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3 07:36

단상. 은하영웅전설. 덜 가벼운 잡담

조금은 뜬금없는 개인적 이야기.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책이라면 정말 닥치는 대로 읽던 때라 집안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은 "감시와 처벌"이라던가 "들뢰르 평전", 또는 "태백산맥"같은, 당시 내가 이해할 수 없거나 너무 긴, 어려운 책들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약간은 과장. 집안에 책이 너무 많아 사실 그걸 다 읽는 건 수준을 떠나 정말 불가능하다.)

그 때, 마악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간한 막스 갈로의 "나폴레옹"과 이문열 평역의 "삼국지"를 읽고 나서 장대한 서사적 구도의 소설에 흠뻑 취해있던 그 어린이는 집안에 비슷한 책이 더 없을까 싶어 찾아 먼지쌓인 창고 상자를 뒤적이다가 검은색 표지의, 뭔가 위압적으로 보이는 책 열 권을 발견했다. 누님이 고등학생 때 사다 읽고 구석에 처박아 놓은 소설책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그 책을 조심조심 읽기 시작했고,
그 책은 내게 위편삼절의 애독서가 되었다.
그 책은 일본의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장편 SF소설, 은하영웅전설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중학생이 되어, 슬금슬금 인터넷의 단맛을 알아가던 나는 만화영화를 다운받아봤고, 그렇게 접한 것은 "은하영웅전설"의 애니메이션판이었다. 그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나는 그 작품세계에 다시 흠뻑 빠져들었다. 은하계를 양분하는 두 거대국가의 전쟁. 민주주의와 전제주의. 부패한 민주정치가와 개혁적 독재자. 거대한 우주 함대전 등등.





그래서, "고작 SF소설 나부랭이"가 인생을 바꾸었다! 고 얘기하자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사실 그 소설은 내 삶의 진로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었다.


어릴적 내가 가장 많이 읽던 책이 뭐였는가.
당시,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읽는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역사에 대한 내 관심은 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가득하던 학습만화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관심의 불씨를 '진로'로 증폭시킨 것이 "은하영웅전설"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은하영웅전설은 그렇게 깊이있는 소설은 아니다. 약간 비하해서 말하자면 그저 저자 다나카 요시키가 대학생 수준의 정치 담론을, 아니, '썰'을 풀어놓기 위해 세계 역사에서 그냥 이것저것 가져다 짜집기해 쓴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나카 요시키가 제시한 그 '역사관'은 어린 내게 너무나 흥미롭게 느껴졌었고, 그리고 양 웬리라는 주인공의 행보는 나를 지나칠 정도로 매료시켰었다.


[이 사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물으면 이순신이나 김구를 언급하는게 아니라 양 웬리의 이름을 떠올렸을 정도였다.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군인이, 명장이, 영웅이 된 게으름뱅이. 상아탑에 파묻혀 공부하고 글쓰는 학자를 꿈꾸었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살해당한 역사학도. 양의 입을 빌려 다나카 요시키가 말하던 역사의 해석들.



"인간의 행위 중에서 무엇이 가장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이 안전한 장소에 숨어서 전쟁을 찬미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국심과 희생 정신을 강요하여 전장으로 내보내는 일입니다."

"음모와 테러리즘으로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단다, 율리안."

"전술 차원에서의 우연은 전략 차원에 있어서의 필연이 남긴 잔광의 파편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부패란, 정치가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그 정치가의 부패를 비판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 웬리-


그래서...

나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양 웬리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 되지 못한 그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되어서, 다나카 요시키보다 더 역사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을 하고 싶다, 고. 우스운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을 읽고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멋은 없다. 난 은하영웅전설 때무에 역사학을 공부하자고 결심했다.



내가 은하영웅전설을 처음 읽은 후로 10년이 지났음에도 난 아직 단순한 애송이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사학도'라고 부르는 것조차 부끄럽다. 난 아직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학자는 커녕 '사학도 지망생'을 자처하는 정도다. I-20 입국 서류에 Major: History 라고 기입되는게 전부다. 나는 글을 써야 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읽어야 되는 사람이다. 역사에 대해 고담준론을 풀어놓는 글을 쓸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난 빨리, 더 많이 배우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상아탑'에 들어가고 싶다.


난 언제쯤 그 가상의 소설 속 중국인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난 아직 홍차보다는 커피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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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asianote 2009/07/03 08:20 # 삭제 답글

    양웬리는 죽었지만 님은 살아있으니 님에게 남은 것은 빛나는 것만 남았습니당.
  • 월광토끼 2009/07/07 08:26 #

    아이고, 그렇게까지;;
  • 고렘 2009/07/03 09:05 # 답글

    저도 드래곤라자 보고 소설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근데 난 드래곤라자의 절반만큼도 못 쓰잖아?
    난 안될거야 아마. (담배)
  • 월광토끼 2009/07/07 08:27 #

    근데 난 브로델 절반만큼의 역사인식도 없잖아?
    나도 안될거야, 아마.
  • 소시민 2009/07/03 09:31 # 답글

    "인간의 행위 중에서 무엇이 가장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이 안전한 장소에 숨어서 전쟁을 찬미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국심과 희생 정신을 강요하여 전장으로 내보내는 일입니다."

