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길레이(1757~1815) 화백의 만평들.


사실 정치풍자Political Satire라는 물건은 일찍부터 의회 정치제를 도입한 영국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깊게 발전했는데, 여기서 풍자만화(캐리커쳐) 문화의 발달 또한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특히 국제정세와 정치사상의 격변기였던 18-19세기의 풍자만화들이 상당히 주목할 만하지요.

그 중에서 가장 걸출한 것은 제임스 길레이의 것들입니다. 그의 거침없는 정부 비판이나 신랄한 사회 풍자는 당대 최고의 것으로,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모두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길레이의 풍자만화가 현대 풍자만화의 기원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담이지만, 현재 그의 캐리커쳐들은 미화 7천~2만 달러 수준에서 거래되는 정도입니다)


[James Gillray, 자화상.]



제임스 길레이는 1757년에 상이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면서 조판업에 종사합니다. 그래서 판화를 만드는 법을 익히고, 그 판화로 70년에 영국 왕실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길레이의 주요 작품들은 주로 판화보다는 식각화(에칭Etching, 동판에서 원하는 부분을 산으로 부식시켜서 그림을 그리는 기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길레이의 만화들은 런던에서 인쇄업소를 운영하는 한나 험프리 여사의 인쇄소에서 인쇄, 판매되었습니다. (한나 험프리와 제임스 길레이는 서로 동거하는 연인관계였다 합니다) 험프리 여사의 인쇄소 진열창에는 길레이의 그림들이 늘 걸려 있었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새 그림이 나올 때마다 그 앞에 모여서 감상하거나, 하나 사가곤 했지요.


[험프리 여사의 인쇄소와 거기 장식된 길레이의 그림들과 거기 몰려든 사람들과 빗길에 넘어지는 사람. 길레이의 1806년작입니다. 배경의 길레이의 그림들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멋대로 가족이나 부하들을 국가의 왕들에 봉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길레이의 만화들은 순식간에 유명해졌고 길레이의 명성 또한 높았죠. 하지만 1806년에 길레이는 점차 시력을 상실해 가기 시작했고, 결국 1811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할 만큼 눈이 나빠진 그는 폭음을 하기 시작합니다. 폭음 때문에 통풍까지 앓다가 점점 광기에 빠진 길레이 화백은 몇차례 자살기도를 하기도 하고, 결국 정신병자로 1815년에 삶을 마감합니다. (이성을 잃은 그를 험프리 여사가 죽을 때까지 돌봐줬습니다)


아무튼 그의 삶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고, 그의 만평들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Rodney Introducing De Grasse"
-드 그라스 제독을 (왕에게) 소개하는 로드니 제독- (1782년 6월 7일자 만평)



미국 독립전쟁기간의 일인데, 1782년 4월 9일에 카리브 해에서 로드니 제독이 인솔하는 전열함 35척의 영국 함대가 드 그라스 제독의 전열함 36척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함대를 완전 격파하고 그 기함과 드 그라스 제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마침 본국에서는, 토리당과 토리파 해군성 장관 샌드위치 공의 해군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으로 인해 정권이 휘그당으로 교체됩니다. 이 때 새로 임명된 제독은 휘그파의 케펠 제독이었는데, 그와 휘그당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로드니 제독을 송환하고 다른 제독을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드니 제독을 본국으로 송환하려는 연락선이 포츠머스를 떠나기 직전에 대승전 소식이 도착했지요. 토리들과 그들의 해군을 욕하던 휘그당은 그 토리당에서 임명한 제독이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자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되었습니다. 로드니 제독에게는 귀족 작위와 포상금이 주어지지만 어쨌든 제독 직위에서는 해임됩니다. 이 그림은 그걸 풍자하고 있지요.

로드니 제독이 말라깽이 드 그라스 제독을 포박해 대령하면서 ‘제 국가와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다했나이다 즈은~하’라고 하고 있고, 옥좌에 앉아있는 죠지 3세 양 옆에 선 휘그당 당수 폭스경과 케펠 제독이 뭐라고 주절주절 투덜거리고 있군요요. 폭스의 말풍선에 쓰인 말은 “이 친구 우리를 위해 너무나 잘 싸워주는군. 그러니까 송환&해임 해야겠어”이며, 신임 해군성 장관 케펠 제독은 “이 승리는 내가 7월 27일 즈음에나 거두기로 계획한 승리잖아!” 라는 식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Dutch Division"
-찢어지는 네덜란드- (1787년 6월 23일자)


이 때 즈음해서 네덜란드 공화국 (United Netherlands, 역사책에서는 보통 Dutch Republic)이 영국과의 짧은 전쟁 (제 4차 영-화 전쟁) 직후 거의 나라가 망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공화주의자들과 왕정주의자들끼리 거의 내전에 가까운 상태까지 갔었지요.

이러한 위태로운 상태의 네덜란드를 열강국들이 저마다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며 자기네들 이익을 챙기려하고 있지요. 그림에 묘사된 저 네 명, 영국의 죠지 3세, 프러시아의 빌헬름,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저 불쌍한 네덜란드인들을 내가 돕게해줘!" 라 외치며 네덜란드를 찢어놓기 일보직전입니다.

