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 VITAM CICERO (키케로의 생애에 관해)
I.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IUS CICERO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 로마에서 남쪽으로 70마일 떨어져 있는 소도시 아르피눔ARPINUM에서 태어났다. 아르피눔은 188년에 제정된 법령에 의해 그 주민들도 로마 시민권자로 인정되는 곳이였다. 키케로가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던 CIVIS ROMANUS SUM!(나는 로마 시민이요!)는 이로 인한 것이였다.
키케로의 집안은 대대로 아르피눔에서 지주로써 농장을 소유해온 기사계급이었다. 가문 일원들의 별칭으로 사용하던 툴리우스TULIUS는 마르쿠스 키케로의 증조부가 콧잔등에 달고 있던 큼지막한 사마귀에서 비롯된 별명이었다. (사마귀 또는 혹을 지칭하는 라틴어 단어는 이후 TUBER가 되었지만 키케로 선조들의 시대에는 TULER였다) 키케로 가족은 경제적으로 유복했으나 정치활동에는 참여한 바 없는 지방유지가로, DOMI NOBILES (직역하면 “귀족가문”이나 영어로 하자면 Semi-noble, 다시 말해 준 귀족 정도가 될 것이다) 였다.
키케로의 아버지 키케로는 소탈하고 친구가 많으며,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이 많던 인물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은 헬비아HELVIA로, 그녀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으나 키케로가 그의 남동생과 주고받은 편지의 묘사에 따르면, 그녀는 매우 분주하고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던 것 같다. 키케로에게는 네 살 어린 남동생 퀸투스QUINTUS TULIUS CICERO가 있었는데, 그 둘은 평생에 걸쳐 깊은 사랑과 우애를 나눈 형제로, 동생은 형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훌륭한 군 장교이자 행정관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마르쿠스 키케로는 어릴 적부터 지방의 신동으로 여겨졌다. 아르피눔도 로마시 주류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상류층의 교양언어인 그리스어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높았고, 키케로도 그런 연유로 그리스어를 배우게 된다. 선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키케로는 열 살의 나이에 그리스 수사학과 고전 그리스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고, 언제나 그리스어를 줄줄 외우고 다니는 그 어린 소년을 보며 가족과 친구들은 그를 ‘PUER PARVO GRAECI’(작은 그리스 꼬마)라 놀리곤 했다. 그리스어에 대한 그 열정과 지식은 아마 키케로가 평생의 지성인이자 교양인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키케로의 아버지는 총명한 키케로의 교육을 위해 로마에 둔 친구들에게 부탁해 키케로를 로마에서 공부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키케로는 이 때 (15세) 우수한 변호사로 명망 있던 무키우스 스카에볼라QUINTUS MUCIUS SCAEVOLA의 제자로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와 함께 수학한 동문 중에는 그 유명한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의 아들과 이후 변호사로써 명성을 날린 세르비우스 술키피우스 루푸스SERVIUS SULCIPIUS RUFUS, 그리고 티투스 ‘아티쿠스’폼포니우스TITUS “ATTICUS”POMPONIUS가 있었다. 술키피우스는 변호사로 성공한 키케로조차 한 수 접는 법의 대가이자 평생의 친구가 되며, “아티쿠스”폼포니우스는 키케로가 ‘스스로의 또 다른 자아’이자 ‘영혼의 반쪽’이라 칭할 만큼 죽을 때까지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가 된다.
