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와 바보와 무용無用의 독서.

일단 필립 라르킨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A Study Of Reading Habits (독서 습관에 대한 연구)
by Philip Larkin


When getting my nose in a book
Cured most things short of school,
It was worth ruining my eyes
To know I could still keep cool,
And deal out the old right hook
To dirty dogs twice my size.

(책 속에 코를 박고 있자면
학교생활의 아픔이 치유되곤 했다.
나보다 두 배는 더 큰 개새끼들의
주먹질에 맞고서도 냉정하게,
쿨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에는
스스로 시력을 망칠만한 가치가 있었다.)


Later, with inch-thick specs,
Evil was just my lark:
Me and my coat and fangs
Had ripping times in the dark.
The women I clubbed with sex!
I broke them up like meringues.

(훗날, 몇센치는 두꺼운 안경을 낀 나는
나쁜 남자가 되는 게 특기였다.
나와 내 외투와 내 송곳니는
어둠 속에서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다.
내가 섹스로 무너트린 여자들!
난 그녀들을 마치 과자 조각처럼 부쉈다.)


Don't read much now: the dude
Who lets the girl down before
The hero arrives, the chap
Who's yellow and keeps the store
Seem far too familiar. Get stewed:
Books are a load of crap.

(요즘은 별로 책을 안 읽는다. 주인공이
구하러 오기 전 장면에서 여자들을
버려두는 놈팽이, 겁에 질려 있는
가게 주인의 모습이 왠지 너무 익숙하다.
정신 차려라. 책 따윈 쓰레기에 불과하다.)







필립 라르킨(Philip Larkin, 1922~1985)은 20세기 후반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시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 전공으로 졸업하고는 거의 30년을 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시를 썼고, 또 평생을 '독서'로 채운 책 중독자였지요.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서'라고 해도 될 겁니다. 그런 그가 1964년에 낸 시집 "The Whitsun Weddings"에 실릭 이 시는 아주 역설적이게도 "책 따윈 쓰레기더미load of crap"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우한 학창시절을 독서로 견디고, 자라나면서 책 속에 나오는 환상적이고 멋진 삶을 동경했던 스스로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릴 적 책을 읽으며 꿈꿔왔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 속에 침식되었다는 인식을 자조적으로 술회하는 거지요.

그래도, 이런 시를 썼지만 라르킨은 어쨌든 계속 읽었고, 도서관에서 일하며, 시를 썼습니다. 아무리 자조해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책 중독자였습니다. 그리고는 오늘날 대시인의 반열에 올려지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자꾸 붙여대는 '대시인' 따위 호칭을 라르킨 본인이 들었다면 개나 줘버리라고 했을 것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해 보죠. 조선 시대 얘기.

아래는 정조 때 실학자인 이덕무가 친구 이서구에게 1770년대에 보낸 편지입니다.


집안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은 오직 [맹자] 일곱 권 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이백 냥에 그것을 팔았소.
그 돈으로 배불리 밥을 먹고 희희낙락 기뻐하며
영재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다오.

영재 또한 오래 굶주린 터라,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좌씨전]을 가져다 팔았소.
그리고 남은 돈으로 술을 사서서 나와 더불어 먹었소.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그 일로 우리가 맹씨와 좌씨를 천만 번 칭송하였으니,
한해 내내 이 두 책을 그저 읽기만 하였다면
어찌 굶주림을 조금이나마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야 비로소 책 따위 읽어 부귀를 바라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요,
당장 내다버려 한 번 배불리 먹고 거나하게 취하는 것이
훨씬 소박하고 가식 없는 삶임을 깨달았소.

서글프오, 서글프오. 족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癡라 일컬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종일 책만 보던 엄청난 책벌레였지요. 그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대부분이 '책 좀 빌려달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50대에 일찍 죽었음에도 일생 남긴 저서의 양이 엄청난 것도 그 독서의 덕일 겁니다.

하지만 이덕무는 서출이었던 관계로 관직에도 등용되지 못한 채 자신의 박식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습니다. 소외받던 가난뱅이 시절의 그에게 재능을 펼칠 장이 없었다는건 얼마나 분한 일이었겠습니까?

