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26 원수: 나폴레옹의 수하들 - 08. 술트

술트 원수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으로 갈리거나, 아니면 모호한 편이다.

'처세술'에 능한 자라는, 약간은 경멸어린 평가도 있으나, 그와 동시에 능력 있는 전략/전술가라고도 평가된다. 또한 그는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 정부의 총리를 세 번 지낸 정치가이기도 했다.


08. 니꼴라 술트 Nicolas Jean-de-Dieu Soult (1769~1851) 원수.




니꼴라 장 드 듀 술트는 1769년 3월 29일 프랑스 북부의 생타르낭 라 바스티드 (오늘날 그를 기려 마을 이름이 생타망 '술트'로 바뀌었다)에서 시청 서기인 장 술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 술트는 아들 니꼴라를 변호사로 키우기 위해 교육시켰으나, 병이 생겨 일찍 세상을 떴다. 그 덕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없게 된 술트는 돈을 벌기 위해 1785년 16세의 나이로 프랑스 육군에 사병으로 입대한다.

이등병으로 군력을 시작했음에도, 그가 유년기 받은 고등교육 덕택에 그는 복무 5년 만에 하사관이 되었고, 1792년에 혁명정부가 들어서고부터는 자기 부대에서 차출되어 신설된 자원병 대대의 훈련교관직을 맡는다. 그의 훈련교관으로서의 근무성적과 지휘자질이 우수했기에 술트는 1년만에 준-장교가 아닌, 대위로 정식 임관하게 된다.

그는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 사단 참모부에서 활약하고, 1794년 6월 플뢰뤼스 전투에 참전하게 될 무렵에는 1개 대대의 지휘를 맡아 최전선에서 직접 뛰어다니며 활약했다. 그 후 2년. 술트는 여단장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1799년에는 마세나 장군 휘하에서 복무하며 스위스 전역에 참전, 쮜리히 포위전에서 도시 공격의 일부를 담당했으며 그 때의 공으로 인해 사단장에 임명된다. 술트는 계속해서 마세나 밑에 복무하며 1800년의 이탈리아 전역에 참전했는데, 이 때 제노바 전투(스위스 제네바가 아님. 이거 혼동하시는 분들 많던데)에서 그는 나폴레옹의 눈에 든다. 나폴레옹은 이 때까지 술트에 대한 칭찬과 명성만을 들어보았을 뿐이었고 직접 대면한 바 없었는데, 그는 술트를 눈여겨보고 마세나에게 술트가 그 명성만큼의 장수냐 물었다. 이에 대한 마세나의 대답은 "그의 판단력과 용기로 보면 그보다 더 뛰어난 지휘관은 드물겁니다." 였다. 나폴레옹은 이 때 즉각 술트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술트는 1804년에 임명된 제국원수진에 포함될 수 있었다.


[아우슈테를릿츠 전투]


1805년 12월 4일의 아우슈테를릿츠 전투에서 술트 원수는 제 4 군단의 지휘를 맡아 전선의 우익에서 나폴레옹이 원한 정확한 시점에서 프랏첸 고지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면서 전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전투 중반에 나폴레옹은 술트에게 "프랏첸 고지를 확보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가?" 물었고, 술트는 "20분이면 충분합니다, 폐하."라 대답했다. 그는 15분만에 고지를 점령했다.

그후 1808년까지 예나, 아일라우 전역에 종군하여 복무했는데, 이 1808년부터 술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의 남은 군력의 대부분을 쌓게 된다.


[반도 전쟁 당시의 술트]


1808년 말. 엉망진창이 된 스페인 점령작전을 직접 수습하기 위해 나폴레옹 본인이 이베리아로 진군 했을 때 그 선봉에 선 것이 술트 원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순식간에 전장과 민간반란상태를 제압하고 났을 때 스페인 내로 들어와 있던 무어 장군의 영국군을 추격하는 임무를 맡아 영국군을 내몬다.

