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현대전’: 볼리비아와 파라과이의 “챠코” 전쟁 - 下

*2주 전에 썼던  “챠코” 전쟁 - 上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챠코 전쟁은 챠코 지방에 슬금슬금 접근하던 볼리비아군의 지휘관이었던 엔리케 페냐란다 대령이 1932년 6월에 챠코 지방의 주요 군사요충지를 무력으로 점거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게 된다.

전쟁의 첫 교전은 볼리비아군이 피티안투타 호수 인근의 작은 파라과이군 초소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그 다음달인 7월에는 다시 파라과이군 1개 중대가 다시 그 초소를 습격해 되찾았고, 7월 중순에는 소규모의 볼리비아군이 빠르게 남하, 파라과이 소유의 소읍 두 곳을 점거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전쟁의 양상은 사상자도 몇 명 없는 소규모의 사소한 교전들로 전개되었으나, 7월 말에 공군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군 3개 연대가 파라과이군의 주요 군사요새였던 보케론을 대대적으로 공격,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규모로 커지게 된다.

호전적으로 나간 페냐라다 대령의 작전 덕택에, 이때부터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던 볼리비아 정부도 전 병력을 소집하고 챠코 지방에 투입하며 전쟁에 제대로 뛰어들었다. 이 때, 볼리비아 정부는 추방되었었던 장군 한명을 다시 본국에 불러들여 전군의 지휘봉을 쥐어 준다. 그 장군은, 독일인이었다.



챠코 전쟁은 현대적 무기들과 현대적 전술로 치러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전쟁이기도 하지만, “리더쉽의 중요성” 이라는 진부하지만 만고불변하는 교훈을 재확인시킨 전쟁이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볼리비아군을 총 지휘한 것은 한스 쿤트 장군이었다. 쿤트 장군은 제 1차 세계대전에 독일제국 육군의 여단장으로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그는 1888년부터 프러시아군에 입대해 참모로 복무, 1911년에 군사고문 자격으로 볼리비아에 건너와 볼리비아 육군의 교육을 담당했었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쿤트도 본국에 소환되어 전쟁을 치렀으나, 볼리비아에 대한 애정이 깊게 뿌리내린 후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1920년에 다시 볼리비아로 돌아가 볼리비아의 군 확장계획에 일조했으며, 국적도 볼리비아로 바꿨다. 볼리비아 내부의 정치적 마찰 때문에 잠시 국외로 떠나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쿤트는 오래지않아 챠코 전쟁의 지휘를 맡기 위해 볼리비아에 돌아왔다.

[가운데 키 큰 사람이 한스 쿤트]


쿤트는 병사 개개인의 안위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군사조련가였다. 하지만, 쿤트의 단점들은 그의 장점들을 모두 뒤덮고도 남았다.

1차세계대전 당시 쿤트는 아주 형편없는 전술가로 악명 높았다. 그는 상황과 조건을 막론하고 무조건 정면 공세만을 고집하는 장군이었다. 그의 휘하에서 많은 독일 병사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당했었다. 우회라던가, 협공이라던가, 수비라던가 모두 필요 없고 그저 무조건 정면으로 돌격! 전술가로서도 형편없었던 쿤트에게는 전략적 식견도 물론 없었다. 챠코 지방에서 전운이 감도는 동안 쿤트는 전선시찰 한번, 지형 파악 한 번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 편, 쿤트를 대적할 파라과이 측의 지휘관의 이름은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에스티가리비아는 평범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도 농대를 들어가 농업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학사 졸업 직후 무슨 생각에서인지 육군에 입대했고, 보병대에 학사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고, 그 능력을 눈여겨 본 상관들에 의해 빠르게 진급을 거듭해, 당시 남미 최고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일컬어지던 칠레의 육군 사관학교에 보내져 유학했다.

[정 가운데의 젋고 잘생긴 남자가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에스티가리비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1924년부터는 현대전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고등 전쟁 학교(L'Ecole Superieure de Guerre)에 입학해 또 3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파라과이에는 1928년에 돌아왔다. 학력이 곧 실력을 말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파라과이 군 최고의 수재로 일컬어지던 에스티가리비아는 1931년에 파라과이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그가 사령관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챠코 지방으로 달려가 그곳의 지형과 기후, 각 지역들을 조사하고 탐방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볼리비아군의 기본 전략은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간단하고 무책임했다.

