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로 공작 존 처칠의 일생. - 7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던 1706-7년에 영국 내의 정치 구도는 상당히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전쟁을 지지하고 원조하고 있던 것은 휘그당이었는데, 그들은 그 대가로 당시 내각의 실세이자 말보로의 친우이던 재무장관 고돌핀 백작에게 끊임없이 로비를 했다. 차기 의회소집에서의 정부에 대한 지원을 대가로 이들은 휘그당의 지도자격인 선덜랜드 백작을 국무장관에 선임하라 요구했고, 고돌핀 백작은 (그리고 말보로 공작도) 휘그당의 전쟁지원이 반드시 필요했기에 여왕에게 이를 청원한다. 그러나 앤 여왕은 감정적으로는 반反 휘그파였으며 선덜랜드백의 국무대신 임명을 주저했다.

여왕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궁정 시녀장에 임명되었던 말보로 공작부인 사라 처칠 또한 남편을 돕기 위해 재무장관 고돌핀백과 함께 여왕에게 압력을 넣었으며 두 사람의 압력에 이기지 못한 앤 여왕은 결국 굴복, 선덜랜드백작을 국무장관에 임명한다.

그러나 바로 이 사건이 여왕과 사라, 그리고 고돌핀과 내각간의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에 파국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여왕은 점점 더 토리당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으로 간섭하는 사라를 피곤해하며 새로운 여성 친구 애비게일 마샴 부인에게 귀를 귀울였다. 고돌핀의 정치적 조언이나 간언은 기피하기 시작했으며 그 대신 토리당의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할리의 조언에 귀기울여, 더욱 더 휘그당을 멀리하게 되었다.


정세는 이러했는데 국외의, 다시말해 전쟁상황은 1706년의 대승리도 무색하게 악화일로로 향하고 있었다. 말보로 공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군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 왕국의 카를 12세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해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독일과 스페인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다시 선전하기 시작했으며 오이겐 대공은 그 전해에 점령했던 툴롱 항을 다시 프랑스군에게 내주어야 했다. 프랑스는 쉽게 굴복할 나라가 아니었다.

말보로의 외교활동의 성과로 스웨덴의 프랑스측 참전만은 막을 수 있었으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1707년 가을에 말보로가 영국에 돌아왔을 때 의회의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진 상황이었다. 토리당은 말보로가 지난 승전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쟁 전체에 대한 승리로 바꾸지 못한것을 비난하며 네덜란드-플랜더즈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2만명의 영국군 부대를 스페인 전선으로 이동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듯 앤 여왕은 국교회 주교직에 토리파 성직자들을 임용했으며, 휘그당은 이러한 정세에 위협을 느끼고 다음 의회 소집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협박해왔다.

이에 말보로와 고돌핀, 그리고 사라는 휘그당을 달래면서 동시에 토리당의 정책들을 수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여왕과 접촉했으며 이러한 노력들은 여왕과의 사이를 점점 더 벌려놓을 뿐이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 하고 말보로가 다시 1708년 초에 전선으로 돌아갔을 때 해는 이미 낭보로 시작된 후였다. 1706년에 점령했던 브뤼주(브루흐)와 겅트(겐트)가 다시 프랑스군에게 함락당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이겐 대공이 유럽 남부의 전선을 떠나 네덜란드의 말보로와 합류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말보로는 오이겐 대공의 조력에 힘을 얻어 다시 전쟁에서의 기선을 잡고자 한다.




1708년 6월경에 벙돔므 원수 하의 프랑스군은 플랜더즈에서 잃은 지역들을 모두 수복한다는 일념으로 진격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겐트를 함락한 이들의 다음 목표는 우데나르드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말보로는 다시한번 그의 주특기처럼 된 분군행군 총군전투 고속강행군을 재연, 우데나르드로 진군하여 도시에 대한 포위공격을 준비하던 프랑스군을 7월 11일에 급작스레 습격한다. 벙돔므 원수의 프랑스군은 이 급습에 일거 혼란에 빠졌으며 이들은 말보로가 주도하는 전장에서 말 그대로 '질질 끌려'다녔다. 거의 10만에 달하던 프랑스군은 말보로의 8만명 군세에 격파되어, 2만여명의 피해를 입고 후퇴한다.

우데나르드 전투의 승전은 다시 플랜더즈 지방 전체의 수복과 프랑스 영토 내 릴 시와 그 요새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승리는 환영받지 않았다.

본국에서 승전보고를 받은 앤 여왕은, "오 세상에, 언제쯤이면 이런 피비린내나는 짓을 그만둘지?" 라며 비아냥거렸다. 사라 처칠은 여러가지 정치 문제와 남편에 대한 잔소리 공세로 남편을 괴롭혔다. 말보로도 지쳐있었다. 그가 그해 8월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난 당신이 보내온 지난 세 편지에 답장을 할 시간도, 정신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오."




휘그당은 승전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말보로와 고돌핀을 쪼아댔다. 내각과 의회에서 토리 세력을 억누르고 휘그파를 확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말보로와 고돌핀은 여왕을 그리하도록 설득하지 못했으며 휘그는 여왕 설득 실패에 대해 비난했다. 그러면 토리측 또한 말보로와 고돌핀이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을 또 비난했다.


한편 프랑스는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었다. 자금도 군대도 전체 국력도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백성들은 기근과 강추위에 고통받았다. 루이 14세는 평화조약을 고려했다.

드디어 전쟁을 끝낼 때가 다가온 것이다. 1709년 4월에 드디어 영국과 프랑스간의 회담이 진행된다. 그러나 휘그당은 지나친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 보아왔지, 전쟁에서 이기는 법은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퇴위를 요구했으며 영토 처리 문제와 무역 문제에 관해 프랑스에 가혹한 조건을 내걸었다. 말보로는 이 모든 것에 반대했으나 그는 휘그당이 주도하는 외교협상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는 모욕감을 느꼈고 이에 대한 그의 절절힌 대국민 칙령은 프랑스 국민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들은 영국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군민이 일치단결해 항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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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슈타인호프 2009/01/01 14:37 #

    쥐도 골목 끝까지 몰리면 반항하는 법인데, 프랑스는 영국과 비교해서 작지도 않은 고양이였지요. 그걸 그렇게 몰아붙였으니 당연한 결과.
  • 계원필경 2009/01/01 14:49 #

    전투에서 이기는 거 보다 더 중요한 건 전쟁을 마무리 짓는 것인데 항상 망각하기 마련이죠(...)
  • 파도지기 2009/01/01 15:02 #

    어째 느낌이 이순신장군 분위기가 감지되는 군요.
    장수가 승전으로 영향력이 올라가는건 시기하고, 쪼아되면서
    한편으론 그 장수는 언제가 전투가 벌어지면 나가서 싸워서 이길꺼라 생각하는...
    전쟁전체의 승리를 이끌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자신들이 전장에 나가서 싸우던지...
    안전한 후방에 앉아서, 오히려 상대를 자국해 단결시키기만 하고 있으니..
  • 피그말리온 2009/01/01 16:32 #

    1차대전 후 독일의 처리가 생각나기도 하고.....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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