영국군을 코루나 항에서 쫓아내데 성공한 후, -비록 코루나 전투에서는 패배해 영국군을 섬멸하는데에 실패했으나- 그의 군세는 제 2차 포르투갈 원정(쥬노 장군의 제 1차 원정군은 영국군에 의해 후퇴했다)에 동원되는데, 느리게 진군해가던 술트는 오포르토 전투에서 웰링턴 공이 이끄는 영국군에게 패퇴해 포르투갈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때 술트는 스페인 안으로 진출해 온 웰링턴의 영국군을 빅토르의 군세와 연합해 포위 섬멸할 예정이었으나 술트는 예정된 시간 내에 당도하지 못했고, 영국군은 탈라베라 전투 후 다시 포르투갈로 무사 복귀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술트는 스페인 왕으로 임명된 죠셉 보나파르트의 군사 자문관직을 맡게 되는데, 이 때 저항하는 마지막 남은 스페인 지방인 안달루시아 지방 공세에서 그가 보여준 우유부단함과 판단미스 -훨씬 중요한 카디스 항의 점령을 미뤄둔 채 느릿느릿 세빌리아를 공격해, 카디스에 영국의 증원과 방비가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는 등의- 는 두고 두고 그의 전략적 안목에 대한 평가를 깎아 먹고 있다.

1811년 2월에는 마세나 원수의 군세가 포르투갈을 북동쪽으로부터 공격하였고 술트는 이에 대한 응원작전으로 그보다 더 남쪽의 바다호즈 요새를 공략한다. 술트는 바다호즈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때마침 마세나 원수의 군대가 바롯사 전투에서 패배함으로 인해 더 이상 진공을 계속할 수 없게되자 안달루시아로 돌아간다. 이 때 그는 돌아가기 전에 점령한 바다호즈 요새에 다수의 수비병력을 남겨놓고 방비를 탄탄하게 해놓고 떠나는데, 이 요새를 윌리엄 베레스포드 중장이 이끄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같은해 4월부터 포위하고 공성하기 시작한다.



이 바다호즈 요새를 구원하고자 술트는 다시 돌아와 공성 중인 영국-포르투갈군과 바로 옆의 알부에라라는 곳에서 5월 16일에 격전을 벌인다. 2만 4천의 병력으로 연합군 3만 5천을 상대한 술트와 그의 군대는 훌륭히 싸워 연합군에게 6천명의 피해를 입혔으나, 스스로도 7천여명이 죽거나 다치는 큰 손실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영국군이 입은 피해도 심대했기 때문에 그들 또한 바다호즈 요새에 대한 포위를 풀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영국은 이 알부에라 전투를 승전으로 여기고 있지만 전략적으로는 술트의 승리로 볼 수 있다. 일단 바다호즈 요새는 지켜내었고, 이 요새는 1812년까지 프랑스군의 수중에 남는다.


1813년까지 계속해서 안달루시아 방면군의 지휘를 맡던 술트는 1813년 4월에 나폴레옹에 의해 독일로 소환된다. 이 때는 이미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퇴해 엄청난 대군을 잃은 후였고, 이미 힘을 잃은 프랑스군은 몰려드는 연합군을 상대로 마지막 작전을 벌일 예정에 있었던 것이다. 술트는 1813년 5월의 륏첸 전투에서 Middle-Guard 부대를 지휘하면서 크게 활약했으나 바로 이 때 나폴레옹에게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웰링턴의 영국군이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파죽지세로 "쓸어"버렸다는 소식이 당도한다.

이에 나폴레옹은 술트를 프랑스 남서부로 급파하여 그곳에서 영국군을 막도록 지시한다. 술트는 본국에 남은 마지막 예비부대와 급히 신설된 신병들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으로 향하는데, 이것이 '반도전쟁' 최후의 전투인 피레네 산맥 전투다.


[피레네 산맥 전투]



7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술트의 8만 프랑스군은 6만 명의 영국-포르투갈-스페인 연합군과 험준한 고산지대 곳곳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이 일주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술트는 웰링턴에게 지고 만다. 웰링턴은 술트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술트는 잔여병력을 이끌고 피레네로부터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간다. 여기서 연합군은 7천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1만 2천의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은 1개월 후 진군을 재개, 북진하여 프랑스 영토 내에 발을 들인다. 술트는 이를 방어해내기 위해 1813년 겨울~1814년 봄 내내 니베유, 니브, 오르테즈 등지에서 여러차례 접전을 벌이며 어떻게든 연합군의 진군을 늦추려 했으나 웰링턴은 이에 막히지 않고 그대로 북진했다.