키케로는 법을 공부하던 중 17세의 나이로 징집되어 전쟁 중의 군 복무를 하게된다. 당시는 마침 BELLUM SOCIALES(동맹시 전쟁, 90-88 BC)가 한창으로,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의 저항에 대한 로마의 진압 공세가 펼쳐지고 있었다. 키케로는 2년 동안 처음에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GNAEUS POMPEIUS STRABO (유명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 89BC에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살해당했다.) 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 그 유명한 독재자)의 지휘 아래 군단에서 하사관으로 2년간 복무하였다. 뼛속까지 문인이자 지식인이었던 키케로는 군대와 전쟁에 별 관심과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군 생활을 겪었다. –먼 훗날 그의 친구 폼포니우스가 그에게 저택을 장식할 조각상들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 조각상들 중 마르스MARS신의 신상이 있자 그는 친구에게 보낸 답장에 이렇게 썼다. “아니, 왜 내게 군신(軍神)상을 보내는겐가? 내가 평화주의자인건 자네도 잘 알잖나?”-
동맹시 전쟁이 끝나 퇴역한 키케로는 공부를 계속하는데, 특히 그리스 철학에 깊이 빠져든다. 기원전 87년에 플라톤 학파의 원장이던 라리사LARISSA의 필로PHILO가 로마를 방문해 철학 강연을 했을 때 키케로는 그 강의를 듣고, 그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자면 “철학에 대한 유별난 열정에 휩싸인 채”플라톤과 그 철학에 심취하였다. 특히 플라톤의 윤리관념과 정치철학은 키케로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키케로는 또한 기원전 84년 경에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디오도투스DIODOTUS와 만나 그로부터 스토아학을 배우며, 먼 훗날 디오도투스의 후원자가 되어 스토아 철학에 대한 배움을 계속해 나간다. 키케로는 이후 로마 상류층 중 가장 철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지식인이 되는데, 그는 어느 날 이렇게 한탄한다. “PHILOSOPHIA NULLUM HABUIT LUMEN LITTERARUM LATINARUM”(철학은 (안타깝게도) 라틴 문학에서 아무런 조명도 받지 못했다.)
키케로가 공부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기원전 81년 경에서부터다. 젊은 변호사 키케로는 무명의 신인으로 경험을 쌓으며 변론법을 익히는데, 처음으로 그가 유명해진 것은 기원전 80년, 섹스투스 로스키우스SEXTUS ROSCIUS의 변호를 맡으면서부터이다. 로스키우스 사건은 섹스투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것으로, 여기서 아직 스물 여섯살의 젊은 무명 변호사이던 키케로가 섹스투스의 변호를 자청한 것은 매우 용감한 행위였다. 섹스투스를 고발한 것은 크리고노스CHRYGONOS로, 당시 독재관으로써 철권통치를 실시하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는 막 마리우스 일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살생부를 공개해 로마를 피바다로 만든 직후였다) 의 총애를 받던 부하였기 때문이었으며, 살부죄는 로마시대에도 최악의 패륜으로 간주되는 무거운 중죄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 키케로는 로스키우스와 그 아버지의 친밀한 관계와 로스키우스 본인에게 있어의 살인 동기 부족을 근거로 로스키우스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로스키우스가(家) 친척들이 섹스투스 로스키우스가 고발됨으로 얻을 이득들 –특히 유산분배 문제-를 들어 친척들을 비난하였고, 동시에 당 사건의 고발자인 크리고노스가 평소 로스키우스의 아버지가 소유한 장원에 눈독을 들이고 부동산 투기를 획책했다는 점을 밝혀 혐의를 그에게 돌린다. 키케로의 설득력 있는 변론은 성공하여 결국 로스키우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죄 방면된다.
로스키우스 공판에서의 승소로 키케로는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그러나 크리고노스를 공격한 것으로 인해 독재관 술라의 분노를 살까 염려한 그는 친구 폼포니우스의 권유와 아버지의 보조로 기원전 79년, 그리스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REMANEO(계속)























![Weezer - Raditude [Standard Version]](http://image.aladdin.co.kr/coveretc/music/coveroff/8678242361_1.jpg)



덧글
훔바바 2008/08/09 22:37 # 삭제 답글
‘스스로의 또 다른 자아’이자 ‘영혼의 반쪽’-> 약간 동성연애 냄새가 나는듯
그리스도 그렇고 로마에서도 동성연애는 흔한 일이었고
이 시기에 "막역한 친구" 라고 얘기되는 깊은 우정관계나 "정신적 동반자" 요런 표현은 동성연애를 은유한것들 같아요
으음 월광님이 서양인문학을 공부하려면 라틴어 이외에 그리스어도 해야 되겠군요
긁적 2008/08/10 00:19 # 답글
시작하셨군요.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