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 13 (1809~1814) : 진격과 후퇴

이 포스트는 흔히 '살라만카 전투에 이어 비토리아에서도 영국군이 승리함으로써 반도전쟁이 끝났다'로 압축 묘사되는 그 살라만카와 비토리아 사이의 시간에 웰링턴과 영국군이 어떤 일을 겪었고 무엇을 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다.

[살라만카 전투]


웰링턴의 영국군은 살라만카 전투 를 통해 프랑스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반도 전쟁의 판도 자체가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군은 살라만카의 승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살라만카 전투 3주 후, 죠제프 왕과 프랑스인들이 버리고 도망간 수도 마드리드에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보무 당당히 입성한 것은 1812년 8월 12일의 일이었다.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영국군을 환영했으며 어떤이들은 그 지휘관 웰링턴 자작 아서 웰즐리 앞에 엎드려 마치 성인에게 하듯 절까지 올리려 했다. 군인들은 이런 열렬한 반응에 무척 감동받으며 신나했으나 아서 웰즐리만큼은 이런 반응에 별 감흥을 받지 못했다.

“난 지금 영광적으로 환희에 들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하지만 난 스페인인들의 열정에 별 기대가 없다. 그들은 ‘비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호감을 하지고 있고 프랑스인들을 증오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는 어떤 나라의 국민들보다도 무능하며 허영심만 가득함과 동시에 무지한 자들이다. 그들은 특히 군사적인 것에 무지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네 나라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행위들에 대해 가장 무지하다.”

(1812년 8월 17일, 국방장관 헨리 바서스트 백작에게 보낸 웰링턴의 편지 중)

이런 무지막지하게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드리드로 향하게 된 것은 정치적 의미와 전략적 고려 양자의 이유 때문이었다. 마드리드를 점령함으로써 상징적 승전을 선포함과 동시에 스페인 내의 프랑스군의 효율적 집결지점을 (정 중앙이니까) 없앨 수 있었으며, 또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의 피로와 위태로운 보급상황을 타개하는 것도 필요했다.

이 시점에서 부상 당해 실려가는 마르몽과 사령관 대리 클로젤이 이끄는, 비록 만신창이로 후퇴중이지만 일단은 단위부대로서의 기능은 하고 있는 포르투갈 방면군, 그리고 황망히 발렌시아 방면으로 피난 중인 죠제프 왕의 중앙군은 술트 원수의 안달루시아 방면군과 합류하여 영국군의 진공을 멈추려고 한다. 웰링턴 입장에서는 술트 원수의 안달루시아 방면군이 카디스로부터 북진하여 공격을 가하기 전에 제빨리 진공하여 스페인내 프랑스 점령지를 뒤집고 프랑스로 향하는 길을 끊는게 작전의 주 목적이 되어야 할 터였다.

[1812년 8월의 상황]


영국군이 스페인 중부 지역을 장악하고 작전의 높은 자유도를 유지하며 프랑스로 가는 길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술트의 안달루시아 방면군이 타구스 강 이남에 가둬져 북상 하지 못하도록 도하를 막는다.
2. 후퇴중인 포르투갈 방면군을 계속 에브로 강 이북으로 몰아낸다.
3. 발렌시아 방면으로 향하는 죠제프 왕의 중앙군과 술트의 합류가 최대한 늦춰진다.
4. 에브로 강, 더 나아가 피레네와 프랑스로 통하는 길목으로 향하는 지점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그 길목의 부르고스 요새를 영국군이 신속히 장악한다.
5. 비가 많이 와 타구스 강물이 불어 도하지점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6. 스페인군/게릴라들이 영국군의 지시에 협조를 잘 해줘 공조한다.