[툴루즈 전투]


그래서, 1814년 4월 10일 툴루즈에서 술트는 마지막 남은 최후의 4만 2천 군세와 함께 5만 연합군을 막아내었다. 툴루즈 시와 그 주변에서 유혈낭자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술트 본인은 전선 곳곳을 누비며 사력을 다했고, 그 결과 최후의 3천 2백명의 피해를 입고 그 대신 연합군에게는 4천 6백명의 출혈을 강요하여, 그는 그 전투를 무승부로 끝낼 수 있었다.

뚤루즈 전투는 술트에게 있어, 그리고 100일천하 전 나폴레옹 전쟁시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그는 연합군이 일시적으로 후퇴하자 그 다음날 아침인 11일에 병력을 도시 밖으로 이끌고 나왔는데, 바로 그 때 그에게 전령이 도착해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옥좌에서 내려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하여 4월 17일, 그는 연합군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나폴레옹의 폐위 후 술트는 자신이 부르봉 지지자임을 선언했고, 새로 즉위한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그러나 1815년에 나폴레옹이 유배지인 엘바섬으로부터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와 복귀하자 술트는 다시 보나파르티스트임을 천명하고 나폴레옹의 밑으로 들어간다. 그는 워털루 전역에서 참모총장으로 참전했으나 별 활약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60대 무렵의 술트]



나폴레옹이 결국 워털루에서 최종적으로 패해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을 때 술트는 100일 천하 때 나폴레옹에게 붙은 점 때문에 프랑스에서 쫓겨나는데, 1819년에 용서받아 돌아왔으며 루이 18세 밑에서 국방장관직을 지낸다.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루이 18세가 물러나고 루이-필립이 왕위에 올랐을 때 술트는 자신이 루이-필립의 충복임을 자처했으며, 그 후 1832년부터 34년까지 국무총리직을 지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


1838년에는 특별 대사로 영국 런던에 파견되어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한다. 이 때 즉위식 행사에서 늙은 웰링턴 공작이 술트를 발견하고는 팔을 확 움켜쥐어 붙잡았다. 놀란 술트가 웰링턴을 보자 웰링턴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드디어 당신을 붙잡았군!" 이베리아 반도와 피레네, 툴루즈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두 노인은 그 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술트는 계속 여러 공직에 머물렀고, 1839년부터 1847년까지 다시 한번 국무총리직을 오랫동안 지낸다. 1848년에 혁명으로 루이 필립 정권이 몰락하고 루이 필립이 쫓겨났을 때 술트는 자신이 열성적인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하며 혁명가들을 지지했다.


[늙은 총리 술트의 캐리커쳐]



술트의 정치 생활은 길었으나 딱히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총리직을 여러번 지냈으나 이는 대부분 무난-하게 흘러갔다. 어떤 이는 그의 정치 감각에 대해 "그는 적군 앞에서만 용맹했다'"고 평했을 정도였으니. 뇌물 수수 혐의도 여러차례 제기된 바 있다.


어쨌든, 늙은 원수는 공직에서 모두 물러나 1851년 11월 26일에 자택에서 여든 넷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떴다.




술트는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명장은 못되더라도 범장 이상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휘하 부대의 규율과 기강, 보급을 늘 만반으로 준비 해놓는 운용 능력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전술적 기량은 그가 상대한 영국군 지휘관들에 비해 약간 부족했고, 인격적으로는 너무 재물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르투갈 원정에 나섰을 때와 안달루시아 지방을 관리할 때 그는 어마어마한 미술품들을 체계적으로 약탈한 것이다. 여기에 정치적으로는 마치 박쥐와 같이 처신한 점에서 그의 인격적 부분은 높게 평가되지 않는다.



한편, 코루나 전투에서 적장인 영국군 무어 중장이 전사했을 때 남겨진 그 유해를 예우를 갖추어 제대로 묻어준 점이나, 영국군 포로들을 원칙에 맞게 잘 대우한 점, 그리고 반도전쟁과 피레네전투, 남프랑스의 전투들에서 '웰링턴의 호적수'로 활약한 점,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에서 프랑스 대사로 참석한 것 때문에 술트는 영국인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http://kalnaf.egloos.com/tag/26MarechauxDeNapoleon



ps. "반도전쟁" 기획 스포일러가 되버렸다! OTL

ps2. 술트 편은 어째 좀 길어졌습니다.....

