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모티에의 일생 - 05.

대륙 의회 (즉, 미 연방 임시정부)는 라파예트 후작과 그 일행을 문전박대 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딘의 추천서와 한발 늦게 당도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추천서를 검토하며 신분조회를 한 결과 라파예트는 '그냥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하면서 미국으로 달려 온 '후작님'임이 확인되었고, 이에 자신들의 실수를 이해하자마자 혼비백산한 미 의회가 즉시 라파예트를 다시 불러들여 사과와 함께 당장 Major General (소장) 계급장을 수여한다.

사실, 중대 규모 이상은 지휘해 본 적도 없는 열 아홉살 청년을 덜컥 장군으로 임명한 처사는 상당히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미 의회가 이런 결정으 내린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그 수개월 전의 뉴욕 전투에서의 패배와 뉴욕 함락은 프랑스의 대미 원조 중단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미국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프랑스와의 동맹이 위태롭게 된 상태였다. 그리고 라파예트 후작은, 국왕 루이 15세의 출국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틱하게 미국행을 택함으로써 프랑스 정계와 사교계에서 일약 스타가 되어, 국왕조차 암묵적으로 그 행위를 용인하게 된 인물이었다. 게다가 유서 깊은 대 귀족 가문의 후작이라는 직위도 있었다. 다시 말해, 미-불 동맹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 라파예트 후작에 대한 예우가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라파예트는 필라델피아에 도착한지 나흘 만에 소장 계급장을 단 채 대륙군 총사령관인 죠지 워싱턴 중장과 만찬과 면담을 가지게 된다. 이 자리에는 라파예트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그와 함께 온 다른 프랑스인 장교들도 동석하게 된다.

[1777년 7월 31일, 미국 필라델피아 시내의 한 식당에서. 쥘베르 뒤 모티에와 죠지 워싱턴의 만남.]



호사가들은 그 날 저녁 라파예트와 워싱턴 사이에 '운명적인 교감이 이뤄졌다'던가 또는 '그 둘은 한 눈에 서로의 위대한 자질을 알아 보았다' 따위의 거창한 수식과 함께 그 순간을 미화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워싱턴 장군 입장에서는 전혀 필요도 없는 프랑스인 '장군'들이 군영에 몰리는 것이 극히 유감이었고, 그리고 그 날 워싱턴은 지극히 저기압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 처해있었다.

영국 남부 방면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중장은 뉴욕을 성공적으로 점령한 후 빙글빙글 돌면서 워싱턴과 그의 오합지졸 대륙군을 낚아내려 하고 있었고, 점진적으로 남진해오며 미국의 수도 필라델피아를 압박해 들어오는 중이었다. 겁에 질린 미국 (임시) 정부는 필라델피아시를 요새화하여 시가전을 준비하자고 워싱턴에게 졸라대었으나 워싱턴은 어차피 야전에서 못 이기면 필라델피아는 영국군에게 뺏길 것이며, 그런 곳를 요새화 하면 그건 영국군 손에 넘어가 사용될 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그 날도 의원들과 갑론을박을 벌인 터였다. 여기에 북부 방면군 사령관인 호레이쇼 게이츠는 대륙군 총사령관직을 노리고 워싱턴을 모함하며 정치공작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 날 라파예트가 워싱턴으로부터 면전에서 무시받지 않고 환대 받은 것은 오로지 워싱턴이 의회로부터 미-불 동맹 관계를 고려하여 극진히 대접하라는 요청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워싱턴은 라파예트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가지진 않은 것 같다. 그 며칠 후 전군 사열식을 열고 라파예트를 초대시켰으니까.





