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로 공작 존 처칠의 일생. - 6부

[블렌하임 회전]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50대 중반의 말보로 공 존 처칠, 1704~5년 경의 초상화]


블렌하임 회전 직후인 1704년의 남은 4개월 동안에 말보로는 쉬지 않고 전투을 벌였다. 이는 블렌하임의 전승을 전쟁 규모에서 최대한도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는 한번의 결정적 전투 정도로 굴복해 평화조약을 맺을 수준의 국가도 아니었으며, 그 예기는 블렌하임에서 꺾였으나 여전히 강대한 군대를 보유한 국가였다. 그러나 바바리아도 오스트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간 마당에 대불 연합군과 말보로에게 방해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말보로 공작은 블렌하임 회전 직후에 있는 최고사령관 회의에서 모젤강으로 진입해 프랑스 본토로까지 전쟁을 확대시킨다는 작전을 제의한다. 그리하여 블렌하임 후 약 1주일의 휴식기간을 가지고는 전군이 라인강으로 진격하여, 프랑스 소유하의 랑도(란다우), 트리에르, 그리고 모젤 강에 있는 트레바흐를 파죽지세로 공격한다. 트리에르는 며칠간의 포위공격이 있은 후 10월 26일에 함락되었으며, 연달아 11월 23일에는 란다우가, 그리고 12월에는 트라바흐가 함락된다.

이로써 모젤강 일대는 완전히 연합군이 장악하게 되었으며, 프랑스군은 서쪽으로 물러나 웅크릴 수 밖에 없었다. 1704년의 전역은 이렇게 끝나는데, 블렌하임의 승전과 함께 모젤 강 전역의 소식이 본국으로 전해지자 말보로 공작은 일약 대 영웅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반反 말보로 파이던 토리당원들마저 끓어넘치는 애국심을 주체못하고 환호작약했을 정도였다.

말보로가 12월 14일에 잉글랜드로 돌아오자 대대적인 개선행진이 있었으며 말보로는 여왕에게 그 해 전역에서 획득한 전리품으로 그가 박살낸 적의 110개의 기병연대기와 128개의 보병연대기를 바친다. 앤 여왕도 말보로 공작에게 왕실 소유의 우드스탁 대 공원을 영지로 하사하였으며 1705년 2월에는 24만 파운드(지금의 가치로 환산하여 다시 원화로 하면 대략 600억원)의 예산을 의회에 통과시켜 말보로의 승전을 기념하는, 말보로 소유의 대궁전 건축을 인가한다.

[Blenheim Palace, Residence of Duke of Malborough]


이 대궁전은 블렌하임 궁전으로 이름지어졌는데, 그 건축기간 동안 온갖 문제가 발생하였고 그 예산 문제를 두고 의회 내에서의 논란도 끊이지 않았으나 현재(2008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말보로 공작 가문의 소유이자 거주지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건물임과 동시에 영국에서 왕실 소유가 아님에도 "Palace"자를 붙일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말보로 공작부인 사라 처칠과 앤 여왕과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앤 여왕은 더 이상 사라 처칠과 짝짜꿍하던 사춘기 소녀가 아니었고 사라 처칠의 지나친 정치 조언들을 실증냈으며 사라 처칠은 앤 여왕의 거만한 태도와 화려한 궁정 생활을 싫어했다. 공작부인과 여왕과의 불화는 말보로 공작과 여왕과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한편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드 1세는 말보로 공작을 신성로마제국의 대공으로 책봉하여 민델하임 대공으로 선포하였으며 대공국인 민델하임은 말보로가 탈환한 바바리아 지방에 만들어졌다.

말보로 대공이 1704년에 거둔 대승은 그 이듬해에는 이어지지 못했다. 영국 내 의회의 의견 불일치와 앞서 말한 네덜란드 정치가들의 방해, 독일 소영주들의 소심함 때문에 대규모 군사적전은 전개되지 못하였으며 7월에는 브라방 방어선(프랑스의 벨기에 방면 요새진)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정치적 문제들로 인해 이것을 전략적 우위로 만드는데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1705년 동안 프랑스는 군의 재정비를 하는데 전념하여 다시 전략적 우세를 점하는데 성공한다. 빌라르 원수는 바덴을 상대로 라인강에서 승전을 거두었고, 1706년 4월에는 벤돔므 원수가 이탈리아 전선에서 칼치나토를 점령하여 오스트리아를 다시금 위협했다.

이탈리아 전선의 흉보가 날아든 시점에서 말보로는 막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 도착한 직후였다. 본래 말보로는 이탈리아로 남진하여 다시 한번 오이겐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 결정적인 교전을 벌일 작정이였으나 전선 곳곳에서의 프랑스군 재침은 네덜란드 정치가들을 겁에 질리게 하여, 연합군이 네덜란드 근방을 떠나는 것을 불가능케 했다. 결국 말보로는 다른 방법의 전략을 짰다. 네덜란드를 떠날 수 없으니 대담하게도 벨기에 남방으로 진군하여 빌루아 원수 휘하의 벨기에 방면 프랑스군을 꾀어내려 한 것이다. 다시말해, 이건 결투신청이였다. 그리하여 5월 9일, 6만 2천명의 연합군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출발한다.

마침 루이 14세와 베르사이유의 궁정은 블렌하임의 굴욕을 복수하자는 분위기였고 루이 14세는 휘하 원수들에게 "므쓔 말브후"(말보로씨)를 무릎 꿇리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빌루아는 이에 반응하여 6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틸몽에서 출전해 말보로의 군세를 맞아 싸우려 5월 18일에 진격한다.




