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26 원수: 나폴레옹의 수하들 - 04. 그루시

그루시.

세르게이 본다르츄크 감독의 1970년작 영화 "WATERLOO"에서 로드 슈타이거가 분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절망적으로 외쳐댄다. "WHERE IS GROUCHY!?"



정말. 그루시는 분명 훌륭한 군인이었고 성공적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다 좋은데. 단지.

WHERE WAS GROUCHY?!




04.
엠마누엘 드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1766 ~ 1847) 원수.



앞서 소개한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엠마누엘 드 '가난한 일반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1766년 수도 파리에서 프랑수아 자크 드 그루시 후작의 장자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왕립군사학교에 입학해 교육받고 1779년에는 포병대에 소속된다. 3년 후에 그는 기병대로 병과를 바꿨고,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우수한 근무성적으로 근위대에 들어간다.

그의 아버지 후작은 루이 15세의 시종직을 수행하기도 했고 왕족의(더 나아가, 루이 15세의) 서자라는 소문도 돌 정도였으며, 궁정에서의 영향력도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들 그루시는 1789년에 폭발하게 될 민주혁명정신을 받아들이고 옹호했으며 이러한 '불순 사상의 오염' 때문에 그의 진급은 차질을 빚게 된다.

[젊은 장교 그루시]



그러나 오히려 이 덕에, 그루시는 고위 귀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의 기병 연대에서 지휘를 할 수 있었으며 1792년에는 혁명군의 대령으로 승진한다. 프랑스 남동부로 파견된 그의 부대는 벙테 전역에서 크게 활약,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루시는 사단장의 직위로까지 올라간다. 허나 로베스피에르 정부 하에 장교들은 다시 엄격한 심사를 받았으며 그루시는 귀족출신이라는 이유가 약점으로 작용, 군에서 퇴출된다. 다행히도 1795년, 지휘관의 부족으로 인해 그루시는 복직되어 혁명군의 아일랜드 공격에 참모로 참전하기도 한다.

아일랜드 전역은 성과 없이 끝났고, 귀국한 후부터 2년 동안 고위 장성으로서 행정성 짙은 임무들을 주로 수행하던 그루시는 1799년의 대전쟁에서 사단장으로 프랑스 동부 전선에서 복무한다. 그러나 그루시가 속한 군세는 같은해 8월에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에게 노비 전투에서 격파된다. 노비 전투 직후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그루시의 사단은 최후위에 남아 추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막았는데, 이 때 그루시는 열 네 군데나 총을 맞고(물론 스친 것도 부상으로 친다) 쓰러져 그대로 포로가 된다.

[1799년 8월 15일 노비 전투]


출신성분 때문이였는지는 몰라도, 오스트리아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루시를 석방했다. 하지만 그루시가 프랑스로 돌아온지 몇주 지나지도 않아 같은 해 11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감행한다. 그루시는 새로 들어선 통령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계속 군에 남아있었으며 다음해인 1800년 12월의 호헨린덴 전투에서 모로 장군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다.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가장 먼저 받아내며 막아낸 것이 그루시와 그의 사단이었으며 그루시의 부대가 완강히 전선을 유지하는 동안 다른 부대들이 오스트리아군을 다른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활약을 보이는 그루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1801년부터 계속 중용했고, 그 후부터 그루시는 사단장으로, 또는 기병군단장으로 프러시아 전역, 폴란드 공격, 아일라우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에 연이어 참전했다. 1812년에는 기병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러시아 원정에 참가, 스몰렌스크 전투, 보로디노 전투, 모스크바 후퇴에 모두 참전, 타격임무나 호위, 엄호 임무등을 주로 수행한다.


[이 무렵의 그루시 장군.]



다만 그의 전적에서도 보여지듯, 나폴레옹은 기병대 지휘나 사단규모 지휘에만 특화된 그루시를 군단장이나 군 사령관 등 중요한 지위에는 앉히지 않았다.

러시아 원정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1814년 대對불 연합군이 프랑스로 진격해 들어갈 때 그루시도 프랑스 방어전에 투입되었는데, 그해 3월 크라온느 전투에서 네이 원수의 기병군에 소속되어 블뤼허의 프러시아군을 상대로 돌격하다 중상을 입고 쓰러져 그 후로 나폴레옹의 폐위 때까지 일어나지 못한다. 나폴레옹이 쫓겨나고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즉위 했을 때 그루시는 군에서 퇴출 당한다.

1815년에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돌아온 100일 천하 시기에 그루시는 즉시 나폴레옹에게 달려가 합류했고, 이 때 그루시는 제국 원수에 임명된다.


여기서.


워털루 전역.


그루시는 3만 3천여명의 군세로 프랑스군의 좌익을 지휘하게 된다. 그는 리그니 전투 직후인 6월 16일, 나폴레옹에 의해 리그니에서 패배하고 바브르 방면으로 후퇴하는 블뤼허의 프러시아군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루시는 그 군대를 이끌고 분명 블뤼허를 추격해야 했는...데?