“파라과이에게는 챠코 지방을 지킬 의지도 능력도 수단도 없다. 따라서 우린 그냥 쑥 진격해서 땅 점령하고 파라과이 정부에 그리 통보하면 끝!”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 전쟁이 진행될수록 볼리비아측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고 가늘어진 것이다. 너무 빨리 챠코 지방 깊숙이 진격해버린 볼리비아군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기 시작했다. 볼리비아군은 애초에 군 보급수단으로 말과 마차로 이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시원한 볼리비아 산지 기후에 익숙해져있던 말들은 한 뼘의 목초지도 없는 챠코 지방의 열기 속에서 한필 두필 다 픽픽 쓰러져나가기 시작했다. 철도도 없고 짐승도 살기 힘든 챠코 지방에서 유일한 운송 수단은 트럭이었다. 하지만 볼리비아는 탱크와 전투기는 가득 사 놓았으면서도 운송 트럭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기껏 긁어모은 트럭들은 필요최소한의 물자만 운반할 수 있었고, 그 트럭들에 사람을 실을 자리는 없었다. 그랬기에, 전선으로 향하는 볼리비아 군인들은 볼리비아 내륙의 비야 몬테스부터 챠코 지방까지, 뜨거운 열기와 먼지구름 속에서 300여 마일을 행군해야 했다. 앞서 말했던 군마들의 경우처럼, 시원한 기후에 익숙하던 볼리비아 군인들도 그런 더운 기후에서의 장거리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심신이 약해져 낙오하거나 열병으로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그들이 2~3주의 행군 끝에 최전선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병력의 태반이 너무 지쳐 싸움을 치를 형편이 못되었으며, 쇠약해진 군인들은 순식간에 말라리아와 열병의 희생자가 되어 실려 나갔다.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트럭들이었다.]



파라과이 측은?

트럭 군단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기는 파라과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파라과이 측의 사정은 많이 달랐던 게, 이들은 챠코 지방에서 벌목사업을 벌이고 있었고, 그 벌목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된 목재 운반용 철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강을 이용할 수 있었다. 깊고 폭이 넓은 그 강들은 대형 증기선들이 오가기에 충분했고, 파라과이의 군인들은 전선까지 트럭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빠르게 도착, 충분히 쉰 상태에서 전장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이점들을 이용해 에스티가리비아는 파라과이 군대를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운용했다. 미리 철저히 조사해놓은 챠코 지방의 지형과 주요 거점들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에스티가리비아는 볼리비아군의 이동경로 등을 미리 파악하고 차단하는 교묘함을 선보였다.

에스티가리비아는 1932년 8월 전초에 점령되었던 보케론 요새 탈환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는데, 이 때 보케론은 약 1천명의 볼리비아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주 병력을 모두 보케론에 집중시킨 후, 나머지 병력은 숲길을 이용해 은밀하게 이동시켜, 볼리비아에서 보케론으로 올 수 있는 길목들에 매복시켜 놓았다. 그 결과, 보케론을 구원하러 가던 볼리비아 육군 수개 연대가 매복에 걸려 전멸당했으며, 그 후 보케론에 원군은 보내지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파라과이군의 은밀한 병력 이동이다. 볼리비아군이 구입한 다수의 정찰기들에 대항하기 위해 파라과이군은 위장의 달인이 되어, 주요 군사도로들은 모두 큰 수목들이 우거지는 지점들만 골라 건설하여 위에서 보면 나무밖에 안보이게 한다던가, 길들을 똑바로 직선으로 놓지 않고 자연스러운 지형처럼 구불구불하게 놓는다던가 하는 술수를 썼다. 결국, 볼리비아에서 운용한 정찰기들은 대규모의 병력이동들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무용지물이었던 볼리비아 공군 정찰기.]



볼리비아군은 고립된 보케론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항공지원이라는 수단을 택했는데, 이에 에스티가리비아는 모든 가용 중기관총들을 대공화망 형성에 투입했고, 비록 제대로 된 대공포는 아니었음에도 이는 볼리비아군의 군용기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볼리비아 공군기들은 이에 더 높은 고도에서 물자를 투하했고, 당연히 이 물자들은 고공에서의 기류를 타고 보케론 요새 대신 파라과이군 진영에 떨어질 뿐이었다.

결국 포위 한 달 만에 보케론의 볼리비아 군은 전원 항복했다.

