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공언한대로 포스팅 합니다.
앤드류 카네기는 돈을 절대로 ‘공공복지’ 따위에 써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럴 돈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도서관을 세워 시민들의 교양 수준을 높이는게 훨씬 유익하다는 논지였다. 그러한 카네기의 논지를 전해 들은 카네기 제철 공장의 노동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 사람을 하루 열 두시간 일하게 해놓고 도서관은 언제 가라는 거야?”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카네기를 비롯한 당시 대 자본가들은 그 개같이 번다는게 노동자들을 개같이 대함으로써 돈을 버는 것이었다. 노동자들도 학대 받고만 있진 않았으며 19세기 후반에 가면 노사 분규는 극에 치닫았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공장 근로자들은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불합리한 그 노동시간은 당시 노동자들도 부당하다 느꼈고, 당시 점차 세를 불리던 Knights of Labor 등의 노동 조합들은 1886년에 5월 1일을 8시간 근로 개시의 날로 선포하며 그 외 여러가지 노동자 권리를 고용주들에게 인정해 달라 요청했다. 그래서 그 해 5월 1일 토요일에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시위와 집회가 있었다. 뉴욕, 디트로이트, 밀워키 등 대도시들에서 수천명에서 수만 규모의 노동자 집회가 열렸고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시위는 시카고에서 벌어졌다. 그 날 시카고에서는 4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어거스트 스파이스와 앨버트 파슨 등의 노조 지도자들이 이끄는 8만명이 시카고 거리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물론 시카고에서 경찰들은 시위를 가혹하게 진압했고 공장주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파업-저지자Strike-Breakers – 즉, 파업하는 노조원 대신 일하러 오는 일용직 근로자들을 투입했다. 경찰의 발포로 세 명의 노조원들이 사망했다. 이러한 사태에 분노한 몇몇 시카고 노조 지도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5월 4일에 시카고 다운타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갖자고 부르짖었고, 시카고 시 당국에서는 이 5월 4일의 집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헌데 정작 5월 4일 저녁, 약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실제 집회가 열리자 광장에 모인 사람은 그 전전날의 수만 규모가 아닌 4백여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집회를 주도한 어거스트 스파이스도 노동운동은 절대 폭력적으로 전개되어선 안된다며 비폭력주의를 부르짖었다. 몇몇 무정부주의 사상가들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고 수백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차분하게 연설을 경청하는, 그런 평범하고 얌전한 모임이 진행되었고 사태를 지켜보러 온 시카고 시장 카터 해리슨은 ‘별 일 없겠구만’ 하며 그냥 집에 자러 갔다. 집회에 연설하러 온 마지막 사람인 사무엘 필든이 단상에서 말을 끝마치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경찰은 집회를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폴리스 라인이 전진하기 시작한 그 때 갑자기 폭탄이 터졌다.

폴리스 라인 한가운데에서 터진 그 폭탄에 의해 경관 마티아스 디간이 그자리에서 사망했다. 경찰은 완전한 혼란 속에서 무차별 난사를 시작했고, 밤의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자기네들끼리의 오인 사격으로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지가 익명을 요구한 한 경관을 인터뷰한 내용에서는 경찰들은 혼란스럽게도 리볼버 총구를 서로에게 돌려 서로를 쐈다고 했다. 얼마 안되던 군중은 그 소란 속에 놀라 도망쳤으나 그 중 네 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들은 서로 쏘다가 60명이 부상 당하고 일곱 명이 사망했다. 폭탄에 의해 사망한 마티아스 디간을 포함하면 최소한 총 12명이 죽은 참사였다. 민간인/집회 참가자 사상수는 제대로 집계가 되지 않고 있는데, 총에 맞고서도 경찰에 체포당하는게 두려워 병원에 가지 않거나 부상자를 데려다 주지 않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시카고 헤럴드지는 거리에 최소 50여명의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친채 널려 있었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즉각 어거스트 스파이스, 앨버트 파슨, 아돌프 피셔, 사무엘 필든 등 당시 집회에서 연단에 올라 발언했던 사람들 여덟명을 살인죄로 체포했다. 6월부터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졌고 조사 결과들과 증거, 증인들은 모두 기소된 여덞명이 그 폭탄테러와 어떠한 직접전 연관성도 없다는 것만을 증명해줄 뿐이였다. 피고들의 가족들은 기업가가 고용한 핑커튼 용병 요원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피고들의 유죄를 증명할 만한 내용이 나오지 않자 조사는 즉각 종결되었고, 친기업 보수 성향의 배심원단에게 이미 나온 조사 결과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기소 된 여덞 명 모두가 유죄, 그리고 그 중 여덞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동안 언론들은 자극적인 기사들을 써 냄과 동시에 여론을 양극단으로 몰고갔다. 그 선두에는 시카고 타임즈와 뉴욕 타임즈가 서서 피고들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들로 몰아갔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이미지와는 달리 극보수 언론이었다. 보수 언론은 그 때 헤이마켓에서 있었던 경찰들끼리의 오인사격을 마치 노동자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경찰들을 학살한 것처럼 보도했다.
