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 - 공화국을 멸망시킨 분열



오프티마테스Optimates포풀라레스Populares. 흔히 로마 공화국 후기 정계를 나눈 두 파벌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오프티마테스나 포풀라레스 둘 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당파’는 절대 아니었고, 가끔은 그 소속원들의 정체성도 다양하거나 모호했기에 공화국 후반의 정치를 오늘날 미국의 민주당-공화당 대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프티마테스는 ‘노빌레스Nobiles’나 ‘파트리키Patricii’와 비슷한 의미를 내포한 사회 계층 명칭에 가까웠고, 포풀라레스는 주로 ‘선동꾼’ 내지는 ‘좌빨’과 유사한 느낌의 모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로마 공화국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도래하게 한 사회/정치적 분열을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충돌’이란 이름으로 해석하고 명명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후기 공화국을 뒤흔든 모든 주요 정치적 사건들 - 그라쿠스 형제의 살해(기원전 133년과 121년), 마리우스와 술라 간의 내전(기원전 88~82년), 카틸리나 반역 사건(기원전 63년), 클로디우스와 밀로의 ‘조폭 민주주의’(기원전 58~53년),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전(기원전 49~45년), 그리고 카이사르의 암살(기원전 44년) 모두 이름있는 개인들이 각자 일으킨 사건 또는 단순 사회현상 이상의,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라는 두 집단 사이의 충돌이라는 전반적인 분열이 직/간접적으로 낳은 결과라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오프티마테스Optimates는 공화국의 상류층Nobiles 중에서도 일반 민중Plebs의 정치 참여와 그 플레브스를 대표하는 호민관들Tribunates의 정치권력의 확대를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견제하려 했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뜻 있고 족보 있는 소수’가 전통적으로 그래왔듯 계속 로마를 통치해야 하며 공화국 체제에 대한 어떠한 변혁이나 조정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할아버지(기원전 236~149년)와 손자(기원전 95년~46년) 둘 다]로, 초기 공화국 탄생기의 위엄있고 청렴하며 고귀한 국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후기 공화국 원로원에도 다시 부활시키는 듯 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많은 오프티마테스들은 카토처럼 정의롭거나(또는 정의로운 행세) 청렴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그냥 자기 이권의 수호에만 관심있어 하며 가끔은 무척 부패한 자들이었으나, 어쨌든 대부분의 오프티마테스들은 거창하게도 자신들이 공화국 정치와 가치의 수호자라고 보았다.

한편, 포풀라레스Populares는 또 다른 정치관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어느 정도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오프티마테스와는 달리 포풀라레스는 어느 하나의 정치 이념도, 특정 집단도 아니었으며 서로와 무관하게 나타난 개인들을 뭉뚱그려 하나로 묶으려 할 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고 나서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포풀라레스란 ‘도시 빈민 문제 해결 및 서민 생활 조건 개선, 토지 개혁과 국유지 분배 등을 골자로 하는 개혁정치를 표방하며 일반 대중의 지지를 권력의 밑바탕으로 삼은 정치가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기원전 168~133년, 가이우스: 기원전 154~121년)처럼 개헌을 요구하거나 서민들을 위해서 발벗고 뛴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물론, 여기서도 그라쿠스 형제처럼 이상주의에 젖은 열정적 혁명가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그저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체계적인 공직 생활을 거친 전통적 방법이 아닌 민중 지지라는 과격한 방법을 택한 자들일 뿐이었다.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본격적 충돌은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나타났다. 이때까지의 로마 공화국은 반박할 수 없이 확고한 과두정Oligarchy으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좋았지만 상류층인 노빌레스Nobiles가 정치를 좌우하는 체제였다. 일반 대중의 정치권력과 참정권을 나타내는 호민관Tribunus 직책은 이때까지는 그저 ‘전통’에 불과한 유명무실한 자리에 불과했는데, 이 직책을 갑자기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위치로 끌어올리게 된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다. 개인 권한으로 입법을 추진할 수 있고, 신규 법안이나 정책에 대해 혼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권한이 부각되었고, 그라쿠스 형제는 자신들의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그 호민관의 권력을 한계까지 사용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