1815년 6월 18일. 작은 마을 워털루 인근.

나폴레옹은 18일 아침식사를 끝낸 직후 프랑스군세와 대치 중인 웰링턴의 영국군을 바라보며
그 날의 작전을 논의한다. 이 때 술트 원수가 나폴레옹에게 건의한다.
"그루시의 군세를 불러들여야하지 않겠습니까?"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한다.

"자네들이 모두 한번씩 웰링턴에게 패배를 겪었다고 해서 웰링턴이 훌륭한 장군이 되는건 아니네. 웰링턴은 못난 지휘관이며, 영국군은 형편없는 군인들이고, 이 전투는 '아침식사'거리 밖에 안될걸세."

또다른 첩보가 들어온다. 프러시아군이 바브르에서 돌아와 워털루의 영국군과 합류할 수도 있다고. 나폴레옹은 다시 이 첩보를 기각한다. "너무 멀어서 제 시간에 못 맞출 걸. 그리고 프러시아군은 그루시가 알아서 처리해줄거야."

이 날 새벽 4시에 그루시는 편지를 통해 나폴레옹에게 다음 작전행동을 물어왔고 나폴레옹은 그 6시간 후인 오전 10시에 이에 대한 답장을 보낸다. "바브르 방면으로 계속 진격해 프러시아군을 압박하라",고.

...그루시는 알아서 처리하지 못했다.



[워털루 전투. '아침식사거리'라던 영국군은 몇번이고 굳건히 프랑스군의 공세를 견뎌내었다.]



전투가 한창 가열차게 전개되기 시작했을 때 나폴레옹은 프러시아군의 접근에 대한 확실한 소식을 듣는다. 아니 그루시에게 쫒기고 있어야 할 프러시아군이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대체 그루시는 뭐하고 있었던거야!? 황망한 나폴레옹은 오후 1시에 다시 그루시에게 "당장 돌아와 워털루로 근접해오고 있는 블뤼허의 프러시아군을 들이치라"고 명령하는 편지를 급파한다.


...그루시는 이 편지를 받지 못한 채 이전에 받은 명령만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루시의 참모장 제라르는 "포성이 울리는 방향으로 진군하자"고 건의했으나
그루시는 그대로 묵묵히 바브르 방면을 향해 진군할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바브르 방면으로 도주하는 블뤼허를 쫓으라고 했으나
바브르로 진군하라고 한 것이 아니였음에도.

블뤼허가 진로를 바꿔 워털루로 달려갈 동안 그루시와 그 귀중한 3만 3천 병력은 바브르에서 헤매었다.


황당하고 절박한 나폴레옹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외쳤다.

Ou est Grouchy!?
그루시는 대체 어디있는거야!?









검은 제복의 물결이 몰려오고, 검은 바탕에 금빛 X자가 칠해진 프러시아 군기가 전장 곳곳에서 휘날렸다.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원군의 등장에 힘입은 영국군은 환호작약하며 돌격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는대로다.


그루시는 그 다음날인 19일까지 '명령받은' 그대로 바브르 방면으로 진군, 여기서 티엘레만 장군의 프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다시 프랑스로 질서정연하게 철수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었겠는가. 워털루에 그의 3만 3천 프랑스군이 당도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송두리째 뒤바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그루시는 프랑스로 철군하는 길에 곳곳에 산개한 패전병들을 규합해 규율과 질서를 유지시킨채 상당 규모의 부대를 다시 방어전에 배치할 수 있었으나, 이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당하고, 네이 원수와 뮈라 원수는 총살당하는 판국에 그루시도 군사재판과 처형을 기다리게 된다. 그를 군사재판에 회부하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그루시는 작위도 박탈당한채 추방당했고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1821년까지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해야했다.

1822년에는 부르봉 왕가에 용서 받아 프랑스에 귀국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대혁명에 참가했던 혁명투사들이나, 부르봉에게 붙은 귀족들이나, 나폴레옹의 제국군에 복무했던 이들이나 모두 그루시를 비웃거나 비난했으며, 그루시는 남은 여생 내내 '워털루 패배는 내 탓이 아니라능!!!'을 눈물겹게 외치며 자신을 변호하는 데에 투자했다.

1830년의 7월 혁명 이후 왕위에 앉은 루이 필립은 이 늙은 퇴역병에게 다시 후작의 작위를 복권시켜주었으며 명예 원수봉도 다시 쥐어준다. 그러나 그루시의 실추된 이름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는 워털루에서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회고록도 여러편 써내며 지내다 1847년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아 그루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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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alnaf.egloos.com/tag/26MarechauxDeNapoleon


덧글

  • Ladenijoa 2009/01/27 08:39 #

    불쌍한 사람이지요-ㅅ- 한 번의 실수가 바로 역사적인 결정적 순간에 있었던 일이어서 두고두고 욕을 먹는(...)

