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백작 가문 이야기.

전에 예고한 대로.

[Bertrand Russell, 3rd Earl Russell]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로 꼽힐만한 위인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고대로부터의 단어 Philosophy를 현대적 의미의 ‘철학’이란 뜻으로 국한하지 않고, 그 단어가 가졌던 원래 의미인 ‘인문학’이란 범주로 넓혀 보자면,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에 반대하기란 힘든 노릇이다. 대학자이자 사회개혁가, 반전 운동가였던 버트런드 러셀. 하지만 러셀이라는 성은 버트런드 러셀 혼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러셀 가문의 인문학과 진보적 가치 추구는 그 전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제 3대 러셀 백작이었고, 그 러셀 백작 가문의 시조는 존 러셀(John Russell, 1792~1878) 공이었다. 러셀 가문은 노르만 침공기 때부터의 오랜 귀족집안이었고, 존 러셀은 그 러셀 혈족 중에서도 베드포드 공작가에서 태어났다. 제 6대 베드포드 공작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존 러셀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에 진학해 인문학을 공부하다 중퇴, 정계에 투신했다. 막대한 부와 깊은 전통을 지닌 최상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존 러셀은 급진적인 진보주의 정치가 되었다. 그는 1813년부터 휘그파 하원 의원이 되었고, 휘그당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사회 개혁파에 속했다. 챨스 그레이 총리 내각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정부의 개혁 성향을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휘그당의 당수가 된 존 러셀은 소위 ‘내정의 민주화’로 불리우는, 지방자치체제에서의 대중 참정과 민주주의 강화를 주도했으며, 그와 휘그당은 공장 근로자의 노동 시간 단축과 사회 보건복지의 보강을 추진, 성공했다.


[John Russell, 1st Earl Russell, Prime Minister of UK]



존 러셀은 1846년부터 1852년까지 영국의 총리Prime Minister를 지냈는데, 그의 재임 기간은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시기와 겹쳐져 있다. 존 러셀 본인은 아일랜드인들에게 동정적이었다고 전해지나, 그의 내각의 사태 대처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아일랜드 인들의 대규모 이민, 사망, 빈민화로 이어졌고 규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총리 시절은 그 명성의 오점이다.

1861년에 존 러셀은 러셀 백작에 임명되었으며 그로 인해 베드포드 공작 가문과는 별개의, 러셀 백작 가문이 생겨나게 되었다. 제 1대 러셀 백작의 아들인 앰벌리 자작 존 러셀(1842~1876) 또한 아버지처럼 정치에 투신했고, 하원의원으로 활동했었다. 이 아들 존 러셀의 사회관은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매우 급진적이고 특출났다. 아버지 존 러셀은 아들 존의 그 가치관을 바꾸려 노력했으나 아들 존은 말을 듣지 않았고, 곧 자신의 아들에게 그 가치관을 교육시켰다. 그는 무신론자였으며 낙태 찬성론자였다! 그리고 그의 그런 가치관들 때문에 그는 하원에서 재선되지 못했다.


[John Russell, Viscount Amberlay, MP]




그러니, 무신론자에 낙태 찬성론자였던 존 러셀의 아들 버트런드가 20세기 최대의 무신론자이자 인문주의자로 자라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존 러셀은 아들 버트런드가 태어나던 해에 존 스튜어트 밀(!!)에게 아들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고, 대 철학자 밀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밀은 그 이듬해인 1873년에 사망했지만 그 업적은 버트런드 러셀이 평생 참고하게 된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부모의 교육을 직접적으로 받지는 못했다. 어머니 캐서린은 1874년에 병으로 인해 버트런드의 누이인 레이첼과 함께 세상을 떴으며 아버지 존 러셀도 그 충격으로 같은 해 사망하여, 버트런드와 그 형 프랭크는 조부인 전직 총리 존 러셀 백작의 집에서 자라게 된다. (버트런드는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은 인자한 노인’으로 회상하곤 했다) 존 러셀 백작은 1878년에 사망하였고, 그에 따라 러셀 가문은 러셀 백작부인(프랜시스 앨리엇)이 꾸려나갔는데, 이 노 백작부인도 예사로운 여성은 아니었다. 백작부인은 독실한 침례교인 이었지만 종교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백작부인은 다윈의 진화론을 믿었고 지방분권자치제(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정부가,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 정부가 다스려야 한다는)를 지지했고, 사회정의 구현에 관심이 컸다.

