실도 꽤 비좁은 곳이었다. 전령 폴 베르티유 이등병과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 혁명파 장교는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아까 제 부하들이 저지른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 달 초 트레비아 군이 한 일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말이지요.”
“아아, 그건 저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의 국민들이 피를 뿌리게 된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진심으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라고?’ 시데르는 리프크네히트의 기색을 살폈다. 이자는 대체 무슨 속셈일까. 도통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리프크네히트는 여전히 은근히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였다. 그저 눈썹을 조금 꿈틀했을 뿐이었다. 시데르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소령님은 구체제에 충성하는 입장은 아니실 테니 이해하시겠지요. 한 번 일어난 혁명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걸 돌이키려 들면 더 큰 혼돈과 피해가 생겨날 뿐입니다. 희생당한 목숨들은 안타깝지만, 반혁명의 봉기는 진압되어야만 했습니다.”
“예, 그렇겠군요...하지만 어째서 제가 구체제 충성파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얼굴 뿐 아니라 말투도 태연하기 그지없어, 마치 내일의 날씨에 대해 가볍게 논하는 것 같은 투였다. 시데르는 자기 앞에 앉은 이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인이 매우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그렇고, 결국 지금까지도 7대대는 얌전히 이곳에서 대기해 주었잖습니까? 반혁명 세력을 돕지도 않고 말입니다. 혁명정부로부터 누군가가 와서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면서 기다린 거지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구체제에 목숨을 건 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군요. 트레비아인을 싫어하건 말건 그건 부수적인 문제이지요.”

리프크네히트는 금방 대답하지 않고 병사를 호출하더니 차를 두 잔 내오라고 했다. 홍차가 괜찮겠느냐고 해서 시데르는 차는 필요 없고 커피가 있느냐 물었다. 실로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약간의 오기가 들어서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부대에 커피가 없다기에 시데르는 그냥 홍차를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별로 할 말은 없는 맛과 향기를 가진 싸구려 홍차였다. 억지로 몇 모금 삼켜 넘기자 리프크네히트가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쯤에 트레비아 외무성에서 왔다는 여인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대기하여 혁명정부의 언질을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큰돈을 대가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의 대화를 부하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제 병사들은 당연히 분노했습니다. 저도 그런 돈은 필요 없다고 했지요. 트레비아 건국 영웅이었다는 1세기 전 사람들과는 달리, 저희는 용병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도발인가?’ 하지만 시데르는 리프크네히트가 용병 얘기를 꺼내는 저의가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지만 당신 결국 요구에 응했습니다. 7대대는 지금까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었잖습니까. 결국은 혁명을 지지하셨던 것 아닙니까? 만약 돈으로 모욕당했다고 느끼셨다면, 저희 나라를 대표해 사과드리고 싶군요.”
“글쎄요, 어느 쪽일까요. 뭐, 혁명을 지지하는 건 사실입니다. 혁명은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혁명이 과연 올바른 방법과 올바른 사상, 올바른 시기에 벌어진 혁명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리프크네히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는 동작이 묘하게 우아해 보이는 것도 시데르의 마음에 안 들었다.

“귀관께서는 국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힘을 기르라고 했었지요? 예, 좋은 말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라도 그렇게 말해주는 트레비아 사람이 있다는 것에 병사들도 놀랐을 겁니다.”
“아뇨, 진심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기사 귀관의 말은 사실 트레비아란 나라에서 그 국민들에게 항상 주입시키는 말의 변종이었지요?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누구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 패배해서 남의 발아래 놓이는 건 다 네 스스로가 노력을 안 한 못난이여서다,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시데르는 당황스러워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리고 조금은 얼굴을 붉혔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 안된 자는 안 한거다’ 류의 레토릭이 트레비아에 만연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들은 너무나 많은 이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차라리 날 때부터 자기 운명은 정해져 있다며 묵묵히 살아야 하는 전제 군주국의 농노가 마음은 더 편하겠지 싶을 정도로.

“그런데 이걸 아십니까? 그렇게 스스로 자기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필요 최소한의 여건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 이전에 탄탄한 출발 기반이 있어야겠지요. 지금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에는 그 기반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말입니다. 사실 레마니아 지방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레만어를 쓰고 같은 황제를 섬겼던 역사를 공유하지만, 다 너무나 작고 잘게 조각 나 있어서 성공을 향해 나아갈 기반은 만들어지기 어렵죠. 그래서야 나라 주인이 선제후이건, 귀족집단이건, ‘국민’이건 간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요. 개개인에 불과한 공장 기계공이 공장 소유자와 경쟁이 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트레비아라는 나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데르는 그 때 깨달았다. 이 자는 사회주의자다. 동시에 레만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트레비아라는 나라와는 그야말로 상극에 위치한 위험분자였다.

“그렇다면, 리프크네히트 소령님은 지금 원하시는 게 뭡니까?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의 앞날을 그렇게 걱정하는 애국자로서, 앞으로 무엇을 바라며 어떤 일을 하겠다는 겁니까?”
“글쎄요, ‘좋은’ 나라,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힘써보고 싶습니다. 외세에 핍박받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들고, 가진 자에게 가지지 못한 자들이 핍박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거지요. 아까 로크 대위 귀관이 말해준 것처럼 말입니다.”

시데르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이 대화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소령님은 아직 제 질문에 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트레비아에 반대하고, 트레비아의 돈을 거부했지만, 슈니빌드부르크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7대대는 왜 움직이지 않았던 겁니까?

리프크네히트는 고개를 까닥이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그는 약간은 장난기 어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표정으로 다시 시데르를 응시했다.

“시기가... 좋지 않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시데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시데르 앞에 놓였던 찻잔이 엎어져 테이블 위가 미지근해진 홍차로 흥건해졌다. 그는 여전히 태평하게 앉아있는 공국군 소령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7대대는 공화국군으로의 재편에 동의합니까?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더 이상의 고담준론은 필요 없습니다. 전 귀관의 사회관에 대해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또 딴소리를 했다.

“제가 왜 이런 긴 이야기를 굳이 당신에게 했는지 아십니까, 로크 대위? 귀관이 트레비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관이 다른 트레비아인들과는 좀 달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귀관이라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리프크네히트는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시데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데르가 손을 잡아주지 않자 그는 들어 올린 손을 그대로 집무실 입구로 향했다.

“공화국군으로의 재편... 행정절차만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서류작업은 제 부관과 함께 하시면 될 겁니다.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그럼 이만, 좋은 하루되시길.”

말투는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시데르는 그 자체가 충분히 모욕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방을 빠져 나왔다.



(1장 3절 끝)

껄껄껄

총 잘 쏴서 포상을 받게 될 줄 누가 알았으리오

으허허 이번엔 어째 총이 좀 계속 잘 맞더라고 으허허

100사로고 200사로고 250사로고 아무거나 다 튀어나오라 그래 다 맞춰주마 하면서

탕 후닥닥 철푸덕 탕 후닥닥 털썩 탕 후닥닥 철푸덕 탕 후닥닥 철푸덕 탕 후닥닥 털썩 탕

했더니

결과에 나도 놀람

다음달엔 좀 바빠서 못쓸 것 같지만, 12월 쯤엔 포상휴가 나가겠으욬

트레비아 - 1장. 슈니빌드부르크의 거리 : 2

본 소설은 매주 일요일 올립니다.

1장 제목을 바꿨습니다.

책으로 치자면 1권이겠군요. 7장 완결로 구상해 논 상태입니다. 소제목들을 달지 어떨진 생각 안해봤습니다.



Chapitre I. The Streets of Schneewildburg

2.

“야영지는 다섯 줄의 횡선을 그리고, 제 1열과 제 2열의 간격은 16피트로 하며 나머지 열들의 간격은 8피트로 한다. 각 중대 사이 통로는 가로폭을 10피트로 하여 각 텐트 사이 간격은 2피트로 한다...”

850년 경 출판된 『낭테르 제국 보병 야전교범』의 야영지 편성 기준 설명이 이와 같았다. 해당 저서는 알트넘 대륙의 각국이 받아들인 결과 2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군대의 기본 교리에 포함되었고 이는 트레비아 공화국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교범을 늘 정확하게 준수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슈니빌드부르크 시 외곽에 자리 잡은 트레비아 공화국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 파병부대의 야영지는 산중 계곡에 위치한 도시 때문에 울퉁불퉁 굴곡이 많은 산악지대에 편성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교범처럼 네모반듯한 모양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덕 지형에 지그재그로 옹기종기 모인 트레비아군 숙영지는 영 옹색했다. 산지여서 아직 9월 중순임에도 이미 아침이슬이 서리에 가까울 만큼 차가웠다.

하지만 도시 안 시설에 투숙하기는 커녕 평지가 더 있는 도시 가까이로 옮길 수도 없었다. 슈니빌드부르크의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이 암녹색 제복의 무장집단은 정복자이자 억압자요, 학살자일 터였다. ‘전투’를 치를 때만 제외하고 이 군대는 민간인들과 불필요하게 접촉해서는 안 되었다. 도시에서 순찰을 도는 것조차도 필요 최소한으로 시행 중이었다. 그 군대의 장교 시데르 로크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서부터 그런 증오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삶은 달걀에 굵은 소시지 한 줄, 작은 통밀 빵 한 덩어리, 그리고 커피로 이루어진 아침식사를 하면서 시데르는 그 날의 부대활동계획을 읽었다. 대부분이 슈니빌드부르크 도시 치안유지 및 경계근무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침식사의 맛만큼이나 무덤덤한 계획이었다. 매일 하는 일은 조금씩 달랐고 다양했지만 기본 골자는 비슷했다. 소요 방지 및 진압, 범죄 감시와 우범자 체포-구금 등. 그 모든 활동은 ‘치안 유지’라는 표현 하나로 다 뭉뚱그려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데르와 그 부하들은 경찰이 아니었다. 시내 치안활동을 하면서도 안전을 위해 분대 단위 이하로는 화장실도 못 가는 존재가 경찰일 리는 없었다. 시데르는 계획서를 구겨 쥐었다.

