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4고지와 776고지 - 러시아 공수부대의 결사항전들

[2005년, 붉은 광장에서 퍼레이드 중인 러시아 공수부대]


이 글은 러시아 공수부대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영화 "9pota(제 9 중대)"가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 영화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실제로 벌어진
"3234 고지에서의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이 전투는 아프가니스탄의 가르데즈지방과 코스트 지방
사이를 연결한다는 작전의 일환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영화 제목인 '9 중대'는 그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3234 고지'에 진지를 구축한채 수백명의 아프간 '무자헤딘'(성전사)과 결사항전을 벌였던 소련군의 제 345 독립 공수연대 제 9중대를 뜻한다.

그 서른 아홉 명의 공수부대원들은 1988년 1월 7일에 그 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300여명 규모 무자헤딘 투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7일 오후 3시 30분부터 박격포와 RPG 포격이 시작되고 곧 11차례에 걸친 보병 돌격이 이어졌다. 제 9 중대는 그 11차례의 돌격들을 막아냈다.

무전도 끊긴 상태였고 전력비는 러시아군의 패배가 명확했다. 그럼에도 제 9 중대는 13시간 동안 버텼다. 치열한 총격전과 결국 진지 안까지 돌입한 무자헤딘 전사들과의 백병전이 이어졌으나, 제 9 중대는 이마저 격퇴해낸다. 그러나 마지막 공격이 끝났을 때 제 9 중대는 6명 전사, 28명 부상에 무사한건 단 5명이라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탄약 또한 바닥난 상태였기에 한 번만 더 공격이 이어졌다면 버티지 못했을 터였다.

[요게 그 9 중대가 죽음으로 사수한 3234 고지.. 는 아니고 그 3234 고지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사진을 찍은 이는 9 중대의 로즈코프 블라디미로비치 중위. (부상만 입고 살아남음)]



이게

1988년 1월의 일이었다. 제 9 중대는 그야말로 영웅적으로 위치를 사수,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났다.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연방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철수 했지만 곧바로 체체니아에서는 독립운동과 함께 또 다른 전쟁과 패배를 경험한다. 독립한 체첸을 진압하기 위해 러시아군은 수도 그로즈니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체첸의 산악 지대에서 체찬반군에 의한 게릴라전을 체험했고, 어마어마한 희생자만 낸 채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체첸의 독립을 반 쯤 인정한 채 물러난다.

하지만 1999년에 푸친 대통령의 명령 하에 러시아는 러시아 내 테러 활동 등을
체첸 반군의 탓으로 돌리면서 분리주의자들을 격멸하고자 체첸을 재 침공한다.

이게 제 2차 체첸 전쟁이다.



이 제 2차 체첸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바치고 1988년 1월 아프간에서처럼 '결사항전'을 하여
국가의 '영웅'이 된 자들이 있다. 이들도 공수부대였다.


2000년 2월, 한 체첸군 집단이 러시아 침공 후 산간 지방으로 후퇴하며 게릴라전을 펼치려 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1차 체첸전 때와는 달리 이들을 추격했다. 산간지방의 아르군 골짜기에 달하여
러시아군은 공수부대를 이용해 포위망을 형성, 후퇴중인 2000명 규모의 체첸군을 격멸할 작정이였다.

[체첸의 Argun 골짜기. 바로 여기로 체첸군이 후퇴했으며 러시아군은 이 골짜기를 에워쌌다.]


한편, 후퇴하는 체첸 반군의 절반은, 상당수가 무슬림인 체첸반군을 도우며 '지하드'를 전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체체니아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80년대 아프간 전쟁에서 싸웠던, 소위 '아프간 무자헤딘' 출신 또는 그 자손들로 구성된 '알 카에다' 조직이였다.

그야말로 10년 전 그 싸움의 재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2월 29일 오전, 제 76 근위 공수 사단 소속의 제 104 공수연대 제 2 대대 제 6 중대 (90여명)가 아르군 골짜기에 위치한 705 고지에 배치된다. 후퇴하는 체첸군의 탈출로를 봉쇄하는 것이 그 목적이였다. 하지만 정작 체첸군(과 알카이다 동맹)이 갑작스레 포위망 돌파를 시작했을 때 러시아군은 완전히 기습 당했고, 제 6 중대는 다른 부대들로부터 고립된체 공격으로부터 탈출, 뒤에 있는 776 고지로 후퇴했다.

