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26 원수: 나폴레옹의 수하들 - 07. 모르티에

모르티에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갖춘 장군이었으나 전면에 화려히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개별적인 전투에서 용명을 날리기 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이나 예비대의 지휘가 주된 역할이었으며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 중 가장 자주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당시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가장 신사다운' 장수로 각국에 명성이 자자했다.



07. 에두아르 모르티에 É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 (1768~1835) 원수.




에두아르 모르티에 (중간 이름 생략)는 1768년 2월 13일 프랑스 북서부 르카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영국에 건너가 영어 교육을 받았고, 이 때의 경험 때문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릴 시에서 상인 일을 시작했는데, 마침 대혁명, 곧이어 혁명 전쟁이 터졌으며 그도 1791년 9월에 국민 자원군에 입대한다. 지방 유지였던 아버지의 영향력 덕택에 그는 중대장에 뽑혔고, 얼마 후 북부 벨기에 전선으로 보내진다.

입대 후 1년 간 그는 중대장으로서 열성적으로 복무했고, 그 결과 92년 9월에는 소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북부 방면군 사령부의 참모진의 일원이 된다.

그는 참모 보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기병대로의 전출을 신청했으나 그의 상관이었던 앙투안 발랑 장군은 참모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시민동지 모르티에는 자신이 맡은 임무를 정확하고 뛰어나게 수행하며 애국심에 불타고 있다... 그는 나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주는 참모다." 발랑 장군의 보고서에 나온 말이다. 모르티에 본인은 참모직을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그 능력은 참모에 걸맞는 것이었다.


1794년에 모르티에는 플뢰뤼스 전투에 참가하며 그 해 가을 내내 생 피에르 요새 포위 공략을 총지휘한다. 다음 해인 75년 여름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어쨌든 모르티에는 참모나 부관 보다는 더 능동적이고 실전에 참가하는 역할을 강하게 바랬고, 결국 1796년에는 그 소망이 실현되어 5월부터 3개월 동안 15번이나 교전에 참가해 연대 규모의 병력을 일선에서 지휘했다.



1799년, 모르티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의 부대는 얼마 안가 술트 장군 휘하 사단에 편입되었으며 그 대신 1800년에 3월에 모르티에는 갑작스럽게도 수도방위사단(제 17 파리 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 그가 보여준 행정 능력은 당시 마렝고 전역에 출정하고 돌아온 나폴레옹을 감탄하게 했다. 이 때 그는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었으며, 그 덕에 1803년 5월에 하노버 침공 임무가 맡겨진다. 모르티에는 최초로 개별지휘권이 주어진 이 작전을 매끄럽게 수행했으며 전후 점령된 하노버의 무장해제와 민간행정을 훌륭하게 처리했다. 영국과의 외교협상 또한 영어를 능하게 구사하는 그가 주도했으며 이 공을 인정받아, 그는 나폴레옹이 1804년 임명한 18 원수들 중 하나가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제국군 원수복을 입은 36세의 모르티에.]



1805년의 울름 전역에서 그는 1개 군단을 지휘했는데, 이 때 듀렌슈타인 전투에서 강을 따라 진군해오는 동규모의 러시아군의 공격을 몇 차례나 막아내고 패퇴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그가 그 날 쓴 편지에 의하면 자기 얘기는 없고 자기 휘하의 어느 어느 연대들이 잘 싸워줬다, 고 적혀있다.-

1806년에는 프러시아 북서부 -하노버~함부르크 일대- 에서 개별로 작전을 펼쳤으며, 이 때 그의 작전 행동으로 영국의 프러시아 내 채권과 은행 자본 등에 큰 피해를 주는 전과를 올린다. 1807년에는 프리틀란트 전역에서는 주로 예비대의 지휘를 맡았다.