이 조건들은 1812년 8-9월 시점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었다. 부르고스는 낡고 방비가 약한 요새였고 코르테스 헤네랄레스(스페인 의회 – 당시 영국군과 함께 카디스에서 농성 중이던 망명 정부)는 웰링턴 후작(살라만카의 승전보 덕에 후작으로 승급했다)에게 스페인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했다. 타구스 강은 매년 풍부한 강우량 덕에 가을엔 늘 범람해 왔었기에 소수의 부대로도 충분히 방어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여기에 술트와 죠제프 왕은 감정적 불화로 인해 술트가 삐딱하게 비협조적으로 나와 공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웰링턴은 심사숙고 끝에 예하 최정예 3개 사단을 마드리드와 타구스 강가를 방어하게 남겨두고, 9월 3일 마드리드를 출발해 최우선 점령 요충지인 부르고스 요새를 양해 진군했다. 이 때 포르투갈 방면군의 클로젤 대장은 부대의 재정비를 위해서라도 급히 동쪽으로 후퇴하면서도 부르고스 요새에는 2천 명의 방어병력을 남겨두고 간 후였다. 영국군은 이 부르고스 요새에 9월 18일 당도한다.

부르고스 시와 그 시를 방어하는 요새는 구식 축성 방식으로 건축된 낡은 성이었던데다 보수 방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집중포화와 대규모 전면공격에는 손쉽게 함락할 수 있을 성이었고, 주둔병력도 겨우 2천명이었다. 웰링턴 휘하에는 마드리드에 남겨두고 온 병력을 제해도 영국-포르투갈 연합군 3만 5천의 병력이 있었으며 현제 게릴라의 도움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서 웰링턴은 대차게 실패한다. 부르고스 공성전은 아서 웰즐리의 길고 화려하게 성공적인 군적에서 유일한 ‘대실패’로 기록되게 된다. 왜? 그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1. 영국군의 그 유명한 공병군단이 그때까지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인원보충이 되지 않았다. 부르고스 요새 공성에 참여한 공병-기술 장교는 겨우 여덟명에 불과했다. (그 이전의 대규모 공성전이었던 바다호스 요새 전투나 시우다드 로드리고 전투에는 스무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었다)
2. 공성장비들과 공성용 대포, 그리고 탄환들이 열악한 도로상황 때문에 제 때 운송되지 못했다.
3. 바다호스와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의 엄청난 사상률에 충격받은 웰링턴이 전면공세를 꺼렸다.
4. 공성전 경험이 있는 부대와 정예부대는 모두 마드리드 방어에 남겨두고 왔다.
5. 그 반면 부르고스 주둔 프랑스군은 정예부대에 지휘관 듀브레통 준장이 적극적이고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부르고스 요새 공성전의 실패]



결국, 약 한달 동안 진행된 공성전에서 영국-포르투갈군은 6백여명이 전사하고 1천 5백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고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영국군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부르고스에서 영국군이 실패를 거듭하던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술트와 죠제프 왕의 불화는 협박과 회유 끝에 해결되어 안달루시아 군이 매우 신속하게 북진하였고, 스셰 원수가 지휘하는 발렌시아 주둔 스페인 동부 방면군이 죠제프 왕의 중앙군과 합류하면서 강력한 전력이 마련되었다. 이는 시칠리아 주둔 영국군의 양동작전이라는게 아무런 성과도 없는 삽질로 그친 (제 12화 참조) 결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하던 때에 비가 오지 않아 스페인 중부는 그 기간 내내 화창했기에 타구스 강은 아무런 방어선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스페인 남부에서 술트의 부대를 견제하는 임무가 주어진 스페인군 사령관 프란시스코 바야스테로스 장군이 ‘외국인의 지휘 따위 받을까 보냐!’며 웰링턴의 지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서 스페인군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바야스테로스 장군은 경질되어 세우타로 유배 보내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10월 말에는 이미 6만 명의 프랑스군이 발렌시아를 출발, 군세를 둘로 나눠 마드리드로 향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이들은 웰링턴의 포르투갈로의 회군로를 차단할 예정이었다. 또한 스페인 북방에 주둔하던 수암 소장의 프랑스군이 부르고스를 구하러 남진하기 시작했다. 웰링턴이 타구스 강변과 마드리드 주변에 남겨 놓았던 힐 중장 휘하 3만 영국군도 즉각 후퇴해야 했으며 부르고스의 영국군도 적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급히 퇴각해야할 형편이었다.