보케론 전투의 결과는 볼리비아 국민과 지도층에 큰 충격을 주었다. ‘완전 깔보고 있던 약소 상대에게 대패를 경험하다니!’ 이 때 여론은 지휘관의 교체를 종용했다. 국민들에게 인기도 높았던 인물. 앞서 언급한 쿤트 장군이었다. ‘유럽에서 전쟁을 치른 장군이니까 그런 대단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파라과이를 이길 수 있겠지!’

여론에 못이긴 정부가 쿤트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자, 쿤트는 그의 고질적 사고방식을 작전으로 실행했다. “정면에서 전면으로 공격하면 우리가 이기게 되어있다!” 그는 챠코 지방의 나나와라는 지점에 전군을 투입한 대규모의 공세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에스티가리비아는 고도로 훈련받은 스파이 군단을 볼리비아 전역에 풀어놓고 있었고, ‘정보전’의 개념을 터득하지 못한 볼리비아 군은 자신들의 기밀 정보를 지키는데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그러한 전면 공세에 대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즉각 공격지점에 대한 방어선 구축에 힘 쏟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1차 세계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무능한 쿤트에 대항한 에스티가리비아의 부하 지휘관들에, 역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많은 러시아인 장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산혁명과 그 뒤를 이은 적-백 내전 이후 러시아를 탈출해 남미로 망명왔던 백군 귀족 장교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자발적으로 파라과이군에 입대했고, 에스티가리비아는 이들을 파라과이 군사거점들의 방어에 투입했다. 그 러시아 장교들은 자신들이 1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단단한 참호 방어선을 구축했다. 벙커와 포대와 지뢰와 철조망과 방책과 교차포화지점들이 교묘하게 건설되었다.

1933년 1월부터 봄 내내 볼리비아 군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이는 모두 아무 성과 없이 격퇴되었다. 쿤트는 이에 아무런 반성도 없이, 규모만 더 무지막지하게 크나 방법은 똑같은 대공세를 다시 기획, 같은 해 여름에 실행했다.




1933년 여름의 나나와 공세는 볼리비아군이 가진 모든 기술적 이점을 일거에 투입하는 작전이었다. 장사정 포대들이 대규모 포격을 가한 후, 볼리비아 공군이 출동해 파라과이 측의 포대를 모두 파괴하면, 포격에 의해 약해진 파라과이군 방어선을 탱크가 뚫고 가고, 남은 벙커는 화염방사기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처리한다는 계획이었다. 그야말로 전격전이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포격이 이루어지긴 했어도 이는 단단히 건설된 파라과이군 방어선에 별 타격을 주지 못했으며, 공군은 예정과는 달리 잘 위장되어 숨은 파라과이군 포대를 발견하지 못했고, 탱크는 요소요소에 잘 배치된 파라과이군 75mm 야포에 의해 아무 힘도 못써보고 격파 당했다. 볼리비아 보병들은 파라과이 측의 박격포탄과 기관총의 교차포화 지점에 걸려 적진에 도달해보지도 못하고 학살당했다.

7월 4일에 시작되었던 나나와 공세는 사흘 동안 거듭된 공격과 공격으로 점철되었고, 그 시간 동안 볼리비아군은 무려 2천명이 전사했다. 사상자의 수가 2천명이 아니라, 딱 전사자 수만 2천명이었다는 것이다. 부상자의 수는 그 두배였다. 반면 파라과이군은 150명이 전사하고 3백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에 거쳤다.


[볼리비아가 비싼 돈 들여 투입한 영국제 탱크들. 하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격파당했다.]



나나와 공세가 대실패로 끝났음에도 쿤트는 굴하지 않고 마찬가지의 전면 공세를 다시 톨레도에서 가한다. 톨레도 공세는 그 ‘러시아계 파라과이’ 장교들이 디자인하고 건설해놓은 방어선에 부딪혔으며, 볼리비아군은 더욱 큰 피해만 입고 후퇴해야 했다. 쿤트는 이 모든 실패들에 대해 “과장되었을 뿐이다. 패전의 가능성은 전무하다! 계속 돌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자위했다. 그리고 그는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볼리비아 본국에 병력과 무기의 지원을 전혀 요청하지 않았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전쟁 전에 공부하면서 여러 가지를 연구했지만, 그 연구 주제에는 전쟁이 만약 터질 경우 볼리비아의 지휘관을 맡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의 인성과 전술에 대한 것도 있었다. 에스티가리비아는 한스 쿤트 장군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쿤트 장군의 지휘관직 수락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에스티가리비아는 작전회의를 열어서 쿤트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결론 내리기를 ‘무모한 전면공세의 광신자이며, 부하 장교들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는 자다.’