스페인 점령과 그 뒤를 이은 반도 전쟁에 있어서 모르티에는 별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다른 원수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있었다. 1809년에는 탈라베라 전투 후 퇴각하는 영국군을 쫒지 않는 우를 범하는데, 여기서 그가 낙오하거나 부상 당한 영국군 병사들을 치료해주고 보살펴 준 것 때문에 훗날 웰링턴 공작이 감사의 편지를 전달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반도 전역에서 그가 제대로 전과를 올린 적도 있다. 1810년 바다호즈 전투에서 스페인군 1만 3천을 단 9천 명의 병력으로 전면공격, 단 400명의 사상자만을 내며 스페인군 5천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승을 거둠으로서 그 능력을 입증한다.



그 이듬해 본국에 돌아온 모르티에에게는 Young Guard 부대의 모집, 편성, 훈련 등의 임무가 맡겨지며 러시아 원정 직전까지 이는 계속된다.



그 뒤를 이은 러시아 원정에 있어, 모르티에는 전역 내내 Young Guard 를 지휘했다. 모스크바 점령-철수 때 모르티에는 최 후미에 남아 약 1만여명 정도 남아있던 Young Guard 부대와 함께 본대의 퇴각을 엄호하며 러시아군의 추격을 막아냈다. 이 긴 퇴각 작전에서 거듭해 러시아군의 추격을 막고 또 막은 모르티에의 Young Guard는 프랑스 본토로 들어올 때에는 불과 2천 명 규모로 줄었을 정도였다. 그 동안 모르티에 본인은 수개월간 비스킷과 브랜디로 끼니를 때우며 Young Guard와 함께했고, 이 때 마치 미국의 워싱턴 장군의 독립전쟁 때 일화처럼 자기 막사 안에 초병을 불러들여 불을 쬐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13년과 14년의 프랑스 방위전과 라이프치히 전역에서 모르티에는 승리가 불가능한 방어전과 무너져 가는 나폴레옹 제국을 빤히 보면서도 최선을 다해 싸웠다. 라이프치히 전역에서 그는 정말 '할 만큼' 했다. 나폴레옹의 패배가 눈 앞에 온 상태에서도 모르티에는 다른 원수들과는 달리 황제를 버리거나 충성의 대상을 바꾸지 않았으며, 나폴레옹이 폐위되었을 때 비로서 루이 부르봉에게로 충성의 대상을 바꾼다.


'백일천하'로 나폴레옹이 1815년에 엘바섬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모르티에는 루이 18세가 파리를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도왔으며 다부 원수로부터 루이 18세를 체포하라는 권고가 전해졌을 때도 이를 묵살한다. 루이 18세가 안전해지자 그 때서야 비로서 나폴레옹을 찾아가 합류했는데, 이 '신사적' 행동에 나폴레옹은 모르티에를 탓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다.


모르티에에게는 다시 Young Guard부대의 지휘권이 주어졌는데, 워털루 전역 개시 바로 전날 그는 심한 신경통으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나지조차 못할 지경에 빠졌다. 이 때문에 그는 워털루에 참전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로 영원히 추방당한 후, 돌아온 부르봉 왕실은 백일 천하 때 나폴레옹에게 합류한 모르티에를 내쳤으나, 1819년에 그는 용서받으며 1830년 7월 혁명 후 들어선 루이-필립 정권에서는 루이 필립이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가 되었다. 1830-31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프랑스 대사직을 지냈으며 1834년에는 프랑스의 총리로 임명된다.

하지만 1835년 7월 28일, 그는 코르시카 출신 과격 운동가 귀제프 피쉬의 폭탄테러에 목숨을 잃는다. 루이-필립 왕 곁에서 파리 시내에서 거행되는 긴 사열식을 참관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폭탄 테러에서 왕은 이마에 파편이 스쳤을 뿐이었으나 총리 모르티에는 폭발에 직격 당해 그자리에서 즉사한다.

[1835년 7월 28일 Boulevard du Temple de Paris. Attendat de Fieschi]



몇 주 후 모르티에의 장례식에서 왕은 눈물을 흘리며 슬피 흐느꼈다고 기록된다.




