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1808~1813) - 8

*이번편은 조금 길게 적었습니다.
반도전역에 있어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지요.*




마세나의 프랑스군이 리스본을 향해 포르투갈 내로 진군해 들어갈 때 택한 길은 부사코라는 작은 마을 옆을 지났다. 그리고 그 좁은 길은 어느 높은 능선 하나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웰링턴은 이곳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한차례 막아내기로 결정한다. 그는 이전의 비미에로 전투와 탈라베라 전투에서 했던 것처럼, 방어하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공세를 막아내는 전술을 준비했다.

[1810년 9월 27일, Battle of Bussaco]





마세나의 프랑스군 6만 5천명은 이곳에 9월 27일 새벽에 도착하여 즉시 공세에 들어간다. 영국군 2만 5천과 포르투갈군 2만 5천, 총 5만 명의 연합군은 능선을 따라 길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프랑스군은 이 전선 중앙에 여러 차례 정면 돌격을 가한다. 전선을 우회하여 측면을 공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장장 일곱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연합군은 단단하게 방어선을 지켜낸다. 결국 마세나는 공격을 포기하고 잠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부사코 능선을 오르려는 프랑스군에게 오히려 역습을 가하는 영국군.]



이 부사코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거의 4천 5백여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으며, 그 반면 연합군은 영국과 포르투갈이 각각 6백명, 도합 1200여명의 손실을 입었을 뿐이었다. 이 때 포르투갈군의 활약은 특기할만한 점이었다. 오합지졸로 웃음거리가 되던 스페인군과는 정 반대로, 포르투갈 내 영국 대표를 맡았던 윌리엄 베레스포드 중장이 수개월간 훈련시켜 놓은 포르투갈군은 용감하게, 그리고 질서정연하게 싸웠다. 이에 대해 웰링턴 공은 “포르투갈 병사들은 영국군과 우열을 다툴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군인들이다”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부각되는 게 영국 군인들의 약탈행위. 전투에서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행군시 약탈에의 유혹은 참기 어려웠나 보다. 포르투갈 군인들은 당연히 자국 내 자국민들의 재산을 침탈할 리가 없었으니 기강이 엄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영국 군인들은 웰링턴의 엄격한 군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약탈을 했다. 이 부사코 전투 직후에 어느 보병이 민가에서 큼지막한 거울을 하나 약탈해가지고 들고 가다가 웰링턴의 눈에 띄어 즉각 거울과 함께 나무에 목이 매달린 사건이 있었다. 그 뒤를 쫒던 프랑스군이 나뭇가지에 웬 거울이 시체와 함께 대롱대롱 매달린 것을 보고 황당해했다고 한다.


부사코 전투가 있은 바로 다음 날인 1810년 9월 28일에 웰링턴은 이제 미리 준비해놓았던 토레스-베드라스 방위선 뒤로 물러나기로 결정, 전군을 뒤로 물린다. 그 뒤를 쫓아가던 프랑스군이 제 1 방위선 앞에 당도한 것은 10월 14일의 일이었다. 토레스-베드라스 방위선은 그저 하나의 긴 성벽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목책과 참호가 있고, 그 뒤에 다시 정밀히 배치된 포대들이 있었으며, 그 너머에는 또다시 2중 목책과 참호, 또 그 사이 사이마다 요새와 방어거점, 초소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는, 그야말로 ‘산 너머 산’식의 요새진이었다. 이를 본 마세나는 화가 나서 외쳤다. “왜 아무도 내게 이런 방어선의 존재를 얘기해 주지 않았나!? 리스본까지 갈 수 있는 모든 길이 다 막혀버리지 않았는가!” 그러자 그의 참모들 중 하나가 바보같이 “웰링턴이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세나는 분통을 터트리며 욕을 했다. “X발 당연히 웰링턴이 만들었겠지!? 그런데 웰링턴이 산도 만들어냈냐!?”*


[토레스 베드라스 방어선의 건설]

[현재까지 남아있는 토레스-베드라스 방위선의 잔해 중 하나.]