유교의 나라에서 유교를 대표하는 경전들을 읽고 외우며 살았는데 그 결과가 굶주림뿐이었다는 거지요. 아무런 보탬이 되지도 않는 그 책들을 팔아버렸을 때 그제서야 보탬이 되었다는게 그야말로 서글프고, 서글픕니다.


그래도 이덕무는 책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책이었고 받는 최고의 선물도 책이었으며 늘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그리고 79년 정조 때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었고, 그 친구들인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와 함께 '매서운 4검서관'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위 편지에서 등장하는 '영재'는 유득공의 호입니다.) 고증학과 실학을 중시한 그와 그 친구들은 소위 북학北學으로 일컬어지는 유파를 이룹니다만...


*이덕무와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는 함께 중국에서 시집을 내어 "사가四家"로 불리던 문인 친구들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이서구만 유일히 양반 신분으로 판서직과 우의정을 지냈지요.





때론 독서라는 행위가 실용따윈 없이 "환상의 이상과 뜬구름 잡는 소리"나 좇는 무용無用의 행위로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거 해서 뭐하나. 아무 소용도 없고, 다 부질 없는데. 그럼에도 사람은 책을 끊을 수 없고, 끊어서도 안됩니다. 뜬 구름 속 이상향을 머리 속에 그려내고, 이를 현세에 실천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때론 저도 저 존경스러운 영국사람과 조선사람들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독서와 제가 공부하는 학문에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게 현실적으로 무슨 소용있나. 현세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지요.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실용의 시대라는 세상에서.

....하지만 전 아직 읽어야 할 게 너무나 많습니다. 자조하고 회의할 '분수'도 없는 그냥 학생입니다. 아직 읽고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책, 읽으십니까?

책을 읽읍시다.






ps. 이덕무의 편지는 임유경씨의 [대장부의 삶](2007, 역사의 아침)을 보고 썼습니다.

정말 좋은 책입니다. 어제 쓴 '러셀 백작 가문 이야기'에 "왜 한국에는 이런 사람 없었냐"는 덧글이 달렸는데
글쎄요... 정말 없었을까요?

조선시대의 양반들, 그러니까 정말 끝없이 공부하고 생각하고 정치하던 '진짜 양반'들 얘기입니다.




이덕무에 관한 책으로는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안소영, 2005, 보림.)이 있습니다.
삽화들이 이쁜 책이지요. ^^



덧글

  • 초록불 2009/11/27 09:07 #

    조선 17세기의 명문가들을 다룬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김학수, 삼우반)이라는 책도 있지요.
  • 월광토끼 2009/11/27 09:46 #

    오오. 이번에 한국에 가면 필히 찾아 보겠습니다.
  • asianote 2009/11/27 09:41 #

    저는 개인을 말한 게 아니고 가문을 말한 것이지요. 사람이야 훌륭한 사람 어디 하나 둘입니까? 다산 정약용만 해도 일세의 걸물이니까요. 그리고 조선의 명문가들은 불행하게도 현대에는 눈에 띄지 않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 월광토끼 2009/11/27 09:53 #

    유성룡의 13대손 유시ㅁ...[퍽!]

    사실 그런 '가문'이 있다쳐도 한국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반反 양반의 감정과 조선 후기 양반계급이라는 존재의 붕괴 때문에 오늘날 아무 의미도 없을 겁니다. 다들 족보를 사고 만들고하니 오늘날 한국에서 조상이 양반 아니라 노비라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_-

    그리고 일제 강점기 동안 정말 배우고 뜻있고 애국심 있던 양반들은 독립운동 하다가 죽거나 가산 탕진했으니, 그 후손들이 남아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할만한 기반을 남겨주지 않았다는 것이 있겠죠. ...아니면 친일을 했거나.

