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도시, 자본주의, 그리고 빈민의 역사.



로마 공화국 말에서 로마 제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은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번창했다. 수도 로마의 경우가 이 점을 가장 크게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공화국 말 로마의 모습이 자본이 밀집된 도시의 상황을 잘 나타내었다. 이 때 로마의 빈민 문제는 심각했다. 부자들이 시골의 별장들을 마련하고 사는 동안, 도시에 모여든 빈자들은 옹기종기 부실하게 세워진 ‘인술라’ (연립주택 또는 서민 아파트)들로 꽉 들어찬 슬럼 지역들에서 거주했다. 이때의 사회 내 높은 실업률과 빈민문제를 해결하는데에는 군 모병과 그로인한 정복전쟁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재패하고 나서부터는 그 부는 더 이상 전쟁으로 지탱된 것이 아니었다. 로마의 번영은 다름 아닌 지중해 내 해상 무역과, 지중해를 넘어 홍해와 아라비아를 통해 연결된 인도 등 동방과의 무역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이 대도시 중심적으로 유지된 것도, 도시 내 빈민 문제가 커진 것도 이러한 해안 무역도시들에 집중된 것이었다. 그래도 제국은 계속해서 직업군대가 지탱하고 있었기에 빈민 문제는 전쟁이 아닌 경제로 중심이 이동된 후에도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은 비 상업적이며 반反 도시적이며 농업, 수렵, 목축문화를 중심으로 한 동구 게르만계 부족들의 대대적 침입과 이주와 함께 몰락했다. 로마제국의 멸망에 맞물린 것처럼 아라비아에서는 이슬람 체제가 나타났는데, 이 이슬람 세력은 지중해 세계를 절반으로 쪼개었다. 이 때 서유럽 세계에 있어 지중해는 더 이상 상업과 무역의 무대가 아닌, 단절의 장벽이 되었다. 이로 인해 문명 중심이 북부로 이전된 서구 유럽은 무역의 몰락이 초래한 농업 위주의 지역단위 사회경제에, 야만적 지방 군사 지배체제가 들어선 암울한 시대를 맞게 된다. 바다로부터 멀어지자 자동적으로 ‘도시’ 와 상업의 문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러고 나니 중세는 한동안 지방 중소 군벌들 간의 국지적 분쟁과 야만족의 약탈과 침입으로 얼룩졌으며, 상업은 계속해서 저해된다. 이러자 중세 초에는 ‘가난함’ 이라던가 ‘빈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했다. 모두가 ‘공평하게’ 가난하니 가난한 게 흠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지배계급도 비슷한 수준이어서, 지배계급과 하층민간의 재산상의, 나아가 생활상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한편 가난한 이들은 그 가난을 운명, 또는 ‘하늘에서 정해준 분수’를 지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기독교의 영향이 컸던 것이, 경전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기만큼 어렵다’고 한만큼 ‘분수를 넘어서는’ 부와 재물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죄처럼 여겨진 것이다. 예수와 성인들도 모두 부자는커녕 걸인들에 가까웠다.

그런데 중세 중기, 11-12세기 들어 점차 유럽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없어지자 안정된 사회에서 다시 상업의 재발견을 통한 부가 조금씩 축재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와 빈민에 대해 이전 ‘암흑기’ 때와는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 내 부자와 빈자 간의 격차가 점차 다시 커진 것이다. 이 때 부 자체는 더 이상 ‘악’이 되지 못했지만 탐욕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한 사회 내 반동이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종교의 영향력이 더 증가하였다. 프란체스코파 같은 탁발 수도승들은 스스로 걸인이 되어 사회 하층에 직접 들어가 설교하였으며 고리대금업자나 부자 상인들은 ‘부를 축재했지만, 그럼에도 구원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 그들이 쌓은 부를 빈민들에게 자선 활동으로 베풀었다.