    - 언제 봐도 가슴을 울리는 명대사입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27 #

    명대사이긴 한데 사실 우리 모두가 늘 하는 말이기도 하죠.
  • 2009/07/03 09:3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28 #

    무슨 말인지 압니다. 저도 10년이 지나 다시 읽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글의 요점이 아닙니다.
  • 제이마루 2009/07/03 09:38 # 답글

    이 책 보고 싶긴 한데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하더라고요;
    도서관에 있긴 하지만 3,4권이 어디론가 행방불명이라 읽기 싫고
    헌책방까지 가기에는 제가 너무 게으름뱅이라 ~_~
  • 월광토끼 2009/07/07 08:29 #

    이제는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게됬죠. 단권으로는 여기저기 보인다고 하던데 전질로는 ㄴㄴ.
    제 경우는 제 책이 이제 하도 낡아서 펼치기도 두렵습니다.

    그냥 애니메이션판 한번 찾아보셔요.
  • 아르히스 2009/07/03 10:37 # 답글

    고등학교 때 이 책이 반 전체를 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같이 돌려보고 키르히아이스와 라인하르트와 양과 율리안을 이야기하던 친구들은 지금도 연락이 됩니다. 생각해보니 2권에서 열받아서 뒷권을 안 본 친구도 있고 8권에서 손 뗀 친구도 있지만 같이 이야기 하는데 큰 무리는 없습니다. 안 읽은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도 친구들과 이 화제 꺼내들면 아마 하루 종일 토론하며 보낼 수 있을겁니다. (라인하르트가 좋아 vs 양이 좋아;)
  • 월광토끼 2009/07/07 08:30 #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애독서였으니까요.
  • 파인애플세이지 2009/07/03 10:56 # 답글

    전권 사놓고 기억이 가물해질때마다 한번씩 읽어보던 책이지만
    양이 죽을 때면 지금도 여전히 가슴이 뭉클해지곤 합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30 #

    삼국지 제갈량 죽는 장면보다도 더 뭉클하죠. 저도 그 부분은 읽을 때마다 울컥하게 됩디다.
  • 레시언 2009/07/03 10:59 # 답글

    저도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된 원인이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 때문이었죠. 현재의 제 시각에도 적잖게 영향을 끼친 바가 있고...학교에서 늘상 실론티 사마시는 원흉이기도 하군요(쓴웃음)
  • 월광토끼 2009/07/07 08:32 #

    저는 이제 그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에 떨쳐낼래야 떨쳐낼 수가 없겠습니다.

    율리안같이 옆에서 차 타주는 사람이 없으면 실론티도 무효[.]
  • 슈타인호프 2009/07/03 11:06 # 답글

    전 얀 패밀리 때문에 독설가가 되었습니다(응?).
  • 월광토끼 2009/07/07 08:33 #

    아. 양 웬리의 부관들, 참모들도 다 참 개성있었지요.그들의 걸쭉한 입담들도 매우 재밌었던 것 같네요.
    코네프와 포플런, 쉔코프와 카젤느, 아텐보로와 무라이 등등..
  • Allenait 2009/07/03 11:09 # 답글

    진짜 양 웬리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군요...
  • 월광토끼 2009/07/07 08:33 #

    Most Favourite Fictional Character
  • 검은월광 2009/07/03 11:13 # 답글

    전 어렸을때 정말 아무 생각없이 양 웬리 좋아!하고 읽었는데 지금 와서 읽어보니 이해가 가더군요..
  • 떠리 2009/07/03 11:21 # 답글

    민주주의에 건배!
  • Ciel 2009/07/03 13:44 # 답글

    다나카 요시키의 글인지 양웬리의 격언으로 봐야할지 아직도 판단하기 거시기하긴 합니다만.;
  • 월광토끼 2009/07/07 08:34 #

    물론 다스베이더의 명대사들을 "죠지 루카스의 씨부림"으로 치지 않는 것 처럼 양 웬리의 말은 양 웬리의 말로 보아야겠지요. 다만 그 생각들이 다나카 요시키의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는 정도입니다.
  • 침묵제독 2009/07/03 15:07 # 답글

    제 첫 이메일이자 지금도 쓰는 이메일의 아이디가
    eisenach입니다.
    키르히아이스나 미터마이어는 어미 다른분들이 선점하셔서...
    (쓰려고 했던 후보들이 전부 은영진 캐릭터들...)
  • 월광토끼 2009/07/07 08:35 #

    침묵제독 아이제나흐... 대사 한 마디 없으면서 어째 알게모르게 존재감이 있는 제독이었죠?
  • 함부르거 2009/07/03 18:57 # 답글