웰링턴의 전략은 단순히 방어선 건축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그가 실행한 전술에는 ‘초토작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의 진격 방향에 있는 모든 민간인들을 방어선 안쪽으로 대피시키고, 그와 동시에 고기 한 근, 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방어선 밖을 비워버린 것이다. 프랑스군은 이제 적지에서 굶주릴 운명이었다.


마세나는 10월과 11월 내내 수차례 방위선을 여기저기 찔러보며 공격을 시도했으나, 방어선 내에서 가장 단단히 방어되어 있는 소브랄 요새에 대한 공격에서 1천여 명의 병사들을 잃고 난 후 부터는 더 이상 정면 공격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군량은 거의 없었으며 비축해 온 식량도 얼마되지 않았으며,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식량도 없었다. 산길을 따라 게릴라나 소규모 분견대의 습격을 받기 십상인 보급로는 위태롭게 유지되었다.


[10월 14일 소브랄 요새에 대한 마세나의 실패한 공세를 묘사하는 그림.]



그래도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선 밖으로 나와 공격을 시도해주길 기다리며 버텼다. 일단은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유리했기에 야전으로 끌어들이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웰링턴은 여러 차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경보병대를 이용한 소규모 접전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힐 뿐이었다.

여기에 1810-1811년의 겨울은 포르투갈 사상 유래가 없는 강추위와 눈보라를 동반했다. 토레스-베드라스 방위선 안쪽의 리스본과 그 주변 주민들도 그해 겨울을 힘겹게 났으며 동사자, 아사자가 여럿 났을 정도였는데, 그 밖의 굶주린 프랑스군은 오죽했으랴.

게다가 이제 군 지휘부도 심각한 상태에 처했다. 마세나는 휘하 군단장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쥬노 장군은 요새를 공격하다가 총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고, 네이 원수는 마세나에게 열을 올려 삿대질을 하다가 직위해제 되었다. 그 외에도 사령부에서는 계속 의견충돌이 반복되었다.


결국, 방위선 앞에서 4개월 반을 버틴 프랑스군은 이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811년 3월 초, 이제 본래의 6만 5천 명 중 4만 6천 명만이 남은 마세나는 외곽으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이 때 프랑스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어느 기병대 장교가 신나서 영국군 사령부에 달려와 전했을 때 웰링턴은 마침 아침 면도 중이었다. 장교의 호들갑스러운 설명을 들은 웰링턴은 차분하게 “아, 곧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좋아.”라고 말한 뒤 무표정하게 계속 면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경 인근의 산타렘까지 후퇴한 프랑스군은 여기서 더 물러나지 않고 좀 더 버텼다. 스페인에 있는 술트 원수의 안달루시아 방면군의 응원을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웰링턴은 조심스럽게 프랑스군을 쫓아가면서도 결코 성급히 야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리고 3월 중순부터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면서 행군로는 진창길이 되었으며 질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던 술트의 원조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보급품이 떨어진 마세나의 프랑스군은 4월 3일에 완전히 포르투갈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물러났다. 포르투갈로 진입하기 직전 6만 5천에 달했던 군세는 반년 간의 작전 기간 동안 총 2만 5천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남은 병사들은 모두 다 헤지고 더러워진 군복과 굶주림으로 비쩍 마른 몰골로 비틀거렸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다시는 포르투갈 안에 발을 들이지 못할 터였다. 며칠 후인 4월 10일에 웰링턴은 ‘포르투갈의 국민들은 다시 집으로 귀가해도 좋다’고 선언했다.

허나. 프랑스군이 국경을 넘었다고 해서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웰링턴은 ‘너무 방어적인 자세’라는 본국에서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세나를 상대로 한번쯤은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여기에 국경선 남쪽에서는 여전히 술트 원수의 군세가 위협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웰링턴은 군세를 둘로 나누어, 윌리엄 베레스포드 중장에게 약 2만여명의 병력으로 술트의 군대가 주둔중인 바다호즈 요새를 공격하게 했으며 자신은 직접 3만 7천명의 본대를 이끌고 마세나를 추격했다.

