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켓과 모어. 두 성(Saint) 토마스에 대해.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과 토마스 모어Thomas More와의 사이에는 300여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베켓은 12세기의 인물이고 모어는 16세기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 두 인물에게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둘 다 이름이 토마스이며 둘 다 런던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의 공통점이다. 그 둘은 비슷힌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고, 사망 후 성자로 추증되었다. 왕권에 대항해 교회권력을 옹호했다는 이유 때문에.

토마스 베켓은 국왕 헨리 2세의 충복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독실한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었고 국왕의 술친구이자 충복으로 행세했던 인물이었다. 헌데, 헨리 2세가 교회 장악을 위해 자기 부하를 영국 카톨릭의 최고위직이었던 칸터뷰리의 대주교Archibishop of Canterbury로 임명했을 때, 이 '충복'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었다.

토마스 베켓은 대주교에 임명되자마자 교회의 권한과 재산을 대폭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헨리 2세의 모든 시도에 사사건건 대립했고, 그 둘의 충돌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성직자에 대한 사법권 또는 면책특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했는데, 왕이 1164년 제정한 클래랜던 법령에 대주교 베켓이 서명을 거부했을 때 이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흔히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식사 도중 화가 치밀어 오른 헨리 2세가 "Will no one rid me of this turbulent priest?(이 말썽쟁이 승려놈을 처리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라고 외쳤고, 이에 충성스럽던 기사 네 명이 이 말을 사형집행명령으로 알아듣고는 칸터뷰리로 달려갔다.



베켓의 죽음 자체에는 특출날 것은 없었다. 험상궂은 기사 네 명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서서 큰소리쳤고, 기사들은 그 지나치게 당당한 성직자를 칼로 내리쳐 죽였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시신을 염하던 다른 성직자들이 그가 죽는 순간에 고행대를 입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베켓은 교황에 의해서, 그리고 '고행대'에 감화받은 민간 신앙에 의해서 대성인으로 추증되었다.

이 사건은 여론을 헨리 2세에 불리한 쪽으로 악화시켰고, 베켓의 관을 찾는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헨리 2세는 그 관 앞에 무릎꿇고 앉아 참회를 하는 쇼를 벌여야 했다. 헨리 2세의 권력 약화, 그리고 그 비참한 최후에는 베켓의 죽음이 큰 몫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베켓의 죽음 300여년 후에 태어난 토마스 모어.



토마스 모어는 종교인이 아니었고, 태어나길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부터 그는 공무원이자 변호사로 일했고, 그 경력의 대부분은 법정에서 쌓였다. 그의 공무 집행은 명확하고 청렴했기에 일찍이 명성이 높았으며 그덕에 그는 국왕 헨리 8세 곁에서 자문관직을 맡아 왕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모어와 헨리 8세의 사이는 헨리 8세가 모어를 대법관Lord Chancellor에 임명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때는 마침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하려 노력하던 시기였다. 모어는 골수 카톨릭이었고, 동시대의 개신교 운동에 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헨리 8세 또한 본디 마르틴 루터에 대한 반박과 교황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가득찬 논문을 쓸 정도의 교황권 옹호자였고, 그럴 때 국왕과 모어의 견해는 일치했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앤 볼레인과 결혼하고,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며 왕실 재원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교회와 교황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모어는 더이상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헨리 8세에 대한 모어의 반발은 베켓의 헨리 2세에 대한 그것처럼 직접적이고 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어는 그저 입을 다물고, 발언 자체를 삼갔다. 얼마 안가 그는 대법관 직에서 스스로 사임했다. 그러나 모어는 이미 불순분자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그는 새로 공표된 충성서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그 내용에는 국왕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로마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어는 정치적 공격에 시달렸고 결국 반역죄로 고발되어 조작된 증거와 증인의 힘으로 유죄 판결 후 참수당했다. 베켓처럼, 모어도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증되어, 이제 그 이름 앞에는 Saint가 붙는다.

토마스 베켓과 토마스 모어. 두 인물의 삶은 상당히 비슷한 족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 다 교회 권력을 왕권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차이는 그 결과에서 나타난다. 헨리 2세는 실패했으나, 헨리 8세는 성공했다는 것. 헨리 2세는 그의 앙쥬벵 제국을 유지하지 못했다. 교회와 그 신자들의 반발 덕에 왕권은 약해졌다. 프랑스는 대륙 내 영국 영토들을 하나 둘 점령해나갔으며 제국을 유지할 재원은 언제나 부족했다. 그의 아들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고는 왕국을 분열시켰다.

한편 헨리 8세는 그의 남은 치세동안 교회권력과 교회재산, 교회토지를 철저히 분쇄해 나갔고, 그 수입으로 전쟁을 치르고 군대를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해 그 딸들에게 보완된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유출된 교회자본으로 부유해진 중산층이 해외무역에 투자를 시작하면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가 닦였다.

베켓과 모어 둘 다 현대의 평면적 해석을 통해 '독재자의 압제에 대항한 신실한 투사' 와 같은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를 떠나서 시대적 배경을 통해 그 둘의 이야기를 보자면- 베켓은 아직 강성하고 지배적이었던 교회권력의 영향력과 힘을 보여, 비록 살해당했을지언정 왕권을 누르는 신정적 중세사회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고, 모어는 그 자신이 전형적 르네상스-계몽 인문주의자면서, 강력해진 왕권과 무관심한 사회 앞에 몰락하는 교회 권력의 임종의 증인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불 수 있겠다.