사건은 연방법원으로까지 올라갔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사형이 선고된 일곱 명 중 두 명, 필든과 슈밥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스파이스, 파슨, 피셔, 엥겔, 그리고 링 다섯 명은 1887년 11월 11일 사형되게 되었다. 그 중 링은 사형 전날 감옥 안에서 자살했다.
사형 당하는 순간 어거스트 스파이스는 목청 높여 외쳤다. “우리의 죽음의 침묵이 언젠가는 당신들이 잠재우려는 목소리보다 더 강력해지게 될 것이다!”
몇년 후 헤이 마켓 광장에는 시카고 시 경찰청 경찰들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인권운동가들과 대학생 시위대가 광장에서 경찰들과 충돌했으며 경찰 동상은 시위대에 의해 네 차례나 박살이 나고 경찰에 의해 네 차례나 재건되었다.
오늘날 5월 1일은 전세계적으로 노동자의 날이다. 하루 최대 8시간 근로를 선언했던 미국의 노조의 바램은 이루어졌고, 그들이 그 주장을 선언했던 메이데이가 국제적으로도 노동절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헤이마켓 사건의 재판은 미국의 역사상 가장 부당한 재판이자 공권력의 남용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사형당했던 연루자들은 노동인권의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으나 아직도 좌-우익 간에서는 해석이 정반대로 엇갈리고 있다. 우익 성향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 사건을 '헤이마켓 폭동Riot'이라고 표현하며 사건Affair 정도가 중립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폭탄을 터트린게 대체 누구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헤이마켓 사건 7년 후 일리노이 주 주지사에 당선되고는 헤이마켓 사건 연루자들의 무죄를 선언했던 존 피터 알트겔드에 대해 다루겠다.


원래는 5월 4일에 포스팅 하려다가 너무 바빠 날을 놓치고선 미루고 미루다 이제사 썼다.
앤드류 카네기는 돈을 절대로 ‘공공복지’ 따위에 써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럴 돈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도서관을 세워 시민들의 교양 수준을 높이는게 훨씬 유익하다는 논지였다. 그러한 카네기의 논지를 전해 들은 카네기 제철 공장의 노동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 사람을 하루 열 두시간 일하게 해놓고 도서관은 언제 가라는 거야?”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카네기를 비롯한 당시 대 자본가들은 그 개같이 번다는게 노동자들을 개같이 대함으로써 돈을 버는 것이었다. 노동자들도 학대 받고만 있진 않았으며 19세기 후반에 가면 노사 분규는 극에 치닫았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공장 근로자들은 하루 12시간을 일해야 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불합리한 그 노동시간은 당시 노동자들도 부당하다 느꼈고, 당시 점차 세를 불리던 Knights of Labor 등의 노동 조합들은 1886년에 5월 1일을 8시간 근로 개시의 날로 선포하며 그 외 여러가지 노동자 권리를 고용주들에게 인정해 달라 요청했다. 그래서 그 해 5월 1일 토요일에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시위와 집회가 있었다. 뉴욕, 디트로이트, 밀워키 등 대도시들에서 수천명에서 수만 규모의 노동자 집회가 열렸고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시위는 시카고에서 벌어졌다. 그 날 시카고에서는 4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어거스트 스파이스와 앨버트 파슨 등의 노조 지도자들이 이끄는 8만명이 시카고 거리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물론 시카고에서 경찰들은 시위를 가혹하게 진압했고 공장주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파업-저지자Strike-Breakers – 즉, 파업하는 노조원 대신 일하러 오는 일용직 근로자들을 투입했다. 경찰의 발포로 세 명의 노조원들이 사망했다. 이러한 사태에 분노한 몇몇 시카고 노조 지도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5월 4일에 시카고 다운타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갖자고 부르짖었고, 시카고 시 당국에서는 이 5월 4일의 집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헌데 정작 5월 4일 저녁, 약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실제 집회가 열리자 광장에 모인 사람은 그 전전날의 수만 규모가 아닌 4백여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집회를 주도한 어거스트 스파이스도 노동운동은 절대 폭력적으로 전개되어선 안된다며 비폭력주의를 부르짖었다. 몇몇 무정부주의 사상가들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고 수백명의 집회 참가자들은 차분하게 연설을 경청하는, 그런 평범하고 얌전한 모임이 진행되었고 사태를 지켜보러 온 시카고 시장 카터 해리슨은 ‘별 일 없겠구만’ 하며 그냥 집에 자러 갔다. 집회에 연설하러 온 마지막 사람인 사무엘 필든이 단상에서 말을 끝마치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경찰은 집회를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폴리스 라인이 전진하기 시작한 그 때 갑자기 폭탄이 터졌다.