웰링턴은 5월 초에 포르투갈 국경선에 위치한, 마세나가 수비병력을 남겨둔 알메이다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하는데, 마세나는 이 때 다시 행로를 돌려 알메이다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연합군을 공격한다. 양군은 알메이다 요새 인근의 푸엔테스 데 오뇨로라는 곳에서 5월 11일에 결전을 벌인다.



[1811년 5월 11일, Battle of Fuentes de Oñoro]



마세나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결전이었으나 푸엔테스 데 오뇨로의 전투는 양군에 각각 1500여명의 사상자만을 안긴채 무승부로 끝났다. 프랑스군 기병대가 잠시 우세를 점해 연합군에게 패배의 조짐이 일었으나 로버트 크로퍼드 장군 휘하의 경보병 여단이 놀라우리만치 정밀한 조준사격전을 통해 전세를 다시 뒤집은 덕택에 연합군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간신히 지지는 않은’ 수준의 전투였고, 웰링턴은 며칠 후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군은 형편없이 행동했고 그 반면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어. 만약 보니(나폴레옹을 뜻하는 영어 표현. 보나파르트를 줄여서 Boney라 불렀음)가 여기 왔었다면 아마 우리는 전멸을 면치 못했을 거야.”라고 한탄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날 밤 포위되어 있던 알메이다 요새에서는 약 3천여명의 요새 수비대가 어둠을 틈타 전원 무사히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으며, ‘용감하기만 할 뿐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능한 장교들 덕택에 오히려 이들은 영국군 여럿을 포로로 잡기까지 하며 벗어난 것이다. 웰링턴은 이에 분노하며 “세상에 ‘용감한’ 장교들만큼 쓸모없는 존재도 없다!”고 외쳤다. 책임을 떠맡은 장교는 군사재판에 회부되는게 두려워 머리에 총을 쏴 자결했다.



그리고 프랑스측 소유의 바다호즈 요새를 공략하던 베레스포드 중장 휘하의 분견대는 술트 원수가 지휘하는 동규모의 프랑스군을 맞아 5월 16일 알부에라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술트의 포병대가 가하는 정밀 포격과 우세한 기병대에 의해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1만명의 영국군 중 (베레스포드 휘하에는 1만 영국군과 2만 포르투갈군이 있었다) 5천명이 죽거나 다치는 지경이었다. 전투는 그 2주 전의 푸엔테스 오뇨로 전투처럼 무승부로 끝나긴 했으나 영국군의 손해가 워낙 심대해 웰링턴은 다시는 베레스포드에게 개별 지휘권을 맡기지 않았을 정도였다.


[1811년 5월 16일, Battle of Albuera]



하지만 어쨌든, 영국군이 잘 버텨오다가 마지막에 실책들을 범하며 손실을 입었음에도, 이 알부에라 전투를 마지막으로 프랑스군은 완전히 포르투갈 지대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세나 원수는 경질되고 그 대신 마르몽 원수에게 지휘권이 넘어간다.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그해가 끝날 때까지 다른 전투는 없었다.

웰링턴은 다음 달 본국 정부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반도 전쟁의 성격을 바꿔놓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공세를 가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적들은 이제 자신들이 획득한 영토들을 지키기 위해 병력들을 방어적으로 집중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의 자원은 이제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할겁니다.”

그의 말은 서서히 현실화 되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며 축배를 드는 제 28 보병 연대의 장교들.]






* (“X발 당연히 웰링턴이 만들었겠지!”는 The devil he did!를 번역한 말임. “Devil"은 Hell과 함께 욕지거리로 사용되는 표현인데, 그대로 번역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악마라던가 지옥이라던가가 한국말에서 욕설로 사용되진 않으니까요. 마세나 원수의 실제 발언 (불어)은 "Allez au Diable!".)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ps. "나폴레옹의 수하들" 기획에 비해 이 "반도전쟁" 기획은 별로 주목 못 받는게 약간 슬픕니다?
이것도 꽤 힘들여 쓰고 있답니다.

