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1708~1778)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708~1778, 1st Earl of Chatam and 10th Prime Minister of British Empire)

그의 아들인 William Pitt the Younger와 구분하기 위해 William Pitt the Elder라고 불리운다. 두 부자는 처칠과 함께 영국의 가장 위대했던 수상으로 꼽히고 있다.

1708년 11월 5일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출생.
그 조부는 마드라스의 총독을 지냈고, 가문은 귀족집안은 아니었으나 매우 부유했다.

이튼스쿨에서 교육받은 후 옥스퍼드 대를 졸업했는데, 그는 당시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사람 중 하나였다. 부친의 사망 후 육군에 입대하여 용기병 여단에서 복무하였는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형편없는 승마 실력으로 유명해졌다. 이에 대해 당시 국왕 죠지 2세는 두고두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1735년에 오클햄튼 지역구에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휘그당원으로 활동했다. 1739년에 스페인에 대한 강경노선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여 이름을 알렸으며 1742년에는 당시 여당이던 휘그당의 당수겸 수상인 R.월폴의 대외정책 -스페인에 유화적인 태도등-에 비판을 가하고 정책 감사를 요구하여 의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46년부터 군 예산편집관-Paymaster of the Forces:군 재정문제와 훈련, 장비, 편제등에 대한 예산 규모 결정 및 집행등의 업무를 수행함. 대부분의 수상 내정자들이 거친 직무- 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1756년 12월에 남정국무장관(당시 영국에는 국무장관직이 두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 겸 하원의장에 임명된다. 임명되던 당시 그는 상원의장이던 데본셔 공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작 각하, 제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저만이." 그리고 그 당당한 발언은 현실이 된다.

그는 실질적으로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프랑스 왕국의 세력을 크게 악화시킨 주인공이였다. 당시 하노버 왕가가 북유럽에 소유하고 있던 하노버 지방에 대한 미련으로 자원을 불필요하게 유럽 본토에서 낭비하고 있던 것을 비판하고, 7년 전쟁의 본질은 식민지 전에 있음을 바로 꿰뚫어보았다. 그는 유럽 본토에서의 전쟁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영도 하의 프로이센을 지원하며 맡겨둔채 해군을 전력 활용하고 직접 고른 유능한 지휘관들을 북미 식민지에 파견함으로써 북미 전역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참전 국 대부분들이 식민지에서의 전쟁을 경시하고 있을 동안 그는 자원과 병력을 북미 전역에 집중시킴으로써 북미에서 프랑스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1757년부터 1761년까지 실질적인 수상에 가까운 직무를 수행했으나 1760년 국왕 죠지 2세가 사망하고 죠지 3세가 즉위함에 따라 프랑스, 스페인과 화친을 맺기를 원하는 국왕의 의향에 반발해 국무장관직에서 사임한다. 그럼에도 1766년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에 서임되었으며 동시에 정식으로 영국 수상에 취임하여 대영제국의 팽창주의적 정책 및 국제적 관계 균형을 영국의 이익에 맞게 유지해내었다. 그러나 1768년에는 악화된 건강이 문제가 되어 사퇴하였다.

17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참정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와 동시에 당시 북미 식민지에서의 사정이 악화일로로 치닫기 시작했다. 북미 식민지인들의 반감을 부추긴 과세 -차세, 도장법 등- 정책을 반대하였으며 능동적이지 못하던 대미정책을 비난하였으나 당시의 수상이던 그렌빌 공의 융통성 없는 국정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다.

1778년 4월 7일 상원에서 미국인들과 화친하고 종전 조약을 맺자고 발언한 리치몬드 공을 반박하며 "미국인들이 독립을 원한다면, 일단 나부터 처리하고 지나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외친 직후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자택으로 옮겨진 그는 5월 11일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의 차남 윌리엄이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낭독해주었다고 한다.

모든 의원들이 그 위대한 정치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장례식일에 의정활동을 중단하고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정부차원의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그는 대영제국을 영광과 번영의 길로 이끌었던 대 정치가였다.

그의 차남 윌리엄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수상이 되어, 다시금 프랑스에 의해 스러질 운명에 처한 위태로운 영국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되어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간다.



"채텀 백작은 당시 영국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 운명의 길을 굳은 확신과 믿음으로 보여주고 이끌어주었다." - J.D. Plumb, "England In the 19th Century"



ps. 근 이틀간 역사 관련 포스팅을 못하다가 간신히 하나 할 수 있어서 다행.
7년전쟁 북미전역 다음 글은 시간이 모자라서 시간이 좀 덜 걸리는 토픽으로
글을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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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긁적 2008/03/31 19:03 #

    아.. 이름만 들어본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였군요. 잘 읽었습니다.
  • 묘구지 2008/04/01 14:50 # 삭제

    결국 미국은 독립...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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