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26 원수: 나폴레옹의 수하들 - 09. 마르몽

거의 두달만의 "나폴레옹의 수하들" 포스팅이군요.
시간이 오래걸린 점, 양해해주세요.






19세기 중-후반에 쓰이던 프랑스어 단어 중에 “Raguser"라는 동사가 있다. 그 뜻은 ”배신하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게 되어 사전에도 없는 단어가 되었지만. Raguser는 지명인 라구사Ragusa에 그 어원이 있다.


그리고, 1808년에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라구사의 공작 작위를 수여받아, 흔히 라구사 공작으로 불린 인물이 있다.



09. 오귀스트 마르몽 Auguste Frédéric Louis Viesse de Marmont (1774~1852) 원수.



오귀스뜨 프레데릭 루이 비스 드 마르몽, 줄여서 오귀스뜨 마르몽은 1774년 7월 20일에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샤띠옹-수르-센느에서 태어났다. 지방의 소귀족이자 퇴역 장교였던 마르몽의 아버지의 영향 덕에 오귀스뜨 마르몽은 어려서부터 군대에 관심이 많았다. 결국 마르몽은 디종의 소년군사학교로 보내져 교육받았으며, 수학을 주로 공부해 포병이론에 재능을 보인다. 그는 이후 1792년에 샬롱 포병학교를 졸업하면서 혁명군 포병대 장교로 임관한다.



마르몽이 임관했을 때 프랑스는 이미 국왕도 처형되고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후였다. 1793년 9월에 마르몽 중위는 툴롱에 배치되어 툴롱 전투에 투입되는데, 이 때 툴롱 공격을 지휘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소령의 눈에 띈다.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란데다 유능한 포병대 장교들이였기에 금세 친해졌다.

그랬기에, 1796년에 이젠 중장으로 진급한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원정에 나설 때 마르몽을 전속부관으로 선택한 것은 거의 당연한 일이었다. 이탈리아 전역 내내 마르몽은 나폴레옹을 보좌했으며, 나아가 1798년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했다. 이 이집트 원정 초기에 마르몽은 세인트 존 기사단이 지키는 말타 섬을 장악할 때 활약했고, 그 공로로 준장으로 진급한다. 이 때 마르몽의 나이는 24세.




1799년 안개달 쿠데타 때는 나폴레옹의 바로 곁에 서서 그를 보호했으며, 1800년 마렝고 전투에서는 포병대의 지휘를 맡아 극히 효과적인 포격전을 수행한다. 포병 지휘관으로써의 마르몽의 능력은 실로 뛰어난 것이었고, 이 전투에서 그의 지휘로 오스트리아군 전열이 산탄포의 집중포화에 무너져 내렸다. 이 때문에 마르몽은 소장으로 진급한다.

하지만 1804년 나폴레옹의 신임 제국 원수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마르몽이 이에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은 높으나 그는 별 탈 없이 계속해서 전장에서 활약했고, 1805년 울름 전투에서는 처음으로 다른 원수들과 동격으로 1개 군단의 지휘를 맡아 분전한다. 울름 전투 직후에는 달마시아 지방을 점령하도록 지시받고, 점령 후에는 총독으로 달마시아를 수년간 통치한다.

1809년의 제 5차 대불 동맹 전쟁에서 마르몽은 (원수가 되고 싶어) 전공을 올리기 위해 악착같이 싸웠는데, 이 때문에 7월 10일의 즈냄 전투에서는 이미 오스트리아-프랑스 양국 간의 휴전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중단하지 않고, 자신의 군대가 수적으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을 계속 공격했다. 그 전투는 황제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달려와서야 중단된다. 그래도 그런 노력을 인정했는지, 나폴레옹은 즈냄 전투 바로 다음 날에 마르몽에게 원수봉을 수여함과 동시에 그를 라구사의 공작에 임명한다. 이 때 마르몽은 35세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군에서 가장 젊은 원수였다.

원수로 진급한 마르몽은 일리리아 지방을 통치하다가 1811년에 급작스럽게 스페인으로 파견된다. 포르투갈 정복에 실패하고, 더 나아가 후엔테스 데 오뇨로 전투에서 웰링턴의 영국군에게 패배한 마세나 원수를 대신해 포르투갈 방면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맡으란 것이었다.

포르투갈 방면군의 지휘를 맡은 마르몽은 최선을 다해 군을 관리하고 통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프랑스군 전선의 취약함과 자기 부대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보완하려 한 여러 행동들과 시우다드 로드리고 요새를 보호하려 한 작전들은 마르몽이 대군의 통솔에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르몽은 결국 ‘웰링턴에게 패한 프랑스군 명장들’ 목록의 길이를 늘이는데 일조할 수밖에 없었다. 1812년 7월 22일의 살라만카 전투에서, 전공을 욕심낸 나머지 판단착오로 성급히 공격을 개시한 마르몽은 개전 직후 영국군의 유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고, 그 곁에 서있던 부사령관도 동시에 중상을 입은 후 프랑스군은 지휘관 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고, 그 날의 전투는 결국 영국군의 대승이자 프랑스군의 대패로 끝난다.