[1812년 10월~11월의 상황]



그렇게 웰링턴은 하는 수 없이 전군 철퇴를 지시해야 했으며 이들은 끝없이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으며 강행군을 통해 후퇴해야했다. 여러차례 엄청난 재앙이 닥칠 뻔 했고, 급한 강행군 동안 몇몇 고급지휘관들의 엄청난 무능함이 발각되는 일들이 (전혀 엉뚱한 길로 보급 물자를 수송하게 해서 전군이 하루 종일 굶은 채 행군한다던지, 집결지를 착각한다던지, 자기 예하 부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던지) 생기는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모든 영국군은 살라만카에 돌아와 집결할 수 있었고, 포르투갈로의 퇴로가 차단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부르고스로부터 후퇴하는 영국군. 영국군의 상황은 'Miserable'했다.]



그동안 죠제프 왕은 11월 2일 마드리드 시에 다시 입성했고 술트 원수의 지휘하에 프랑스군 8만명이 웰링턴의 영국군 6만 5천을 11월 15일 살라만카에서 따라잡았다. 이 날 반도 전장의 명운을 결정지을 결전으로 제 2차 살라만카 전투가 벌어지는 듯 싶었으나… 총사령관 술트 원수는 공격을 하지 않았고, 오후에는 전장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웰링턴은 술트가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는, 전군에게 포르투갈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 술트가 대체 왜 공격을 명하지 않았나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죠제프 왕은 동생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술트 원수가 자기 예하 여단장이자 자기 동생인 피에르 술트의 안위 (무능한 장교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를 걱정해 전투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석했으나 이는 확실치 않다.


11월 20일, 영국군은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전황은 다시 1811년의 그것으로 돌아갔고, 전군의 절반이 병에 걸리거나 더 이상의 행군이 불가능한 (발을 너무 혹사해서) 상태였다. 웰링턴 휘하 가장 유능한 지휘관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골골했고, 다른 지휘관들의 무능함은 표면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1812년 반도 전쟁에서 영국군의 군사행동은 전반적으로 보자면, 큰 성공이었다.

11월 23일에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웰링턴은 이렇게 썼다:

“1월부터 지금까지 수개월 동안 이 군대는 잉글랜드로 2만여명의 적군 포로를 보냈으며, 시우다드 로드리고, 바다호스, 살라만카, 바야돌리드, 마드리드, 아스토르가, 세비야의 주요 적군 병기창들을 파괴하고 물자를 압수한데다, 총 3천문의 대포 또한 획득했습니다. 적군의 카디스 요새 포위는 풀렸으며 적군은 더 이상 스페인 남부에서 작전을 펼치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정신적인 면에서의 승리였다. 1812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군은 그저 프랑스를 조금 귀찮게 할 뿐인 미미한 존재였다. 하지만 1812년에 영국군은 엄청난 존재감의 적수로 부상했으며 프랑스군은 연패를 거듭하며 추태를 보여야 했다. 또한 이제 프랑스군은 1812년의 다급한 병력 이동과 다수의 병력 손실에 의한 결과로 스페인 전역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렇게 한 해가 끝났다.



해당 연재기획의 전체 링크: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다음편은 언제 쓸지 잘 모르겠습니다.

덧글

  • Allenait 2010/04/03 16:14 #

    허. 진짜 하마터면 영국군이 다 털릴뻔 했군요
  • 들꽃향기 2010/04/03 16:36 #

    간만에 올리신 반도전쟁 시리즈 잘 보고 갑니다. ^^ 부르고스 공방전은 세부를 까고보니 안습이긴 하네요;;; 공병 장교 8명....ㄷㄷ;;
  • 행인1 2010/04/03 20:51 #

    아직도 아슬아슬한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영국군이 승기를 잡아가는군요.
  • 네비아찌 2010/04/03 22:16 #

    만약에 2차 살라망카 전투가 벌어졌다면 어떻게 역사가 변했을지 궁금해지네요.
  • 오제영 2010/04/03 23:14 # 삭제

    너무 흥미진진한데요.
    역사적 사실은 제쳐두고, 저같은 일반인은 잘 이해 못하는 "영토를 다시 상실했는데 왜 승리인가?"까지 써주시다니, 좋은글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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