트레비아 공화국은 해군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트레비아 독립전쟁 당시부터 육군도 강력했다. 그 중에서 가장 명성 높은 부대 중 하나로 근위 연대가 있다. 공화국 근위연대Republican Guard Regiment는 본디 식민지 시절 트레폴스 시 상업조합 후원의 시 야경대로 처음 조직되었었고, 독립전쟁 중에는 용병부대들을 제외하면 유일한 정규 군 부대로 재편되어 싸워 명성을 얻었던, 공화국과 역사를 함께하는 유서 깊은 부대였다.

근위 연대의 공식적 규모는 4개 대대 4천여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근위 연대에는 정식 번호가 붙지 않는, 1개 대대 1천여 명이 비공식적으로 추가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흔히 ‘평화 유지군Peace Keepers'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평화유지 대대는 트레비아 공화국 육군을 통틀어 현재 가장 실전, 그 중에서도 시가전 경험이 풍부한 부대였다. 그들은 공화국의 소방수들이었고 트레비아를 위해 비공식적인 위치에서 수많은 전장을 누빈 자들이었다. 그러나 시데르는 자신이 속한 이 부대가 자랑스러운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국방부 공식 기록에는 남기지 못하는 비공식의 전투기록들. 약자를 상대로, 많은 경우 기초적인 군사 훈련도 받은 적 없었을 사람들을 상대로 도시 골목들에서 얻어내는 승리들이 과연 명예로운지 의심스러웠다. 부대 약칭인 PK가 민중 살해Populous Killing의 PK라는 비난의 오명을 들어도 할 말이 없지 않나 하는 자조도 있었다.

“-강철 같은 정신력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 헌신과 충성심-으로 따지자면 어쨌든 세계 최강인건 사실이겠지.”

시데르가 언젠가 물어봤을 때 체스터의 대답이었다. 시데르는 그 때 체스터가 진심으로 말한 것인지 비아냥을 담아 말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을 명령 받아도, 어떤 짓을 하더라도 동요하지 않을 정신력과 국가가 하는 일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는 ‘맹목’이란 뜻일까. 그런 맹목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교육? 훈련? 보수? 사회? 공화국 그 자체? 그렇다면 그런 부대에 소속된 자신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시데르는 일주일 전 전투에서 전사한 휘하 병사 네 명을 떠올렸다. 잘 알던 병사도 있었고 얼굴이 벌써 희미한 병사들도 있었다. 그때 그들은 국가를 위해 죽게 되어 마냥 기뻤을까?

“강철같은 정신력이라. 밀가루 반죽마냥 물렁한 정신일지도 모르지. 공화국이란 이름의 제빵사 손에서 빚어지는...”
“잘 못들었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말게.”

당번병인 폴 베르티에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반쯤 남은 아침식사 쟁반을 들어 방을 나갔다. 시데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십대 소년인 어린 병사 앞에서 괜한 말을 흘릴 필요는 없었는데. 그는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된다. 시데르는 당분간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괜한 생각이나 하다가 귀중한 커피가 다 식어버리지 않았는가. 일단 할 일은 해야했다. 시데르는 방금 나간 당번병을 다시 불러 말 한 필을 준비하라 지시하며 군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중대 지휘는 선임 소대장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다른 일을 하러 슈니빌드부르크 시내로 가야했다. 오히려 사복 차림일 때야말로 복면을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나왔다.

생각하는 것을 나중으로 미룬 것은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9월 9일 슈니빌드부르크의 소요가 있은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신 공화국 혁명군과 트레비아 원정군의 합동 진압과정에서 시민 사상자가 천 수백여 명이나 나왔고 그 직후에는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 정재계 사회 지도자, 그리고 귀족들이 수십 명 단위로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다. 피로 물든 수도의 참상 앞에 충격 받은 시민들은 그 사상을 불문하고 모두 움츠러들었고 그 사이 신생 공화국 정부는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가졌다. 친혁명파와 반혁명파의 갈등과 충돌도 잠시 잠잠해졌다. 시민들에게는 일단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혼란에서 회복해 일상을 되찾는 것이 중요했다. 공국이던 공화국이던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는 지상낙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족 등의 상류층이 유별나게 부패하거나 억압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군주제 국가였다. 그래도 기존 체제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어느 이상사회에서라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경제위기는 그 불만을 폭발시켜버렸다. 민주주의가 시대의 유행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혁명은 일어났고 공국이 공화국이 되어 그 국민들은 갑작스럽게 신민에서 시민으로 신분이 변했다. 이 ‘시민’들은 나머지 동료 ‘신민’들을 계몽시키고 개종시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노력했다. 다만 그 노력의 수단에 폭력이 포함되었던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트레비아는 ‘정통’ 민주주의 공화국이자 좋은 이웃으로서 파병까지 하여 공화파 시민들을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그 시민들의 노력을 트레비아가 언제까지고 도와줄 수는 없었다. 천명 조금 넘는 평화 유지군을 8만여 명의 성난 슈니빌드부르크 시민들 앞에 계속 노출시켜 상대하는 것도 무리였다. 공화국은 자립할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권의 수반과 구성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신생 공화국의 체제에 걸맞도록 군대도 야경대도 다시 편성될 필요가 있었다.

그랬기에 슈니빌드부르크의 중앙 성채 앞에 위치한 시청 건물 안에서는 이를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 옛날 철학자 털리스 르코시가 말했던 것처럼 국가재건이라는 대업을 위해서는 망치와 톱을 들기 이전에 펜과 종이가 확실히 마련되어야 했다.

“구舊 공국군 병력의 분류는 대체 언제쯤 제대로 되는 겁니까? 이 작업이 제대로 완수되지 않으면 이 나라에 평화와 안정이 자리잡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게, 믿을만한 하사관들을 통해 분류 중이긴 한데, 워낙 지난번 소요와 숙청 때문에 혼선이 많이 생겨서 말입니다...”

암녹색 제복을 입은 젊은 장교 앞에서 고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쩔쩔매고 있었다. 당당한 군인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중년 남자는 그리 덥지도 않은데 연신 땀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두 사람 다 직함이 길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입장이었다. 트레비아 공화국 육군 공화국 근위 연대 평화유지 대대 부대대장 체스터 아크벨 소령과 슈니빌드부르크 시장 겸 혁명 임시 정부 공안의장 카알 로베르트 베켄바우어. 그러나 전자가 손님이고 후자가 방주인이라는 것은 의자 위치를 빼면 알기 힘들 모습이었다.

“혼선? 혼선이 생길게 뭐 있단 말입니까? 그저 돈이 필요할 뿐인 용병들, 구체제 또는 공작 개인을 지지하는 자들, 그리고 애국자들과 어중이떠중이들, 이 세 부류로 나누는 것에 대체 어떤 제한 사항이 있습니까? 용병들에겐 퇴직금과 트레비아로의 귀화 기회를 주고, 구체제 충성파는 퇴출시키고, 애국자들은 재교육시켜서 신공화국군으로 재편하면 끝날 문제입니다. 외국인들이 들어와 득세하는 꼴이 싫다면 마음을 고쳐먹고 단결하여 빨리 신정부를 튼튼히 하면 된다고 교육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이봐요, 소령, 제발 이해해 주시오. 병사들이 그렇게 트레비아 사람들처럼 명쾌하게 구분될 만큼 뚜렷한 주관이나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단 말이에요. 함부로 그들을 재편한다고 건드리면 오히려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교육과 설득을 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어요.”

베켄바우어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간곡한 어조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체스터는 넘어가지 않고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 ‘조금 더’의 시간을 위해 트레비아 군인의 피를 뿌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틀 후까지 재편이 시작되지 않으면 저희 쪽에서 직접, 자체적으로 비용을 조달해서라도 이 나라의 군을 뿌리부터 다시 만들겠습니다.”

베켄바우어뿐 아니라 트레비아 재무성에서도 들었다면 기겁할 소리를 체스터는 태연하게 했다.

“그렇게 된다면 반발만 더 커질 겁니다! 혁명정부는 아직 온전히 자리 잡지 못했는데, 지방에 배치된 부대에 반감이라도 불러일으키면 그들은 폭도로 돌변할 겁니다!”

베켄바우어가 우는 소리를 했지만 체스터는 지금 상대의 편의를 봐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가 보기에 베켄바우어는 정말로 애로사항이 있어서 미적대는 것도, 난처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절반쯤은 의도적으로 자주국방을 미루는 것이 분명했다. 무엇 때문인지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는 베켄바우어를 비롯해 현 임시정부의 공안위원회 의원들이 새로 발견된 에테르석 광산들의 채굴권을 가졌거나 가진 자들과 연관이 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산 문제 때문에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와 트레비아 양국의 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에테르 석Aethereal Stone. 학계에서는 단순히 원기광물Energy Mineral로 불리었고 그 외에도 파워스톤이라던가 마법의 보석, 마법사의 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광물은 근 수십 년 동안 새롭게 발견되고 연구되어 활용되기 시작한 물건이었다. 그 광물을 정제해 사용하면 수정을 통해 불도 킬 수 있었고 동력이 생겨나기도 했다. 신비한 에너지가 넘쳐흘러 마치 마법과도 같은 일들, 심지어 장거리 통신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그 능력은 실로 전설의 원소인 ‘에테르’란 이름이 어울릴 만 했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에테르는 신화의 존재일 뿐이라며 그 명칭을 거부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에테르 광석은 그 전까지 자원으로써 널리 사용되었던 고래 기름 따위는 아득히 뛰어넘는 효율과 활용성을 가진 광물이었다. 이 에테르석의 채굴은 곧 중대한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광물이 나는 곳은 한정되어 있었고 아직 채굴기술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그렇게 귀한 이 천연자원이 불과 2년 전 이 나라를 가로지르는 하브기어 산맥Habgiengebirge 가득 묻혀 있음이 발견된 것은 누구에게 있어 행운이었을까.