그리고 이런 호민관들을 대중은 열렬하게 지지했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기존 노빌레스들은 같은 귀족이면서도 서민에게 지나친 힘을 주어주려 한 그라쿠스 형제를 살해했다. 하지만 살해만으로 해결되기에는 문제는 이미 커져있었다. 민중 참정권과 참여의식이 고양되었고, 호민관으로 입후보하는 수많은 정치가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제시한 그 직책의 적절한 사용 방법을 참고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기원전 4세기의 ‘계급 투쟁’ 후 2세기만에 계급 분열과 투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귀족-서민간의 이분 충돌이 아니라, 중요한 제 3 요소가 투쟁에 가담함으로써 문제는 심화되었다. 바로 에퀴테스Equites, 즉 기사 계급의 성장이라는 요소였다.

로마 공화국의 중산층은 ‘기사’계급으로 불리는 에퀴테스였는데, 이들은 로마 시 자체 뿐 아니라 로마 밖 동맹 도시들과 지방의 유력자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중산계급의 영향력과 세는 기원전 2~1세기 경에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로마 공화국의 지중해에서의 팽창과 때를 같이했다. 원정가는 군단병들의 무장을 지급하게 된 것은 정부와 계약을 맺은 에퀴테스 출신의 군수업자들이었고, 점령된 신영토 또는 보호국에서 통상을 담당한 것도, 직할 식민지에서의 징세꾼 역할을 맡은 것도 모두 에퀴테스들이었다. 로마 공화국에는 정식 관료체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식민지 통치와 체계적 세금 징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에퀴테스 출신 기업가들이 운영하는 사기업 집단Cartel 또는 징세원Publicani였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재화가 빼돌려져 사유 재산으로 축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공화국의 에퀴테스 계급은 플레브스와 노빌레스와 견줄만한 신계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전통적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일반인이 고위 공직에 오르고 원로원의 일원이 되는, 그런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의 노비 호미네스Novi Homines라 불렀는데, 이러한 노비 호미네스들은 대개의 경우 신흥 에퀴테스 집안 출신이었다. 물론,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노빌레스 집단은 이런식의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했고, 노비 호미네스들은 당연히 정치 생활 내내 주변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야했다. 그렇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노비 호미네스가 몇 되지 않은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역사에 이름을 실제로 남긴 몇 안 되는 ‘신인류’중에서 단연 유명한 것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특히 포풀라레스 세력을 하나의 정치 집단으로 끌어올리고 공화국의 사회분열을 촉진시킨 공 또는 악덕이 큰 인물이다. 그 유명한 ‘마리우스 군제개혁’을 통해 공화국 군대는 상비 직업군대로 변모하게 되었고, 그 직업군인들은 국가 체제보다는 장군 개개인에게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다. 제대한 후에도 퇴역군인들은 국가보다는 유명 정치가(대개는 현역 시절 자신들을 이끌던 장군) 개인의 이익을 위해 발벗고 뛰었고, 이는 소위 포퓰리즘, 당시 말로 포풀라르 정치를 확실히 가시화시키게 되었다. 사병에서 사령관까지 군력을 쌓아올려 로마 상류사회에 들어간 마리우스는 정계에 입문한 순간부터 서민층의 지지를 노린 정책을 폈고, 그라쿠스 형제 이후 주춤하던 민중기만 정치를 다시 구현하게 됨으로써 포풀라레스라는 이름의 어떤 정치 집단, 또는 기조를 재형성하게 된다.

