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로 공작 존 처칠의 일생. - 8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의 일생 7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휘그당의 터무니없는 요구와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과 루이 14세의 단 및 항전의지 고양에 의해, 1709년 봄의 정전 협상은 성과 없이 종결 되었다. 이로인해 곧 끝날것만 같던 전쟁이 재개된다. 프랑스군은 재집결되기 시작했고 그동안 말보로는 그 스스로의 휘그 정책 반대의사 표명에 의해 정치적으로 공격받았다. 뿐만 아니라 앤 여왕과 말보로 부부 간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버려, 앤 여왕은 말보로 공작 부인에게 "더 이상 우리가 옛날의 우정을 되찾기란 불가능할 것 같구려"란 서신을 보내기에 이른다. 여왕은 말보로 공작에 대한 정치적 지원도 완전히 철회해버려,말보로는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존 처칠, 제 1대 말보로 공작. '캡틴 말보로'.]



그래도 말보로는 전장에서 끊임없이 작전을 수행하고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또한, 그는 본국에서 정치적으로 공격받을지는 몰라도 휘하의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사랑받는 존재였다. 언제나 전투를 승전으로 이끄는 명장이었으며 그는 일반 보병들의 보급과 휴식, 건강상태에 유래없이 큰 관심과 배려를 보여준 장군이었다. 그의 병사들의 안위에 대한 배려로 인해 그 휘하의 군대는 언제나 급속 장거리 행군도 말끔하게 일체의 약탈이나 이탈 행위 없이 수행할 수 있었으며 치밀한 계획 구상 능력으로 이동과 집결이 언제나 신속했다.

언제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서서 (전황과 전열을 즉각즉각 파악하고 적시적소에 투입하기 위해서였지만) 진두지휘를 하는 말보로 공작을 두고 그 휘하 병사들은 친근하게 "캡틴 말보로" 또는 "코포럴(상병) 존"이란 애칭으로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보로는 최대의 적수를 만난다. 지난 블렌하임 회전에서 프랑스 군의 부사령관을 맡았던 빌라르 원수가 플랑드르 방면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말보로와 일전을 겨루게 된 것이다. 프랑스군은 전세계 다른 전역에 있던 부대들을 플랑드르 방면군에 증원으로 포함시켰으며 곧 대규모의 프랑스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플랜더즈, 플랑드르, 지금의 벨기에)에 집결한다.

1709년 7월, 말보로 공작은 프랑스군이 더 결집하기 전에 먼저 선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투르네 요새를 공략, 함락시키고 연이어 몬스시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한다. 투르네를 실함했으나 몬스까지 빼앗기는 것은 두고볼 수 없었던 빌라르 원수는 플랑드르 남부의 라그니에르 숲을 통해 몬스방면으로 진격했고, 이 때 말보로 지휘 하의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동맹군과 빌라르 지휘 하의 프랑스군은 라그니에르 숲 인근의 말플라케라는 마을에서 8월 29일에 마주친다. 양 군세는 각각 1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말보로는 즉각 교전에 들어가고 싶어했으나 동행한 네덜란드 대표들과 장교들이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도록 압력을 가해 전투는 시작되지 못했다. 다음 날인 30일이 되어 뒤늦게나마 말보로가 공격 명령을 내리려 할 때 네덜란드 정치가들이 다시 개입했고, 전투는 무려 9월까지 미루어진다. 네덜란드인들의 터무니 없는 우유부단함은 빌라르 원수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빌라르의 프랑스군은 즉각 주변 일대에 철저한 강화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전을 벌일 준비를 철저히 했다. 포대가 전선 곳곳에 절묘하게 배치되었으며 고지들에는 깊은 참호가 파였고 방책이 쌓였다.


[프랑스군을 이끌며 선두에 선 빌라스 원수]


말보로는 이번에도 전선 전체에 대한 압박 공세와 기병대를 이용한 중앙돌파라는 전법을 실행하려 했으나 이번엔 프랑스군의 진지가 워낙 잘 단단히 방비되었으며 빌라르 원수 또한 적시적소에 병력을 유연하게 투입하고 이동시키는 고급 용병술사였다.