9번째 장수는 누구로 할지 고민 중.

덧글

  • Allenait 2009/03/02 09:21 #

    파란만장하던 시대를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이군요. 그저 적이 웰링턴이어서 겪은 비극이라면 답이 없군요(...)
  • 월광토끼 2009/03/02 15:38 #

    ~_~ 그런데 사실 술트가 아닌 누구였다 해도 그 때 웰링턴은 못막았을 것 같습니다.[..]
  • 소시민 2009/03/02 09:53 #

    정말 박쥐같은 인물이었군요.
  • 월광토끼 2009/03/02 15:37 #

    박쥐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활약 많이 했다는 점도 기억해주세요 ^^;
  • 함부르거 2009/03/02 11:27 #

    어째 나폴레옹 휘하에서는 능력을 발휘하는데 독립적인 부대를 맡으면 헤매는 모습이군요.
  • 월광토끼 2009/03/02 15:37 #

    음... 딱히 그렇다기 보다는 개별 지휘를 맡기에는 살짝 모자란 정도였던 거죠.
  • 슈타인호프 2009/03/02 12:50 #

    총지휘권을 맡기기에는 "조금" 모자라는군요. 그리고 정치적으로는...뭐랄까, 집권자가 누구든 권력자에게 충성이랄까요^^
  • 월광토끼 2009/03/02 15:36 #

    그렇죠. 사실 그렇게 행동해야 난세를 살아남기 쉬워지는거지만..
  • 긁적 2009/03/02 13:03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 월광토끼 2009/03/02 15:36 #

    감사합니다.^^
  • 들꽃향기 2009/03/02 14:09 #

    술트와 웰링턴의 일화는 왠지 귀엽기까지 하네요..-0-
  • 월광토끼 2009/03/02 15:36 #

    참 훈훈한 광경이었을 듯. (어떤 면에선 약간 핑크빛)
  • dunkbear 2009/03/02 14:12 #

    뭔가 2% 아쉬운 무인이었네요. 흠.
  • 월광토끼 2009/03/02 15:35 #

    그렇죠. 랄까 술트뿐 아니라 나폴레옹의 수하들 모두 뛰어났지만 각자 뭔가 2%씩 부족했죠.
  • 계원필경&Zalmi 2009/03/02 14:41 #

    장군으로서는 10점 만점의 7점이였지만 인간으로서는 10점 만점의 3점 밖에 안되는 인물인 것 같군요(...)
  • 월광토끼 2009/03/02 15:03 #

    바로 표현하셨습니다.
  • 티이거 2009/03/02 14:56 # 삭제

    얼레...? 100일 천하 맨처음에 나폴레옹 체포하러 간 지휘관 중 하나가 술트 아니었나요? 단 부하들이 모조리 나폴레옹에게 달라붙자 혼자서 튀었다가 다시 기어들어온 친구로 알고 있었는데....
  • 월광토끼 2009/03/02 14:59 #

    아뇨. 나폴레옹을 체포하러 갔던 건 '용자 중의 용자' 미쉘 네 원수입니다. 술트는 관계 없습니다.
  • 오제영 2009/03/02 16:51 # 삭제

    처음 댓글 달아보네요.
    요즘은 이거 보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역사과목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는데 (상호이해도 없이 그냥 암기..) 이런식의 역사묘사는 너무 좋아합니다.
    슬프게도 중고등학교 역사교과를 이런식으로 진행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요

    다음 편 기대하겠습니다.

    사족..
    1. 그래도 반도전쟁편 스포일러가 되버린건 조금 아쉽네요.^^
    2. 영국사는 거의 모르는데, 웰링턴 공은 굉장한 명장이었나 보네요. '적이 웰링턴이어서 겪은 비극'이라니..
    3. 대관식의 에피소드는 참 훈훈하군요.
  • 월광토끼 2009/03/02 17:54 #

    어이쿠, 재미있게 봐주신다니, 또 기대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역사과목이 결국 암기위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보니 중고교 수준 역사 수업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 글들에서 재미를 찾으신다니 다행입니다.
  • 침묵제독 2009/03/02 18:42 #

    그래도 좋게 봐서 공통적으로 충성한 대상이 있군요.

    프랑스의 현재 정부(정권)...