*전쟁이 없어졌다, 란 말은 전쟁이 더 이상 국지 민간 규모에서 벌어지지 않았으며 민간에 대한 영향이 축소되고 왕들과 직업용병들, 기사계급이 벌이는 것으로 국한되었단 말이다 -

이러한 시대의 빈민들은 부자들이 자신들이 부를 쌓은 ‘탐욕’을 ‘속죄’하며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찾음과 동시에, 부를 정당화하고 과시할 수 있게끔 하는 ‘기능’을 하였다. 상업이 재 부흥하면서 동시에 종교의 영향력이 커진 시대의 특수한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빈민’들은 물론 실업자 또는 걸인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한 귀족이나 기사들, 태생이 가난한 자들, 일할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구걸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그냥 가난한 자영농이나 농노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 12세기에서 13세기로 넘어가면서 ‘도시’들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유럽 남부 이탈리아의 연안 도시들이 동방의 비잔틴 제국과의 무역을 재개하면서 ‘동방무역’이 가져다주는 거대한 부가 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베제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 이 항구도시들을 거점으로 장사하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군사와 행정 중심지들이 모여들면서 현대적 의미의 ‘도시’들이 재형성된다. 그리스-로마의 지중해 시대의 ‘도시문명’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도시문명들은, 주변 농촌의 영주들과 농민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막대한 영향을 가해, 결국 기존의, 로마제국 멸망 후 성립되었던 후진 사회경제 구조 자체를 바꾸게 된다. 14-15세기 중세유럽 봉건경제체제의 위기는 인구 과잉, 무토지 농민의 증가와 농업 파국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빈민들의 수가 급증한다. 더 이상 ‘부자들의 자선활동’은 이 빈민들의 수요를 맞추는 게 불가능해졌으며 사회 내 빈민 문제는 심각해진다. 걸인들은 심지어 전문 직업 집단화하기 까지 했는데, -여러 도시들에서 나타난 ‘걸인 조합Guild of Beggars' 같은 경우 - 여기에 이러한 걸인들이 도시들로 몰리면서 로마 제국 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슬럼가와 빈민촌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기독교의 부흥기에 부각되었던 예수와 성인들의 ’우아한 가난‘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범죄와 도덕적 타락의 상이 가난에 씌워졌다.


16세기에 이르러 대항해시대를 거친 유럽의 상황은 더욱 바뀐다. ‘해상무역’의 구조는 지중해 부자 도시들이 오스만 투르크와의 경쟁 끝에 몰락하고 나서도 계속되는데, 부의 중심은 이제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들로, 이후 더 나아가 북해의 항구도시들로 넘어갔다. 이러한 상업 중심적 세계에서 물가는 오르고 땅값이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그때까지도 봉건제의 잔재가 남아있던 지주들은 이에 대한 대처로 농민과의 관계를 지주-농노가 아닌 상업적 계약을 통한 자본농경의 것으로 바꾸거나, 아예 업종을 바꾸었다. 업종을 바꾼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농민을 땅과 지주에 예속시켜 강제로 일시키는 것이 아닌 토지 임대를 통한 계약적 관계로 바뀌게 되자, 이 지주들이 오히려 그 농민들을 내쫓아버리고 그 시대에 인기 있던 양모 사업 등으로 토지의 용도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게 16세기 영국의 Enclosure 가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게 근대 초 영국의 ‘농업 자본주의’의 기초다.

* 프랑스에서는 사정이 약간 달랐는데, 농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삼고 있던 프랑스 절대 왕정은 이 농업자본주의 신장기에 ‘자유를 찾은’ 농민들에게 땅까지 붙여주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나아가 산업의 발달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도시들에서 ‘길드’들이 몰락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몰린 실직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일자리를 구해도 더 이상 ‘노동조합’등의 보호를 받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실직자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빈민에 대한 시각은 더욱 악화되었다.