그러나 그 사열식의 대륙군은 사열이라는 단어가 무참할 정도의 오합지졸들이었다. 대오도 잘 못갖춰, 장비는 다 제각각이거나 고장난 폐품에 제식 군복도 없이 얼룩덜룩한 누더기를 걸친 자들이 대다수. 라파예트는 훗날 회고하면서 그 날 그가 본 군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1만 1천 명의 남자들. 무장도 제대로 못 갖췄을 뿐더러, 의복은 그보다 더더욱 못 갖춘 사람들이 거기 서 있었다." 그런 오합지졸들은 몇 주 안에 윌리엄 하우 중장 지휘 하의 최정예 대영제국 육군 1만 5천을 상대해야 할 터였다.


이 때 라파예트는 자신의 계급에 걸맞게 1개 사단의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는 (당연히) 정중하게 거절된다. 라파예트는 자신의 무예를 뽐내고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을 생각에 들떠 활발히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회는 그가 워싱턴 지휘 하에 편입된지 한 달 만에 찾아오게 되었다.


[7년 전쟁에서 군력을 쌓았던 영국군 베테랑 윌리엄 하우 중장.]



곧, 윌리엄 하우 중장 휘하 영국군이 필라델피아 코 앞에 당도하였으며, 그 8월 한 달은 필라델피아 주변에서의 영국군과 대륙군 양군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견제 기동으로 점철되었다. 양측이 서로 최적의 공격과 방어의 기회를 엿보며 빙빙 돌며 의미없는 행군을 하였으며, 8월의 미국 동해안 남부의 습기차고 푹푹 찌는 열기는 양군의 사기와 체력을 저하시켰다. 워싱턴은 떨어진 사기를 올리기 위해 잠시 필라델피아로 회군해 전군에게 때빼고 광내고 시가행진을 하게 했는데, 그런 블러프는 아군에나 적군에나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8월 25일에 워싱턴의 대륙군 1만 4천은 필라델피아 시 남쪽에 진을 쳤고, 그보다 더 남쪽에는 하우의 영국군 1만 5천이 북진하는 모양세가 되었다. 양군 사이에는 브랜디와인Brandywine이라는 이름의 긴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브랜디와인천 중/하류에는 도하 가능 지점이 일곱 군데 있었고, 워싱턴은 정탐병으로부터 그 일곱 군데 외에는 도하 지점이 없고 북쪽의 강 상류는 완전히 막혀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는 치명적으로 잘못된 보고였다.


9월 11일 오전 9시. 영국군은 지형과 대륙군 배치를 면밀히 조사한 후 진군을 개시한다. 워싱턴이 전 병력을 브랜디와인 하류에 집결시켜 도하지점을 방어하고 있는 방면으로는 독일인 크내프하우젠 장군이 지휘하는 6천 8백명의 헤센 보병대가 진격했고, 그 동안 하우 장군의 부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챨스 콘월리스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군 본대 8천 2백명이 대륙군 몰래 북쪽으로 이동, 브랜디와인천 상류 지점에서 도하를 하는 양동작전이 벌어졌다.


[1777년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



오후 네시 반에는 워싱턴이 만일을 대비해 배치해 둔, 존 설리반 소장 예하 후방 부대 3개 사단이 북쪽으로부터 날아오는 포격에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그제서야 자신이 완전히 허를 찔렸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워싱턴은 이 순간 짧은 메모를 필라델피아의 의회에 보낸다. "오후 네시 반 경, 적군이 설리반 장군의 부대를 하천 북쪽에서 공격,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 중. 매우 극렬한(Severe) 포격이 이쪽에도 가해지기 시작함. 아주 뜨거운 저녁을 보낼 것임."

이때까지 하는 일 없이 사령부 막사에서 지휘부가 하는 일을 구경만 하고 있던 라파예트는 바로 그 때 워싱턴에게 자신을 설리반 예하 부대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워싱턴은 건성으로 요청을 수락했고, 라파예트는 즉시 말을 달려 설리반의 부대와 합류한다. 라파예트가 합류한 것은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육군 장교였던 토마스 콘웨이 준장이 지휘하는 여단이었고, 라파예트는 그 부대에게 착검 돌격을 지시한다. 그렇게 돌격하는 동안 라파예트는 영국군의 총탄에 의해 왼쪽 넙적다리가 관통당했으나, 그는 자신이 다친 것조차 모르고 싸우다 쓰러졌다.