그러한 포풀라레스 집단과 마리우스를 상대해 내전을 벌인 오프티마테스와 그 지도자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였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다. 한푼 없이 가난하게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술라는 젊은 날을 플레브스, 즉 서민층 사이에서 보냈고, 스스로의 정치 경력 또한 서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술라는 공화국의 전통과 ‘원로원에 의한 통치’라는 기존 원칙을 수호하고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마리우스 일파와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끝나자 술라는 스스로를 독재관으로 선언하고는 일련의 극단적 정책들을 폈다. 호민관의 입후보 자격은 좁디좁게 한정되었으며 그 권력과 권위는 극단적으로 최소화되었다. 민중 집회와 집회를 통한 입법 절차등은 모두 폐지되었으며 대중 참정의 길은 모두 막히게 되었다. 더 이상 그라쿠스 형제같은 극렬 혁명가들의 등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반면 원로 의원Senator의 권한은 불어났고, 원로원의 의원 숫자는 기존의 세 배로 확 늘어났다. 모든 정책 결정과 법안 상정 등의 권한은 과거에 그랬듯 원로원에 집중되었다. 이는 술라의 독재기간의, 그리고 오프티마테스 정치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독재자 술라.]



하지만, 바로 그 술라가 자신의 군력을 쌓고 지지기반을 닦았던 바로 그 전쟁의 결과가 술라의 정책과 그를 지지했던 자들이 추구했던 바를 무너트렸다. 동맹시 내전, 영어로는 사회전Social War라고 부르는 그 전쟁. 시민의 의무를 모두 지니고 있음에도 시민권도 없이 주권시민 대접을 받지 못하던 이탈리아 동맹시의 시민들이 로마 시민의 권리를 요구하며 로마와 벌인 그 이탈리아 내전은 로마의 양보와 양자 합의로 끝났었다. 여기서 로마의 양보, 즉 로마 시민권 대상의 확대는 다시 말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증가를 뜻했다. 이제 로마의 정책은 단순히 로마시 내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시 밖에서 온 이탈리아인들의 손에도 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새로이 힘을 얻은 에퀴테스 계급이 뛰어든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오프티마테스가 원로원 중심의 정책을 폈어도 다시 이탈리아 내전을 치를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정치권은 포풀라레스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술라는 기원전 80년에 독재관 자리에서, 그리고 79년에 집정관 자리까지 모두 내놓고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해 살다 기원전 76년에 사망했다. 술라가 죽은 직후, 술라가, 그리고 오프티마테스가 이룩했던 체제는 순식간에 뒤집히게 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포풀라레스 정치가’로 분류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술라가 죽은 직후 그가 추진한 법안은 바로 로마의 포룸에 내전에서 패해 반역자로 분류되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상을 다시 세우고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술라의 공포정치 하에 숨죽이고 있었던 포풀라레스 세력과 민중들은 ‘민중의 친구 마리우스’를 외치며 카이사르의 주장에 동조했고, 오프티마테스 측 의원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동안 이미 십수년 전 죽은 마리우스는 복권되었다. 그리고는 차례 차례 술라가 폈던 정책들과 법안들이 뒤집혀가기 시작했고, 호민관의 권한은 다시금 복원되었다.


술라의 압도적 독재로 인해 잠잠해졌던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분쟁이 다시 심화되던 무렵에 중요인물로는 앞서 언급했던 키케로가 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지방 에퀴테스 출신이었다. 연줄 없이 법조계에 진출해 그 변호실력만으로 신분상승의 계단을 오르고, 공직에 출마해 결국은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른 그 입지전적 인물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잊지는 않았으나 그로부터 최대한 벗어나려 했다. 그가 늘 고려했던 정치 목적은 기사계급과 귀족계급의 화합과 공존이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는 귀족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서 있었다. 그는 늘 중립을 표방하고자 했으나 구분을 하자면 그는 언제나 오프티마테스 파벌의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기원전 62년의 집정관 선거에서 정치자금을 모두 날려먹고는 실패해 희망을 잃은 귀족,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체제전복을 꿈꾸며 쿠데타를 준비하던 기원전 63년, 그의 쿠데타 계획은 사전에 새어나갔고 당시 집정관이던 키케로는 이를 즉각 진압했다. 음모가 발각된 바로 다음 날 당당하게(뻔뻔하게) 원로원에 출석한 카틸리나를 마구 비난하던 당시 키케로의 연설은 키케로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을 매우 잘 반영해 준다.