참고:

문헌-
Marius, Richard. 1984. Thomas More: a biography. New York: Knopf.
Staunton, Michael. 2001. The lives of Thomas Becket. Manchester medieval sources series. Manchester, UK: Manchester University Press.

영화-
Becket (1964, Peter Glenville)
A man for all seasons (1966, Fred Zinnemann)


ps. 모어는 그의 저서 "유토피아"로 유명하지만, 그 자신은 유토피아에서 그려지는 이상사회나 그에 표현되는
주의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에 가까웠고, 인문주의의 대가로 손꼽힘에도
상당한 보수주의자였다. 물론, 그의 공직생활은 거의 고대 로마 공화국의 마르쿠스 카토의 그것에 비견될 만큼
청렴결백하기가 짝이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런던에 세워진 토마스 모어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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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의 토끼집' : 시스템과 무관히 내 멋대로 해보는 2010 이글루 결산 2010-12-29 09:46:35 #

    ... 성자는 영국의 역사에 있어 비슷한 일과 비슷한 배경 아래 대단히 큰 족적을 남긴사람들입니다. 그 둘과 영국 내 교회 권력의 변화를 엮어서 설명해 보자는 생각이 둘의 같은 이름 (토마스)을 보자 번뜩 뇌리를 스쳐 써내려간 글이 나름 유익했었기를 바랍니다. 8. 그리고 웨일즈. 흔히 유나이티드 킹덤 오브 브리튼을 구성하는 ... more

덧글

  • 오제영 2010/01/06 15:20 # 삭제

    자기 이름도, 대립한 왕의 이름도 비슷했군요. (헨리를 이름으로 봐야 하는 지는 좀 그렇지만,)


    헌데 첫번째 그림 자세히 보니 고어... 킬 빌의 루시 리우가 당한걸 당했군요.. 어째 머리가 이상하게 작더라니.
  • 월광토끼 2010/01/08 14:31 #

    헨리는 이름 맞습니다. 뭐 즉위하고 나서 '헨리 몇몇세' 라는 타이틀이 붙여지는게 아니라 그냥 애초에 퍼ㅡ트 네임이 헨리인거지요.
  • 맹꽁이서당 2010/01/06 15:41 #

    토머스 모어가 가톨릭에서 시성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지만, 성공회에서도 성인력에 이름이 올라간 것이 아이러니하더군요. --a
  • 월광토끼 2010/01/08 14:34 #

    엄밀히 말하자면 모어가 '공개적으로' 반대했던건 Protestant였으니까.. 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요.
  • 엽기당주 2010/01/06 15:41 #

    역사공부하면서도 토머스 모어같은 인문주의자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블랙코미디가 너무 웃기긴 했습니다만. -_-;;;;

  • 월광토끼 2010/01/08 14:35 #

    그런데 그가 신교(Protestant)에 대해 보인 입장 등을 생각하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갑니다.
  • 萬古獨龍 2010/01/06 16:08 #

    영국내 신권의 몰락과정을 비교해주는 두 인물들이군요. 재밌는 관점이라 잘 보았습니다. 사실 배킷은 모르고있었다능.(퍽) 토마스 모어는 그 죽음자체가 영국내 교황권의 퇴출(?)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배킷의 경우는 딱 하나만 생각나네요. 카노사의 굴욕.
  • 월광토끼 2010/01/08 14:36 #

    약간 경우가 다릅니다만...
  • zkskek 2010/01/06 17:04 # 삭제

    토마스 모어의 전체적인 생애를 보면(그리고 본문을 보면) 그가 시성된건 당연하죠. 그가 성공회 성인력에 올라간건 블랙코미디가 맞지만.

    그리고 한국인에게 토마스 베켓하면 역시 박신부죠, 말세편 시작하자 말자 말아 먹었지만.
  • 월광토끼 2010/01/08 14:33 #

    박신부가 뭔가요..? 박씨 성의 성직자인가요?
  • 슈타인호프 2010/01/08 15:03 #

    월광토끼//퇴마록의 박신부입니다. 박신부가 가진 성물 중 베케트가 남긴 십자가가 있지요.
  • 행인1 2010/01/06 21:16 #

    성공회도 성인력이 있군요....
  • Esperos 2010/01/07 18:15 #

    성공회엔 당연히 전례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성인 기념일도 당연히 있지요.
  • 월광토끼 2010/01/08 14:32 #

    성공회니까요. -구조적으로 카톨릭하고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 부단뽀이 2010/01/07 15:43 #

    고행대가 뭔가요?
  • Esperos 2010/01/07 18:17 #

    가시나 돌기가 난 허리띠, 아니면 조끼 등을 입어서 눞거나 움직이면 몸에 상처를 내도록 한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교황 바오로 6세(1960년대 말 즉위)도 고행 조끼를 입었지요. 중세 성인전을 보면 고행대를 입고 생활했다는 성인들이 꽤나 많습니다.
  • 월광토끼 2010/01/08 14:36 #

    에스페로스님의 설명대로입니다.
  • 네비아찌 2010/01/07 16:59 #

    두 사람 모두 원래는 왕의 최 측근이었다가 새로운 자리에 임명되자 "자기 자리에 요구되는 역할"에 대한 충성을 왕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시 한 점도 같군요.
    이런 걸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 월광토끼 2010/01/08 14:37 #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게 좀 더 보편적인 진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 -_-
  • 만슈타인 2010/01/15 12:08 #

    심지어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 얘기하는 놈 까는 놈으로 자신을 넣었더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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