덧글

  • 행인1 2009/03/04 13:38 #

    영국이 우세를 점하가는 것 같은데 여전히 정면으로 붙으면 손실이 상당하군요.
  • 오렌지대좌 2009/03/04 13:53 #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 르-미르 2009/03/04 13:56 #

    전 '수하들'보다 반도전역 이야기가 더 재밌더군요 음음..
  • 악희惡戱 2009/03/04 13:59 #

    고구려의 청야전술이 떠오르는군요^^
  • Allenait 2009/03/04 14:01 #

    결국 이건 소모전으로 귀결되는군요(...)
  • dunkbear 2009/03/04 14:06 #

    그렇게 굶주림과 추위, 행군에 시달리고도 영국군과 호각으로 싸우다니...
    역시 나폴레옹 휘하 장군과 병사들은 굇수였던가...
  • 침묵제독 2009/03/04 15:58 #

    술트도 월링텀만 아니면, 잘싸운 장군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 곤충 2009/03/04 17:15 # 삭제

    윌링턴이 영국군을 까고 또 깔만 하군요.
    ..... 저런게 크림전쟁때의 붉은 선이 되다니;;;
  • 들꽃향기 2009/03/04 17:33 #

    용감하기만 하고 머리가 나쁜 장교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실책을 범해서 포로까지 내주고 웰링턴이 그리도 분노했는지 궁금하네요. ;;;
  • 계원필경&Zalmi 2009/03/04 21:34 #

    어떻게 본다면 반도전쟁판 베르됭 전투라고도 볼 수 있겠군요(...)
  • 티이거 2009/03/04 22:57 # 삭제

    에이에이^^ 포르투갈군이...? 영국 육군(!)보다 질떨어지는 군대가 유럽에 존재하기는 합니까? 그 시대라면 스페인군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랑다르메나 프로이센 등과 비교했다가는 그들이 절 사과나무에 매달아도 '찍'소리도 못할걸요?

    당시 영국 육군의 구성은 하노버 출신의 병사들이 3분의 1, 아일랜드 출신이 3분의 1, 나머지가 잉글랜드 출신이었는데 그 중 하노버 출신들의 실력이 가장 출중했죠.... 나머지는 참담했고....
  • 프레디 2009/03/04 23:47 #

    저 초토작전으로 죽은 포르투갈 민간인이 5만명에 달했습니다. 프랑스군이 와도 대피하지 않고 남아 있었던 탓이지만, 살던 집과 땅을 버리고 갑자기 대피해봤자 먹을 게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예견된 피해였다 할 수 있죠. 이들이 영국군 몰래 숨겨 놓은 식량을 프랑스군이 찾아내서 그나마 저정도로 버텼다 하더군요.
  • 윤민혁 2009/03/05 04:16 #

    주목을 못 받다뇨! 정말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나폴레옹 전쟁은 아는 게 부족하던 차인데 월광토끼님 글이 가뭄의 단비 이상으로 소중합니다.
  • Zutta 2009/03/05 19:34 #

    흐음.... 트라팔가르 해전이후에도 여전히 나폴레옹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나보군요. 나폴레옹이 있었다면 전멸했었을 거라니...
  • 오제영 2009/03/06 15:13 # 삭제

    잦은 혁명으로 국내정세가 불안하고 산업이 사회를 받쳐주지 못했을거 같은데..
    (국내정세가 불안하니 열성적으로 전쟁을 한거겠지만요...)

    유럽대부분을 휩쓸고, 상당기간 이를 장악한 저때의 프랑스군은 정말 굉장했군요.. 열악한 보급과 적지에서의 싸움, 거기다가 패주에 가까운 철수를 했음에도 전면전에서는 대등 이상이라니...
  • 크핫핫핫 2009/03/17 18:08 # 삭제

    오제영/영국도 솔까말, 나폴레옹 전쟁으로 파산크리 직전까지 갔던걸로 기억합니다 -ㅅ-;;; 오죽하면 주식사기까지 벌여졌겠습니까...[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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