그러한 할머니 밑에서 프랭크와 버트런드 형제는 성장했다. 형인 제 2대 러셀 백작 프랭크 러셀(Francis Russell, 1865~1931)은 당시 영국 상류 사회에서 그의 여성 편력으로 큰 스캔들을 일으키고 중혼문제로 인해 법정에까지 서야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캔들 이외의 부분에서 프랭크 러셀은 상당히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는 귀족으로서는 최초로 영국 노동당(Labour Party)에 입당하였고, 영국 상원(귀족원)에서의 노동당 대표로 활약했으며, 당시로서는 매국노 취급받기 딱 좋았던 반전주의(또는 평화주의) 지지 정치인이었다. 그는 1929년부터 죽을 때까지 영국령 인도의 국무장관을 지냈다. 기이한 업적도 남겼는데, 영국민 최초로 자동차 면허판을 받았고 자동차 스피드광이었던 그는 교통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고속도로의 속도제한을 철폐했다. (다행히도 속도제한은 그가 죽고 난 직후 부활했다)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907.]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업적과 저서는 너무나 방대해서 지금도 계속 연구가 진행 중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분야에서 지식을 쌓았다. 수학-기하학, 경제학, 사회학, 윤리학, 철학, 역사학 등, 그는 어느 특정 분야의 학자라기보단 전반적 의미에서의 인문학자였다. 1차세계대전 중에 러셀은 반전 평화주의자로 활동했으며, 그 때문에 그는 대학 강사직에서도 잘리고 벌금형에 6개월 금고형까지 선고받았다. 이 반전 평화주의는 버트런드 러셀 평생의 이념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르크스주의 자체는 지지했으나 소련의 전체주의적 성격-이후 스탈리니즘이 될-을 맹 비판했다.

1931년에 프랭크 러셀이 죽자 버트런드 러셀은 제 3대 러셀 백작이 되었다. 2차세계대전 발발 즈음에 이르면 러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UCLA와 시카고 대학 등 대학들에서 강의를 했는데, 1940년에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그의 ‘성 도덕관’이 문제가 되어 (사실은 그의 무신주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무신론자’하면 흔히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떠올리나, 리처드 도킨스의 사상적 원조(이자 그의 저서들에서 계속 인용하는 건)는 버트런드 러셀이다. 러셀의 에세이집 “Why I Am Not a Christian"은 오늘날 무신론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변이다.) 교수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 때 세계의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러셀을 옹호했는데, 그 지식인들 중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 직후 러셀은 서양 철학에 대해 강의하는 것에 전념했고 그 강의 내용을 기초로 러셀 최대의 저서인 "History of the Western Philosophy"(서양철학사)가 저술된다. 서구문명의 철학사를 집대성하고 정리한 서양철학사는 오늘날에도 최고의 인문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러셀 살아생전에는 고마운 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서양철학사 외에도 그의 여러 저술활동으로 인해, 러셀은 194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50년대와 60년대를 식민지 독립, 핵무기 반대, 베트남 전 반대 운동에 투신하며 당시 좌파 청년들의 우상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핵 군축 성명은 아인슈타인 혼자 한게 아니라 러셀과의 공동작업의 결과였다. (그 성명의 정식 명칭은 “Russell–Einstein Manifesto” 다.) 그렇다고 그가 친 공산주의자였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의 비판대상에는 모든 전체주의적, 독재 정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일으킨 중동 전쟁들 또한 비판하며 이스라엘이 중동 국가들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에 92세를 일기로 장수하고 사망했다. 그는 형 프랭크처럼 일생을 여러 여자들과의 재혼과 이혼과 불륜의 사이클 속에서 보냈는데, 그 얽히고설킨 관계들 속에서도 훌륭한 아들이 태어났다. 버트런드 러셀의 죽음 후에 4대째로 러셀 백작의 이름을 물려받은건 그의 두번째 결혼에서 태어났던 존 러셀이었고, 그가 1987년에 죽었을 때 제 5대 백작이 된 것이 그 이복동생인 콘라드 러셀이었다.


[Bertrand and Conrad. 1941.]