    이시영 선생과 그 가족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주목받을만하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 연금으로 간신히 살고 있다는 게 그런 맥락에서 보여지는 것들 중 하나죠...
  • asianote 2009/11/27 09:45 #

    하지만 책에만 얽매이게 된다면 환빠가 된다는. OTL. 초록불 백신 같은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 아야소피아 2009/11/27 10:53 #

    아아...저 고결함이여...저 심오함이여...
    저 위대한 학자분들이 저렇게 말씀하실 수 있던 것은 역설적으로 많은 독서를 통해 '깨달음'을 먼저 얻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는게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월광토끼 2009/11/27 16:52 #

    그러니까요. 지혜는 결국 지식의 축적에서 나오는 거니까...
  • 꽃가루노숙자 2009/11/27 11:12 #

    (영어 실력은 젬병이지만) 맨 위의 영문에서 의역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느낌상으로도 머리라기 보단 코를 박고 있다는 게 더 임팩트가 있을지도...(...)

    여튼 저도 어릴적엔 책을 꽤 봤는데 크면서 점점 읽기가 힘들어지더군요.

    난독증이랄지 단순하고 삭막한 문장 외에, 시적 운율이나 살짝 꼰 문장엔 집중하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 월광토끼 2009/11/27 16:55 #

    사실 저도 '코'라고 하려다가 머리로 바꾼건데 아무래도 역시 코가 나을려나요.
    수정합니다.
  • 꽃가루노숙자 2009/11/27 17:11 #

    코를 박고 먹는다, 라는 표현이 있죠.

    좀 우악스러운 느낌이라고 할까, 몰두한다는 느낌도 있죠.
  • 효우도 2009/11/27 11:57 # 삭제

    필립 라르킨은 학창시절 양판소를 좀 읽은듯.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아무거나 읽으면 안돼겠지요.
  • 월광토끼 2009/11/27 16:57 #

    고고한 이미지에 비해 그가 가장 즐겨 읽은건 오늘날로 치면 3류 액션 판타지 소설.... 이었달까
    사실 라르킨은 일부러 저런 얘기를 쓴 거기도 합니다. 사용한 단어나 문장이나 모두 어렵거나 고급한 어휘 대신 최대한 '상스러운' 단어를 사용하고...

    아무튼. 아무거나 읽으면 안돼겠지만 아무거라도 계속 읽다보면 책을 고르는 변별력이 생기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 Allenait 2009/11/27 12:18 #

    저도 아직 읽고 배워야 할게 많군요..
  • 월광토끼 2009/11/27 16:57 #

    누구나 그렇겠지요...
  • 셸먼 2009/11/27 12:55 #

    아, 저 시를 보고 어디에나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닳았습니다(...)
  • 월광토끼 2009/11/27 16:58 #

    서양이나 동양이나, 과거나 현재나 다.. 다 같은 사람이고 사람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 솔로부대장 2009/11/27 13:15 #

    지식도 너무 과하면 중독되죠. 그게 악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냥 지나가면서 주절주절...
  • 월광토끼 2009/11/27 16:58 #

    그러니까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되는 거겠지요.
  • 솔로부대장 2009/11/27 15:03 #

    근데 그게 악영향을 줄만큼 공부한 사람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의문이군요.

    흐흐흐
  • 무명 2009/11/27 15:13 # 삭제

    아시발 겸손할라고 하지좀 마요
    존나 그런 사람들하고 비교해서 뭐함?ㅄ같네
    저런 인생 다산놈들하고 비교를해서 웅엉나병신이지랄하면 그냥뭐 병신이지
    님은 지금 할일을 다 하고 있는거 아님?
    애썩이 많아서 좀 욕좀 썼음ㅋ
  • 솔로부대장 2009/11/27 16:40 #

    마음에 쌓인게 많은듯.

    그냥 가서 술이나 드시죠. -_-;
  • 월광토끼 2009/11/27 16:58 #

    어.... 네?;
  • 억이 2009/11/27 20:15 # 삭제

    조선시대 대표적 독서 오타쿠(-_-;;) 이덕무의 이야기군요.
    저는 <미쳐야 미친다>(정민,2004,푸른역사)라는 책에서 보았습니다.
    조선시대, 별별 분야에 미친 양반들이 골고루 나오는 책이니 볼 가치는 있겠죠^^
  • 티이거 2009/11/28 10:59 # 삭제

    뭐 이제야 연구가 시작된 분야니까요...
  • Cheese_fry 2009/11/28 12:54 #

    양반 독서 오타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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