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모티에의 일생 - 07.

라파예트 후작은 '충성 선언' 이전에 이미 대륙군의 요직에 앉은 상태였다.

라파예트 후작은 처음 대륙군에 합류한 시점에서부터 자신에게 일개 사단의 지휘권을 달라고 줄기차게 요청 해왔다. 당연히 총사령관 죠지 워싱턴은 이러한 요청에 대해 '이 애송이가 뭐라는 거야' 정도의 생각을 가졌고, 그 요청에 대해 불평하는 서한을 의회에 한 번 보내기까지 했었다. 그런 덕에 라파예트 후작은 8월부터 11월까지 브랜디와인 강 전투 때 잠깐 나선 것 외에는 1개 사단은 커녕 1개 소대조차 지휘할 일 없이 이름뿐인 장군으로 남아 있었다.

그 때, 즉 11월 중순에 영국군은 뉴저지 주를 장악하기 위해 별동대를 필라델피아로부터 파병했고, 이 부대를 견제하기 위해 워싱턴은 휘하의 나다니엘 그린 소장 지휘 하에 5천여명의 부대를 출동시킨다. 라파예트 후작은 여기에 함께 가겠다고 자원했고, 바로 이 때 라파예트는 처음으로 단위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그린 장군은 부대를 기동하면서 영국군 전위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라며 라파예트에게 버지니아 민병 중대들로 구성된 1개 대대의 지휘권을 맡기며, 라파예트는 신이 나 이 1개 대대를 이끌고 앞서 나간다.

11월 25일에 뉴저지 주의 마을 글로스터Gloucester 인근에서 라파예트는 전진배치되어 있던 영국군 휘하 헤센군 1개 대대의 야영지를 발견하고 공격을 가했으며, 경계를 하고 있지 않던 헤센군은 이 공격에 놀라 퇴각했다. 라파예트의 대대는 이 작은 교전에서 1명이 전사하고 다섯 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헤센군 스무명을 사살하고 다시 스무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린다. 이 소식에 워싱턴 장군은 그제서야 라파예트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으며, 전투 바로 다음 날인 11월 26일에 의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실제로 라파예트 장군의 소장 계급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단장으로의 임명에 동의함을 밝혔다.


마침 그 전 10월 4일의 저만타운 전투에서 명령 불복종 및 작전계획 무시에 아군에 대한 오인사격까지 저지르고, 전투 중 만취 상태였던 것이 밝혀져 직위 해제와 동시에 군사재판에 회부당한 아담 스티븐 소장Major General Adam Stephen, 1721~1791 휘하의 사단 지휘관 자리가 공석이었고, 라파예트는 12월부터 그 '스티븐 사단'의 지휘관에 임명된다. 그때부터 그 사단은 '라파예트 사단Lafayette's Division'이 된다.

갓 스무살이 된 이 외국인 귀족 청년이 지휘를 맡게 된 사단은 버지니아 경보병 연대들 -제 1, 제 2, 제 6 버지니아 연대 등-로 구성된 부대였는데, 그렇게도 요망하던 지휘권이 주어지자 '너무나 신이 난' 나머지 라파예트 후작은 먹고 자는 것도 잊고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자기 사비를 들여 그 휘하 부대를 위한 새 군복과 장비를 마련했으며, 휘하 중대장 이상의 장교들에게 화려하게 장식된 지휘도들을 선물했다. 검증되지 않은, 스무 살의 외국인 귀족의 지휘를 받게 되어 불안해 했을 그 군인들은 아마 신임 지휘관의 호의와 열정에 곧 안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라파예트가 그들을 느슨하게 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라파예트는 자신이 받은 프랑스 육군의 엄격한 훈련 규율을 자기 휘하 부대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라파예트가 지휘권을 받게 된 시점부터 대륙군은 장기 숙영에 들어간다. 1777년 12월부터 1778년 5월까지 대륙군은 펜실베이니아 주 북부의 포지 계곡Valley Forge에서 겨울과 봄을 나며 주둔하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 유명한 '포지 계곡의 겨울'이라고 불리우게 된 대륙군의 암흑기다. (라파예트의 '충성 선언' 도 이때의 일이다.)


근래의 잇따른 주요 교전에서 대륙군은 연패를 당했다.
수도 필라델피아가 함락당했다.
따라서 사기가 바닥이었다.
대륙군에는 돈이 없었다. 의회에서 발행한 어음도 휴지조각이 되었다.
탄약과 무기가 부족했다.
식량이 없었다.
겨울 의복을 준비하지 못했다.
따라서 미국 동해안 중북부의 매서운 겨울을 나기 힘들었다.
숙영지 전체에 폐렴과 설사병 등 전염병이 돌았다.

그렇게 해서 아사자, 동사자, 병사자, 그리고 많은 수의 탈영병이 속출했다.



[포지 계곡에서 병사들을 시찰하는 워싱턴 장군과 라파예트 후작.]