에스티가리비아는 나나와 공세 후 쿤트의 성격을 교묘히 이용하는 작전을 짰다. 그것은 각개격파였다. 쿤트의 성격상 그는 휘하 부대의 퇴각이나 전략적 재배치를 허용하지 않을 터였고, 그 점을 이용하여 볼리비아군의 이동을 더욱 쉽게 예측하며 포위 섬멸전을 벌이는 것이 가능했다.

1933년 겨울, 에스티가리비아는 볼리비아군 전선 몇몇 지점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병력을 은밀히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12월에 대공세를 펼쳤다. 그의 예측대로, 쿤트는 지나치게 얇아져 있던 볼리비아군 전선 병력의 재배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파라과이군은 손쉽게 볼리비아군 사단들을, 연대들을 고립시키며 진격해나갔다. 볼리비아 공군이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계획이 어찌나 엉성히 짜여 있었던지 공군 폭격은 파라과이군이 아니라 아군의 머리위에 떨어졌다. 반면 파라과이 공군은 여기서 대활약, 제공권을 잡는데 성공함과 동시에 지상의 볼리비아군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이 공세에서 볼리비아군은 총 2천 6백명의 전사자를 내고, 7천 5백명이 파라과이군의 포로로 잡혔다. 전선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단 1500명 뿐. 철저한 파라과이군의 승리이자 철저한 볼리비아의 패배였다.

결국 볼리비아의 대통령은 쿤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처음 전쟁의 불씨를 제공했던 엔리케 페냐란다 대령을 장군으로 승진시켜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공세 후 포로로 잡힌 볼리비아군인들을 이송하는 파라과이군. 포로들의 눈가리개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1934년에도 전황은 볼리비아측에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볼리비아군을 추격하던 파라과이군은 이번에는 그 자신들의 보급선이 얇아져 위험한 상황에 쳐했으나, 에스티가리비아의 지휘로 다시 전장의 통제권을 찾았다. 1934년 11월의 엘 카르멘 전투에서 파라과이군은 이동중이던 볼리비아군을 급습해 격파했고, 4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볼리비아의 대통령 다니엘 살라만카는 이 때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그들(휘하 지휘관들)에게 그들이 원하던 것들을 모두 주었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뇌까지 줄 능력은 없다.”

자신들의 보직이 위험에 쳐했다고 느낀 볼리비아 장군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살라만카 대통령에게 사직을 강요했다. 집무실을 떠나며, 살라만카 대통령은 쿠데타의 수장인 페냐란다 장군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축하하오. 드디어 처음으로 뭔가 작전에서 승리를 해보셨구려!”


그 후 1935년은 교착된 상태로 흘러가, 지친 양국은 같은 해 6월 14일, 종전협약을 맺었다. 페냐란다와 에스티가리비아가 종전합의문서에 사인하는 가운데, 볼리비아는 챠코 지방에 대한 파라과이의 영유권을 모두 인정했으며, 한편 파라과이측은 볼리비아에게 파라과이 강 상류에 있는 작은 항구를 대여해주었다.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3백만 인구의 볼리비아는 21만 명의 남자를 징집했고, 그 중 6만 명이 전사했으며 2만 3천명은 파라과이에게 포로로 잡혔다. 인구 90만의 파라과이는 15만 명을 전선에 투입했으며 그 중 3만 명을 잃었다. 인구비율로 보면, 양국 모두 참혹한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챠코 전쟁은 현대전이었다.

신식 탱크들이 전장에 투입되었으며, 물자와 병력의 이동은 트럭들로 행해졌고, 공군 지원과 폭격이 전투의 주요 요소로 작용했으며, 병력의 신속한 이동과 각개전투가 주요 전투 양상이었다. 또한, 자동화기가 보병들의 주무기로 사용된 최초의 전쟁이기도 했다.

[브라우닝 경기관총들로 무장한 볼리비아 군인들]


그와 동시에, 우수한 기술과 고급 무기가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교훈이 나온 전쟁기도 하다. 그리고 앞서 본 것처럼, 우수한 지휘관이 열세의 병력을 이끌면 무능한 지휘관이 이끄는 우세한 병력을 얼마든지 격파할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진실도 다시한번 입증되었다.



하지만...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양국 모두 이 전쟁 후 끝없는 암흑기에 빠져든다.

볼리비아의 정치판은 부패되고 막장으로 치달았고, 그 우세하던 경제력도 점차 힘을 잃는다.