최소한 지금 망명 중인 브란 팔켄호르스트 공작은 그 행운을 활용하지 못했다. 국제 모피 가격 하락의 여파로 그의 신민들이 심각한 불경기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그는 새로 발견된 광맥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활용하려 했을 때는 이미 개발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것은 지난 9월 9일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운은커녕 불운이었을 것이다. 체스터는 냉소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트레비아는 파병을 오래 지속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올해 안으로 철군 준비를 완료하라는 상부 지시도 있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를 제 2의 노르들란트나 자칼레나우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다 이 말입니다.”

15년 전 트레비아의 영토가 된 지역명들이 언급되자 베켄바우어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씀은 좀 심하시군요. 우리 정부는 귀국과의 병합을 원하지도 않거니와 귀국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파병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저 이곳에 발을 담갔고 이미 손에 피도 묻힌 분들이 금세 나 몰라라 떠나는 것도 도의는 아니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저도 귀하를 매국노라고 비난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함으로써 베켄바우어에게 큰 모욕을 준 체스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낭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예, 우리는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달 여기 올 손님들 경호라던지 다음번 무장봉기에까지 책임을 질 의무는 없을 겁니다. 손님 대접과 가족 관리는 집주인이 해야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트레비아에서 다음 달 잔뜩 오실 민간인 분들 얘기입니다. 그 문제를 지금 고려 중이신 것 아니였습니까?”
“아니, 지금 설마 우리 정부가 자원 평가 조사단 방문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군 재편까지 지연시키고 있단 뜻이요, 지금? 귀관께서는 우리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좀 전까지의 비굴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베켄바우어는 주먹을 쥐고 언성을 높였다. 체스터는 차라리 이렇게 당당한 편이 낫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계속 시치미를 떼지는 못할망정 속 보이게 발끈하는 모습에 쓸 만한 정치가나 외교관은 못 되겠다 싶었다.

“아니란 말입니까? 그러면, 봉급문제 때문입니까? 하긴, 밀린 월급을 지급할 예산이 없다는 소문도 듣긴 했습니다.”
“둘 다 아닙니다! 근거 없는 소문이요. 군인 2만 명을 위한 봉급 정도는 언제든지 지불할 수 있어요. 특히나 지난번에 확보한 반역자들의 압류재산만 정리되고 나면 만사가 잘 풀릴 거요.”

체스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도 베켄바우어도 모두 혼란 속에서 나라를 다시 세워야하는 신생공화정부에게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난하진 않았더라도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재앙에서 자가 회복할 능력은 잃어버린 나라였다. 신 공화국이 향후 최소 수년간은 트레비아로부터의 차관에 의존해 운영될 거라는 것은 임시정부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터였다. 그 막대한 액수에 비하면 어차피 부동산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귀족 가문 자산 따위는 별 의미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체스터는 그것이 군인 2만 명을 당장 일하게 만들기는커녕 수도 야경대나 정상화 시킬 액수면 다행이겠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체스터는 이 문제에 있어 돈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안위원회’는 지금 일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호오,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가 없을 텐데요? 자원 평가단 방문 전까지 치안 회복이 가능하리라 생각되는군요. 아니, 아예 저희 쪽에서 그 협상과 설득의 과정을 직접 지원하고 싶습니다”

베켄바우어가 이에 다시 뭐라 항변하려 했을 때 누군가가 시장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비서에 의해 방문객의 신분과 성명이 전해졌고 이를 들은 체스터는 그 시의적절함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트레비아 육군 중대장 시데르 로크 대위.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켄바우어 의장님. 아니, 시장님이라 해야하나? 시데르 로크 대위입니다.”

베켄바우어 공안의장은 갑자기 나타난 청년과 떨떠름하게 악수했다. 약식 정장에 곤색 롱코트를 걸치고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터라 군인인지도 알기 힘들었다. 허리춤에 찬 장교용 제식 기병도만이 신분을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아, 이건 도시 안에서 안전하게 다니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옷을 가리키며 묻지도 않은 말에 답하는 시데르의 뒤를 이어 체스터가 덧붙여 말했다.

“이 친구가 앞으로 자원평가단 방문과 부대 편성 건으로 신 혁명군과 협조하게 될 겁니다.”

베켄바우어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좀 너무 심했던 것 아냐? 외교관도 아니면서 외교관급 중대사를 논하지 않나, 일개 부대대장 주제에 장관급 정부요인을 윽박지르질 않나. 직급에 맞는 일을 하라고, 좀.”

시데르는 웃으며 체스터의 팔을 툭툭 쳤고 체스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가 없었어. 이 사람들은 적당히 겁을 주지 않으면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고. 그리고 대대장님도, 베켓 대사도 이 문제는 내게 일임했으니까.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 대대는 때에 따라선 군대이자 동시에 외교 사절단이니까 문제없지.”
“그래도 외교부랑 관할 권한 가지고 충돌하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을걸. 헌데, 군 재편과 조사단 방문인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소한 걸 가지고 쟁점을 삼는 기분인데.”

체스터와 시데르는 시청 청사를 나와 그 앞의 중앙 성채로 걷는 중이었다. 높게 솟은 그 하얀 성은 공작가의 궁성 역할을 했었고 지금은 혁명 임시정부의 청사가 되어 있었다. 체스터는 성채의 정문 게이트하우스에서 경례하는 병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에서 현실적으로 운용중인 ‘혁명군’이 몇 명이지?”
“이 성 안과 주변의 2천여 명 정도.”
“그래. 군부에서 혁명에 동참한 건 그 정도가 고작이란 얘기야. 나머지 1만 5천 정도의 구 공국군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어. 그 흩어진 각 부대들을 어서 빨리 제압하거나 회유하거나 해산 시키던지 빨리 해서 안보문제가 정리 되어야 할 텐데. 아니, 시데르. 사복차림이라도 군 품위 유지 규정에 어긋나는 짓은 하면 안 되지.”

시데르가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자 체스터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트레비아의 군 규정상 보행흡연은 금지였다. 시데르는 투덜거리며 파이프를 다시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래서, 그 중요한 안보문제를 미루려 드는 건 어째서지? 붕 뜬 상태로 있는 그 병사들이나 지휘관이 다른 마음을 품으면 심각한 문제가 될 텐데. 평가단 방문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도 내 수준에선 잘 모르겠고 말이야.”

시데르의 질문에 대해 체스터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글쎄, 몇 가지 유추해 볼 수는 있겠지. 첫째, 실제로 임시 정부의 능력이 안 된다는 것. 협상실력도 없거니와 금전적으로도 빈곤한 상태니까 감안해 볼 수는 있겠지. 둘째, 타국과의 알력 등 외교적 충돌 문제.”
“타국이래 봤자 남쪽의 드벨그나 동쪽의 낭테르일텐데. 낭테르 때문이겠군?”
“맞아. 낭테르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까 사태가 악화되면 자신들 손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확실히 끌어들여서 대리전을 치르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 말에 시데르는 픽 웃었다.

“난 대리전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치르는 거라고 들었는데, 이곳에선 정의가 그 반대인가 보지?”
“아아 글쎄, 우리나라와 이 나라는 서로를 방패막이로 쓸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셋째, 책임 소재의 문제. 사실 이게 제일 크겠지.”
“책임 소재라니? 뭐, 에테르석 광산 때문에 말인가?”

둘은 슈니빌드부르크의 중앙 궁성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 용무가 있는 것이 이 두 장교들만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직원들과 정부에 청원하기 위해 몰려든 각양각색의 수많은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체스터의 제복을 보고 흠칫 놀라거나 사납게 노려보았다. 체스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 궁성 입구 옆 정원에 놓인 벤치들 중 하나로 걸어갔다. 벤치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이 제복을 보더니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시데르가 그 모습을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안 체스터는 비어버린 벤치에 앉아 시데르에게 손짓했다. 시데르가 따라 앉자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말을 이어 나갔다.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가 받아갈 차관과 그 대가로 오갈 에테르 광산의 채굴권리, 그 채산성에 대한 조사 평가,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질 광산의 가치와 차관의 이자율. 그리고 그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예를 들자면 폭력사태-에 대한 관리책임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 정도겠지? 그리고, 지금 정부는 아무래도 ‘임시정부’니까, 총선거를 치를 때까지 책임질 일은 다 회피하면서 이득은 최대한으로 챙기겠다는 심보가 아닐까 싶어. 뭐, 더 복잡한 문제는 협상권이 있는 베켓 대사랑 외교부가 알아서 처리할 테지만.”
“그러면, 나는 그 ‘책임’을 혁명 정부가 확실히 가져갈 수 있도록 일하면 되는 건가?”
“그래, 너는 이미 잘 하고 있어. 예를 들자면, 지난번 소요 때 3중대 담당구역에서는 포병을 아예 쓰지 않았던 일 같은 것? 덕분에 재산피해 보상 협상도 유리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체스터가 짐짓 미소 지으며 말했지만 시데르는 웃지 않았다.

“퍽이나.”
“왜 그래, 시데르. 새삼 또 침울해 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미 ‘침울’해진 시데르는 진지한 표정 그대로, 마음 속 의문을 털어 놓았다.

“그 공국군 말인데. 왜 그들은 일주일 전 봉기 때 대응하지 않았던 걸까? 봉기의 주모자들은 군을 회유할 생각을 하지 못한 건가? 슈니빌드부르크 인근, 행군 하루거리에 있는 병영들에서 공작 충성파만 다 긁어모아도 2천명은 모을 수 있었을 텐데?”

체스터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의도적이라곤 하지만 아직 신정부와 협상도 잘 안될 정도로 망설이고 있는 자들이, 정작 수도에서 구체제파가 들고 일어났을 때는 가만히 있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그야 전망이 불확실하니까 그저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겠지.”