라파예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 휘하의 부대만이라도 규율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일반 사병들의 어려움을 공유하며 생활한다. -물론, '어려움을 공유했다'는 것도 어느정도 필터링을 해서 이해해야 한다. 라파예트는 담요를 둘러싸고 통나무집 속에서 잘 수라도 있었다. 그의 부하들은 담요조차 없이 옹기종기 모여 바람이 솔솔 통하는 천막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런 암울한 때에 대륙 의회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캐나다에 대한 공세를 계획한다. 게이츠 중장과 콘웨이의 입김이 작용한 국방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이 원정은 콘웨이가 이끌게 될 예정이었다. 이에 워싱턴은 라파예트를 그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자기 편'임이 입증 된 라파예트를 통해 콘웨이를 견제하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던 라파예트는 명령에 따라 뉴욕주 알바니로 여행해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캐나다 원정 예정 부대의 상황을 감사한다. 포지 계곡으로부터 알바니까지의 여정은 아주 거칠고 고된 것이었고 (이 때 라파예트가 집에 보낸 편지는 그의 보통 편지와는 달리 짜증으로 가득 차 있다. '쏟아지는 비에 찔리고, 가끔은 쏟아지는 눈에 덮혀 여행하오. 가끔씩 길에 화가 나고, 내 말에 화가 나고, 모든 것에 화가 난다오.') 그 고된 여정 끝에 도달한 알바니에 있던 부대의 상황은 포지 계곡의 워싱턴 휘하 대륙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장거리 원정은 커녕 겨울 숙영조차 불가능한, 누더기 걸친 오합지졸들이었고, 처음엔 지휘를 맡게 된 이상 전력을 다해 원정을 준비하려던 라파예트는 그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

만약 캐나다 원정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면, 패배할 것이 뻔했다. 라파예트는 원정계획 자체를 포기할 것을 의회에 건의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해임하고 콘웨이를 작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방안 또한 반대했다. 원정을 이끌게 되어 실패하는 것도 치욕이고, 자신이 사임하고 그 자리를 콘웨이에게 맡기는 것 또한 자질이 없어 해임되는 모양새로 비치는 것 또한 치욕적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라파예트는 알바니에 부임한지 한 달도 안돼 포지 계곡으로 송환되고, 1778년 3월에 복귀한다. 그렇다고 콘웨이가 후임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포지 계곡의 겨울'의 암흑기는 점차 지나가고, 상황은 점점 나아지기 시작한다.

소위 '콘웨이 음모'와 게이츠의 뒷공작은 대부분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고, 콘웨이는 자신에 대한 대우가 안좋아지자 사임하겠다고 위협했으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의회는 그의 사임을 수락해버린다. 콘웨이는 멍하니 직위가 해제된 채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콘웨이는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육군 장교였다)

또한 워싱턴의 지휘권에 대한 압박행위가 많은 장교들에 의해 비판받게 되자 게이츠 장군과 그의 부하들 또한 워싱턴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게 된다. 동시에 게이츠와 콘웨이가 입안했던 캐나다 원정작전 또한 무효가 되었으며, 게이츠는 책임을 지고 국방위원장 직에서 사퇴하고 북부군 야전 사령관 직으로 돌아간다. 워싱턴과 게이츠는 편지를 통해 화해한다.


대륙군은 이제 최악의 상황을 넘겼고, 이제 단련될 차례였다. 1778년 2월에, 프로이센 육군 장교 프레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 남작Baron Friedrich Wilhelm von Steuben이 포지 계곡의 대륙군 야영지에 도착한다. 대륙군의 훈련 감찰관이 된 슈토이벤은 즉각 '프레드리히 대왕의 군대'식 규율과 전투훈련을 대륙군에 도입하고,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대륙군의 기강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진짜 군대 다운 군대로 만든다. 겨울은 끝나갔으며 대륙군 정규군은 슈토이벤의 지휘하에 거듭된 사격훈련, 제식훈련, 규율 엄수를 통해 영국군과 정면으로 맞붙을만한 실력을 기르게 된다.


[포지 계곡의 대륙군을 훈련시키는 슈토이벤 장군]



그리고, 그보다 앞선 1777년 12월에 새러토가 전투 승전과 버고인 장군 휘하 영국군 9천명의 항복(10월의 일) 소식이 대서양을 건너 뒤늦게 프랑스 베르사이유에 당도했다. 파리의 프랑스 지도층은 술렁였고,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공식적으로 미국과의 외교협상을 시작할 것을 명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외교활동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 결과.


1778년 2월 6일, 프랑스와 미국은 동맹을 맺는다. 드디어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전쟁에 나선 것이다.