16세기는 종교 개혁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때의 빈민정책의 변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본래 ‘빈민 구제’의 역할을 전통적으로 담당해 오던 교회들은 더 이상 빈민문제를 담당하지 않았으며 이 문제는 각 ‘도시’의 행정 당국에게로 넘겨졌다. - 이 또한 대도시들의 영향력과 행정구역이 커다래지면서 각 도시가 각 지방 전체를 중개하는 중심지로 거듭나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 종교 개혁의 선두에 서 있던 청교도, 신교들의 철학은 ‘성실하게 일을 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쳤으며, 일을 할 수 있는데도 ‘게으르게’ 구걸하는 자들을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종교가 아닌, 상업으로 발달된 도시 문화가 만들어낸 행정과 법률로 이어졌다. 런던과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같은 후기 상업 도시들과 ,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의 “Poor Law"가 이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법은 빈민에 대한 기부를 금지했으며 위반 시에는 벌금형에 처했고, 직업 없이 출생지를 벗어나 유랑하는 자들, 걸인들은 사형에 처했다. 대신 이들은 감옥에 가둬져 ‘재교육’을 받은 후 싼 값에 노동력으로 활용되었다.

산업 혁명과 그 뒤를 이은 자본가-노동자 관계의 성립은 이러한 중세 말 상업의 발달과 빈부격차의 극대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산업 혁명 이후에는 그 빈부격차가가 줄어든 적이 없었다. 18-19세기를 거쳐, 20세기, 나아가 21세기에 이르러 그 ‘산업’으로 만들어진 세계는 ‘국제화’ Globalization 을 거쳐 오늘 날에 이르렀다. 서구 문명은 기술과 전시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자국 내 사회문제와 국제적 자원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 등 과거 빈민 억압을 실시했던 국가들은 그 결과 대규모 사회 복지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 대신, 국가 단위의 빈부격차는 앞에 말한 ‘국제화’를 통해 그야말로 국제적 문제로 번졌다. 가난과 폭력에 찌든 제 3 세계와 그에 대비되는 서구 문명의 ‘녹색 제국주의’ (환경문제와 친환경기술개발과 그 독점으로 나타난) 그리고 그 서구문명을 본 떠 발전했으나 아직 복지와 환경제국주의를 실현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난항을 겪고 있는 동북아시아가 현재의 모습이다.





ps. 이 글을 작성하는데에는 서울대 주경철 교수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과, Dobb과 Sweezy의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의 정치/사회 현황도 물론...

결정적으로,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굽시니스트님의 이 만화
http://homa.egloos.com/4045251 - 우리가 합의한 삶의 방식 에 대한 감상이었습니다.

ps2. 너무 두서없게, 그와 동시에 비전문적으로 쓴 것 같아 조금 후회됩니다.




[Riva Degli Schiavoni, Venice Giclee. by Leandro Da Ponte Bassano (1557~1622)]

덧글

  • 피그말리온 2009/02/19 13:23 #

    잘 읽었습니다.....복잡하지도 않고 재밌네요....ㅋㅋ
  • 나아가는자 2009/02/19 13:38 #

    잘 읽고 갑니다. 다만, 부가적으로 쓰신 프랑스의 사례에서, 전체적으로 인구과잉이고, 농토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자유를 찾은 농민'에게 땅을 붙여주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 월광토끼 2009/02/19 13:48 #

    절대왕정 유지를 위해 귀족 지주들의 세력과 땅을 줄인겁니다. 다시 말해, 빈 땅을 준게 아니라 지주 밑에서 부치던 농토를, 자영농이 되어서도 그대로 가져갈 수 있게 한거죠.
  • 나아가는자 2009/02/19 13:53 #