시데르는 친구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봐 체스. 난 이번 주 내내 공국군 병영들을 순회해야 할 판이야. 베켄바우어 말마따나 ‘자극’해서도 안 되니까 병력도 없이 가야겠지. 솔직히 조금은 부담이 있다고. 너는 내게 일거리를 던져줬어. 그러니 내가 일을 잘 할 수 있게 도와달란 말이야.”

그러나 체스터는 냉담한 어조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나만 알고 너는 모르는 그런 건 없어.”
“헛소리하네! 정 그렇다면, 너도 나도 알지만 내가 워낙 멍청해서 기억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라도 얘기해 주던지.”
“...이렇게 백주대낮의 공공장소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군.”
“그러면, 다른 곳에서라면 말해줄 건가?”

체스터는 대답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대화가 좀 길었나 보군. 나는 이만 대대장님을 모시러 가야겠어. 혁명정부 총리 각하를 상대하느라 진력이 나 있을 거야.”

노골적으로 말을 피하는 체스터의 모습에 시데르는 순간 화를 냈다.

“너는 다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항상 뒤에서 냉소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거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한테까지도?”

체스터는 얼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 그의 친구는 말 해줘도, 말 안 해줘도 ‘침울’해 할 터였다. 그냥 넘어갈 기색이 아니었다. 골치 아픈 노릇이었다. 그는 하, 하고 한숨을 쉬더니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했다.

“네가 알아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알아서 좋을 것도 없지. 더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챠오.”

그리고는 즉시 등을 돌려 떠나갔다. 그는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를 뚫고 성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챠오?”

챠오가 뭐지? 대륙 서남쪽의 아란치오 말로 '안녕'이란 뜻이었던가 싶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우두커니 서있던 시데르는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여러 번 들어왔던 이름이었는데도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건 어느 유명한 정부기관을 지칭하는 약어였다. TIAO. 트레비아 정보분석실Trevian Intelligence Analysis Office. 슈니빌드부르크의 민중 봉기는 그다지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시데르는 일주일 전 사형당한 백작과 구 공국군 장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일을 벌렸다기 보다는 일을 벌일 준비를 하다 잡힌 것 같은 느낌이었었다.

‘설마... 봉기 그 자체가 의도된 건 아니겠지.’ 어쩌면 구체제파의 봉기는 원래 예정보다 일찍, 반혁명 세력과 구 공국군이 협력하지 못하도록 때 이르게 의도적으로 촉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강하게 들었다. 트레비아의 정보실이 뒤에서 그렇게 조종한 거라면 많은 것이 설명될 터였다.

시데르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의 사람들이 놀라 그를 쳐다보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더 웃었다. 생각해보니 참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어차피 트레비아의 군이 개입할만한 사태에는 군에 앞서 정보부가 개입되어 있으리라는 것쯤은 누구나 떠올릴 만한 일이었다. 이러니 체스터보다 진급이 늦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싶었다.

웃음을 멈춘 시데르는 문득 일주일 전에 보았던 나흐트팔렌 백작가의 영애를 떠올렸다. 정보부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소녀는 아버지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증오 어린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가정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럴 거면 이 나라에서 처음부터 혁명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트레비아 정부는 이 나라에 병력을 파병하지 말았어야 했다. 입맛이 썼다. 그는 그녀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그는 집어넣었던 파이프를 다시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런데 연초 주머니와 성냥갑을 찾느라 주머니를 뒤지던 그에게 혁명군 경비병 한 명이 다가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정부 청사는 금연구역입니다.”

시데르는 하마터면 죄 없는 병사에게 주먹을 날릴 뻔 했다.


(1장 2절 끝)

올레 TV 시청하면서..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선택해 볼 수 있다는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느끼고 있습니다.

TV를 안보고 살았었는데 안본게 아쉬운 점이 있을만큼.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한국판 리메이크 [우욱] 라던지 무슨 천사가 지상 강림해 여고생이 된다든지 [????] 화승총이라고 하는데 볼트액션 [!!??] 이라던지 하는) 들을 본다거나 연예인 소꿉놀이를 본다던지 하면 심신이 쇠약해지는 기분에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가 보고픈 거 볼 때는 참 좋습니다.


저는 EBS의 [세계테마기행]과 [다큐 프라임]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를 즐겨보는 편입니다만

그것이 알고싶다는 놓치지 않고 꼭 보고 있습니다. 가끔씩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나오니까요.

살인사건 얘기가 나올 때는 왠만한 범죄 스릴러보다 더 긴장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알고싶다 제 956회도 참 유익했습니다. 아직 안 본 958회도 흥미로울 것 같고.

전자오락 뉴스 한 건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문위) 소속 새정치 민주연합 박주선 의원이 다시 한 번 밸브의 '스팀' 서비스에 대한 게임물관리위원회(이하 게임위)의 신속한 대처를 요구했다.

박 의원은 지난달 스팀이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서는 게임의 등급분류를 받으면서 국내에서는 등급분류를 받지 않고 서비스 하는 등 한국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등급분류기관이 자국 내 유통 게임물에 대해서는 등급분류를 진행하는 것이 확인된 만큼, 지난달 1일 게임위가 “스팀은 서버가 해외에 존재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게임을 제공하고 있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답변은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 의원은 17일 교문위 국정감사 현장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며 “지난달 9월 스팀문제를 지적한 이후 게임관련 종사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국내법은 외국, 내국 업체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야 된다. 현재 밸브의 행동은 대한민국의 법 주권을 훼손시키는 것이며 이는 대한민국의 체면이 말없이 손상된 것이 아닌가? 필요하다면 (서비스 중단과 같은)강제조치를 해야 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게임위 설기환 위원장은 “조치하겠다”고 짧게 답변했다.



-박주선 의원 "밸브도 예외 없어, 국내법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 돼야" -






....I don't know what to think anymore

[부고] 문학평론가 김치수 (향년 74세)

http://moonji.com/8800/

문학평론가 김치수(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선생님(향년 74세)께서
2014년 10월 14일(화) 오후 3시에 영면하셨기에 삼가 알립니다.


빈소: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영안실 1호실

발인: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영결식: 10월 17일 금요일 오전 8시 영결 예배
장지: 경기도 양평 추모공원


유족
용대(KAIST 전기및전자공학과 교수)
용욱(뉴욕 맨해튼 칼리지 토목공학과 교수)


출생 및 학력
1940년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출생

1959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졸업

1964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 졸업(학사)

196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불어불문학과 석사학위 취득

1976년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에서 『소설의 구조(Structures d’un Roman)』로 불문학 박사학위 취득



경력
1963년 대학시절에 김승옥, 김현, 최하림과 함께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

1966년 중알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염상섭 재고”로 등단

1968년 『68문학』 동인

1970년 김병익,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문학과지성』 동인으로 계간지 창간

1972년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전임강사

1977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조교수

1979년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불어불문학과 부교수

1985년 이화여자대학교 학보사 주간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불어불문학과 교수

1993년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연구소 소장

1994년 한국기호학회 회장

1996년 이화여자대학교 인문대학장

1997년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원장 /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

2000년 세계기호학회 이사

2002년 동아시아기호학회 부회장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2011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2014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1972년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공저, 민음사)

1976년 『한국 소설의 공간』(열화당)

1979년 『문학사회학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80년 『구조주의와 문학비평』(편저, 홍성사)

1982년 『박경리와 이청준』(민음사)

1984년 『문학과 비평의 구조』(문학과지성사)

1991년 『공감의 비평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98년 『현대 기호학의 발전』(공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년 『삶의 허상과 소설의 진실』(문학과지성사) / 『표현인문학』(공저, 생각의 나무)

2001년 『누보 로망 연구』(공저, 서울대출판부)

2006년 『문학의 목소리』(문학과지성사)

2010년 『상처와 치유』(문학과지성사)



역서
1979년 『시간의 사용』(미셸 뷔토르, 삼성출판사)

1981년 『누보 로망을 위하여』(알랭 로브그리예, 문학과지성사) / 『러시아 형식주의』(츠베탕 토도로프, 이대출판부)

1996년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미셸 뷔토르, 문학과지성사)

1999년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마르트 로베르, 공역, 문학과지성사)

2000년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르네 지라르, 공역, 한길사)

2003년 『기호학과 문학』(자크 퐁타나유, 공역, 이대출판부)

2007년 『대장 몬느』(알랭 푸르니에, 문학과지성사)

2014년 『나나』(에밀 졸라, 문학동네)



김치수 선생에 관한 연구서
2000년 『김치수 깊이 읽기』(정과리 엮음, 문학과지성사)



수상
1982년 제27회 현대문학상 평론부문(현대문학사)

1992년 제3회 팔봉비평문학상(한국일보)

199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Palmes Academiques-officier

2006년 대한민국 옥조근정훈장 / 올해의 예술상(문화예술위원회)

2010년 제18회 대산문학상(대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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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나온 부고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수술 받으시고 나선 계속 건강이 안좋으시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May He Rest In Peace. Amen.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1화 잡상들




1. 시로가 왠지 믿음직스러워 보이는게 내 눈의 착각인가 단순 작화 때문만도 아닌 것 같은데

2. 후지무라 타이가가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으으 귀.. 귀엽다

3. 오프닝 엔딩 영상만 보면서도 달심이 차오른다! .... 인데 아니 진짜 소름 돋았음

4. 0화도 1화도 다. 난 지금까지 살면서 이 지경으로 작화에 힘 들어간 TV애니메이션은 처음 봄

5. 고등학교의 일상생활 모습이 원작에서 원래 이렇게 자세했던가?

6. '육상부 3인조' 여자애들 비중이 원래 이렇게 컸던가?