[카틸리나를 비난하는 키케로]



키케로는 역사적으로 민중권익의 대변자였던 스푸리우스 마엘리우스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예로 들며 국가에 해가 되었던 자들은 그 공과에 대한 고려 없이 모두 처단되었다는 말을 하며 카틸리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보여지듯, 키케로는 평생의 편지와 연설과 저술에서 거듭 그라쿠스 형제와 그 사상에 대한 반감을 표명한다. 그에게 있어 애국이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닌 국가라는 체제 그 자체를 위하는 마음이었고, 그러한 그의 태도는 대다수 오프티마테스들의 그것과도 일치하는 바였다.

카틸리나 연설에서 키케로는 카틸리나와 그 일당들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요구하면서 동료 의원들에게 명성이나 인기 같은 것을 고려하면 국가대사를 위해 유익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중의 인기와 반응에 연연하며 인기를 보존할 방법만 택하는 정치가는 옳은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포풀라레스 세력을 매섭게 비판한다. 포풀라레스로 분류된 정치가는 그 방향과 사상, 목적에 관계없이 무조건 ‘인기몰이만 하려드는 정치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로 매도되었고, 이는 키케로 개인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사실, 키케로의 포풀라레스 정치에 대한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었다. 키케로의 시대 쯤 오면 소위 민주정치란 극단적 중우정치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사례다. 본디 귀족 출신인 클로디우스는 스스로 서민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호적을 바꾼 다음 기원전 59년의 호민관 선거에 나서 호민관에 당선되었고, 그가 호민관을 지내는 동안 로마의 정치판은 몰락할 대로 몰락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무장 갱단을 이끌고 정책을 무력으로 집행했으며 폭도들을 선동함으로 반대세력의 목소리를 죽였다.

카틸리나 반역 사건에서 진압된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들은 당대의 포풀라레스의 당수나 다름없는 자들이었고, 그 후대 포풀라레스의 영도자 비슷한 위치에 선 클로디우스는 그 카틸리나와 그 동맹들을 처형시킨 전 집정관 키케로를 매도했다. 곧 클로디우스는 폭도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키케로를 몰아냈고, 키케로는 시내 가산마저 모두 압류당한 채 이탈리아를 쫒겨나듯이 떠나 망명생활을 해야했다.

클로디우스가 호민관으로써 편 정책들은 그야말로 포풀라레스라고 분류되기 적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빈민들에게 일정기간동안 시장 판매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한다는 곡물 분배 정책이 클로디우스에 의해 ‘정기 무상배급’으로 바뀌었고, 원로원의 집회 해산권이 폐지되었다. 이러한 클로디우스와 그 지지세력을 반대하던 정치가들의 머리 위에는 똥물 바가지가 씌워졌고 원로원의 권위에도 똥물이 칠해졌다.

오프티마테스 세력이 폭주하는 클로디우스를 잡기 위해 마련한 대안은 클로디우스와 동일한 성질의 것이었다. 기원전 57년,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가 클로디우스의 동료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밀로는 곧 클로디우스가 그때껏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클로디우스를 공격했다. 곧 로마의 시내는 밀로의 갱단과 클로디우스의 갱단이 서로를 때려 부수는 아수라장으로 변모했고, 로마시는 일종의 소규모 내전에 휩싸였다. 혼란은 클로디우스가 기원전 53년에 밀로의 갱단에게 살해되면서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클로디우스의 죽음]



