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03일
1830년 7월의 파리. – 01

7월 대혁명. “Trois Glorieuses”(영광의 3일)
이번의 내 역사 포스팅은 프랑스의 7월 대혁명에 대해서다. 아직 완성짓지 않은 글들이 여럿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냥 이 주제를 가지고 조사, 글을 쓰고 싶었다. “대영제국” 테마의 글들을 더 읽고 싶었던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잠시 외도를 해야겠다. –사실 난 유럽사 전체를 다 좋아할 뿐이다-
1824년 9월 16일.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그 동생 샤를르 10세가 프랑스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1815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인트 헬레나로 보내지고, 비엔나 의회가 프랑스에 왕정복고로 ‘앙시엉 레짐므’를 복권시킨지 9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샤를이 파리시에 입성하는 순간, 파리 시의 시장은 ‘새로운, 고귀한 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다’며 환호하는 시민들과 함께 왕을 맞이했다. 하지만 파리의 분위기는 수개월이 지난 후 차갑게 돌변하게 된다.
아직 1789년 대혁명의 공포가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루이 18세는 불안에 떨며 왕좌에 앉아있었다. 대혁명과 자유주의, 공화주의에 대한 기억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어져 있었고, 그는 재위 기간동안 일종의 허수아비로 앉아있었다. 부르봉 왕가가 왕정복고를 하면서도 거의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시스템으로, 헌법에 의거한 통치를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루이 18세가 즉위시 사인했던 샤흐트 꽁스티뜌씨오넬 프랑세Charte constitutionnelle française(프랑스 헌법)의 골자는 1798년 혁명 때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이한 샤를르 10세는 한편, 왕권 강화와 국민 통제, 그리고 진보주의 사상의 척결을 목표로 새로운 정책들을 펴기 시작했다.

[샤를 10세. 샤를-필립 부르봉. 프랑스를 지배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
1825년 1월. 국왕에 의해 Loi sur le sacrilège(반신성모독법)이 통과된다. 이 웃기지도 않는 법안의 내용중에는 카톨릭 성직자나 성체(하얀 빵 반죽. 왜 그 ‘예수님이 빵을 들며 이것이 내 살이요 ‘ 한 것을 빗대 성체식에서 나눠주는 것)를 욕되게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항목이 들어있었다. 아니, 성체를 담은 상자에 해를 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성체 그 자체에 손을 대거나 욕되게 하는 자는 사형 후 그 시체를 난도질한다는 식의 그런 법안이였다.
이 법안은 1814년에 부르봉 왕가가 동의한 헌법 조항 중 [[ Garantie des droits individuels, droit de propriété, liberté de presse et d’expression, liberté religieuse]], 그 중에서도 종교의 자유에 관한 항목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5년 2월에 다른 법안이 나타났다. 1789년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 동안 재산과 토지를 잃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그 재산을 환원한다는 법안이었다. 다시 말해, 귀족들에게로의 재산환원이었다. 이는 국민들의 반발을 즉각 불러일으켰다.
4월에 국왕측은 새로운 제안으로, 당시의 상속법안을 귀족과 재산가에 유리하게 바꾸고자 했다. 정부와 의회는 이를 굳게 반대했고,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국왕파는 계속해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법안들을 제의, 통과시켰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도 높아져만 갔다. 국왕과 그 정부의 정책들은 대혁명을 겪은 국가에서 실행되리라곤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들의 왕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1827년 4월 16일에 샤를 10세가 친위대(Garde Royale)를 사열할 때, 군인들은 환호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국왕이 그 앞을 지나갈 때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 모두들 싸늘한 눈초리로 샤를 10세를 바라보았다.
샤를과 국왕파는 당황했다. 샤를은 사촌동생 오를레앙 공에게 쓴 편지에서 « 사람들의 반응이 차갑다. 적대적이지는 않았으나 가끔씩 매우 끔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한다 »고 썼을 정도였다.
1827년 여름에 국왕은 프랑스 국민병La Garde Natonale을 해산시켜 버린다. 자원복무중인 시민들로 이루어진 이들을 해산한 것은 국민의 손에 쥐어진 무력이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정부와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1830년 4월 20일 경에 국왕은 언론, 특히 신문의 검열과 통제를 극도로 강화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이에 의회가 어찌나 격렬하게 반발했는지 국왕은 당장 제안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꾸자꾸 불복하는 국민들에 대한 대답을, 왕가는 1830년 7월 25일 일요일에 발표한다. 샤를르 10세는 그 날 « Ordonnances de Saint Cloud »(생 클루의 조례)라는, 총리 폴리나Jules de Polignac가 작성한 문건에 사인한다. 그 문건이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1.la première ordonnance suspend la liberté de la presse et soumet toutes les publications périodiques à une autorisation du gouvernement ;
2.la deuxième dissout la Chambre des députés alors que celle-ci vient d’être élue et ne s’est encore jamais réunie ;
3.la troisième écarte la patente pour le calcul du cens électoral, de manière à écarter une partie de la bourgeoisie commerçante ou industrielle, d’opinions plus libérales, réduit le nombre des députés de 428 à 258 et rétablit un système d’élections à deux degrés dans lequel le choix final des députés procède du collège électoral de département, qui rassemble seulement le quart des électeurs les plus imposés de la circonscription ;
4.la quatrième convoque les collèges électoraux pour septembre ;
5.les cinquième et sixième procèdent à des nominations de conseillers d’État au profit d’ultras notoires.
그외에도 등등등.
다시 말해.
언론과 출판의 금지, 국민대표회(Chambre des deputes)의 해산-그것도 막 새로이 선출된-. 새로이 뽑을 국민대표 의원들의 수를 428명에서 258명으로 축소. 선거일을 9월로 연기. 상업, 재계 종사자의 공직 선거 출마 금지. 등.