7. 랜서vs세이버 전투 ...... 으흑은ㅁ음ㅇㅁㅇ마러;ㅣㅓㅍㄹ;ㄴ엊ㅁ댤,너니리러미어리추 ㄴㄹㄷ

8. 하아하아 세이버 짜응 하아하아 세이버 짜응 하아하아

9. 센빠이 센빠이 소리 좀 안나게 해라 거슬린다!

10. ............................. 전반적 감상 평 :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유포터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달빠여서 행복합니다



트레비아 - 1장. 슈니빌드부르크의 거리 : 1

공언한 대로 매주 일요일 연재합니다


Chapitre I. The Streets of Schneewildburg

1.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 공국Principality of Theresiensteinberg은 트레비아 반도 남쪽에서 깊이 내륙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다른 레마니아Remania의 크고 작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선제후가 다스리는 제후국이었다. 제후를 임명한 황제와 제국은 이미 오래 전 사라지고 없었음에도 작위와 칭호를 고수했던 레마니아의 군주들 중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를 3세기 이상 다스려 온 것은 팔켄호르스트Falkenhorst 공작 가문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무난하고 평범하게 통치해왔던 관계로, 나라는 큰 전란 없이 평온하게 유지되어 왔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경지는 적었지만 모피 산업과 광산업이 발달해 21대 공작 브란 폰 팔켄호르스트의 치제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이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이 나라는 작은데다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여행객들은 그 울창한 숲과 높고 깊은 산골짜기가 보여주는 깨끗한 자연풍광에, 그리고 그 수도 슈니빌드부르크Schneewildburg의 백회색 성곽들이 만들어내는 경건한 도시 풍경에 감탄하고, 또 칭송하곤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방랑시인 미하일 라인홀트Michael Reinhold는 그런 슈니빌드부르크의 경관에 대해 ‘산속의 진주’라고까지 표현했을 정도였고, 국민들은 라인홀트의 그 표현을 자랑스럽게 인용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산 속의 진주’라던 곳의 청명한 공기는 역한 화약의 냄새와 피비린내로 오염되고, 새하얗던 슈니빌드부르크의 성벽과 거리들은 새까만 그을음과 검붉은 핏자국으로 지저분하게 얼룩지고 있었다. 그 얼룩들은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또 새로이 흩뿌려지는 중이었다. 요란한 총소리와 찢어지는 비명과 노호가 공기를 가득 메웠다.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었다. 건물에서 건물로, 골목에서 골목으로 비슷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구호가 적힌 피켓과 플래카드, 깃발, 농기구 등 잡다한 도구와 때대로는 총칼 등의 무기를 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무리지어 다녔다. 그러면 그 맞은편에는 사각 반듯하게 대오를 짜 정렬한 암녹색 제복의 군인들이 차분히 기다리고 있다가 한 줄 한 줄 차례대로 총을 격발했다. 군인들은 얼굴 하단부를 코까지 덮는 검은 복면을 하고, 높다란 군모는 깊이 눌러 써 위압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분노한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가 아무렇게나 총을 쏘아 군인 한두 명이 쓰러지면, 그 보답으로 반대편의 사람들이 무더기로 우수수 쓰러지곤 했다. 거리 곳곳에서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자 제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더 나아가지 못했고, 그렇다고 흩어져 도망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머뭇거렸다.

“폭도들이 전의를 상실한 것 같습니다!”

군인들 중 누군가가 보고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군중이 자진 해산할 것 같지도 않았다. 군중은 더 이상 전진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벽돌과 자갈이 계속 날아왔다. 군대의 지휘관은 한숨을 쉬고는 군모를 고쳐 썼다. 그는 다시금 필요한 지시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1소대 재장전, 2소대 사격준비, 3소대 대기.”

약간 가라앉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려진 그 명령을 전령이 다시 우렁차게 복창했고, 북과 나팔이 그에 맞춰 소리를 내 신호했다. 경쾌한 드럼소리에 맞춰 병사들은 마치 기계처럼 무미건조하게 정해진 행동들을 취했다. 무릎을 꿇은 채 탄약 주머니의 봉인지를 뜯어 비스듬하게 기댄 머스켓 소총의 총구에 대고, 총알과 화약을 동시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총열 밑에 장착된 길쭉한 꽂을대Ramrod를 빼내어 총구 속에 깊숙이 삽입, 총탄을 약실까지 밀어 넣는다. 1소대가 그렇게 장전을 하는 동안 이미 장전을 끝내고 도열해 있던 2소대가 머스켓을 일제히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2소대, 5보 앞으로 가.”

호명받은 2소대는 총구를 전방에 향한 채로 1소대를 몇 걸음 지나쳐 걸어가 멈춰 섰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쏜 총에 맞은 병사 한 명이 어깨를 움켜쥐며 비틀거렸지만 나머지는 미동도 없이 총의 가늠자와 표적을 일치시켜나갔다. 총구 앞의 사람들은 동요하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2소대 조준, 사격 개시!”

수십 정의 총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일제히 불을 뿜었고, 그 맞은편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군대의 지휘관은 좀 전보다 큰 목소리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3소대 사격준비! 준비된 사수로부터 자유사격!”

명령 복창과 나팔신호가 끝나자마자 거리 양 옆 건물들에서 창문이 일제히 덜컥 열렸다. 번뜩이는 총구들이 창밖으로 모습을 내밀고는 놀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총탄을 한가득 뱉어냈다. 앞에서 뿐만 아니라 양 옆 머리 위에서 쏟아진 사격까지 받자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건물들에서 3소대의 사격이 끝나자 2소대가 무릎을 꿇어앉았고, 앞서 장전을 끝냈던 1소대가 기립하여 일제사격을 이어나갔다. 탄알 세례 속에서 죽은 자들은 무참하기 길바닥에 널브러졌고 죽어가는 자들은 고통에 몸부림 쳤으며 산 자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거나 쓰러진 자들을 안으며 울부짖었다. 남아 있는 자들은 이제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이들을 쓰러트린 군인들은 움직임 없이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복면과 군모 때문에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 지휘관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명령을 하나 더 하달했다.

“중대, 착검.”

군인들은 일제히 허리에 찬 대검들을 뽑아 자신들의 머스켓 총구 아래에 장착시켰다. 지휘관도 장교용 기병도를 뽑아들었다. 스르릉 칼이 뽑히는 소리와 칼끝이 석양에 반사되며 반짝이는 모습은 스산하고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지시가 떨어졌다.

“진격 앞으로.”


*****



슈니빌드부르크에서 공정복고 운동, 또는 반혁명 봉기가 터져 나온 것은 공국이 민주공화국으로 개칭하고, 군주였던 브란 팔켄호르스트 공작이 국외로 도주했으며, 고관들이 직위해제 당하거나 구금된 지 석 달이 지난 1087년 9월의 일이었다. 신생 민주공화정부의 급진적인 정책들을 성토하고 팔켄호르스트 공작의 귀환과 복위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발생한 사태였다. 귀족들 또는 그들의 봉속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대거 참여한 시위가 벌어졌다. 혁명 찬성파와 반대파가 거리에서 맞부딪히기도 하면서 폭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민중운동은 순식간에 잔혹한 유혈사태로 얼룩진 채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혁명 정부는 반동 세력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고, 이에 따라 ‘선한 이웃’으로써 ‘동맹국의 위기를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여 신생 정부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되어 있던 그 동맹국 트레비아의 군대에 의해 대단히 신속하게, 또 효율적으로 진압되었기 때문이었다.

“9월 9일, 아름다운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성실히 임무를 수행중인 트레비아 공화국 원정부대는 슈니빌드부르크에서 일어난 친 공작파 폭도들의 무장봉기와 국가전복 음모를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민주주의를 다시금 지켜냈다!”

-최소한 트레비아 전쟁성Ministry of War의 대 언론 공보자료는 그렇게 간결하게 쓰일 터였다. 바로 좀 전까지 그 진압작전을 지휘하던 암녹색 제복의 장교는 단 한 명의 종군기자도 파견하지 못한 자국 신문들이 대체 어떻게 뭐라고 기사를 쓸까, 상상하며 어느 무너진 건물의 벽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장교는 한숨을 푹 쉬더니 군모와 복면을 벗어 옆에다 내동댕이쳤다. 아무렇게나 길러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장발에, 반짝이는 녹색 눈빛을 가진, 키가 크고 선이 날카롭게 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전혀 군인답지 않게 길게 기른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더니 주머니를 뒤져 마호가니 파이프와 성냥갑을 주섬주섬 꺼내들고는 입에 물어 불을 붙였다. 그가 내뿜은 담배 연기는 공기 중에 자욱한 흑색화약의 냄새보다 더 독하고 매캐한 것이었다. 파이프를 씹으며 군화까지 벗어 팽개칠까 고민하던 남자는 뚜벅뚜벅 다가오는 동료를 발견하자 그냥 신고 있기로 했다. 해를 등지고 다가온 사람은 앉은 이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데르 로크 대위.”
“체스터 아크벨 소령님.”

갈색 장발의 남자, 시데르 로크Cydere Locke는 해를 가리고 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흑발에 중키인 체스터 아크벨Chester Achbel을 보면서 시데르는 새삼스럽게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나이도 같은 26세인데도 아직 너무 젊어 보였다. 그런 그가 서늘하게 파란 눈동자로 가만히 쳐다보자 시데르는 그 시선을 피했다. 옛날부터 체스터의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3중대는 왜 포병 지원을 사용하지 않았지?”
“불필요했으니까.”

대위는 소령에게 격의 없이 그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상사 총합은 냈나?”
“전사 네 명에 부상 아홉 명. 나중에 전투 보고 써 올릴게.”
“담당 작전구역 장악은 확실히 하고 쉬는 중인건가?”
“분대 단위로 나누어 마무리 중이야.”
“부수 피해는?”

전투로 인한 민간 피해를 묻는 말이었다. 시데르는 그 질문에 이를 꽉 악물고 입을 닫았다. 그는 체스터가 재차 묻고 나서야 쉰 목소리로 빈정대듯 쏘아붙였다.