모르티에는 분명 훌륭한 군단 사령관이었으며 명참모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완전하게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지휘권이나 병력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소수의 병력과 제한된 지휘권만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적은 병력만으로도 언제나 좋은 성과를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후처리나 민간행정 능력은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 가장 뛰어났으며, Young Guard를 운용, 지휘한 행적 또한 주목할 만 하다.

한 개인으로서는 언제나 명예를 가장 높이 치며 신사답게 행동했고, 이 때문에 적국 군인들은 모르티에를 존경했다. 특히 그의 영어 구사 능력 때문에 영국 사람들이 그에게 호감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

모르티에가 훈련, 편성, 지휘를 모두 담당했던 Young Guard. 이 Young Guard를 한글로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참 모르겠다.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나폴레옹 1세의 '그랑다르메'(대군)에서 "Old Guard"가 황제 바로 옆에 서는 최정예부대고, 그 다음가는 근위대가 Middle Guard, 그리고 가장 수가 많으며 보통 다양한 임무와 최일선 전투에 자주 투입되는 Young Guard가 있었다. 그게 통틀어서 제국군위대 Imperial Guard Infantry.










전체 글들을 읽으려면 아래 링크 클릭

http://kalnaf.egloos.com/tag/26MarechauxDeNapoleon




아래는 제가 참고하고 있는 서적을 사진으로 찍은겁니다.



덧글

  • 긁적 2009/02/12 17:34 #

    역시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 레이트 2009/02/12 17:48 #

    ...저 시대엔 멋진 분들이 정말 많아요..
  • 피그말리온 2009/02/12 18:41 #

    제가 닮고 싶은 역할이네요....ㅎㅎ
  • JOSH 2009/02/12 19:30 #

    프랑스어에서는 어떤 뉘앙스인지 모르겠지만
    영어에서는 차라리 Old guard, Young guard 보다는 Senior - Junior 의 느낌이네요.
    (원래 명칭이 그래서 어쩔 수 없겠지만)
  • 월광토끼 2009/02/13 04:03 #

    "Jeune Garde" 니... -_-
  • dunkbear 2009/02/12 19:30 #

    적에게, 그것도 영국과 왕실에 모두 존경을 받다니... 대단하네요.
  • 계원필경&Zalmi 2009/02/12 21:11 #

    모든 이에게 사랑 받을 수 없던 원수였군요...
  • 티이거 2009/02/12 22:58 # 삭제

    청년근위대 아닌가요? 워털루에서 저 청년근위대가 오후에 합류한 프로이센 4군단에게 무너지면서...프랑스군 우익이 노출되었죠... 그리고 그들이 확보한 루트를 통해 저녁때 도착한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 주력이 프랑스군에게 결정타를 날립니다... 그이전까지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은 말그대로 박살나기 일보 직전이었고요...
  • 월광토끼 2009/02/13 04:02 #

    한국어로는 '청년근위대' 라고 하는거군요. ㄱ- 그렇게 번역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 나아가는자 2009/02/12 23:19 #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프랑스랑 영국이랑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말도 그닥 크게 차이나는게 아닌거 같아서, 서로의 언어를 아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행동을 잘했기 때문이겠지만) 유창한 영어실력이 많은방면에서 모르티에에게 장점으로 작용할 정도로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는 것은 영어를 잘 하는 프랑스인들이 많이 않았기 때문인가요?
  • 월광토끼 2009/02/13 03:55 #

    미국인 관광객들과 해협 건너 여행오는 영국인들로 돈을 벌어야 하는 오늘 날 프랑스와는 달리
    불과 100년 전 까지만 해도 '영어 잘 하는 프랑스인' 이란 참 드문 존재였습니다.
    '불어 잘 하는 미국인/영국인'은 흔했음에도 말입니다 -_-
  • 玉蔚亞育護 2009/02/13 14:21 # 삭제

    호오 역시 저책을 참고하셨군요. 도서관에 있길래 저도 예전에 읽어봤습니다.
  • 굽시니스트 2009/02/13 14:34 #

    헐, 역갤 개념본좌 오구라 유코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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