네덜란드는 이 국론 분열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하고 1795년에 프랑스 공화국에 의해 점령되고 그에 뒤이은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프랑스의 마리오네트가 됩니다. -그 후 1806년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속주 왕국으로 재편-






"Monstrous Craws, at a New Coalition Feast"
-잔치에 모인 괴악한 모이주머니들- (1789년 5월 29일자)


당시 웨일즈의 왕자 (영국의 왕세자는 15세기 이후부터 웨일즈 왕자로 불립니다. 이 사람은 훗날의 죠지 4세) 는 여러 가지 사치와 향락을 마구 즐기면서 국고를 낭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건 국왕 죠지 3세와 여왕도 마찬가지로, 아무튼 왕실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도박이나 쇼핑 행각으로 인한 빚을 국채로 갚는다던가 하는 일을 벌이는데, 이 그림은 그들의 탐욕과 국고 낭비를 풍자하고 있지요.

왼편에 왕비가, 가운데에 왕세자가, 오른편에 국왕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탐욕을 나타내는 모이주머니를 주렁주렁 볼에 매달고는 말이지요. 그들 뒤편으로는 재무부 청사의 대문이 훤히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제임스 길레이는 자국의 국왕 죠지 3세를 가장 자주 신랄히 풍자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실 아카데미를 시찰 중이던 죠지 3세가 길레이의 스케치들을 보고 “이 캐리커쳐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하겠군”이라고 무심히 얘기한 것 때문에 길레이가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더군요.


“A Connoisseur Examining a Cooper”
-쿠퍼를 감별하는 미술 평론가- (1792년 6월 18일자)


이 그림도 그런 것들 중 하나입니다. 국왕 죠지 3세가 큰 초를 들고 작은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초상화는 화가 사뮤엘 쿠퍼가 1657년에 그린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지요. 예술을 사랑한다 얘기하고 폼 잡으면서 실은 예술의 A도 모르는 국왕의 무지를 비웃고 있는 그림입니다. (자기가 들고 있는 그림이 왕실의 적 크롬웰을 그린 거라는 것도 모르는)








"Britannia between Scylla & Charybdis"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의 브리타니아- (1793년 4월 8일자)


스킬라는, 그리고 카리브디스도,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괴수를 뜻하는 표현들입니다. ‘Between Scylla and Charybdis"라는 표현은 음... 우리나라말로 하자면 ’앞에는 범이요, 뒤에는 절벽‘ 정도로 할 수 있겠군요.

당시 영국 수상인 윌리엄 피트 (소少피트)가 작은 배의 키를 잡고 있습니다. 그 작은 보트의 이름은 바로 영국 헌법. 같이 타고 있는 아리따운 여성은 영국을 상징하는 여신 브리타니아. 왼편의 절벽 꼭대기에 빨간 모자가 꽂혀 있는게 보이십니까? 저 빨간 모자는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를 상징합니다. 배를 쫓고 있는 괴상하게 생긴 사람들은 상어로 풍자된 당시 휘그당 정치가들 (셰리단, 폭스, 그리고 프리쓸리)입니다.

혼란스러운 정권교체와 유혈 공화주의 혁명의 사이에서 위태로운 영국의 운명과 그 운명을 손에 쥔 수상 피트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지요. 저 끝에 안전해 보이는 땅에는 “Haven of Public Happiness" (공안의 안식처. 모두가 행복해지는.) 라고 쓰여있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네요.





그리고 이게 아마 길레이의 그림들 중 가장 교과서에도 자주 실리고 널리 인용되는 그림일겁니다.


"Plum Pudding In Danger"
-위험에 처한 자두 푸딩- (1805년 2월 26일자)


영국 수상 윌리엄 피트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두 푸딩-세계’를 멋대로 갈라먹는 것을 묘사하고 있죠. 프랑스는 육지를 몽땅 가져가고, 영국은 바다를 독차지하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세계를 맘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막 적절한 센스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길레이의 만화들은 당시 영국의 정치, 사회, 외교관계 등에 대한 풍부한 상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만화가 아닌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죠.


이 글에 반응이 좋으면 길레이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도 더 쓸지도. 일단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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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Allenait 2009/04/07 10:30 #

    이것이야 말로 만평의 정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데 막상 저는 중고등학교때 저 사람 그림을 본 적이 없군요(..)
  • 슈타인호프 2009/04/07 10:41 #

    세계사 교과서 중에 마지막 만평을 실어 놓고 "빈 회의 이후의 세계 분할"이라고 적은 책이 있었지요. 지면부족으로 탈락-_;;;
  • 萬古獨龍 2009/04/07 10:42 #

    위트가 넘친다고 해야할까나... 지금과는 다르지만 어쨌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만평은 중요하죠.
  • 나아가는자 2009/04/07 10:56 #

    국왕에 대해 저정도 비평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군요.
  • 울트라김군 2009/04/07 13:32 #

    지구를 참 먹음직스럽게도 자르는군요.
  • 愛天 2009/04/07 14:05 #

    생각보다 당시의 비판의식이나 표현 수위가 대단하군요.
  • 조이 2009/04/08 12:11 # 삭제

    정말 재밋네요. 다른 작품들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 작품을 보고 있자니, 당시 영국에 확실히 언론의 자유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감히 국왕을 저렇게 비웃으면서도 멀쩡했다니.... "살인귀, 엘바 섬을 탈출하다 - 황제폐하, 충신들과 함께 퐁텐블로 궁에 도착하시다"는 프랑스 언론쪽과는 확실히 달랐던 듯.
  • 2009/04/11 14:2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Rumphius 2010/11/05 05:39 # 삭제

    좋은글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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