    사실 나폴레옹이 계획했던 대로라면 워털루는 그루시에 의해 성공적인 승리로 막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당시의 여러 전장환경이 그렇게 만들지 못했죠. 이것이 역사.
  • 피그말리온 2009/01/27 10:53 #

    헉....얘 너무 불쌍....은 아니고 자업자득이지만서도 ㅎㅎㅎㅎㅎㅎ
  • 나아가는자 2009/01/27 11:10 #

    전투는 실수를 적게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군요.
  • 곤충 2009/01/27 11:18 # 삭제

    그후 나폴레옹은 '숨은 그루시 찾기' '그루시를 찾아서'등을 유배동안 눈을 부릅뜬 채 열중했다고 하며...(이하생략)

    범인의 저런 실수덕에 역사가 이렇게 변하는 걸 볼 때마다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합니다;;;
  • Cheese_fry 2009/01/27 11:52 #

    토끼님 시리즈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역사는 언제나 흥미롭죠;;
  • 계원필경&Zalmi 2009/01/27 12:34 #

    그루시 원수 같은 경우에는 웬지 140여년뒤 모국의 파울루스 원수를 보는 듯 하군요... (랄까나 아일랜드라면 영국 옆의 아일랜드인건가요!?)
  • 2009/01/27 12:47 # 삭제

    나폴레옹은 정말 애가 탔을 듯하군요 ㅋㅋ
  • 함부르거 2009/01/27 14:25 #

    그루시의 역할을 다른 사람이 맡았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거라고도 하지요...
    워털루 패전이 그루시의 책임인 것만은 아니지만, 가장 큰 원인제공을 했으니 할 말 없는 겁니다.
    한편으론 그루시한테 그런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인재를 소모했던 게 나폴레옹의 진정한 패인이 아닐까요.
  • 데프콘1 2009/01/27 14:39 #

    X맨이 아니었을까요. 실제 그루시의 무덤이 영국에서 발견된다거나
  • 이글루스비회원 2009/01/27 15:07 # 삭제

    그루시를 파리에 앉히고 다부를 데려갔어야 했는데 망했죠.
  • rumic71 2009/01/27 16:58 #

    로드 스타이거는 훗날 두우체 역도 했지요.
  • BigTrain 2009/01/29 12:13 #

    사람은 자기가 무능해질 때까지 승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던데 그루시가 대표적인 것 같습니다.

    워털루 전에는 나름 유능했군요 ㅎㅎ
  • 멀더요원 2009/01/29 14:57 # 삭제

    마지막 실수덕에 랑펠러 게임에서 그의 능력은 기병 B를 제외한 안습....

    정말 안타까운 인물....

    개인적으로 다부와 베르티어 장군.. 맥도날드 장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마르몽도 게임에서는 많이 썼는데.. 그도 실제 역사에서는 마지막이 안 좋아서..
  • 카구츠치 2009/02/03 17:58 #

    정말 할 말이 없는 사람이네요(...)
  • 자이드 2009/05/08 21:24 #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서에서는 참 극적으로 저 장면이 묘사되었지요...한 순간의 실수가 평생의 짐이되었던 안타까운 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네요
  • 데빌쿠우 2009/10/03 17:31 # 삭제

    처음엔 그냥 찌질이구나 싶었는데 내막을 알고 나선 여러가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사람이더라구요.
    내가 그루쉬였으면 다 집어치우고 워털루로 달려왔을까... 이미 나폴레옹에게 워털루로 올필요 없다는
    명령을 받은상태에서 말입니다.... 군대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비슷한 실수를 워낙 많이 해서 말이죠 ㅋㅋ
  • 크루이트 2009/12/13 20:28 # 삭제

    아쉬운 인물이죠 군단휘하의 사단규모를 이끌던 때에는 뛰어난 활약을 보인적이 많았는데...100일천하때에 첨으로 원수에 임명되고 군단급 규모를 지휘했던탓일까요... 그 한번의 실수때문에 참...아쉬운 인물이긴 하죠 ㅎㅎ

    나폴레옹 시대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블로그에 제가 원하는 내용들이 너무 많네요
    재밌게 항상 보고있습니다. 나폴레옹 제국원수 26인 꼭 다 완성해주세요 ㅎㅎ
  • 카텔 2012/06/02 21:01 # 삭제

    근데 무엇보다
    나폴레옹에 병력이 30만인데 비해
    연합은 100만이라서
    워털루를 숭리해도 곧 패배햇을꺼예여...
    물론 제생각이죠 혹시
    뭐 아우슈터리츠 한번 더 띄울수도 잇고요 ㅋ
    1인당 3명만 잡으면 되잖아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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