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Glory of Britannia-7년전쟁 북미전역:French-IndianWar(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상황은 전쟁과 거의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1745년 퀘벡 일대에서 벌어진 소규모의 산발적 교전을 제외하곤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국가들은 식민지 상황에 관심이 없었으며 식민지에서는 모국을 위해 싸울 의지는 있었음에도 그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북미 식민지에서는 모국의 전쟁을 빌미로 개척 가능 영토의 확장을 노려보자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1748년의 정전 협정은 뒤늦게서야 싸울 준비를 하던 많은 식민지인들을 실망시켰다.

결국 북쪽의 캐나다 지역으로의 확장은 보류한채 뉴 잉글랜드의 식민지인들은 눈길을 동쪽의 오하이오 강과 그 계곡 지역으로 돌렸다. 1748년부터 오하이오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인디언들로부터 오하이오 지방의 땅 20만 에이커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프랑스측은 신속하고, 또한 강경하게 대응했다.



1749년에 퀘벡 총독 마르키 뒤키슨의 지시하에 피에르 죠셒 셀로롱 대위가 이끄는 200여명의 원정단이 오하이오 강 일대를 답사하며 오하이오가 프랑스의 영토임을 선언한 것이다. 셀로롱의 부대가 답사하고 기록, 표시해둔 경로와 지도를 토대로 뒤키슨 총독은 다시 1754년에 폴 마랭 드 라 말크 대령이 지휘하는 2천명의 프랑스 해병대를 보내어, 이번에는 그 경로를 따라 요새와 거점들을 건설했다. 이 요새와 거점들은 오하이오 일대에서의 인디언들과의 거래를 프랑스에 이롭게 만들 것이였으며, 나아가 뉴 잉글랜드의 이권을 심대하게 위협할 터였다. 실제로 이 요새들에는 상당수의 프랑스 병력이 주둔하며 인디언들을 뉴 프랑스와 통상하도록 유도하였으며, 동시에 프랑스 점유지에 접근하는 뉴잉글랜드의 상인과 사냥꾼들에게 경고를 주며 쫓아내었다. 이러한 공격적 반응은 뉴잉글랜더들을 경악시켰다.

당황한 식민지인들은 1753년에 버지니아 민병대의 죠지 워싱턴 소령을 프랑스 측의 주 요새이던 포르 드 라 뵈프(소고기의 요새, 라는 뜻 -_-;)에 파견하여 프랑스군이 당장 오하이오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드 라 뵈프 요새 사령관 생 피에르 대령의 반응은 매우 예의바르게도 “요청은 잘 알아들었으나 내가 그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의무는 없소” 였으며 워싱턴 소령은 저녁식사나 배불리 얻어먹고 돌아올 수 박에 없었다. 그는 이후 버지니아 주지사 로버트 딘위디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서쪽은 프랑스가 ‘쓸어’버렸습니다” (French had swept the west)라 표현했다.

프랑스의 요새방어가 점차 강화되고 주변 인디언들이 흔들리자 – 이로쿼이 족만이 영국편을 들고 잇는 상황이었다 – 뉴잉글랜드인들은 1754년 4월에 위기감 속에서 다시 앞서 말한 워싱턴 소령과 그 지휘하의 버지니아 주 민병대 수백명을 오하이오에 보내 요새를 건설하고 프랑스측을 견제케 했다. 이 와중 프랑스군과 버지니아 민병대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민병대는 산산히 깨져 도망쳐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쟁 지지 포스터. 식민지인들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곧 영국인들은 북미 식민지를 아예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이어졌다. 이미 프랑스인들은 뉴프랑스 본진인 퀘벡에서 시작해 5대호 (현 미국 영토와 캐나다 영토 국경 지역에 위치한 바다만큼 거대한 호수 다섯개의 군집. 빙하기에 거대한 유빙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의 일부다)를 따라 다시 오하이오 강, 다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멕시코 만의 누보 오를레앙 (현재의 뉴 올리언스)까지 이어지는 긴 영역권을 확보한 상태였다. 뉴 잉글랜드 식민지를 북, 서, 남으로 주욱 둘러싼 형태로, 전 방향에서 프랑스가 압박해오면 뉴 잉글랜드의 운명은 풍전등화라는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프랑스 본토의 정부는 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1754년 5월에 식민지인들의 대표단은 뉴욕주의 알바니에 모여 긴 회의를 가졌고, 그 결론으로 영국 본토에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브래독 원정(Braddock Expedition)
원조 요청을 수락한 영국 정부는 1754년 9월에 영국 본토로부터 에드워드 브래독 준장이 지휘하는 2개 보병연대를 파견한다. 이들의 최우선 목표는 오하이오 계곡으로부터 프랑스인들을 몰아내고, 그 일대 프랑스 점유 요새들을 점거하는 것이었다.

영국군 사령관 브래독 소장은 그의 군력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쌓은 인물이었다.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해오던 대로 그가 아는 전쟁 수행 방식은 영광스럽게 대병력을 이끌고 나가 평원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북미의 상황에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는 나쁜 지휘관도 아니었고 나름 전공도 많은 군인이었으나 융통성은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브래독 장군이 이끄는 2개 보병연대의 (1400여명) 영국 정규군에 워싱턴 소령이 지휘하는 식민지 민병 500여명이 더해져 약 2천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1755년 봄에 오하이오를 향해 출정한다. 프랑스 요새들을 목표로 행군하던 이 병력의 행렬은 깊은 숲길을 따라 길고 얇게 이어졌는데, 이 와중 브래독 장군은 출정지에 대한 사전답사나 정찰활동등을 경시하고 행하지 않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였다.