제 5대 러셀 백작 콘라드 러셀(Conrad Russell, 1937~2004)은 버트런드 러셀의 세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가까이서, 또 오랫동안 받은 아들이었다. 콘라드 러셀은 이튼 스쿨 재학 후 옥스퍼드대를 졸업했으며, 아버지와는 달리 역사학에 전념했다. 그의 17세기 영국사- 영국내전사, 영국정치사- 연구는 그를 해당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학자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내가 뭐 페이퍼 하나 쓸라치면 꼭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콘라드 러셀의 논문들이다! 어렵다! ㅠㅠ)

바로 이 콘라드 러셀의 연구들 덕분에 영국 내전사와 의회-왕권 대립에 대한 해석이 재조명받게 된다. 영국 내전에 대한 과거의 ‘억압적 왕권에 대항한 민중 혁명’식의 단순 해설이 반박되었으며, 영국 내전을 불러온 사회적, 정치적 분열은 훨씬 더 장기적이고도 거시적 시각에서 분석되게 했다는 것이 영국 사학계에서의 콘라드 러셀의 가장 큰 업적이다. 그는 예일대에서, 그리고 런던대에서, 마지막에는 죽을 때까지 런던 킹스 컬리지에서 영국사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다방면에 투자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영국사, 그것도 17세기라는 특정 분야에 집중했다. 그의 저서 “The Fall of the British Monarchies 1637–1642(영국 왕정의 몰락)"는 오늘날 영국사의 최중요 저작 중 하나다.


[Conrad Russell, 5th Earl Russell]



콘라드 러셀의 업적과 활동은 학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87년에 제 5대 러셀 백작이 된 직후 그는 상원에서 영국 자유민주당의 주요 지도자이자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스스로가 귀족이었으면서도 귀족 계급 자체의 철폐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전반적 정치 경력은 열렬한 사회개혁론자의 그것이었다. 1999년에 영국 상원이 개편되고 비귀족 일반인이 참여하게 된 개혁에는 러셀의 활약이 일부 작용했다. 그는 죽기전까지 정부의 보수적 태도를 비판했다.(참고로 그의 상원에서의 연설은 늘 역사적 경구나 사건을 인용하거나 역사를 돌이켜보며 반성하는 내용이었고, 그 덕에 잘난체 한다는 야유도 받았다.)


2004년 콘라드 러셀의 사망 후 현재 제 6대 러셀 백작인 니콜라스 러셀(Nicholas Russell, 1968~)은 영국 노동당원이며 핵무기 폐지론자이며 열렬한 장애인 인권 운동가다. 그는 현재 왕립 맹인 권리협회의 사무장직에 있다. 1999년 개헌으로 인해 그는 귀족이지만 상원의원이 아니게 되었으나, 차기 선거에서 노동당 측 의원 후보로 나올 가능성도 있다.


러셀 백작 가문의 ‘명성과 전통’은 세월의 권위가 아닌 행동과 업적으로 일구어졌다.

'그저 귀족일 뿐'인 많은 가문들과 참 비교 되지 않는가.




이 포스트에 적힌 사실들의 상당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참조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덧글

  • Allenait 2009/11/26 11:48 #

    참 뭐랄까 이런걸 보면 영길리는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월광토끼 2009/11/26 15:37 #

    이런식의 일반화는 지양해야겠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세계를 지배해 본' 몇 안되는 자들 중 하나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요..
  • Cheese_fry 2009/11/26 12:31 #

    음.. 러셀 가문의 특징은 자유분방한 머리 스타일?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역사는 참.. ㅎㅎ
  • 월광토끼 2009/11/26 15:37 #

    앞머리가 많이 까지는 스타일이라면 저런 머리가 오히려 더 어울리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ㅎ
  • 꽃가루노숙자 2009/11/26 12:37 #

    크게 보면 민주주의의 틀인 사회 개혁의 주도자들은 오히려 그것에 반하는 귀족이었다고 하더군요.

    깨어있는 지성이라고 할지, 돈이 있어야 그만큼 기회도 많았을테니까요.

    귀족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을 위시하여 역사, 의과를 연구하는 분야에서 특히 그런 성향이 두드러지더군요.

    오히려 인간의 삶이라고 할까, 이상을 탐구하는 문학 쪽에서 높은 존경을 받는 분들이 극단적인 편중을 보이는 경우가 많구요.