체첸군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고 이들은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제 6 중대를 돌파해야만 했다. 체첸군은 수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했고 제 6 중대는 지원 포격에 힘입어 이를 막아냈다. 이 때 제 6 중대는 31명이 전사한 상태였다. 주변의 다른 러시아군들은 제 6 중대를 구원하기 위해 여러차례 접근했으나 체첸군의 공격에 막혔고, 이를 뚫고 제 6 중대까지 도달한건 제 2 대대의 대대장이 지휘하는 제 4 중대의 1개 소대 20여명 뿐이었다. 그리고는 체첸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체첸군과 광신적 열정으로 돌격하는 알 카에다 조직원들 앞에서 제 6 중대는 결사적으로 싸웠고 전투는 백병전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위태위태하던 힘의 균형은 3월 1일 오전 5시에 이르러 깨진다. 체첸군은 방어진지를 깨고 돌입해 러시아군 부상자들을 사살했다. 여기서 중대장 세르게이 몰로토프 소령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대대장인 알렉산드르 도스토발로프 소령이 무전기를 붙잡고 외쳤다. "내 위치에 포격 요청! 내 위치에!!"

122mm 고사포가 776 고지에 내리박혔고 체첸군과 알카에다군들을 분쇄했다. 이 상태로 공격은 멈췄고 산발적 교전이 곳곳에서 벌어졌으며 그런 상태로 하루가 지난다. 여기까지 제 6 중대(와 제 4 중대 병사들)에서 26명의 전사자(사상이 아니라 사망)들이 났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은 부상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776고지 바로 아래. 전사한 제 6 중대 병사들의 시신 위에 선 체첸군. 빨리 제 6 중대를 돌파하지 않으면 포위망에 걸려 전멸할텐데 어째 이리 사진 찍을 시간까지 있었나 모르겠다. 체첸반군을 옹호하는 웹사이트 '카프카츠 센터'에서 가져왔음.]

3월 2일 아침. 러시아의 구원군은 점점 더 다가왔으며 전멸 당할 것을 우려한 체첸군은 더 맹렬히 공격을 재개한다. 이 때 제 6 중대는 중대장과 대대장 모두가 전사한채 로만 소콜로프 대위가 중대장 대리를 맡아 지휘하는 중이었다. 그는 체첸군의 마지막 공세를 보고는 가장 젊은 병사 6명을 선발해 탈출시키고는 살아남은 15명의 대원들을 자기 주위로 집결시키고 최후까지 싸운다. 최후의 순간 그는 무전으로 바로 자기 위치에 포격을 요청한다.

이 776 고지의 전투에서 84명의 공수대원들이 전사했다. 생존자는 앞서 언급한 그 6인의 병사 뿐. 지원군이 장소에 도착하여 저항하는 체첸군과 아직 도망가지 못한 자들을 처리하고서 6 중대의 진지에 도착했을 때는 싸늘한 시신들 뿐이었다. 체첸군과 알카이다 조직원들은 어땠을까.

중장비와 물자를 실은 당나귀들과 수백여명의 체첸군은 최후의 공세 직후 골짜기를 빠져나가 탈출했으나, 2000명에 달하던 그 군세의 작은 일부였을 뿐이었다. 전장에 남겨진 체첸군(과 알카이다) 시신의 숫자는 약 500여 구. 포위망에 걸린 다른 100여명의 체첸군은 항복했다.

여기서 전사한 84인의 공수대원들은 러시아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나라를 위해 몸바친
그 숭고한 정신은 길이 기려지고 있다.





......여기까지가 그 '병사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훌륭한 군인들이었다. 결사의 항전을
벌인 그 모습에 경외심마저 들게한다. 하지만..



앞서 그 아프간 전쟁의 3234 고지 전투는 뭐였을까. 제 9 중대는 왜 그렇게 싸웠을까.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그저 '소련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었다.

제 9 중대가 보급로 확보를 위해 싸운 그 작전은 금새 취소되고 소련은 그 전투 후
1개월만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수한다. 제 9 중대원들은 무엇을 위해
죽고 상처입으며 싸웠을까?

애초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01년 미국의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더러운 전쟁이었다.

그곳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고, 현지에 생성된 탈레반 정권은 폭정을 휘둘렀으며
소련군은 그저 혼란만을 남겨준채 떠났을 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생존자들은 "소련의 영웅" 칭호와 훈장을 수여받지만 이는 금새 무용지물이 되었다.
1년 후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며 3년 후에는 소비에트 연맹 자체가 해체되었다.



제 6 중대는 왜 전멸했을까?

푸친 치하의 러시아가 일으킨 제 2차 체첸 전쟁은, 간단히 말해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의 발현일 뿐이었다.