파라과이는 그 우수한 장군이자 전쟁영웅이었던 에스티가리비아가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자로서 군림하기 시작함으로 후진국의 전형적 전철을 밟는다. 에스티가리비아는 1944년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지만, 챠코 전쟁 당시 에스티가리비아의 오른팔이었던 프랑코 장군이 그 뒤를 이은 독재자로 등극하면서 암울한 시기를 보낸다.

양국은 남은 반세기 동안 수차례의 쿠데타를 겪었고, 지금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은 애로 사항이 존재하는 나라들이다. 특히 파라과이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부패한 나라들 중 하나다. ‘가난한 3세계 남미 국가’의 표본이 되었으니.

무의미한 챠코 전쟁의 여파와 결과가 양측 모두에 이리도 슬픈 것이었으니, 전쟁이란, 영토 욕심이란 얼마나 부질없었는가.








참고문헌: Corum, James S., "Battle In the Barrens: Bolivia's obscure war with Paraguay showcased the modern weapons and tactics." The Quarterly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21, No. 4 (2009): 52-65.


사진자료들도 대부분 위 문헌에서 가져왔다.

덧글

  • 아브공군 2009/07/09 17:06 #

    마지막이 OTL이네요.

    볼리비아는 무의미한 전쟁을 자주 벌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파라과이는 똑똑하던 영웅이 변질되어 독재자가 되어 망했다는 것이......
  • 월광토끼 2009/07/11 04:43 #

    사실 에스티가리비아가 독재자 되기도 전에 파라과이 의회가 막장사태이긴 했습니다. 망할 운명이었다고도.
  • Allenait 2009/07/09 17:08 #

    참... 세상 일 가소롭군요.

    포로에게 눈가리개를 씌운 이유가 있는 건가요?
  • 월광토끼 2009/07/11 04:43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기밀유지?
  • 듀란달 2009/07/09 17:26 #

    쿤트 장군은 사령관 발탁과정에서 하는 짓까지 전부 최근에 많이 본 느낌이 드는데...;;
  • 월광토끼 2009/07/11 04:44 #

    에헴. 크흠. 어험. [쉿!]
  • 긁적 2009/07/09 17:33 #

    한국의 정치판도 부패되고 막장으로 치닫고 있죠.
    -_-)y=o0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 월광토끼 2009/07/11 04:44 #

    그래도 한국의 정치판은 남미/아프리카 막장국보다는 낫다고 자위중입니다. ㅠㅠ
  • NOSBY 2009/07/09 17:36 #

    마지막 씁쓸한데요...
  • 월광토끼 2009/07/11 04:45 #

    쓸쓸하지요.
  • 른밸 2009/07/09 17:47 #

    전쟁영웅 = 경영영웅 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해주네요. 마지막 부분이 어떤 나라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저도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전략을 관철시키기보다는 어떤 멍청이의 전략을 그대로 이행하는 총알받이일 뿐이니까요
  • 월광토끼 2009/07/11 04:46 #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마세요. 그 총알받이들의 의견이 모아져 어떤 멍청이의 전략을 반대할 수 있는게 민주주의입니다.
  • rumic71 2009/07/09 18:04 #

    그래도 무다구찌보단 낫군요.
  • 월광토끼 2009/07/11 04:46 #

    아, 그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 분 [...]
  • 행인1 2009/07/09 18:52 #

    쿤트는 뭐라 할말이 없군요. 1차대전을 몸소치르고도 닥돌이라니....
  • Cicero 2009/07/09 20:30 #

    그땐 "아직 닥돌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능!" 이라고 믿던사람이 좀 많았습니다.
  • 월광토끼 2009/07/11 04:47 #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있습니다 -_-
  • asianote 2009/07/09 18:56 #

    땅이 부의 원천이라는 망상은 만국공통인 모양입니다. 비스마르크가 식민지 대신 화학이라고 외쳤는데도 군함덕후가 즐한 덕분에 독일 사람들은 계속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무려 1914년부터 1945년까지요) 요슈카 피셔가 다이어트를 외친 것은 그로부터 50여년 후.
  • 월광토끼 2009/07/11 04:48 #

    미리견 제국 [..] 도 '해외 식민지'가 있는게 아니지만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봐도 알 수 있죠 [!?]
  • 萬古獨龍 2009/07/09 20:05 #

    기다리고있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휘관이 병맛이면 끝장인건 시대를 불문하고 진리로군요.
  • 월광토끼 2009/07/11 04:48 #