이 칙령들은 자꾸 반발만 하는 프랑스의 국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프랑스인들의 격한 분노와 분노의 혁명이였다. 신문들은 언론자유를 외치며 샤를10세에 대한 규탄으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7월 25일과 26일의 일이었다.
1830년 7월 26일, 월요일은 매우 덥고 건조한 날이었다. 파리시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피서차 지방과 농촌으로 내려가 아직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경제계에 종사하는 많은 비지니스맨들은, 한편, 그럴 여유가 없어 파리에 남아있었고, 그런 고로 가장 먼저 소식을 접했다. 조간신문 모니터지Le Moniteur는 월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그 전 날인 일요일에 발표된 생 클루 칙령에 대해 보도했고, 이를 읽은 재계 인사들은 물론 이를 환영하지 않았다. 상업에 종사하는 경제인들이 공직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건, 실제 공직 출마 의사나 능력이 있던 없던 관계없이 사람들을 크게 자극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많은 공장과 회사들이 그 날 문을 닫고 영업을 중단했다.
마침 어수선한 국내 정치 상황과 더불어 파리의 실업률은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었는데, 30년 7월 말 그 실업률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장이 문을 닫아 그 날이 휴일이 된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은, 신문을 읽고 분노했고, 마침 할 일도 없던 그들은 다른 일. 예를 들자면 시위, 같은 일에 투자할 시간이 있었다.
진보/자유주의 정계 인사들은 그 날 소식에 분노하면서도 즉각 움직이는 것을 꺼리고, 그 대신 쪽지를 주고받고 수신호를 주고 받으며 모임을 준비했다. 한 편 즉각 움직인 것은 저널리스트들이었다. 모니터지와 꽁스띠뜌씨오넬지등 4개의 주요 보수언론들은 칙령에 고분고분 순종해 신문사 문을 닫고 신문의 출판을 중지했으나, 파리의 12개의 진보 신문, 잡지사의 저널리스트들 50여명이 진보 신문 나씨오널Le National지의 본사 건물에 모여 정부에 반대하는 결의안에 서명하고 그들의 신문이 계속해서 언론활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정계 인사들도 회합을 열고 생 클루 칙령에 대한 반대의사를 확실히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시의 경찰청장 클로드 망쟁Claude Mangin은 그 날 보고에서,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이 « 수도 내의 모든 것이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하다. 보고를 올릴만한 작은 사건하나 없었다 »고 썼다. 그것은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것이였다.
1830년 7월 27일 화요일.
아침이 밝자 진보계 신문들인 나씨오널지Le National와 떵지Le Temps, 글로브지Le Globe, 그리고 경제신문Le Journal du Commerce이 칙령에 정면으로 반발, 선동적이고 비판적인 글들로 가득찬 신문들을 찍어내기 시작한다. 즉각 경찰청장 클로드 망쟁은 각 신문사들에는 경찰들을 파견, 인쇄기와 신문을 압수하고, 기자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신문사의 직원들 ; 인쇄공들과 기자들이 모두 합심해서 인쇄기 앞에서 경찰들과 격한 몸싸움을 벌였다.
오전에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며, 언제나 인파와 마차, 말들로 붐비던 파리의 거리들은 점점 비기 시작했으며 불안한 공기를 느낀 거리의 상점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오후 4시 경에 더 이상 거리를 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때 파리시 주둔군과 왕실친위대는 시의 주요 지점들에 배치되어 발생 가능한 폭동을 사전 차단하고자 했다.
그리고 해산당하게 될 민회 의원들은 모여서 대책을 논의했다. 논의는 별 진전이 없었고, 샤를 10세와 총리에게 반대성명을 표하는 편지를 보낸다는 의견이 나왔다. 가두행진을 시작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회의는 별 성과 없이 오후 5시에 해산했다.
그와 동시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텅 비었던 거리는 순식간에 시민들로 가득찼다. 성난 군중들은 관공서와 총리 관저등으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경찰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Á bas les Bourbons!, Vive la Charte!! »(부르봉 왕가는 물러가라 ! 헌법 만세 ! )
시민들이 외치는 구호는 점차 격화되어
« Mort aux Ministres! À bas les aristocrates! »(총리와 내각을 죽여라 ! 귀족들은 물러가라 !) 로까지 이어졌다.
군중들이 시위를 이어가지 못하도록 경찰과 군대가 설치한 바리케이드에 막히자 점차 분위기가 격앙되었다. 시민들은 기왓장과 깨진 보도블럭, 돌맹이들을 병사들에게 던지기 시작했고, 군대가 경고로 허공에 발포했을 때 이는 제압효과보다는 오히려 시민들을 더 흥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대는 결국 시위대의 압박감에 긴장, 직접사격을 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무차별사격으로 이어졌다. 총성은 해가 지고 밤이 깊을 때까지도 계속 파리시를 울렸고 날이 저물었을 때 총 스물 한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유명한 7월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
여기에서 계속
1830년 7월의 파리 -02 (完)
# by | 2008/06/03 12:19 | 역사 | 트랙백(2)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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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830년 7월의 파리. – 02 (完)
1830년 7월의 파리. – 01 앞의 글에 계속 이어서. 화요일의 소요사태는 파리 시에 설치되어 있는 가로등 2천개가 시위대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소요 중의 사고 때문인지 모두 불이 꺼졌고, 도시는 어둠에 잠겨 이에 시민들은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파리시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날이 새도록 총성과 포성이 간간히 울렸으며 거리 곳곳에 흩어진 사람들은 « À bas le roi » (왕은 물러나라!)를 ......more
그리고 늘 인간은 쌍코피가 터져야 정신 차린다는 것.
이번엔 코피 안터지고 바뀔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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