양군이 만난 것은 5월 23일, 벨기에 동부의 소읍 라밀리즈Ramilles에서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교전이 펼쳐졌다. 보병들이 평원에서 밀고당기며 전투를 벌이는 동안 기병대끼리의 전투가 격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말보로는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져 낙마하는데, 그가 일어나 다시 말에 오르려는 순간 그를 옆에서 도와주고 있던 수행장교는 날아온 총탄에 즉사한다. 그래도 말보로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장면의 묘사]


그야말로 '총알이 빗발치고' 죽음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말보로는 침착하게, 전선 사방을 오가며 지휘를 했으며 적지 적소에 부대를 배치하고 이동시키는 그의 용병술은 거의 예술에 가까웠다. 빌루아 원수와 프랑스군의 다른 지휘관들은 이러한 용병술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그들이 부대를 움직이는 것은 항상 이미 때늦은 후에서였다. 결국 영국군 기병대가 전선 좌익을 돌파하고는 우회, 프랑스군의 배후를 쳤을 때 프랑스군 전선 전체에 "sauve qui peut"(할 수 있을 때 도망가라!!)라는 외침이 퍼졌고, 라밀리즈 전투는 블렌하임 전투에 버금가는, 말보로의 대 승리로 끝이 난다.

[라밀리즈에서 돌격하는 영국 왕실 근위기병연대]


라밀리즈 전투에서 말보로가 지휘하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은 1000명이 전사하고 2600명이 부상당했으나, 프랑스군은, 그 위풍당당하던 6만 명의 벨기에 주둔군은 1만여명 이상의 전사, 부상자와 포로 잡힌 1만여명의 손실과 함께 그야말로 '한줌의' 패잔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5월 23일 그날의 프랑스군 인명 손실은 정확히 집계하는게 불가능하다. 빌루아 휘하의 프랑스군은 너무나 완벽하게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전투 직후 20킬로미터에 이르는 구간동안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격멸하였으며 제대로 대오를 갖춘채 후퇴한 부대가 하나도 없었다.

라밀리즈 전투는 1706년 전체에서의 대승리였다. 라밀리즈 전투 직후 말보로는 연합군은 승세를 몰아 그대로 파죽지세로 진격했으며 5월 25일에는 루뱅이, 5월 28일에는 벨기에 주도 브뤼셀이, 겐트는 5월 30일에, 우데나르드와 브뤼주는 6월 3일에, 앤드워프는 6월 6일, 오스텅드는 7월 4일에 차례대로, 도시에 이어 도시가 함락되었다. 8월에는 메닌, 10월 2일에는 아스가 함락됨으로 1706년 11월이 되었을 때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지금의 벨기에에는 단 한 명의 프랑스군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1706년, 플랜더즈. 말보로가 일궈낸 파죽지세 연전연승의 장]


이 1706년의 '플랜더즈 전역'은 그야말로 말보로의 인생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의 영국군의 전사戰史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승리였다.

그러나 1706년의 승리들은 프랑스를 굴복시키지도 못했고 만족스러운 평화조약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루이 14세는 전쟁을 끝내는데는 동의했으나 프랑스군의 패전 상태로 전쟁을 끝낸다거나 프랑스에 불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는다거나 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말보로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악화되었다. 본국에서의 문제가 점차 커진 것이다. 토리당의 득세와 앤 여왕의 변심, 그리고 말보로의 친우 고돌핀 백작의 실각 위험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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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뭐 멀리 기차타고 가는게 아니라 그냥 루브르 박물관 갔다올려구요. 그래서 잠시 글 쓸 시간이 나 작성해 올립니다.-

덧글

  • 데프콘1 2008/12/28 20:07 #

    오옷 정말 전쟁영웅이네요. 보면 말보로 공작은 탄력적으로 공세를 나가는 장군이었던 것 같네요.
  • 계원필경 2008/12/28 20:08 #

    블렌하임 이후에도 역시 말보로 공작은 계속 위풍 당당하군요...(결국 문제는 본국)
  • 슈타인호프 2008/12/28 20:14 #

    영국 전함 라밀레즈도 저 라미예즈의 지명에서 따온 거겠군요. 호오+_+
  • Ladenijoa 2008/12/28 21:16 #

    정말 처참한 패전을 당했군요;;; 프랑스는 저래서...-ㅅ-
  • 들꽃향기 2008/12/28 23:22 # 삭제

    잘 읽고 갑니다. 아직도 중세시대의 결투 관념이 남아 있었던 시대의 전투였군요;;
  • 피그말리온 2008/12/29 09:05 #

    리얼 히어로네요 정말.......
  • 곤충 2008/12/29 14:41 # 삭제

    프랑스 지못미.
    정말 프랑스는 나폴레옹에게 몇백년간의 군사적 능력을 몰아준 듯 합니다.
    노력은 하는데, 성과는 항상....orz
  • 델카이저 2008/12/29 18:29 # 삭제

    원래 정확하게 나폴레옹도 코르시카 인이지 프랑스인은..(탕~~)

    장수들이 왕 눈치 보느라고 제대로 용병을 구사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긴 하죠.. 말보로가 대단하다는 것도 이유고.. 그래도 보방이 남긴 유산 덕분에 완전 털리는 것은 피한다능..-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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