    한 마리 사자와 백마리 양떼 한마리 양과 백마리 사자... 뭐 만고불변의 진리죠.
  • 한뫼 2009/07/09 20:08 #

    아니.. 현실에서 "닦치고 정면공격"이라니...
  • 월광토끼 2009/07/11 04:49 #

    엠비씨께서 그런 사상으로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MBC일까요 MB씨일까요)
  • 코코볼 2009/07/09 20:30 #

    완전 우울했군요...
  • 황제 2009/07/09 21:09 #

    좋은 지휘관이 좋은 지도자가 되는 일은 드물죠.
  • 월광토끼 2009/07/11 04:49 #

    대통령 된 전쟁영웅 중에 정치가로는 실격에 실격인 경우가 많이 보입디다.
  • 나아가는자 2009/07/09 21:11 #

    욕심, 영토, 전쟁...맨 마지막에 쓰신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 알렉세이 2009/07/09 21:35 #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의 유능한 지휘관이 독재자로 변하는 과정은 참 ㅎㄷㄷ하네요
  • 산책자 2009/07/09 22:59 #

    재미있고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소한 지적이 하나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남미의 계절은 북반구와는 반대입니다.
    12,1,2월이 여름, 3-5, 가을, 6-8 겨울, 9-11월 봄.
    조금 혼동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월광토끼 2009/07/11 04:50 #

    아이고. 제가 착각했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dunkbear 2009/07/09 23:03 #

    마지막은 참... 전쟁은 헛된 것이군요. (다만 멋진 무기들은 눈요기 거리로 좋지만... ^^;;)
  • 월광토끼 2009/07/11 04:50 #

    무기야.. 잘 모르겠습니다. 전투기는 꽤 멋있는 것 같지만.
  • 사과향기 2009/07/09 23:04 #

    좋은글입니다. 많은걸 느끼게 해주네요.
  • 계원필경Mk-2™ 2009/07/09 23:33 #

    그러고보면 파라과이의 전술은 30여년후 베트남의 것과 유사점이 많은 거 같습니다...
  • 월광토끼 2009/07/11 04:54 #

    뭐.. 그렇지요. 열세인 전력을 극복하려면. 하지만 베트남의 경우는 좀 많이 다르죠. 그 전쟁은 완전히 War of Attrition이었으니까.
  • 무요 2009/07/10 09:05 # 삭제

    사는데가 파라과이라 그래도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는 이뤄냈는데 나머지는 쩝....
    그리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월광토끼 2009/07/11 04:51 #

    아, 파라과이 사시는 군요. 파라과이 사시는 분께서 잘 읽어주셨을 정도니 틀리게 쓴 것은 아닌 모양이네요. 다행이다. [...]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 비틀린나무 2009/07/10 09:28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유능한 지휘관이 독재자가 되는 과정은 참 무섭군요.
  • 월광토끼 2009/07/11 04:53 #

    일단 군인이 독재자가 되는 것 자체가... 한국에도 박모씨라던가 전모씨라던가 에헴. 크흠.
  • 들꽃향기 2009/07/11 10:10 #

    “축하하오. 드디어 처음으로 뭔가 작전에서 승리를 해보셨구려!”
    이 말이 인상적이네요...

    그런데 차코전쟁에서 파라과이측은 포로로 잡은 볼리비아 병사들의 다수를 '현장처분'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던데, 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 위장효과 2009/07/14 10:50 #

    학력이 문제였을 수도 있겠는걸요. 농대나와서 칠레 육군사관학교-당시 남미 최강의 군사대국이었으니 수준역시-에 나중에는 프랑스 육군대학까지, 바깥구경을 많이 하고 왔고 배우기도 많이 배웠으니 당시 막장의 정치권을 보고 "역시 많이 배우고 전쟁도 이긴 내가!"하는 자만심이 그대로 표출되었겠죠.

    밑의 볼리비아군 사진보니 왼손에 들고가는 건 체코제 ZB26, 뒤에 짋어지고 가는건 미제 브라우닝 M1917...정말 여기저기서 좋다는 것들은 다 긁어 모아서 무장했군요.
  • Carlos 2009/07/18 02:51 # 삭제

    정말 대단한 글입니다!!
    파라과이에서 중고등교육을 받았던 저조차도 몰랐던 이야기네요..
  • 234 2010/07/17 17:44 # 삭제

    파라과이를 보니 역시 유능함과 정직함은 서로 별개의 문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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