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모티에의 일생 - 01.

드 라 파예트. (de La Fayette. 파예트의.) 이 집안은 프랑스의 굉장히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그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12세기까지 닿았는데, 가문의 이름은 그 시조가 살던 곳의 이름이 파야 (Faya)였던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가문의 선조들 중 유명한 것은 쥘베르 모티에 백작 라 파예트 3세 (1390~1464) 로, 100년 전쟁의 주요 장군들 중 하나였다. 그는 1422년의 보제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을 지휘해 클래런스 공 토마스의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1429년에는 쟌다르크의 동료 지휘관으로서 오를레앙 공성전을 이끌었었다. 샤를르 7세 치세에 그는 프랑스 육군 원수 (Marechal de France)를 지내며 군제개혁을 주도했고, 도적반란 토벌 또는 노르망디에서 영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며 여생도 전장에서 보냈다.

[오를레앙 전투.]


15세기의 쥘베르 모티에 드 라 파예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라 파예트 집안은 가히 군인가문이라고 할 만 했다. 오래된 선조 중 하나는 예루살렘으로의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가 성배를 찾는 모험 중 실종되기도 하였다. 수세기 동안 수십명의 뒤 모티에들은 다들 젊은 나이에 전장에 나가 전사했고, 이는 거의 가문의 전통이라고 할 만큼 잦은 일이었다. (결혼은 다들 잘 해서 아들은 낳고 전사했다) 그래서인지 본디 라파예트 가문은 오랫동안 군인 전통의, 가난한 지방 소귀족으로 남았었다.

라파예트 가문을 백작에서 후작의 지위로 상승시키고 왕실과 연줄을 이으며 가문의 부를 늘린 것은 샤를르 모티에 샹프티에레(1630~1700?)로, 그도 전장에서 공을 세워 장군의 지위로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는 천수를 누렸으며 그 아들 쟝 프랑수아도 오래 살았다. 하지만 가문의 '전통'은 금방 다시 되살아났고, 쟝 프랑수아 모티에의 아들로 라파예트가문의 상속자인 쟈크 로크 모티에는 1733년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다가 오스트리아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 그가 전사함에 따라 후작의 작위는 당시 두 살이었던, 동생 미쉘 루이 크리스토프에게 넘어간다.

그 미쉘 루이 크리스토프 뒤 모티에도 역시 군인으로, 척탄병대의 대령이었다. 그는 스물 다섯의 나이에 아들을 한 명 얻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이 연재기획의 주인공인 라파예트 후작이다.


[라파예트의 생가, 샤또 드 샤바니악]



풀 네임. 마리-죠세프 폴 이브 로크 쥘베르 뒤 모티에. 간단히 줄여서 쥘베르 뒤 모티에. 역사책에서는 그냥 '라파예트'로 통칭되는* 인물은 1757년 9월 6일, 라파예트 가문의 영지인 샤바니악의 저택에서, 라파예트 후작 미쉘 루이 크리스토프 모티에와 마리 루이즈 졸리 드 라 리비에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제부터 저도 편의상 ‘라파예트’로 통칭합니다)

어린 라파예트가 태어나서 두 번째의 생일을 맞이하고 한 달 후인 1759년 8월 1일. 라파예트의 아버지 미쉘 루이 크리스토프 모티에 대령은 베스트팔리아 지방의 민덴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대전투에 참전해 영국군 포병대의 포화에 휘말려 전사했다. 모티에 대령을 비롯해 8천명의 프랑스 군이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영국군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유럽은 7년 전쟁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라파예트의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던 민덴 전투]



당시 겨우 두 살이던 쥘베르에게는 라파예트 후작의 지위와 샤바니악 영지가 유산으로 남겨졌다. 결혼 지참금은 가문의 운영과 재산은 어린 라파예트의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가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을 버려둔 채 샤바니악 영지를 떠나 수도 파리의 룩성부르 궁에서 머무르며 사교생활에 참여했다. 그녀는 룩성부르 궁의 자기 아파트*에 있거나 아니면 친정인 리비에르 후작 가문에 돌아가 지내었으며, 샤바니악으로 돌아가는 일은 극히 드물어 사교시즌이 끝난 여름의 한 달 정도 아들을 보러 가는 게 전부였다.


*파리의 룩성부르 궁전은 당시 귀족들에게 있어 ‘타워 팰리스’ 같은 아파트 빌딩의 역할을 했습니다. 국왕 가족과 왕실의 어르신들은 베르사유나 루브르에서 거처했지요.