하지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밀로의 배후에 원로원이 있었듯, 클로디우스 또한 더 큰 세력의 마리오네트였을 뿐이었다. 그 사주자는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 동맹자들- 즉 3두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 그리고 그 동맹자인 크라수스에게는 각자가 갈리아 지방과 파르티아에서 자기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쌓고 있는 동안 로마 내에서도 난리를 쳐 줄 인물이 필요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3두정의 일원이었던 크라수스가 멀리 동방 원정 중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클로디우스가 살해당하고 밀로가 그 죄로 재판정에 서던 것과 동일한 해의 일이였다. 3두정은 붕괴했고, 클로디우스-밀로 사태의 책임을 묻고자 원로원은 이제 그 카이사르를 끌어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원로원이 이 때 회유한 것은 그나에우스 폼페이우스였다. 카이사르의 우방이자 일시적으로 포풀라레스 세력의 지지자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에퀴테스 출신의 노부스 호모, 즉 ‘신인류’였던 폼페이우스는, 근본적으로는 키케로처럼 오프티마테스였다. 폼페이우스는 그 군 생활과 정치 생활을 모두 과거 독재자 술라의 충복으로써 시작했고, 그의 보수적 성향은 스스로가 상류층에 편입되고 나서부터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카이사르가 이끄는 포풀라레스 운동은 비 귀족 평민 출신의 폼페이우스가 영도하는 오프티마테스와 충돌하게 되었으며, 그 유명한 루비콘 강 도하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지중해 전역을 휩쓸었다. 그 내전의 결과는 기원전 48년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오프티마테스 세력이 완전 격파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뒤를 이은 카이사르의 독재 정치는 ‘공화국’의 가치와 질서에 너무나도 극명히 위배되는 것이었고, 그를 지지하던 포풀라레스들조차 이에 실망하고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아직 남아있던 오프티마테스의 잔재 세력은 암살을 획책했고, 그에 따라 카이사르는 수십번을 난자당해 살해당했다.



[카이사르의 죽음]




하지만 이제는 포풀라레스건 오프티마테스건 아무도 공화국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공화국이라는 체제는 한 세기에 걸친 두 세력의 분쟁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카이사르가 죽었을 때에는 더 이상 정치 이념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되어버린 거이다. 그 상황에서 카이사르보다도 더 간악하고 야심찬,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확실한 권력 장악과 신분 상승을 노린 에퀴테스 계급의 지지를 바탕으로 남아있는 기존 권력층을 일거에 청소해버렸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원수 -프린캡스Princeps, 즉 황제의 자리에 올렸으며 에퀴테스 계급은 죽고 없어진 노빌레스들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등장한 신 체제 - 제국은 과두정도, 민주정도 아닌 금권정Plutocracy의 세상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읽은 문헌들:

Cicero, Marcus Tullius. Catiline Orations. Perseus Project.


Everitt, Anthony. 2007. Cicero: Rome's Last Greatest Politician. Penguin Books.


Holland, Tom. 2008. Rubicon The Last Years of the Roman Republic. Paw Prints.


Millar, Fergus. 1986. Politics, Persuasion and the People before the Social War (150-90 B.C.). The Journal of Roman Studies, Vol. 76, pp. 1-11. http://www.jstor.org/stable/300362


Murray, Robert J. 1966. Cicero and the Gracchi. Transactions and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Vol. 97, pp. 291-298. http://www.jstor.org/stable/2936013


Seager, Robin. 1972. Cicero and the Word Popvlaris [Cicero and the Word Popularis]. The Classical Quarterly, New Series, Vol. 22, No. 2 (Nov.), pp. 328-338. http://www.jstor.org/stable/638213


Syme, Ronald. 1939. The Roman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Taylor, Lily Ross. 1942. Caesar and the Roman Nobility. Transactions and Proceeding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Vol. 73, pp. 1-24. http://www.jstor.org/stable/283534


Wirszubski, Ch. 1954. Cicero's CVM Dignitate Otivm: A Reconsideration. The Journal of Roman Studies,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Roman Studies. Vol. 44, pp. 1-13 http://www.jstor.org/stable/297549






ps.

이 글은 사실 이번 학기 로마사 과목의 기말고사 내용으로 썼던 것을 바탕으로 해서 한글로 옮긴 겁니다. -_-
그대로 '번역' 한건 아니고 '바탕'으로 해서 '다시 쓴' 거지만.