    영혼이 없는 공무원적 군인이랄까요..
  • June 2009/03/02 18:54 # 삭제

    워털루 전역에서 참모장인 술트는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기보다는 "삽질을 했다"가 더 옳은 표현이 아닐까요.
    당시의 술트원수를 가르켜 "베르띠에가 참모장을 10년간 하면서 했던 실수보다 더 많은 실수를 술트가 10일동안 해버렸다"라는 평이 있을 정도니까요.
    아무래도 사단장 정도의 그릇이었던 것 같습니다.
  • 오일렌부르크 2009/03/02 20:04 # 삭제

    비중은 좀 떨어질런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포니아토프스키가 끌리는데요^^(요즘 폴란드사를 연구중이라~)
    그러고보니 아직 쥐노, 뮈라 이런 사람들도 남아있군요
  • 노스팔라무스 2009/03/02 22:03 #

    처음에는 이 시리즈때문에 월광토끼님 블로그에 오게 되었는데요..
    최근엔 밸리 보면 음란만화가 시리즈에 집중하시는 것 같아요 ㅎㅎ
    뭐 그것도 나름 좋지만서두^^
  • 황제 2009/03/03 00:14 #

    원래 이런 양반이 제일 출세하고 오래 삽니다.
  • 멀더요원 2009/03/08 21:28 # 삭제

    조제프 푸쉐급이죠.. ㅋㅋㅋㅋ

    그나마 푸쉐는 중간에 죽었지...

    공산주의자로 시작했던 푸쉐의 사상 변천사도 재미있습니다. ㅋㅋㅋ
  • 사수 2009/03/22 23:25 #

    프랑스 원수의 글을 읽을 때
    공화정시절, 단두대시절, 쿠데타-나폴레옹시대- 몰락
    -그 후 100일천하때 어떻게 하느냐 ;
    이런 순인데.. 정말 읽다가 보면
    업적을 쌓은 인물들이
    100일천하 전에 죽거나, 배신하거나, 마지막까지 충성하거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정말 많습니다.
    꼭 26명 마지막까지 완성해 주세요 ^^ 힘내세요
  • 크루이트 2009/12/13 20:38 # 삭제

    사람에게는 역시 자기가 잘하는 분야가 따로 있는거 같습니다 술트의 경우 군단지휘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지만...보좌역으로는 역시 뭔가 모자란 인물이죠
    워털루 전투때 뒤늦게 프로이센군이 다가오는것을 안 나폴레옹이 자신을 보좌하던 참모장 술트에게
    그루쉬의 군세를 부르는 전령을 보냈냐고 묻죠. 술트는 자신있게 한명을 보냈다고 했고...
    ㅡ.ㅡ; 어이없어하는 나폴레옹은 혼자서 이렇게 중얼댔다고 하죠
    '베르티에라면 20명은 보냈을건데...'
    물론 그 한명의 전령이 적에게 잡혔는지는 확실치 않지만...확실히 참모로서의 제대로 된 일처리는
    아니었죠.

    그나저나 정말 박쥐같은 행보로군요 제2공화정 시대까지 정치행보를 이어갔다니
  • 크루이트 2009/12/13 21:04 # 삭제

    그러고 보니 박쥐같은 술트의 행동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또 하나 생각나네요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전에 술트와 뮈라가 나폴레옹에게 퇴각을 권유하자고 입을 맞췄는데
    황제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평소에 황제랑 절친한 란에게 그 말을 해주길 부탁합니다
    란이 술트와 뮈라와 함께 황제의 막사를 찾아가서 퇴각에 대해 고려해보심이 어떨런지
    이런식으로 말을 하니...이탈리아 원정 이래로 한번도 부하장군들에게 퇴각에 대한 고려를 받아본적이
    없던 나폴레옹은 황당해하면서 그게 도대체 누구의 생각인지 묻더랍니다
    란이 '저희 모두의 의견입니다' 이렇게 둘러대니까 술트가 갑자기 나폴레옹에게
    '폐하, 저와 저의 군단은 폐하가 있는 이 곳에서 끝까지 싸울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해버렸다더군요
    란이 열을 제대로 받아서 술트에게 결투를 신청했는데 술트는 '지금은 결투를 할 상황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두리뭉실 농담을 섞어가며 그일을 넘겨버렸답니다

    그후로 란과 술트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버렸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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