콘월리스 예하 영국군 본대가 공격을 시작한 것을 신호로, 크내프하우젠 예하 헤센군도 브랜디와인의 도하지점을 향해 전면공격을 가했다. 전선 두 곳에서 동시에 가해진 협공에도 대륙군은 놀라울 정도로 오래 버텼지만, 결국 두 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전열이 무너져 패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버티려던 워싱턴은 결국 전군 퇴각을 명했다. 영국군이 백여명의 전사자와 5백여명의 부상자를 낸 반면 대륙군은 3백여명이 전사했으며 4백여명이 영국군에 포로로 붙잡혔고 5백여명이 부상을 입은 대패였다. 그 5백명의 부상자 명단에는 라파예트도 끼어 있었다.


그 날 밤 간신히 패퇴를 중지하고 대오를 정비한 워싱턴과 그 휘하 지휘부는 체스터 인근의 농가에서 휴식을 취한다. 그들이 농가에 들어섰을 때 라파예트는 식탁 위에 누워 총상을 치료받는 중이었는데, 그는 워싱턴과 다른 장군들을 보고 자신을 '음식으로 착각하진 말아달라'고 농을 던졌다고 한다. 워싱턴은 농을 무시한 채 '난 너무 피곤하니 자네들 중 하나가 의회에 보낼 전투 보고서를 작성하게'라고 한 후 침실로 향했다.

그 날의 전투 보고서는 워싱턴의 부관이었던 토마스 픽커링이 작성했다.


"1777년 9월 11일 심야. 체스터.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교전에서 우리는 적에게 전장의 우세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의 양동작전과 우회기동에 관한 정보는 불행하게도 모순되거나 불완전하게 전달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병력을 방어에 적합하게 재배치하지 못했고, 적과 처음 교전에 들어간 부대는 전열을 보강받기 이전에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불운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의 사기는 높으며 오늘의 손실을 되갚을 날이 곧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라파예트 후작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날 라파예트의 '활약'이 얼마나 대륙군에게 보탬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대단치 않은 것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실제로 대활약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던 이것이 열 아홉 살 후작의 생애 최초 전투 경험이었다.



[후대에 그려진, 이 날 라파예트의 '활약'을 좀 미화한 그림]




계속.



본 기획의 이전 글들: http://kalnaf.egloos.com/tag/LifeOfLafayette



본 기획의 참고 서적:

Gaines, James R. 2007. For liberty and glory: Washington, Lafayette, and their revolutions.
New York: W.W. Norton & Co.

Unger, Harlow G. 2002. Lafayette. New York: John Wiley & Sons.

덧글

  • 01410 2010/02/02 08:32 #

    잘 보고 있습니다.
    라파예트는 적어도 20대 후반일 것이란 이미지였는데 실제로는 완전 혈기끓는 알라(?)였군요...
  • 월광토끼 2010/02/02 09:18 #

    네. 20대 후반인건 프랑스 혁명 전야 때나 되서야.
  • dunkbear 2010/02/02 08:38 #

    정탐병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일단 안전망은 쳐놓고 있었군요.
    그래도 결국 졌지만 멍청하고 무사안일하게 있다가 당하지도 않은...
  • 월광토끼 2010/02/02 09:18 #

    Rear Guard 라는건 상식있는 군인이라면 반드시 배치해 놓아야 하는거니까요
  • 아브공군 2010/02/02 08:50 #

    잘 보았습니다.
    라파예트도 어느정도는 싸울 줄 아는 군인이었군요.
  • 월광토끼 2010/02/02 09:18 #

    뭐 얼마나 싸운건진 모르겠습니다만..
  • Allenait 2010/02/02 09:09 #

    브랜디와인 강이라면 저기는 호비튼이겠군요(도주)