    그런일이 가능하다니...정말 '절대'왕정 이군요.
  • Allenait 2009/02/19 14:16 #

    교회가 16세기 이후 빈민문제에서 손을 떼었다고 보기는 좀 어려운 것 아닐까 합니다.
  • 월광토끼 2009/02/19 14:35 #

    16세기 이후 떼어버렸다, 가 아니라, 16세기'의' '현상'이 그러하였다는 의미에서 언급한 겁니다만.
  • 들꽃향기 2009/02/19 14:48 #

    오옷 여기서 돕-스위지 논쟁을 참고하시다니..본좌님의 냄새가 풀풀 -_-;;
  • 월광토끼 2009/02/19 17:22 #

    아니, 본좌라뇨. 저도 '우연히' 읽게 된 겁니다.
    읽거나 참고하는건 많아도 '내공'이 쌓인 건 없어서 걱정입니다.
  • 피오리노 2009/02/19 15:09 #

    빈민 문제는 언제나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월광토끼님 지적대로 빈민상은 중세 성기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빈자와 같이 좋은 이미지가 있었으며 또한 12,13세기에 유럽 각지에서 조직된 형제회나 교회 병원에 의해서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흑사병 이후로 빈자에 대해서 부정적 이미지가 퍼지게 되었으며 이후로 도시 당국에 의해서 관리 대상이 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아는 예는) 피렌체 같은 경우에는 타 유럽 도시보다 선진적으로 고아원에 전문화된 이노첸티 고아원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에는
    피렌체의 비단 관련 조합이 후원자로써 설립하엿고 피렌체 당국이 개입하는 형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피렌체에서는 몇개 있던 빈민 구제 기관들이 통폐합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알프스 이북에서 본격적으로 도시 당국이 제대로 나서는 것은 한참 뒤 이야기죠.
    (나중에 서 고아원을 배우러 영국 왕실에서 파견도 나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16세기 - 17세기이었는듯)

    여담입니디만은 월광토끼님이 언급하시는 피렌 테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중세 초기가 그렇게 막장이었다고는 생각이 안되고 말이죠. (물론 서로마가 멸망했을 때에는 들어왔을때에는 생산량이 엄청 낮았다고 하지만은 사회적 혼란상은 단기적이었고 게르만 부족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고 합니다. 단지 프랑크 왕국만이 살아남은 것은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이유(비잔틴의 정복) 가 크다고 합니다.)
  • 월광토끼 2009/02/19 17:26 #

    오, 좋은 덧글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상세 사례로 가면 저도 잘 모르는 내용인데, 피렌체의 자세한 사례를 들어주셔 감사합니다.

    그런데 피렌 테제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하긴, '암흑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나 기준이 흔들리고 있는 세태에서는 물론 비판 받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저는 아직 까지는 '암흑기'란 표현과 그 인식에 좀 더 마음이 가더군요. 그에 대한 반론이 좀 더 확증적으로 제기되면 생각을 바꾸게 될 것 같습니다만.
  • Lucid 2009/02/19 20:53 #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은 정말 좋은 책이죠. 저도 스무 살 때 대학 교양수업에서 강사님이 권하셔서 읽었는데, 아직까지도 틈날 때마다 보고 있습니다. 비록 거기 소개된 좋은 책들을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이행기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실은 이 시기가 이행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으로 보입니다. 어느 시기가 이행기인가 이행기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부터가 선행되어야 하고 여기서부터도 이견이 많을 수 있죠.
  • 터미베어 2009/02/19 22:30 #

    잘 읽었습니다.
  • 황제 2009/02/20 02:59 #

    성경에 아무리 좋은 말이 많이 있어도 사람들은 제귀에 좋은 것만 듣고 나머지를 흘려버리는 군요....
  • Allenait 2009/02/20 13:20 #

    그게 문제인것 같군요..
  • 2009/02/20 13:0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월광토끼 2009/02/20 14:28 #

    그렇게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러셀의 저서의 경우, 한국에 번역이 안된게 꽤 많더군요.
    Problems of Philosphy (한글판 제목이 "철학이란 무엇인가" 였을겁니다.)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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