패장이 된 마르몽은 이때의 부상으로 들것에 실린 채 프랑스 본국으로 이송되었으며, 1813년까지 상처의 치료에 전념했다. 그러나 1813년 봄 무렵부터 전해의 러시아 원정이 대실패로 끝난 프랑스의 방어전이 시작되었고, 마르몽도 이에 동원되어 1개 군단의 지휘를 맡아 뤼첸, 바우첸, 드레스덴 전투에서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우며 승전에 일조했다. 하지만 뤼첸과 드레스덴에서의 프랑스군의 승리들은 전체적인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 해 10월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결정적으로 대패한다. 이 전투에서 마르몽의 군단은 전선 북쪽에서 러시아군과 프러시아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열세였고, 마르몽은 최후의 예비 부대까지 전부 투입하며 판을 뒤집으려 했으나 실패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넘어간 1814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토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 하였는데, 수도 파리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마지막 남은 예비 전력의 지휘를 마르몽에게 맡긴다. 이렇게 마르몽은 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2만 병력을 지휘해 파리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 명령을 내리면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C'est là que viendront s'addresser toutes les intrigues, toutes les trahisons; aussi y ai-je placé Marmont, mon enfant élevé sous ma tente.”
“가장 배신이 일어나기 쉬운 지점이기 때문에, 나는 내 최고의 친구(mon enfant élevé sous ma tente - 내가 내 천막에서 직접 기른 아들이나 다름없는)인 마르몽을 그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여기서 마르몽은, 나폴레옹의 굳은 믿음을 배신했다.

파리에서는 총리 탈레랑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나폴레옹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그는 마르몽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탈레랑의 설득에 넘어간 마르몽은 비밀리에 연합군과 연락하여 합의를 본 후, 휘하 전군을 이끌고 그대로, 진군해오는 연합군에게 투항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모든 희망을 잃었다. 그는 화내지도 못하고 슬프게 말했다.


"Marmont me porte le dernier coup."
마르몽이 내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구나.



툴롱 전투 때부터 함께해 온 친구나 다름없는 부하의 배신이 어느 정도의 충격이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배신자 마르몽은 나폴레옹 폐위 후 그대로 부르봉 왕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 때는 루이 18세를 수행했고, 1830년의 7월 혁명 때는 정부군의 사령관으로 혁명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 때 마르몽의 행보에 대해서는 내가 전에 썼던 ‘7월혁명’ 포스트들
(http://kalnaf.egloos.com/tag/7월혁명) 을 참고하자. 다만, 저 글들을 썼을 때 마르몽 원수를 글 내내 ‘중장’으로 표시한 부분은 순전히 내 착각으로 인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 시간나면 전부 원수로 수정해 놓겠다.)

7월 혁명 성공 후 샤를 10세가 폐위되고 오를레앙 공 루이-필립이 왕위에 오를 때 마르몽도 프랑스 국외로 탈출해야 했고, 그는 오스트리아에 망명, 비엔나에 정착해 살았다. 프랑스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요청은 기각되었고, 마르몽은 자신의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회고록들을 써내며 여생을 보냈다.

마르몽의 회고록들은 현재 당시 프랑스군의 계통과 군사작전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긴 하나, 그의 배신행위는 무엇으로도 정당화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마르몽의 회고록 중 하나. 지금도 출판되어 읽히고 있다.
"Avec Bonaparte" - 보나파르트와 함께.


http://kalnaf.egloos.com/tag/26MarechauxDeNapoleon


덧글

  • Allenait 2009/05/03 15:41 #

    ..그래서 한때 Raguser 라는 말이 배신과 같은 말이 되었군요. 숙주나물이 떠오릅니다.
  • 萬古獨龍 2009/05/03 16:01 #

    그야말로 뼈아픈 배신이었군요...
  • 긁적 2009/05/03 18:33 #

    1. 1809년, 35세의 나이로 프랑스 제국군 최연소 원수가 되었다면...;;; 1804년에 원수가 되었다면 30살.; ㄷㄷㄷ 실력이 있어도 뒷말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2. 오늘의 교훈은 '배신은 저렇게 하라' 인가요..;; (멍미?)
    3. 바쁘신데 좋은 포스팅 감사드립니다.
  • 맹꽁이서당 2009/05/03 18:48 #

    기다린 포스팅입니다~ 이번엔 마르몽이네요. 1년만 더 살았다면 나폴레옹 왕조가 부활하는 모습을 보고 죽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쥐노가 원수가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더군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 쿠로 2010/01/20 10:13 # 삭제

    쥐노 도 원수봉을 잡긴했습니다..반도전쟁때 1차포루투갈 원정을 쥐노원수가 맡았죠..참담하게 패배해서
    짤리지만 ㅜㅜ..
  • 오제영 2009/05/03 20:05 # 삭제

    오랜만의 나폴레옹의 26원수 포스팅이군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 젊은 나이에 장성이라니... 그것이 난세인가요... 헌데 두번째 배신자라니.
  • USAF 2009/05/03 20:27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나폴레옹말기 배신자 마르몽이군요
    제일 맘에 안드는 인물 중 하나...1위 탈레랑 2위 마르롱 3위 카롤린
  • 계원필경&VDML 2009/05/03 21:38 #

    마르몽을 보니 역시 보나파르트 지못미...(주위에 다들 능력 굇수들이자 기회주의자들이...ㅠ)
  • kafka 2009/05/03 23:25 # 삭제

    포스트 재밌게 읽었습니다. 뜬금없지만 the back horn 신보 나왔네요. http://thebackhorn.com <- 확인ㄱㄱ!
  • 사수 2009/05/05 23:17 #

    배신자 -_-
    아... 정말 가슴아프네요...
    정말... 정말.... 씁슬합니다...
    배신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면, 그 누구도 배신을 하려하지 않을텐데요...
  • 위장효과 2009/05/06 10:51 #

    앙드레 모르와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 장군들? 그들은 원탁의 기사들보다도 더한 속물들이었다."-나폴레옹의 제휘 중기 이후를 평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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