핑백

  • '3월의 토끼집' : 2009 3월의 토끼집 12대 "추천" 포스트 2009-12-31 08:37:16 #

    ... 그 중에서도 그나마 좀 유쾌하면서도 역사의 이면을 엿볼만한 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구나 리고니에 장군 같은 방식으로 성공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11월: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 - 공화국을 멸망시킨 분열. 가장 열심히 쓴 글입니다. 흔히 주목하는 '위인 중심'의 공화국 말기 모습과는 좀 다른 상狀을 제시하고 싶었기에. 12월: 45년 전 오늘 목청을 높였 ... more

  • '3월의 토끼집' : ....역사 잡담, 키케로, 백악관 2010-07-06 12:34:52 #

    ... 스트들을 혹시 놓치신 분들은 한번 읽어 주셔도 무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리우스 군제개혁과 로마 공화국의 몰락(2009년 7월 작성) "오프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 - 공화국을 멸망시킨 분열"(2009년 11월 작성) ... more

덧글

  • 드로이드 2009/11/25 17:55 #

    흐흠....
    일단 집에 있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버릴까 고민 중입니다.
  • 월광토끼 2009/11/25 17:57 #

    네?;
  • 월광토끼 2009/11/25 18:00 #

    덧글의 요지가 잘 파악 안됩니다만...
  • Allenait 2009/11/25 18:21 #

    먼나라 이웃나라가 의외로 구멍이 많죠. 이상한 걸 따온것도 많고..
  • Allenait 2009/11/25 18:22 #

    성은 언제나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는 거니까요.
  • 피그말리온 2009/11/25 18:40 #

    재밌게 읽었습니다.
  • 월광토끼 2009/11/26 11:45 #

    감사합니다.
  • 아빠늑대 2009/11/25 19:37 #

    잘 읽었습니다 ^^
  • 월광토끼 2009/11/26 11:45 #

    감사합니다.
  • 엘레시엘 2009/11/25 19:51 #

    '에퀴테스 계급은 죽고 없어진 노빌레스들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천수백년 후에 프랑스에서도 완전히 동일한 일이 벌어지는군요.
    하긴, 저런 일이 흔하고도 흔한 일이긴 하지만...
  • 월광토끼 2009/11/26 11:46 #

    그래서 로마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의 저서 제목이 "Roman Revolution"이지요. 전혀 혁명이 아닌 사건이었음에도 French Revolution에 빗대면 너무나 유사하니까요.
  • asianote 2009/11/25 19:55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강력한 인물이고 매력적인 인물이었기때문에 공화국에 치명상을 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야 정말 정치적인 인물이니까요.
  • 월광토끼 2009/11/26 11:47 #

    음... 이 글의 요점은 '카이사르가 공화국을 무너뜨렸다'라는 인식을 깨부수기 위한 것이었는데, 동의하지 않으시나보군요...
  • 나아가는자 2009/11/25 20:10 #

    제정수립과 기사계급을 연결시키거나, 금권정치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맨 마지막 내용을 보고 놀랐습니다. 제가 공화정말기까지만 조금 알고 제정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서... 혹시 후속포스팅을 하신다면 저로서는 지식을 쌓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 월광토끼 2009/11/26 11:48 #

    네.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체제 초기에 대한 포스팅은 늦건 빠르건 어쨌든 꼭 하게 될 것 같습니다.
  • sanister 2009/11/25 20:38 # 삭제

    Optimates와 Populares의 대립축이 한국사회에서 보이는 것은 제 착각일까요...
  • 월광토끼 2009/11/26 11:48 #

    쉿! [...]
  • 들꽃향기 2009/11/25 21:36 #

    "에퀴테스 계급은 죽고 없어진 노빌레스들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 이것이 당시 정치체계의 귀결과 행간을 대표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귀족정파나 민중파나 그러한 '정치'를 폭력과 금력의 장으로 타락시키면서 결국 이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어느 파이던지 간에 돈과 에퀴테스 계급을 필요로 했으니깐요.