1999년 부터 2000년까지 러시아군이 자행한 반인륜적 행위들을 보면
그 전쟁은 의도나 전개방식이나 모두 또 하나의 '더러운 전쟁'에 불과하다.

누가 영웅일까? 전멸한 제 6 중대? 아니면 그 앞길을 가로막는 6 중대를
뚫으려다 전멸한 체첸반군?

현재 체첸 반군은 거의 소멸 상태에 있다. 그로즈니와 체첸 지방의 대부분은
완전한 러시아군의 장악 하에 놓여있다. 이들은 철저한 통제 속에
친 러시아 사고를 '주입'받고 있다.

[2008년 2월, 체첸수도 그로즈니에 만들어진 "84인 공수부대 추모 거리"]


그래,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시각을 떠나서 보자면
그 러시아 공수부대원들은 용감히 싸웠고 용감히 죽었다.
1988년 3234 고지의 공수부대원들이나 2000년 776 고지의 공수부대원들이나 모두.


하지만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들은 헛된 개죽음을 당했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부가 미화했건 안했건 전쟁이 부당하건 정당하건을 떠나서




러시아 공수부대가 대단하며, 그들의 죽음을 불사한 전투와 임무 수행에 찬사와 추모를 보내고 싶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영상에는 776 고지 전투의 생존자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다.


덧글

  • 오토군 2008/12/17 12:51 #

    아…
  • rumic71 2008/12/17 13:05 #

    소련의 아프간전은 캘수록 월남전과 비슷해지는군요.
  • 월광토끼 2008/12/17 13:35 #

    그다지 아프간 전쟁에 대한 글은 아닙니다만...
  • 데프콘1 2008/12/17 14:57 #

    구타와 폭력으로도 유명한 부대죠-_-b 예전에 미쿡 뉴스에서 러시아 공수부대 기합주는 동영상을 방영했는데 그때 미쿡 사람들 표정이^^;;
  • 터미베어 2008/12/17 15:42 # 삭제

    데프콘님/어떤영상인지 알겠는데..공수부대만이 아닌 전 러시아군의 상황이라더군요.

    러시아군 공수사단들은 좀 다용도로 쓰이다보니...실제로 공수보다는 보병의 역활을 더 하는거 같지만요...강하기는 강하죠..

    러시아가하는 전쟁이 죄다 진흙탕속 쓰레기같은 전쟁이어서 그렇지. 병사들은 잘못없고.그저 용감하게 싸운거뿐이죠..
  • 愚公 2008/12/17 17:18 #

    근데 개죽음/안개죽음의 기준은 뭘까요...
  • 월광토끼 2008/12/18 16:43 #

    없죠. 다만 '그 죽음의 미화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나 없나'의 차이는 있습니다.
  • starseed 2008/12/17 19:29 # 삭제

    WIC에서 즐겨 사용하던 소련군 공수보병이군요.. 잘싸우기도 하고, 파란 베레모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과거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 요조 2008/12/17 19:36 #

    제9중대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남은 병사의 나레이션이 참 냉소적이었죠. 트랙백합니다.
  • gforce 2008/12/17 22:24 #

    에이, 이라크전은 더러운 전쟁이라기보다는 등신같은 전쟁=ㅅ=
  • 월광토끼 2008/12/17 22:47 #

    이라크를 언급한 바 없습니다?
  • gforce 2008/12/17 23:01 #

    아, 2001년이군요=ㅅ= 근데 아프간전은 전 지지하는 편이라.
  • 계원필경 2008/12/17 23:32 #

    결국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은 러시아인의 무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군요...(그리고 역시 러시아의 제 4군이라고 불리는 공수부대이군요...)
  • 울트라김군 2008/12/18 10:01 #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또 지식을 배워갑니다.
  • ninjacat 2008/12/19 09:40 #

    잘 읽었습니다.(_ _)
    특히 마지막에 쓰신 부분들은..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네요.
  • 123 2009/04/02 09:55 # 삭제

    자신의 위치에 포격하라고 한 중대장이 허무한 삶이었다니.. 안타깝군요
  • gforce 2015/11/17 19:51 # 삭제

    아, 2003년이군요=ㅅ=근데 아프간전은 전 지지하는 편이라.
  • 계원윽경 2015/11/17 19:52 # 삭제

    결국 아프가니스탄과 체첸은 러시아인의 무덤 이상 이하도 아니군요...(그리고 역시 러시아의 제 6군이라고 불리는 공수부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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