한편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프랑스의 뒤크슨 요새에는 백여명의 프랑스 정규군과 백오십여명의 캐나다 민병대, 그리고 오백여명의 인디언 동맹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은밀한 정찰활동을 통해 영국군이 대포까지 끌고오고 있다는 것을 보고 받은 프랑스측 지휘관은(랑글라드 소령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요새에 직접적인 공격이 가해지기 전에 그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선공을 가하고자 했다. 인디언들은 숫적으로 압도적인 영국군을 공격한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이를 거부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의 리에나르 드 보쥬 대위가 스스로를 인디언들의 전통 전투복장으로 치장하고 인디언들을 선동,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브래독 원정군의 당시 상황]

브래독의 영국군은 55년 7월 9일 경에 모논가헬라(Monongahela)라는 작은 강가에 다다랐는데, 이 때 다 합해도 800명이 채 안되는 프랑스군과 인디언들은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틈에 매복해 있다 공격을 가했다. 당황한 브래독은 보병들을 총열 일제사격 진형을 취하게 하려 했으나 사격할 대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쓰러져 나가던 보병들은 대형을 유지조차 할 수 없었고, 곧 브래독 본인도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장교들이 집중 사격의 대상이 되었고 지휘관을 잃은 병력은 우왕좌왕했다. 500여명에 달하던 식민지 민병대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혼란이 지속되자 당장 지리멸렬하여 등을 돌리고 달아났고, 남아 있던 영국 정규군은 한참을 어디있는지도 모를 적과 상대하며 혼란 속에 전투를 계속하다 민병대의 죠지 워싱턴 소령의 지휘하에 간신히 퇴각한다.

이 원정의 결과는 참혹했다. 2천에 달하던 영국군 중 5백여명이 전사하고 4백명은 부상을 입었으며, 브래독 장군 자신은 전투 후 하루만에 부상이 악화되어 숨졌다. 반면 프랑스측은 250여명 중 8명이 죽고 4명이 다쳤으며 637명의 인디언 동맹군은 15명이 죽고 12명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영국측이 버리고 간 수많은 물자와 장비는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손에 들어갔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브래독 장군과 지휘권을 계승받는 죠지 워싱턴 소령]

영국군의 결정적인 대패였다.


한편, 브래독은 원정을 나가기 전에 뉴욕주 민병대의 지휘관이던 윌리엄 존슨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뉴욕 주 북동쪽의 프랑스 거점 크라운 포인트를 향해 공세를 가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브래독 본인은 동쪽의 오하이오를 확보하는 동안 양동작전으로 프랑스 캐나다로의 진로를 뚫는다는 작전이었는데, 이 윌리엄 존슨 소장이 이끄는 뉴욕주 민병대 1500명은 브래독의 원정군이 참패를 당한지 두달 후인 9월이 되어서야 크라운 포인트 근처에 도달한다. 영국군(식민지 민병대라도 영국군은 영국군)의 진입을 두고볼 수 없었던 크라운 포인트 디스커 백작 휘하의 1500명의 프랑스군은 크라운 포인트 인근의 죠지 호수로 진군해나가 영국군과 교전을 벌인다.

9월 8일에 병력 규모가 대등한 양군은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격렬한 교전을 벌였는데, 양측 모두 피해가 4백여명에 달한, 승자 없는 전투였다. 혼란 스러운 교전 와중에 프랑스측 지휘관 디스커 백작이 포로로 잡히자 프랑스군은 후퇴하여 근처의 카리용 요새에 재집결하였다. 전략적인 면에서는 영국 측의 승리라 할 수 있었으나 상황을 바꿀만한 승리도 아니었다.

영국군은 그 후에도 두어차례 패배를 경험하였고 전략적으로 아무 득을 보지 못하였으며, 반면 프랑스군은 광대한 영토를 지나치게 빨리 확대시킨 나머지 각지를 지킬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영국군은 몸을 사렸으며 프랑스는 전략적 행동을 취할만한 병력이 없었다. 1755년은 이렇게 양측에 아무 소득도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1756년, 식민지에서의 분쟁은 결국 프랑스와 영국 양측의 전면 교전으로 옮아, 영국정부는 정식으로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북미전역(그리고 7년 전쟁 전체의)의 진정한 전환점은 1757년에 찾아온다.




ps. 이 기획을 작성하면서 절실히 느끼게 된 건데, 7년 전쟁의 북미 전역에 대한 영국측 사료와 미국측 사료는 늘 그 관점이 달라서 참 애매하다. 미국측 사료는 식민지 민병대의 활약과 죠지 워싱턴 소령의 활약을 크게 부각시키며 영국측 사료는 식민지 민병대와 워싱턴을 '공기' 취급한다. -_-


ps2. 미국의 지리에 익숙치 않은 분들을 위해 지도를 다량 첨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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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긁적 2008/03/28 17:44 #

    음음음?? 근데 스페인 사람들은 뭐 했나요? -_-a
  • 000o 2008/03/28 18:28 #

    스페인은 이 때쯤 몰락해 가는 중이었나? 아무튼 이 시기의 주역은 프랑스와 영국.
  • 묘구지 2008/04/01 13:19 # 삭제

    음? 그동안 사관의 중요성을 간과했는데 영/미도 그렇게나 다르게 보는군요;;저 전투가 계기였나요? 영국의 레드코트가 대규모전에서 소규모 분대 위주의 전투로 전환하는게...
  • Allenait 2009/03/04 10:50 #

    영국측에서야 워싱턴이 좋아 보일 리 없겠죠(...)
  • m1a1carbine 2013/01/06 12:47 #

    2012년에 나온 모 게임에서 브래독의 원정이 언급되는걸 보고 이걸 보니 이해가 더 빠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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