    잘 읽고 갑니다. ^^
  • 월광토끼 2009/11/26 11:49 #

    감사합니다. 에퀴테스의 부가 정치 판도를 확 바꿔 놓아버린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 umberto 2009/11/25 22:48 # 삭제

    현대 민주주의와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테네의 몰락과 로마 공화정의 붕괴는 현대 민주정치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
  • 월광토끼 2009/11/26 11:50 #

    읽어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사실 역사를 공부하고 해석하는건 그 현재 세태에 대한 설명을 갈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시사점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겠습니다...
  • 솔로부대장 2009/11/25 22:56 #

    언제나 다른 의견을 가진 집단의 분쟁이 격화되어 해소가 되지 않으면 독재가 나타나는듯.

    역사는 이런 면으론 돌고 돌죠.
  • 월광토끼 2009/11/26 11:50 #

    그게 또 단순 개인의 독재에 그치는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지요. 며칠 전 올렸던 '근현대사 명언들' 중에서 백범의 발언을 떠올리게 됩디다.
  • 오제영 2009/11/26 14:00 # 삭제

    좋은 포스팅 감사히읽고갑니다.
    로마인 이야기와 전혀 다른 시야로 전개된 글이 너무 흥미롭습니다.

    특히나 금권정치라는 체제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말이죠. 글을 읽고 보니, 저 시기에 가장 득을 본 자들이 누구였나 느낌이 바로 오는군요.
  • 월광토끼 2009/11/27 09:09 #

    1천 8백년 후 그 식민지였던 지방 중 하나에서 비슷한 일이 생기죠.
  • gg 2009/11/26 15:46 # 삭제

    항상 월광토끼님의 로마의 원로원 vs 민중파의 대결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로마인 이야기로 익숙해진 내용과 다르다 보니 참 재미있게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섯부른 생각일수도 있지만 월광토끼님께서는 "공화국의 가치, 공화국의 신념"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호의적으로 원로원파를 상대적으로 평가하고, 카이사르나 민중파를, 실질적으로는 제정 자체에 부정적인 느낌이네요.

    이런 충돌과정을 보면 송의 구법당과 신법당간의 투쟁이 떠오르긴 하는데..
    공화국의 가치와 질서, 그리고 그를 유지하는 귀족적인 원로원 체제나
    구법당의 보수적인 가치, 사회적인 엘리트성, 고고한 사고방식이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민중파나 신법당이 "질적"으로나, "품성"면에서나, "능력"에서나 전자에 비해 떨어지는건 사실입니다만,

    근본적으로 민중파나 신법당이 득세하게 되고 이슈가 된 원인, 빈부격차의 확대, 자영농의 몰락과 대지주의 득세와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었다"라는 내용외에 현재로서는 어떤 대안이 있었는지를 지금까지의 글로는 잘 느끼기가 어려워서요.

    원로원파와 구법당에게 느껴지는 것이 왠지 유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엘리트주의, 고아함, 빈민의 현실에 대한 무시.. 근본적인 문제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이를 외면하고 방치하는 느낌이라...

    그렇다면, 로마의 멸망이,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나, 제정으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는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공화국의 가치와 신념을 신봉한 원로원파 자체가 오히려 가장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만약 원로원파가 이에 대한 대책이 없는, 구법당과 마찬가지의 존재였다면, 과연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에게 로마 멸망의 원인을 물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공화국의 가치와 신념이라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몰락할수밖에 없는, 로마가 도시국가였을때나 달성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근본적으로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이탈리아를 제패하고 식민지를 확보하는 시점에서 공화국의 가치와 신념이란 개념이 공화국을 유지하기에는 낡아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요.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혹시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월광토끼 2009/11/27 09:14 #

    이 부분에 있어서 저에게 '명확한 관점' 같은건 없습니다. 그저 계속 공부하고 탐구해볼 문제이지요.
    그저 감정적으로 ['독재자'와 그런 독재자를 옹립한 선동된 민중]이라는 테마를 언제나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제 생각이 글에 녹아있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요.