“우리 대대가 하는 일이 언제나 그렇듯, 약탈, 강간, 방화는 단 한 건도 없어. 아주 대단하지. 아아, 엄정한 군기 만세로세!”
“...”
“야포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니까 재산 피해도 적었을 거야. 아마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슬픔도, 외국 군대에 의해 수도가 전장이 된 충격과 분노도, 우리가 ‘부수 피해’를 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않다면 금방 진정되겠지? 그리고 나면 저들은 다시는 오늘같이 소용없고 무익한 짓을 벌이지 않고 민주주의의 달콤한 과실을 누릴 수 있겠지!”

시데르는 더 이상 눈길을 피하지 않고 체스터의 눈을 노려다보았다. 마주보던 체스터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시데르. 이봐. 우리가 하는 일은, 오늘 우리가 한 일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함이잖아? 무자비하고 모진 일이었지만, 이렇게 한 번의 무력행사를 통해 이제 이 나라는 더 큰 혼란에 빠지지 않게 될 거라고. 그래서 ‘부수적 피해’를 내지 않는 것도 정말 중요해. 우리는 공포와 경회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길이 남을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되니까. ...내가 굳이 이렇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이미 이런 건 잘 알고 있잖아?”

차분히 타이르는 그 어조에 시데르는 오히려 발끈했다.

“살인은 했지만 약탈과 강간만 안하면 미움 받지 않는 건가? 가족친지들을 죽였지만 겁탈은 하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감사장이라도 받을까? 칫, 웃기지 말라고 그래.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운운하는 궤변은 그만둬. 너한테서까지 듣고 싶지는 않아.”

시데르의 표정은 험악해졌지만 체스터는 그저 약간 슬픈 얼굴이 되었다. 차갑던 눈빛에 약간의 감정이 실렸다.

“시데르!”
“...”
“알았다. 네 말대로 같잖은 궤변은 관두도록 하지. 하지만 우린 갈 길이 멀어. 그 길이 험하다는 건 너도, 나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 길에서 넘어지고 굴러도, 남과 부딪치고 밀치게 되어도 계속 앞으로 갈 수밖에 없어. 상처도 죄책감도 다 안고 앞으로 가야해. 이제 와서 지쳤다고 쉴 수도 없어. 우린 약속을 했잖아.”
“그래... 그랬지. 미안하군.”

사과의 한마디 후 시데르가 말을 더 잊지 않자 체스터도 더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말이 필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 불쾌하고 더럽고 지저분한 일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 방금 전에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다. 이 나라의 질서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조치들을 어서 취하라고 말이지.”

그 필요한 조치라는 게 무엇인지 시데르는 따로 묻지 않았다.

“이어지는 수순으로 주동세력 색출 및 검거를 해야겠군.”
“...검거까지만?”
“하. 처벌... 까지도 우리가 하라는 건가.”

체스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데르는 파이프를 다시금 입에 물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담배 연기가 흩어지고 나서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추가 수당이라도 지급하라고 해.”

정말 기분 나쁜 일이었다. 체스터는 그런 시데르의 어깨를 한번 꽉 잡아 쥐었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갔다. 시데르는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



그날 밤, 포박된 여섯 남자가 어느 건물 벽을 등지고 나란히 서게 되었다. 한 명은 구체제의 백작이었으며 또 한 명은 그 친족이라는 남작, 그리고 구 공국군의 소령. 나머지 세 명은 그 부하들이었다. 그들 앞에는 트레비아 공화국의 군인들 수십 명이 도열해 섰다. 그 옆에서 시데르 로크 대위는 일렁이는 횃불 빛에 의지해 자신의 손에 들린 문서를 무미건조하게 읽어 내려갔다. 입을 가리는 복면을 쓴 채였기 때문에 웅얼거리지 않도록 목청을 돋우어야 했다. 그것은 죄인들에 대한 평결문이었다. 죄목은 자유·평화·정의를 위협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 판결은 유죄에 총살형이었다. 증인과 증거와 변론에 의한 정식 재판은 따로 없었다. 말이 평결문이지 실상은 그냥 명령서나 다름없었다.

시데르는 3중대가 ‘처리’하도록 할당받았기에 자신 앞에 서게 된 여섯 명이 정말로 유죄인지, ‘폭동’의 주모자들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는 명단을 받았고 그의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몇 몇 저택들을 습격해 그 명단에 오른 사람들을 끌어냈을 뿐이다. 다만 그들 중에서 백작이라는 붉은 머리 중년의 남자가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어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뭔가 큰일을 벌였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긴 했다. 백작의 저택 지하에서 백 수십 정의 머스켓 소총이 발견된 것도 사실이었다. 개인 독서실에서 압수한 많은 수상쩍은 문서들은 신 혁명정부에게로 넘겨졌다. 시데르는 명령서에 적힌 백작의 이름을 음미해보았다. 게르하르트 폰 나흐트팔렌Gerhardt von Nachtfalen. 고풍스러운 레만 귀족의 전형이었다. 관직을 맡고 있진 않았지만 공국군의 명예 연대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 구 팔켄호르스트 공작 가문과 인척 관계에 있다는 모양이었다.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평결문을 경청하는 중이었다.

백작뿐만 아니라 다른 죄수들도 판결과 선고가 낭독되는 동안 놀라우리만치 차분하게 서 있었다. 심약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 남작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그조차도 소리는 내지 않았다. 낭독이 끝나고 나서는 이미 체념한 것인지, 또는 각오를 했는지, 누구도 선고에 대한 반론이나 항변은 하지 않았다. 시데르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들이 없는지 물어보았고 그들은 모두 가족의 안위를 부탁하거나 사랑의 말을 전해주길 원했다. 그 점은 예의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내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지 않게 해주겠다고, 귀관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 줄 수 있겠소, 대위?”

백작의 입에서 나온 것은 위엄 있고 고전적인 발음의 낭테르어였다.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는 레만어, 트레비아는 갈릴어를 사용했지만 낭테르어는 각국 상류층 사이에 공용어로 통하는 말이었다. 시데르도 역시 매끄러운 낭테르어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 제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는데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다만 ‘재산에 대한 보호는 보장해드릴 수 없지만 말입니다.’ 라는 말은 속으로만 했다. 백작이 변호사니 유언장이니 얘기하게 되면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건 몰라도 재산분배는 이뤄지지 못할 테니까. 물론 군에 의한 약탈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처벌받는 모든 귀족, 자산가들의 재산은 신생 공화국 정부에 귀속될 예정이었다. 가산을 잃고 거리로 나앉을 유족들에 대한 처우는 아무도 생각해 놓지 않았다. 그것도 ‘위해’라면 위해였다. 그래도 이 나라는 사정이 나았다. 단순히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 받으며 갓난아기까지 몰살당하는, 다른 나라들에서 있었던 혁명처럼 피의 광풍이 몰아치는 단계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내 딸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그리고 씩씩하게 살아남아야 한다고 전해주시오. 그대가 직접.”

사형수 유언의 전령이 되는 어두운 일 따위 직접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백작의 언동에 압도되는 기분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백작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참으로 간결한 유언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죄수들의 눈에 안대가 채워졌고, 도열해있던 군인들은 명령에 따라 머스켓 총을 일제히 앞을 향해 들어 올렸다. 이럴 때조차 명령을 하달하는 드러머의 드럼 소리는 밤공기 속에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작은 아직 할 말이 다 끝난 건 아니었는지 이번엔 레만어로 크게 소리쳤다.

“비어 슈타벤, 오프 다스 테레지엔 레베!”

레만어에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시데르는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죽음으로써 나라 또는 국민들을 살린다는 얘기였다. 그 당당한 의기는 존경받을만하다고 생각하며, 시데르는 손을 높이 들었다.

“조준!”

그는 들었던 손을 내리며 외쳤다.

“격발!”

온 몸에 구멍이 난 채로 죄수들은 쓰러졌고 벽에는 피가 튀었다. 의무병이 다가가 한 명 한 명 맥을 짚어 절명을 확인하는 것으로 음울한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그 날 밤 슈니빌드부르크 곳곳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이 죽음의 대열에 합류했다.




몇 시간 후 시데르는 나흐트팔렌 백작 저택에 들어섰다. 품위는 있으되 과장된 사치스러움 없이 정갈하게 정돈된 그 저택의 안팎의 모습에서 죽은 백작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시데르는 이제 그 유족들을 만나야 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저택의 응접실에 미망인과 두 딸, 그리고 몇 안되는 사용인들이 트레비아 군인 세 명의 감시 아래 모여 있었다. 수 시간 전 가장이 연행된 이후로 계속 그 상태였을 터였다. 세 여인 모두 간소하면서도 우아한 만찬용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쓰고 있던 군모를 살짝 벗으며 인사를 하자, 미망인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남편은, 나흐트팔렌 백작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죠? 그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역시나 고풍스러운 낭테르어였다. 시데르는 뭐라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다 알텐데도, 기품을 유지한 채 짐짓 가슴을 펴 말하는 귀부인의 모습 때문에, 그리고 그 뒤에서 자신을 깊게 쏘아보는 한 소녀의 냉랭한 눈빛 때문에 입맛이 매우 썼다. 전장도 장례식장도 사형장도 모두 몇 차례 경험해 보았지만 그 ‘뒤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명 복잡 미묘할 자신의 표정이 검은 복면에 의해 가려지는 게 그나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흐트팔렌 경은 가족에게 사랑한다며, 덧붙여 잘 살아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남편 분은 끝까지 매우 당당하셨습니다.”

백작이 어찌 되었는가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이에 나흐트팔렌 백작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되 흘리지는 않은 채로 답했다.

“저희에게 이렇게 직접 말을 전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몸도 목소리도 조금 흔들리고 있긴 했지만, 백작 부인의 의연한 모습은 죽은 백작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이 사람들은 ‘진짜’ 푸른 피의 귀족이다 싶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자 그녀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백작님과 함께 갔던 겐츠 남작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제 사위입니다.”