앞으로 계속


본 기획의 이전 글들: http://kalnaf.egloos.com/tag/LifeOfLafay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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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게 부연 설명을 하자면, 서양 군대에서 고정된 단위부대로서의 '사단'개념이 정착된 것은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공화국군이 처음이었고, 그때까지는 언제나 군대의 기본이자 최상위 구성 단위는 '연대'Regiment'였다. 다수의 연대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쓰는 '여단'Brigade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이건 '제 13 여단' 이라던지 그런 고정된 구성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그때 그때 편제가 바뀌는 물건이었다. 'Division', 즉 사단도 같은 맥락에서 야전군의 규모가 클 경우 그렇게 유동적으로 구성되었다. 미 독립군, 즉 대륙군Continental Army의 경우 창설될 당시 워싱턴 장군은 휘하 부대를 3개 사단Division으로 나누어 운용했으나, 이 또한 상당히 유동적인 편제였으며 역시 군의 기본 편제는 여단Brigade이었다. 그런지라, 오늘날 6천에서 1만 명 정도로 구성되는 1개 사단의 구성은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제국군에서야 정착되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기 대륙군의 '1개 사단'은 대개 4천명 미만이었으며 2개 여단 정도로 나뉘어졌다. -프랑스 다음으로 고정된 사단 편제를 도입한 것은 영국인데, 그것도 19세기 들어서였다. 그 후에도 영국군은 많은 경우 Regiment 단위의 유동적 편제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제대로 된 정규 육군을 존속시키지 않았던 미군에서 사단 편제가 생겨난 것은 1860년대, 즉 미국 내전 때에 이르러서였다.-


*부연설명 2 : 책들마다 다 Division과 Brigade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게 혼용되고 있는 것 같아서 혼란스럽다. 그냥 현대 육군 편제 를 염두에 두지 말고, 간단하게 '라파예트는 수천 명의 지휘를 맡았다' 정도로 이해하도록 하자.



ps.
참고서적으로 최근에 도서관에서 빌린 "Lafayette and Three Revolutions"란 책. John Simpson Penman이란 학자가 쓴 책인데, 방금 아무 생각 없이 첫 페이지를 펼쳤다가 깨달았지만 무려 1926년에 출판된 책이었다. 게다가 초판본!! 도서관 카드에는 무려 1956년에 우리 학교 학생이 빌린 기록이 남아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누나



ps.2.
한국에 계신 독자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떡국 많이 드시고 차례 음식 많이 드세요.
외국 나가면 가장 그리워지는게 차례 음식입디다. 가장 한국적이고 맛있는 한국음식이 차례음식인 것 같음.

덧글

  • Allenait 2010/02/14 10:35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그리고 이제 프랑스의 국고가 털리겠군요(...)
  • 천하귀남 2010/02/14 10:40 #

    잘보고 있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 초효 2010/02/14 10:45 #

    한 나라는 국고 좀 채워보려다가 식민지를 잃고, 한 나라는 미운 나라 개바를려다가 국고를 탕진하고...
  • 행인1 2010/02/14 11:09 #

    포지 계곡은 정말 어떻게 넘겼나 놀라울 정도입니다. 오바마도 취임 연설문에서 살짝 언급하더군요.(국초의 이런 위기도 잘 넘기고 오늘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런식으로)
  • 엽기당주 2010/02/14 11:24 #

    노숙도 스킬이다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노숙을 잘하는 군대는 강군이랍니다. -_-;;;;
  • 들꽃향기 2010/02/14 11:53 #

    잘 읽고 갑니다. 만일 게이츠 장군의 제안대로 캐나다 원정이 이루어졌다면, 대륙군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여력까지 탕진하고, 역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참전을 이끌어내지 못했겠죠;;
  • dunkbear 2010/02/14 13:20 #

    잘 읽었습니다. 월광토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
  • 迪倫 2010/02/14 14:07 #

    상당히 국제전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군요. 이때 네덜란드는 아직도 잉글랜드가 예전 자기들에게 깨지던 시절같은 줄 알고 독립군편을 들었다가 4차 앵글로-더치전쟁에서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던데, 미국 독립에 관련된 유럽의 세력재편도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가까이면 떡국이라도 나누면 좋을텐데, 아쉽네요.
    아무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조이 2010/02/14 15:40 # 삭제

    허허허. 자기가 맡은 사단 장병들에게 새 군복을 뽑아주다니.... 깜빡 잊었지만, 역시 라파예트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대귀족이군요.^^ 저런 게 바로 의미있게 돈을 쓰는 거지요.
  • 프레디 2010/02/14 18:04 #

    전부터 신경쓰이건 건데, Gloucester는 글로세스터가 아니라 글로스터로 읽는 것 같습니다. 중간의 ce는 묵음이지요. 리처드 3세 영화를 보니, 영어 자막으로는 Duke of Gloucester라고 하는 상황에서 발음은 글로스터더군요.
  • 소시민 2010/02/14 18:50 #

    저도 학교 도서관에서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 대출 기록이 남은 책을 빌려본적이 있는데

    1956년이라 ㅎㄷㄷ이로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아인베르츠 2010/02/15 22:50 #

    드디어 프랑스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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