    아, 그리고 아마도 오타라고 생각됩니다만, 맨 위쪽 시조 존 러셀의 설명 중 공장 노동자를 공작 노동자로 쓰신 부분이 걸리더군요. 만약 오타라면 존 러셀이 공작가에서 나온 분이라 혼란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슈타인호프 2009/11/26 12:46 #

    프랑스 혁명의 주창자 중 하나인 미라보도 백작이었으니까요.
  • 월광토끼 2009/11/26 15:38 #

    오타 수정했습니다. 사실 세속적인 것에 시간 뺏기지 않고 '느긋하게 뜬구름잡는 소리나 하고 앉아있으'려면 일단 '팔자가 좋아'야 하는건 당연한 일이겠죠 -_-[..]
  • 슈타인호프 2009/11/26 12:47 #

    러셀이 귀족, 그것도 노르만 정복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가문 출신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월광토끼 2009/11/26 15:40 #

    감사합니다. 실제 전혀 의외의 사람이 대단한 가문 출신이면서, 귀족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꽤 있지요.
  • asianote 2009/11/26 12:54 #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가문이 없는 걸까요?
  • 드로이드 2009/11/26 13:51 #

    2대 가기도 전에 망하고
    3대까지는 정재계에서 밉보일 테니까.
  • 윤현철 2009/11/26 14:44 # 삭제

    조선시대에서 사회개혁을 외치면 죽기 딱 좋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1대가 살아남더라도 2대정도 되면 멸문되니 저렇게 될수가 없지요.
  • 월광토끼 2009/11/26 15:40 #

    드로이드님이 깔끔하게 말씀해주셨네요 ^^
  • 근엄자 2009/11/26 14:49 #

    버트란드의 저작과 학술을 만든건 팔할이 형이 보내준 수입....이랄까, 심지어는 격한 반전활동에도 가장 큰 버팀목이 된 게 백작가의 배경이라는 점이 좀 대인배스럽죠.
  • 월광토끼 2009/11/26 15:40 #

    그렇기에 그 형이 역사에 기억되는게 그저 스캔들 때문이라는게 안타까운 점이지요.
  • 솔로부대장 2009/11/26 14:51 #

    그러니까 부르주아들의 탐욕에 비해서 귀족의 blood-right는 그렇게까지 악독하지 않다는 것일지도요.

    이것도 일례라 전체로 보긴 좀 그렇지만요. ^^
  • 월광토끼 2009/11/26 16:02 #

    새로이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신흥 세력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는 전통에서 나오는 배경이랄까요?
  • 행인1 2009/11/26 15:33 #

    저도 러셀이 백작가의 후예인줄은 오늘에야 알았씁니다.
  • 월광토끼 2009/11/26 16:02 #

    후예일뿐 아니라, 백작이죠 ^^
  • 소시민 2009/11/26 18:40 #

    자동차 스피드광이었던 그는 교통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고속도로의 속도제한을 철폐했다.

    - 이건 좀 무서운 권력남용이군요.
  • 월광토끼 2009/11/27 09:15 #

    당시 자동차 속도를 생각하면 그렇게 남용도 아닐지도 모릅니다.
  • 無上之道 2009/11/26 18:59 #

    먹고 살만하기에 더욱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라...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없지는 않을진데... 참...
  • 월광토끼 2009/11/27 09:15 #

    아... 그건 그냥 자조적으로 쓴 말입니다 -_-;
  • 위장효과 2009/11/27 01:32 #

    Falling Gentry vs Rising Gentry 이 논쟁하고 관련이 있는 건가요?(그런데 이 이야기도 나온지 20년이 훨씬 넘은 것이니...)
  • 월광토끼 2009/11/27 09:14 #

    네. 바로 알아차리셨는데, 관련 있지요.
  • 들꽃향기 2009/11/27 04:48 #

    잘 읽고 갑니다. 영국혁명의 단선적 해석에 반대하는 최초의 시도가 러셀가문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_=;;
  • 월광토끼 2009/11/27 09:16 #

    그리고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요...
  • 지나가던과객 2009/11/27 20:18 # 삭제

    우리나라에서 저러면 빨갱이 소릴 듣는데, 영국이 저런 면에서는 대단하군요.
    대영제국은 아직 죽지않았어!
  • 미르하이 2010/02/15 21:51 # 삭제

    잘 읽었습니다! 월광토끼님 러셀 가문은 굉장한 명문이로군요 ;
    개인홈피에 퍼가도 될까요?
  • 카라얀 2012/09/13 21:16 # 삭제

    와 ㅅㅂ 진짜 쩐다. 버트런드 러셀만 쩌는줄 알았는데 정말 대단한 가문이네요 ㅎㄷㄷ 게다가 어떻게 1대 러셀부터 지금의 러셀까지 진보주의 정신이 대대로 물려내려오는것도 정말 신기해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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