백작의 곁에 서 있었던 젊은 귀족 얘기였다.

“그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 했습니다. 두 분 다 고통 받거나 모욕당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언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백작부인은 끝내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고 백작의 두 딸 중 장녀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녀가 겐츠 남작부인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차녀 쪽은 울지 않았다. 곁에서 비틀거리는 언니를 부축하면서도, 자기 앞의 복면 군인을 새파란 눈동자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버지처럼 붉은 색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아직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소녀였다.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 시데르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더 아렸는지는 몰라도 더욱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기에 대고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같은 헛소리는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던 시데르를 향해 그 소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들을 죽인 건가요?”

청명하면서도 차갑게 절제된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녀는 낭테르어도, 레만어도 아니고 트레비아의 언어인 갈릴어로 말했다. 그러나 말의 내용에 담긴 무게에 눌린 시데르는 놀라지도 못했다. 분명 시데르가 직접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명령대로 형 집행을 감독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겐 책임이 있었다. 어째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시데르는 수많은 살인을 경험한 냉정 침착한 준인이 아니라 교장실에서 벌 받는 소학교 학생 마냥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소녀는 그에게 성큼 다가가 있는 힘껏 그의 뺨을 때렸다. 복면이 벗겨져 땅에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1장 1절 끝)





누가 이건 하드코어 역덕후만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겠다 라고 하던데

하드코어 역덕후가 아니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이코패스 시즌2 1화를 감상

애니플러스에서 사이코패스 시즌 2를 하길래 봤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괜찮긴 한데..

....뭐랄까 되게 Ham-Handed 라던가 Hammy 한 느낌이었는데 한국어로 적당한 표현이 안 떠오르네요.

사이코패스 시즌1 재편집판 다 보고서 곧바로 이어 보는건데, 비교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새로 나온 사람들도 다 너무 미형이라 마음에 안드는 점이 있습니다. 디자인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반적 분위기도.

거친 데카물의 맛을 기대했는데! 코가미랑 마사오카가 없는 것만으로 이렇게 분위기가 확 달라지네요.


아카네에게서 낯익은 어딘가 육자 출신 소령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


작화 하나는 아주 깔끔하더라구요.


오프닝은 시즌1때보다 더 정신 사납던데



왠지 이 구도 유행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ps. 페이트 제로 24, 25화도 하길래 이어 봤는데 으으 세이버 불쌍

내일 보게 될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1화가 더더욱 기대 됩니다


ps.2. 시로바코...는 그냥 인터넷으로 봤는데, 모든게 다 예뻐서 이거 이래도 되나 싶었음.

애니메이션 업계라는데가 훨씬 더 피로와 고난과 가난에 찌든 느낌으로

골방 작업 힘들게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이 만화는 너무 샤방샤방해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싶습니다.

아니면 애니메이션 업계 일반과는 관계 없이 제작자인 PA Works 스튜디오 분위기가 레알로 그런 것인가

미워

진짜 밉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TREVIA - 0장. 공화국

판타지 소설입니다.

일주일에 한편 씩 정기 연재 하겠습니다.

여러차례 쓰고 고치고 생각하고 하다가 이번에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진지하게 본격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많이들 읽어봐 주세요.


TREVIA
Chapitre 0. La Republique

“흑.. 흐흑”

검은머리 소년은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냈다. 하도 문질러 대서 이미 눈두덩이 새빨갰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울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어 딸꾹질 하듯 목젖을 울렸다. 소년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듯 고상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옷도 여기저기 구겨지고 흙먼지는 엉망이 되어 보기 안쓰러웠다. 그 앞에 서 있던 꾀죄죄한 갈색머리 소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다 못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만 울어 이 바보야!”

검은머리 소년은 눈물이 일렁이는 파란 눈으로 갈색머리 소년을 쳐다봤다. 여전히 억지로 참으려 애쓰느라 들썩였지만 소리는 조금 잦아들었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그 시선에 갈색머리 소년은 움찔했다.

“끅, 흑, 아버지가, 흑, 아버지가 끌려갔는데, 내가, 끄흑, 뭘 어떻게..”

갈색머리 소년은 답답하다는 듯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소리쳤다.

“너만 그런 일 겪은 줄 알아?! 내 엄마 아빠도 다 끌려갔었어. 하지만 넌 배부르고 따뜻하게 잘 지내 왔잖아! 니네 엄마도 살아계시잖아! 난 춥고 배고프고 엄마 아빠도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 바보야! 그러니까 울보같이 울지 말란 말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갈색머리 소년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고 눈에서도 눈물이 차올랐다. 이윽고 그도 ‘흐에엥’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위로 아닌 위로를 하던 아이마저 울자 울음을 참으려던 아이도 결국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동네 길바닥에서 두 소년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은 참으로 볼썽 사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들을 달래주러 오는 사람도 없었고 무슨 일이 있나 내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방금 전 곤봉 든 경찰들이 들이닥쳐 검은머리 소년의 아버지를 포박해 끌고 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와 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면서 붉은 기운을 드리울 때, 아이들이 울다 지쳐 멍하니 앉아있을 때, 한 젊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덥수룩한 머리에 테 두꺼운 안경을 쓰고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는 코트를 입은 키 큰 남자였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그저 측은한 눈빛으로 두 소년을 바라보더니 별 말 없이 사방으로 삐친 자기 머리를 양 손으로 쓸어 넘겼다. 무릎에 고개를 박고 앉아 있던 갈색머리 소년이 머리를 들어 흐릿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검은머리 소년은 멍하니 먼 하늘만 계속 바라보았다.

“시드 삼촌...”

삼촌이라 불린 남자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더니 두 소년을 긴 팔로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집에 가자. 뜨거운 코코아 한 주전자 데워줄게.”

잠시 후 한 남자와 두 소년은 터덜터덜 걸으면서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듯 꼭 붙은 채로, 슬픈 거리를 떠났다. 어느 봄 날 저녁 트레비아라는 나라, 트레폴스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



[그 이름도 찬란한 트레비아 민주 공화국Trevian Republic은 989년 11월, 갈루스Garlus 왕국의 해외 식민도시였던 트레폴스Treppols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성립되었다. 표면적으로는 갈루스 왕국의 압제와 폭정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기치로 내걸고 일치단결한 시민들이 이끌어낸 혁명이었다. 철학사적으로 보자면 당대 인본주의 혁신운동을 이끌었던 정치 사상가들이 -털리스 르코시나 파이너스 호텀, 몰로치 벨리나크 등이 대표적으로- 혁명에 있어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주도적이고 실천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분석해보자면 그 유명한 <11월 트레폴스 대혁명>은 다른 무엇보다도 ‘금권金權’의 혁명이었다.

트레폴스는 본디 노스트룸Nostrum 해海 남쪽 중앙이라는 적절한 위치에 있는 트레비아 반도에서 700여년 경 갈루스의 해외 개척단이 소수의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무역 중계점으로 세운 도시였었다. 북해 무역항로에서 점차 중심적인 기능을 하며 순식간에 거대하게 성장해 나간 트레폴스는 중계·중개무역 뿐 아니라 자체 생산을 통해서도 부유해졌다. 트레비아 반도의 훌륭한 농업 생산력과 광물 채산성을 바탕이 된 결과였다. 갈루스 중앙정부로부터의 통제가 처음부터 약했기에 부와 자유가 공존하게 된 이곳에 사업가들과 개척가들이 몰려들었고, 머지않아 트레폴스는 북 알트넘 대륙 상업경제의 구심점이 되어갔다. 그런 트레폴스의 주 상인 계층이 987년의 국제 금융위기와 갈루스 왕국 후계자 미결 위기 당시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고 관세 전면 철폐를 외쳤을 때 그 움직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트레폴스 상업조합의 준동을 갈루스 왕국 정부가 뒤늦게 막으려 했을 때 벌어진 충돌이 독립 국가의 성립으로까지 연결되는 과정에서, 트레비아 공화정부가 주장하는 것만큼 순수한 ‘평등하고 평화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자유에의 열망’ 운운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가에는 상당한 이론의 여지가 있다. 보다 사적이고 이기적인 동기가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뚜껑을 열어보면 ‘자유의 투쟁’이란 표현이 주는 분위기와는 달리, 쇠약해진 한 나라가 분수에 맞지 않게 소유했던 해외 자치 지방이 자연스럽게 그 독립을 명문화했을 뿐이라는 맥 빠지는 전개가 펼쳐졌을 뿐이다. 트레비아의 독립의지에 불을 지핀 건 억압이 아니라 자본가의 오만과 욕망이었음은 갈루스의 실제 식민지 정책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과도한 과세는커녕 최소한의 식민지 군대 유지비조차 조심스럽게 구걸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트레비아 독립전쟁’의 전개 양상은 호사가들이 미화하는 것처럼 기적적인 소수파의 승리도, 아름다운 저항정신의 승리도 아니었다. 그 전쟁이 불평등한 싸움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트레비아는 약자가 아니었으며 갈루스도 강자가 아니었다. 신생 독립국 트레비아는 돈벌이를 위해 찾아든 세계 유수의 용병부대들을 기업가적 효율성으로 조직하고 운용했다. 아낌없이 붓는 자본으로 금융과 주식을 움직여 경제적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상대를 압박했다. 그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트레비아의 탄생은 곧 갈루스의 몰락이었다. 트레폴스의 상인들이 당시 동원한 막강한 자본의 힘은 이미 왕위 계승 분란으로 흔들리던 갈루스 왕국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갈루스라는 체제 그 자체에 정치적인 치명타가 되었다. 이미 휘청거리던 갈루스는 무너져 내렸고, 적대국이던 그 이웃사촌 헨노스에 병합되었다. 갈루스는 ‘연합왕국’의 이름 아래 사라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까지 푹신한 가죽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독서하던 중년의 여인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만 책을 엎어놓았다. 큰 논란이 되다 못해 국회에서 얘기가 나올 만큼의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트레비아의 건립 배경과 현 체제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인 시선을 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런 책이 논란을 등에 업고 계속 판매실적을 높여간다면 사회에 악영향이 있을 거라는 우려도 허무맹랑하진 않을 것 같았다. 스스로도 기분이 나빴지만 그녀는 그녀 주변인들이 가장 불쾌해하며 지적했던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다시 책을 펴 들었다.