    허. 진짜 혈기가 끓는 청년(?) 이군요
  • 월광토끼 2010/02/02 09:19 #

    ....지명 드립이라니 OTL
  • shaind 2010/02/02 17:50 #

    아니죠 호비튼보다는 버크랜드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합니다....(맞는다)
  • 초효 2010/02/02 09:13 #

    저런 부상을 입고 다리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군요.(당시 의술을 생각하면...--;;)
  • 월광토끼 2010/02/02 09:20 #

    납탄이 살 속에 푹 박혀 남은게 아니라 쑹 관통해버려서 그렇습니다. 관통상이면 의술 수준에 관계없이 엥간해선 동맥을 맞았다던지 해서 출혈과다 되는게 아닌 이상 이상은 없죠..
  • guybrush 2010/02/02 09:38 # 삭제

    관통상이라 다행이었군요. 저 시대의 사극을 보면 다리에 총알이 박힌 사람은 무조건 다리를 잘라내던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 월광토끼 2010/02/02 09:59 #

    무조건 자르는게 아니라 일단은 칼과 가위와 집게를 사용해 끄집어내긴 합니다. 다만 위생이 좀...
    마이 드러운 터라 납 중독 / 중금속 오염 또는 총알 빼내는 수술 도중 감염 으로 인해 상처부위가 썩어 문드러지는 경우죠. 그럴 때 싹독 자릅네다.

    또는 관절같은 부위를 지대로 맞아서 아작이 났다거나... 그런 경우에도 잘라 내긴 합니다.
  • 엽기당주 2010/02/02 09:44 #

    애들에게 소장계급을 주면..

    전투개요도를 보니 흔히 말하는 후장털기에 당한거군요.

    불쌍한 대륙군..영국군에게 그만..
  • 월광토끼 2010/02/02 10:00 #

    그렇습니다. 후장 버진을... 이 아니라 이미 여러번 털린 대륙군이기이 괜찮습니다[.]
  • ㆍㅅㆍ 2010/02/02 09:54 #

    대륙군 부상자 수가 5백명과 6백명으로 동시에 적혀 있습니다.
  • 월광토끼 2010/02/02 10:00 #

    지적 감사합니다. 즉각 수정했습니다.
  • 검투사 2010/02/02 10:38 #

    오오 얼마만에 뵙는 후작가카인지... ^0^/
  • 지나가던과객 2010/02/02 10:43 # 삭제

    그래도 후작이라는 작위가 있으니 전투에 참가라도 해봤지, 그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못해봤을것 아닙니가? 뭘 하려면 간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중요한 교훈이군요
  • 들꽃향기 2010/02/02 11:17 #

    그래도 귀한 손님 대접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가 전선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다쳤으니,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잉여스러운' 이미지를 환골탈퇴해, '전우'로서 인식될 수 있었겠군요. 잘 읽고 갑니다. ^^
  • 크핫군 2010/02/02 11:33 # 삭제

    브..브랜디와인! 브랜디벅이 사는곳인가!!!(어?!)
  • 행인1 2010/02/02 14:25 #

    오늘도 안습의 대륙군이군요. 그나저나 라파예트 후작님은 그날 (당시 의술을 감안하면)운이 좋았던듯 합니다.
  • 데프콘1 2010/02/02 20:05 #

    엠파이어 토탈워에서 영국군으로 우회해서 밀어버리면 워싱턴도 죽일 수 있죠. 게임에서 워싱턴이 도망가다가 포격에 말과 함께 날라가 버렸습니다. 사망 장군 이름이 워싱턴이라서 깜놀했다능
  • 황제 2010/02/02 20:54 #

    헐퀴..... 싸우긴 싸웠군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삼왕국 전쟁사 또는 단순히, 영국 내전사

7년전쟁 북미전역

말보로 공작의 일생

로열 네이비 이야기

이베리아 반도전쟁

라파예트 후작의 일생

영국육군 블랙왓치 부대史


통계 위젯 (화이트)

134145
973
4703278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1420

I Support ROKN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아지캉 최고

9mm Parabellum Bullet

the pill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