    '인생을 바꿨다.' 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 인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소설이지요.
    세월이 지나서 다시 읽어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37 #

    저나 함부르거님 뿐 아니라 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걸작은 아니지만 대작인 것은 정말 사실인듯.
  • 하늘나늬 2009/07/03 22:05 # 삭제 답글

    작년 이걸 떠올리고는 동맹의 부패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걸 깨달았습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38 #

    동맹의 부패가 상징하는 민주주의의 부패 과정은 한국 뿐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 사회가 공통적으로 지양하고 경계해야 되는 일이지요.
  • 티이거 2009/07/03 22:16 # 삭제 답글

    명작이죠... 근데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는 것과 동맹 말기가 너무 흡사해서 눈물이 납니다... 우국기사단이 설치고 실용과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하에 복지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 월광토끼 2009/07/07 08:38 #

    그래도 전쟁은 안났으니 그나마 다......행....?
  • 2009/07/03 23:58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41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42 #

    홈페이지에 굉장히 흥미로운 글들이 많네요 :D
  • 해색주 2009/07/05 02:45 # 답글

    저는 양 웬리를 존경해서 해사에 들어가려다, 기어링급 구축함 운용한다는 이야기에 박박 찢고 육사 시험 쳤습니다. 뭐, 최종에서 떨어지고 대학도 경영학과를 들어갔지요. 결국 복수전공으로 사학을 택했고 학군단으로 육군 장교로 들어갔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못했고 늘 차선, 차차선을 택했지만 양 웬리는 늘 가슴속에 두고 삽니다.

    트류니히트와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는 쥐 닮은 모씨가 한국 정치를 퇴행시키는듯 해서 가슴이 저립니다. 개신교 일부 종단과 폭력적인 저질 쓰레기 집단을 이용하는 것도 지구교/우국기사단과 겹쳐지면서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 월광토끼 2009/07/07 08:43 #

    그래도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쥐 닮은 모씨는 트류니히트처럼 처신을 능구렁이같이 하지 못해서 어느정도는 안심이 됩니다.
  • XiNAVRO 2009/07/05 02:50 # 삭제 답글

    어떻게 손써볼 수도 없는 커피빠인지라 아무리 좋더라도 차는 마시질 않습니다.
    식도괄약근이 느슨해져서 위액 역류 현상이 생기더라도 속이 쓰리고 냄새가 나도
    승리의 커피 얍!

    PS. Oblivion 이외의 장소에선 처음 뵙는 느낌입니다. 안녕하세요, 시나브로입니다 :D (...)
  • 월광토끼 2009/07/07 08:44 #

    어? 테스 넥서스와 엘더 카페의 시나브로님이십니까?! 아이쿠, 안녕하세요 :D
  • 방랑자 2009/07/05 10:22 # 삭제 답글

    일본에서는 라인하르트쪽이 더 인기있는 듯 합니다. 애니 외전만 해도 라인하르트쪽만 잔뜩 나왔고 얀쪽은 몇개 되지도 않죠.

    반면에 한국에서는 얀쪽이 훨씬 더 인기있었죠.

    ...사회적 분위기의 차이인지...

    *.어쨌건 다나카 요시키 이분 작품들 하나같이 일본 정부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씹어대더라고요. 최신작인 야쿠시지 료코의 괴기사건부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고위관리들 바보만들고 있고...
  • 월광토끼 2009/07/07 08:45 #

    국민성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또한 '만화적 의미의 강렬한 캐릭터성'을 찾는 일본 사람들에게는 라인하르트가 더 와 닿겠지요. 사실 따져보면 양 웬리는 극히 비현실적인 인물이고 라인하르트는 있을법한 사람이지만..
  • 효우도 2009/07/05 13:38 # 삭제 답글

    양 웬리의 연설도 참 인상적이지요.
    http://www.youtube.com/watch?v=0i5A9SB-ACM
  • 월광토끼 2009/07/07 08:45 #

    제가 예전에 포스팅 한 적 있는 내용이군요 :D
  • 김희대 2009/07/05 21:48 # 삭제 답글

    그래도 다나카 요시키씨의 짜집기는 한국 대학생 수준보다는 많이 높습니다. 특히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의 정치, 역사에 관심있는 시대의 대학생들 보다도요. 그러니 너무 자격지심을 갖지 마시길... 목표가 좀 높았다 생각하시고 정진하시면 됩니다.
  • 월광토끼 2009/07/07 08:45 #

    아... 네. 감사합니다.
  • leopord 2009/07/07 03:14 # 답글

    역시 은영전의 힘은 세군요.
  • 나그 2009/07/08 09:57 # 삭제 답글

    이런 명작을 소장판으로 만들어서 나와야 하는데... 국내 판권을 가진 쪽에서는 별 관심 없나봐요.
  • 상처자국 2009/07/08 19:40 # 삭제 답글

    저런거 새로 안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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