[...트레폴스에 모인 용병대와 사략선단들은 신생 공화정부가 지불한 막대한 재화와 권력의 양보 덕분에 종전 후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공화국의 건국 영웅들’로 트레비아에 남아 트레비아 정규군을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지배계층의 일익으로 자리 잡는데 이르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산적 떼가 귀족으로의 신분세탁에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사회·정치적 면에서 혁명을 이끌었던 르코시나 호텀 등의 학자와 전문가의 집단은 권력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후에 트레비아를 장악하게 된 것은 돈과 칼의 결혼이었다. 용병들과 동맹을 맺은 ‘기업가’ 집단의 실상도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다. 암시장 밀수업자에 불과하던 요한 헨켈과 말이 해운보험업이지 실상은 해적이나 다름없던 앤더슨 맥도웰, 밀주 도매상 클레멘스 매더스가 신정부의 지도자들이 되었던 사실에서부터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난다.

칼팔이Sell-Swords들과 암시장 장사꾼들이 이기적으로 자신들만의 이윤을 추구하며 장악해낸 권력이 ‘자유 민주주의’라는 거창한 주의주장을 빛바래게 만드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공화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던 르코시가 반강제적으로 하야하여 칩거에 들어가며 했던 말 <나의 혀가 칼을 닦아주는 동안 나의 펜은 영수증을 써준 꼴이었다>은 트레비아 공화국의 실질적인 정체성을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트레비아 민주 공화국의 건국은 민주적이지도 공화적이지도 않은 방탕한 벼락부자들의 사교 클럽의 설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 이런 말도 안되는...”

르코시의 사소한 농담 한마디까지 들먹여가며 국가를 재단하고 비난하려 드는 문장에 정이 떨어진 여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해적’이나 ‘칼팔이’, ‘밀수업자’ 등의 험악한 비칭들과 경멸적 어조는 도가 지나쳤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증조부님까지 도매금으로 욕을 먹어 ‘암시장 밀수업자’로 격하되어버렸다.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할 역사서로서는 그야말로 낙제점이었다. 이건 역사책이 아니라 불평분자의 수필 나부랭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인은 곧 책을 덮어 치워두고 피곤해진 눈을 자신의 방 안으로 돌렸다.

넓은 집무실은 밤색 고급 목조 가구들과 몇 점의 크고 작은 초상화들로만 장식되어 있었다. 아직 낮이었지만 트레폴스 특유의 구름 짙은 날씨 덕분에 해는 별로 들지 않았다. 약하게 켜 놓은 등불만이 방 가운데의 큰 타원형 책상만을 은은히 밝혀 주었다. 그 책상 앞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던 여인은 새삼스레 자신의 집무실이 무척 구닥다리에다 적막한 곳이라고, 그와 동시에 참 소박하고도 검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건국의 아버지들이 그렇게 이윤과 사치에 목을 맨 벼락부자 소인배들이었다면 이 방도 지금보다 훨씬 화려하고 우아하며 편안한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방이었다. 방 안의 적막감을 깨 주는 것은 그저 벽에 걸린 오래된 괘종시계 시계추의 똑딱임 뿐이었다.


여인은 자기가 방금 덮어 놓았던 책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아무런 장식 없는 검은 제본에 간결한 은색 글씨로 제목과 저자 이름만 적혀있는 것이 마치 방의 딱딱한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드릭 보우셤 박사의 『공화국사 개론』. 출간된 지는 이미 십 수개월이 넘었으나 뒤늦게 조명 받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작이었다. 트레비아의 간행물윤리보호위원회는 이 발칙하게 반체제적인 서적의 증쇄와 판매를 중단시키거나 아니면 대대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이 책 한 권에 굳이 과민반응 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책의 내용에 부당한 비방들이 가득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까짓 책 한권을 가지고 공적 차원의 대응이 이뤄진다면 오히려 그 비방들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저자에 대해 알아보니 보우셤 박사는 현재 어느 대학에도 몸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이 책은 그저 학위는 있으되 강단에는 서지 못하는 학자의 울분에 찬 사회 비난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책의 내용을 정치가들과 군인들 몇몇이 조상 또는 본인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부정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어지던 그녀의 상념을 방해한 것은 방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였다. 여인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골치 아픈 직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얼굴을 찌푸렸다.

“마담 프레지던트? 프레지던트 헤라논?”
“들어오세요.”

대통령 수석 보좌관 토머스 맥개리슨이었다. 안경이 잘 어울리는 젊은 정치가 지망생, 이라는 것이 대통령의 평소 느낌이었다.

“국무회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장관들도 모두 도착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방장관이 예의 그 안건에 대해서도 지시하신 사항들을 이행해 놓았다고 전해드리랍니다.”

여인은 고맙다고, 10분 후에 나가겠노라 대답한 후 옷매무새를 가볍게 단장하였다.

사실 트레비아 공화국 제 19대 대통령 탈리아 헤라논Talia Herranon에게는 좌파 역사책 한 권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들이 가득 산재해 있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던 책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자신이 앞으로 신중히 택해야 할 정치적 행보들에 대한 고려가 뇌리를 채웠다. 탈리아 헤라논은 집무실 책상에 비치된 거울을 틀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검은 블라우스 위에 암청색 정장 재킷과 바지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기 보단 공화국의 역대 수반들이 불문율로 제복처럼 입어오던 색상의 조합이었다. 가슴 왼편에 달린 붉은 루비로 된 올리브 이파리 모양의 브로치만이 그녀의 국가원수로서의 위치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다지 개성이 있거나 특별히 멋지지도 않으며 다른 대륙 국가의 귀부인들처럼 여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모습도 아니었지만 헤라논 대통령은 그게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41세의 탈리아 헤라논은 갈색 머리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자기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정계에 입문할 무렵 발명된 사진기와 사진은 그녀의 그런 외모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대통령 선거에서도 큰 이점으로 작용해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당선되고 반년이 흐른 지금,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이라는 환호의 열기와 개혁에의 바람이 반동에 의해 사그라졌다. 전 정권에서 물려준 문제들이 금방 해결되지 않자 지지율은 벌써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출 경제는 호황이었지만 그게 그녀의 공이 되지는 않았고 내수는 침체 중이었다. 그 경제에도 외부의 정세 불안정이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고 ‘전문가’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 ‘먹구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전임자와, 현 야당과, 호언장담만 늘어놓던 군부가 무책임하게 저질러 놓은 음모와 만용의 모험이 빚은 결과라고 호소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지지층 유권자들에게도 호소 할 수 없는 일인데 칼을 갈기 시작한 주변 국가들에게 전임자 타령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전임자들의 과격한 정책이 너무 많은 분란의 씨앗을 뿌려 놓았기 때문에 트레비아가 겪고 있는 외교적 분쟁은 한 둘이 아니었다.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외무성에서는 심상치 않은 주변 동향을 계속해서 보고해 오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갑갑한 상황에서 여당 지도부는 그녀를 통제하려고만 들었고 진짜 중요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은 속된 말로 ‘똥을 싸 놓은’ 전 정권 야당보다 현 여당의 작태가 더 괘씸한 지경이었다. 이웃의 제국들이 군비를 증강하고 있고, 자원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믿을만한 동맹국 보다는 이빨을 드러내놓고 충돌하기 시작한 국가들이 늘어나는 추세였는데다가 세계 최대 규모라던 트레비아 해군 함대의 위치가 슬슬 위협받고 있었는데도, 고작 선거구들의 민심 이변 하나하나에 벌벌 떠는 모습이 매우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그냥 예전에 하던 대로 돈 뿌려서 유권자 따위 대충 구어 삶으면 될 거 아니냐’ 고 윽박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논의할 중요한 의제가 너무나 많은데도 당 지도부 회의에서 반체제적 역사책 한 권 내용 성토하는 걸로 시간이 다 가는 것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헤라논 대통령은 동시에 이 위기야말로 국면전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정권뿐만 아니라 트레비아 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위기도 해법도 문제의 본질은 경제나 내정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외교라고, 이 멍청이들아!’ 그녀는 그 해 알트넘 대륙의 국제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격변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여기에 트레비아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인지시켜야만 했다. 트레비아의 건국 비화가 어쨌건 상인과 용병이 어쨌건 간에 중요한 건 지금 트레비아가 어떻게 잘 살아남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녀의 특명에 따라 외무성에서는 이미 정지작업이 한창일 터였다.

“나는 이 나라 역사에 무능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는 않겠어. 두고 보라고.”

젊은 대통령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읊조리고는 당찬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래서 그 1087년 8월 어느 흐린 날의 트레비아 공화국 국무회의에서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다른 주요 현안들보다도 여러 외국 이름들이 회의록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낭테르, 아란치오, 쿠엔디아 등등이 그것이었다. 그 이름들과 관련해서 파견할 외교관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맡길 임무를 정하고, 무역수지 현황을 논하고, 그리고 군대의 이동에 대해 토론했다.



테레지엔슈타인베르크Theresienstenberg라는 이름도 그 중 하나였다.




진지하게.


유포터블製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0화 감상










말이 필요 없다

분노한 민중에 의해 오체분시 당했는데 몇 조각 남은 거나마 모아다가 묻으려 했더니 그마저도

하늘에서 번쩍 내려온 벼락에 맞아 가루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는 후한 말 동탁의 시체 마냥


스튜디오 딘判 페스나는 이제 유골조차 남지 않겠구만



유포터블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달빠라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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