그래서 라파예트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도 떨어져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샤바니악 대저택에 남겨진 라파예트는 그 친할머니와 두 고모들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그가 어머니를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소년이 열 한 살이 되었을 때였다. 파리의 귀족 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인 콜레쥬 뒤 플레시스에서 학업을 시작하기 위해 파리로 간 후부터였다.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으며, 일요일이 되면 룩성부르에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는 불과 1년 후, 라파예트가 열 두 살이 되던 해인 1770년 4월 3일에 병에 걸려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지나치게 호화로운 삶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의한 충격으로 그 아버지인 리비에르 후작(라파예트의 외조부)도 보름 후 사망했다. 어린 라파예트가 이를 어찌 받아들였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로 인해 그가 큰 부자가 된 것은 확실하다. 유언에 의해 그 외가의 유산이 라파예트의 소유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열두 살 무렵의 라파예트.]



어린 라파예트는 어머니의 죽음 후에도 계속해서 학교를 다녔는데, 라틴어 과목에서 교내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그는 라틴어를 읽고 쓸 뿐 아니라 일상 언어로 라틴어를 편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친구는 사귀지 못했던 것 같다. 여름이 되면 샤바니악의 본가로 돌아가 방학을 홀로 보냈으며, 학교 친구 한 명 저택으로 초대하는 일이 없었고 훗날 그가 남긴 글들에서도 유년기의 친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는 그렇게 영리하지만 말없는 소년으로 성장했는데, 라파예트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친가 쪽 어른들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를 근위 총사대(Les Noir Mousquetaires. 검은 제복 때문에 그렇게 알려졌다)에 입대시켰으며, 그는 학교수업과 군사훈련을 병행해 받았다.

1772년에 열다섯이 된 라파예트는 그의 외증조부(아들과 손녀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은) 리비에르 백작이 자신의 결혼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결혼 대상은 노아이유 공작 집안의 어린 공녀 마리 아드리엔느 드 노아이유였다. 그녀는 라파예트보다 세 살이 어린 소녀였는데, 노아이유 공작 집안은 어린 라파예트의 막대한 재산에 관심이 컸던 것 같다. 지참금이나 새신랑의 처가 더부살이 등의 논의가 양가 사이에서 거의 1년간 오갔는데, 이 때 노아이유 공작부인만이 계속 결혼을 반대했다. 그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보편타당한, 그러나 당시의 정략/중매 결혼 세태에서는 극히 드문 태도로 두 소년 소녀가 지나치게 어려 결혼을 당장 시키지 말고, 그들이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자고 주장했다.

노아이유 공작부인은 거의 2년의 시간을 끌다가 조건부로 설득당했다. 그 조건이란 결혼식을 2년 더 미뤄 라파예트가 17세, 그리고 아드리엔느가 14세가 되었을 때 치르고, 또 그 때까지 어린 라파예트가 노아이유 공작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공작부인의 고집과 결정은 두 소년 소녀의 장래에 큰 도움이 되었다.

쥘베르와 아드리엔느는 함께 지내는 그 2년 사이에 서로 사랑에 빠져, 정략결혼이 아니라 진정으로 애정을 속삭이는 사이가 된 것이다.

둘은 1774년 4월 11일에 결혼했다.


[아드리엔느.]






ps. 마담 라파예트에 대해서는 종종 얘기를 하게 될 텐데, 그것은
그녀가 라파예트의 인생에서 작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덧글

  • Silverfang 2009/07/31 16:58 #

    집안이 프랑스 전통의 무가였군요. 이런것이 진짜 전통있는 명문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월광토끼 2009/08/02 07:11 #

    네, 진짜 명문이지요.
  • 萬古獨龍 2009/07/31 17:43 #

    뭐, 영예로운 전사가 가족내력이라니.... 좀 후덜덜하지만요...
  • 월광토끼 2009/08/02 07:13 #

    흔하지 않은 가족 전통이지요 -ㅁ-
  • dunkbear 2009/07/31 19:48 #

    대대로 내려오는 무인 집안이군요. 헐헐...
    근데 '샤또 드 샤바니악'하니까 와인 이름 같다는... (그 Nom의 신의 물방울!!!)
  • 나도사랑을했으면 2009/07/31 20:29 #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음...
  • Allenait 2009/07/31 23:23 #

    정통 무인집안의 후예였군요
  • 조이 2009/08/01 11:36 # 삭제

    진짜 정통 귀족가문 출신이었군요. 그런데도 국민회의에 참여하고 혁명을 지지했다니 대단합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던 점이 있어서. 총사대는 왜 총사라고 부르나요? 총사(머스킷티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총은 안쏘고 맨날 칼싸움만 하니....(가만, 그러고 보니 머스킷 소총은 들고 다니긴 했었나?)
  • 네비아찌 2009/08/01 12:15 #

    시오노 할매가 종종 말하는 "푸른 피" 그 자체라고 할 만 하군요.
    어머니 운은 없어도 장모님 운은 좋은 분이었군요^^;
  • 드로이드 2009/08/01 20:24 #

    그래도 저 집안에 시집 오는 처녀들이 있다는 것이 미스테리.
    과부되는 게 전통 아냐, 저거.
  • 섬백 2009/08/03 15:12 #

    이런 귀족적 배경을 지닌 인물이 혁명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다니...

    낭만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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