여러 날에 걸친 공세가 이어진 후 9월 11일에 본격적인 대전투가 벌어졌으며 격전은 프랑스군의 전열이 계속되는 포격과 돌격에 무너짐으로써 프랑스군의 패배로 끝났다.


[돌격하는 영국군 척탄병 연대]


하지만 이번에는 빌라르 원수의 침착한 지휘 아래 프랑스군은 철저히 질서정연하게 전장을 이탈했으며 영국-동맹군은 완벽하게 철수하는 프랑스군을 감히 추격하지 못했다. 이 말플라케 전투에서 말보로는 다시 한번 승리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처절한 피로스식 승리였다. 10만 명의 병력 중 동맹군은 2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잃었으며 비슷한 규모의 프랑스군은 1만 5천명을 잃었다. 이 어마어마한 희생자 수는 각 참가국 지도부와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고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격멸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였다.


[블렌하임 궁전에 걸려있는 말플라케 전투 묘사 테페스트리]



말보로는 말플라케 전투 직후 이렇게 썼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인들은 지금껏 내가 본 어떤 전투에서보다도 (전선을) 잘 방어해냈다." 말보로는 여세를 몰아 10월 2일에 몬스시를 함락시켰으나 이 성공은 말플라케의 사상자 수에 가려져 빛을 잃었다. 말플라케 전투는 승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높은 사상률은 정적들에게 있어 아주 좋은 공격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정적들은 말보로가 병사들의 안위보다 자기 개인의 영광과 명예만 신경쓰는 이기주의자이자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전군을 집결시켜 일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당한 프랑스측은 1710년에 다시 평화협상을 요청한다. 휘그당은 영국측에 유리한 조건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묵살해버린다. 여기서 휘그당은 완전히 국민과 정부로부터의 지지를 잃었고, 1710년 10월의 총선에서 토리당이 압승하게 된다. 토리 정부가 들어섬과 함께 지금까지 말보로와 함께 전쟁을 이끌어 왔던 재무장관 고돌핀 백작이 실각했으며 말보로의 지휘권 또한 크게 공격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폭풍 속에서 그 해 5월로 환갑을 맞은 늙은 말보로 공작도 야전군 총사령관 직에서 사임하려 했으나 부사령관 오이겐 대공과 친구 고돌핀 백작의 각곡한 만류로 사임만은 보류한다.

그리고 야위고 초췌해진 그가 1711년 1월에 영국에 귀국했을 때 정부의 반응은 차가웠다. 새로이 장관직에 임명된 자들은 모두 토리당원들이었으며 이들은 말보로를 정치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앤 여왕은 드디어 말보로 공작 부인 사라 처칠에게 궁내 시녀장 자리를 내놓고 사직하라 명령한다. 말보로 공작이 아내를 위해 여왕을 찾아가 간곡히 보류를 부탁했으나 여왕은 그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했다.


이러한 불운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인해 말보로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점차 쇠약해져갔지만 이를 무시한채 다시 1711년 3월에 네덜란드 헤이그로 돌아가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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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마 8편으로 연재 완료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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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엘레시엘 2009/01/14 13:23 #

    허허; 엔간한 사람 같으면 '에라 썅 집어쳐. 그래 니들 조때로 다 해먹어봐라' 하고 다 때려치고
    낙향해버릴 것 같은데...말보로 공작도 참 어지간한 양반이군요;;
  • 르-미르 2009/01/14 13:25 #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네요;
    그리고 왠지 오랜만에 뛰어난 프랑스 장군을 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
  • 델카이저 2009/01/14 13:56 #

    남탓하는 건 정치가들의 공통이군요..-_-;;
  • 데프콘1 2009/01/14 14:32 #

    저 같으면 아 포기하고 낙향 할 듯
  • 계원필경 2009/01/14 14:35 #

    정말 전쟁도 정치의 도움이 없으면 하기 힘들군요...(말보로 공작은 계속 이기는 군요...)
  • 레이트 2009/01/15 11:46 #

    허허...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네...
  • 玉蔚亞育護 2009/01/24 19:51 # 삭제

    빌라르는 블렌하임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그이전까지 사령관이었지만 바이에른선제후와 사이가 틀어져 결국 루이14세가 본국으로 소환해서 국내에서 위그노반란을 진압하는 소임(?)을 맡고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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