    '로마 공화국이 정말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도태된 도시국가체제였기에 제국이 되었는가'라는 문제는 지금도 사학자들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파와 '아니다, 대안이 있었다'파로 나뉘어져 격론 중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저도 나중에 따로 후속 포스팅을 할 생각이 있으니 덧글로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좋은 덧글에 감사드립니다.
  • 사수 2009/12/25 01:06 # 삭제

    요약하면은...

    오프티마테스 - O
    포폴라레스 - P

    그라쿠스 형제(암살) - P
    가이우스 마리우스 (군제 개혁) - P
    술라 (동맹시 전쟁) - O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삼두정치, 갈리아로 감) - P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카틸리나 반역사건) - O
    클로디우스(조폭민주주의) - P
    밀로(위와 같은 방법) - O
    카이사르 - P vs 폼페이우스- O
    카이사르 - ?(독재, 암살)
    옥타비아누스 - 제 3세력

    맞나요?ㅋㅋ 로마 사람들은 너무 이름이 복잡해서 알아보기 힘드네요 ㅠ
  • 월광토끼 2009/12/31 00:20 #

    맞습니다.
  • 하늘나무 2011/06/24 15:36 # 삭제

    월광토끼님께서 서주시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글을 읽을때마다 많은 것을 배웁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에 대한 글과 이 글을 읽으면서 프랑스의 구체제는 입법권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반면로마 공화정은 행정권의 문제도 인해 몰락했다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아주 러프한 생각입니다.)

    프랑스의 경우 새로운 사상과 가치를 논의하고 수용할 만한 입법부가 부재했으며 로마의 경우 원로원과 호민관으로 대표되는 입법부의 활동은 활발한 반면 입법부의 활동을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시할 행정권이 약해보입니다.

    이는 밀로와 클로디우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공권력의 부재나, 한명의 장군이 국가의 비용으로 군대를 모병하여 사병화시키는 행위 등에서 나타납니다.

    로마가 일개 도시국가로 존속했다면 이러한 약한 행정력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탈리아 반도 전체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로 성장한 시점에서는 문제가 심화되었을 겁니다.

    도시국가체제에 특화된 행정력은 입법부에도 문제가 되었겠죠. 체제가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중해 여러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그들의 생각과 가치를 입법부에서 논의할 수 있어야하는데 그들을 입법부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행정적 철차가 없었으니까요.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보면 행정권의 강화로 이해할 수도 있지않을까합니다. 행정권이 원수에게 집중되었기에 밀로나 클로디우스가 보인 행동을 막을 수 있고, 군대전체가 황제의 사병이기에 장군의 사병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국가에서 모병하고 지휘관을 선임하는 체제와 같은 구조가 된 것이죠.

    물론 이 과정에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논의하는 입법권자체가 손상된 것은 맞습니다. 후에 로마식민지 지역에서는 행정권만이 강화한 국가에서 입법부이 부재하여 혁명이 일어났지요. 영국의 경우는 행정권(왕)과 입법권(의회)가 균형을 이루어 성공한 예라고 볼 수 있지않을까 합니다.

  • Lautitia 2012/02/27 00:48 #

    homines novi가 복수 형태여서 'homines novi들이'라고 하심은 초큼 골룸하다능 ^^;;;;

    변화형은 이렇게 되요. 위는 단수, 아래는 단수, 차례로 주격 - 소유격 - 간접목적격 - 직접목적격 - 탈격 - 호격입니다.


    homo novus - hominis novi - homini novo - hominem novem - homine novo - homo nove
    homines novi - hominum novorum - hominibus novis - homines novos - hominibus novis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삼왕국 전쟁사 또는 단순히, 영국 내전사

7년전쟁 북미전역

말보로 공작의 일생

로열 네이비 이야기

이베리아 반도전쟁

라파예트 후작의 일생

영국육군 블랙왓치 부대史


통계 위젯 (화이트)

58126
983
4707574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1417

I Support ROKN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아지캉 최고

9mm Parabellum Bullet

the pill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