폴리스 라인 한가운데에서 터진 그 폭탄에 의해 경관 마티아스 디간이 그자리에서 사망했다. 경찰은 완전한 혼란 속에서 무차별 난사를 시작했고, 밤의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자기네들끼리의 오인 사격으로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지가 익명을 요구한 한 경관을 인터뷰한 내용에서는 경찰들은 혼란스럽게도 리볼버 총구를 서로에게 돌려 서로를 쐈다고 했다. 얼마 안되던 군중은 그 소란 속에 놀라 도망쳤으나 그 중 네 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들은 서로 쏘다가 60명이 부상 당하고 일곱 명이 사망했다. 폭탄에 의해 사망한 마티아스 디간을 포함하면 최소한 총 12명이 죽은 참사였다. 민간인/집회 참가자 사상수는 제대로 집계가 되지 않고 있는데, 총에 맞고서도 경찰에 체포당하는게 두려워 병원에 가지 않거나 부상자를 데려다 주지 않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시카고 헤럴드지는 거리에 최소 50여명의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친채 널려 있었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즉각 어거스트 스파이스, 앨버트 파슨, 아돌프 피셔, 사무엘 필든 등 당시 집회에서 연단에 올라 발언했던 사람들 여덟명을 살인죄로 체포했다. 6월부터 치열한 법정공방이 벌어졌고 조사 결과들과 증거, 증인들은 모두 기소된 여덞명이 그 폭탄테러와 어떠한 직접전 연관성도 없다는 것만을 증명해줄 뿐이였다. 피고들의 가족들은 기업가가 고용한 핑커튼 용병 요원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피고들의 유죄를 증명할 만한 내용이 나오지 않자 조사는 즉각 종결되었고, 친기업 보수 성향의 배심원단에게 이미 나온 조사 결과는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기소 된 여덞 명 모두가 유죄, 그리고 그 중 여덞 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동안 언론들은 자극적인 기사들을 써 냄과 동시에 여론을 양극단으로 몰고갔다. 그 선두에는 시카고 타임즈와 뉴욕 타임즈가 서서 피고들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들로 몰아갔다. 당시 뉴욕 타임즈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이미지와는 달리 극보수 언론이었다. 보수 언론은 그 때 헤이마켓에서 있었던 경찰들끼리의 오인사격을 마치 노동자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경찰들을 학살한 것처럼 보도했다.
사건은 연방법원으로까지 올라갔지만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사형이 선고된 일곱 명 중 두 명, 필든과 슈밥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스파이스, 파슨, 피셔, 엥겔, 그리고 링 다섯 명은 1887년 11월 11일 사형되게 되었다. 그 중 링은 사형 전날 감옥 안에서 자살했다.
사형 당하는 순간 어거스트 스파이스는 목청 높여 외쳤다. “우리의 죽음의 침묵이 언젠가는 당신들이 잠재우려는 목소리보다 더 강력해지게 될 것이다!”
몇년 후 헤이 마켓 광장에는 시카고 시 경찰청 경찰들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인권운동가들과 대학생 시위대가 광장에서 경찰들과 충돌했으며 경찰 동상은 시위대에 의해 네 차례나 박살이 나고 경찰에 의해 네 차례나 재건되었다.
오늘날 5월 1일은 전세계적으로 노동자의 날이다. 하루 최대 8시간 근로를 선언했던 미국의 노조의 바램은 이루어졌고, 그들이 그 주장을 선언했던 메이데이가 국제적으로도 노동절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헤이마켓 사건의 재판은 미국의 역사상 가장 부당한 재판이자 공권력의 남용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사형당했던 연루자들은 노동인권의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으나 아직도 좌-우익 간에서는 해석이 정반대로 엇갈리고 있다. 우익 성향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 사건을 '헤이마켓 폭동Riot'이라고 표현하며 사건Affair 정도가 중립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폭탄을 터트린게 대체 누구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헤이마켓 사건 7년 후 일리노이 주 주지사에 당선되고는 헤이마켓 사건 연루자들의 무죄를 선언했던 존 피터 알트겔드에 대해 다루겠다.
원래는 5월 4일에 포스팅 하려다가 너무 바빠 날을 놓치고선 미루고 미루다 이제사 썼다.






































덧글
사례 중 하나는 노사분규하면 빨갱이라고 총으로 쏴죽인다는 사례도 있었다고 하던데...
미국은 그 이후 전쟁에 맛을 들려 대리전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양상이 되죠.
전쟁 참전의 계기는 항상 달랐습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미국내의 각종 문제에 대해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미국 내 문제를 덮기 위해서 전쟁에 참전한다는 말은
제 생각엔 전혀 다른 말 같네요.
그리고 Nine One 님은 2)라는 주장을 하시면서 1)을 근거로 삼고 계시는 듯 보이네요.
게다가 미국내 갈등을 폭발시켜버린 베트남전도 있었죠.
1,2차세계대전의 미국의 참전은 확실히 미국내 문제에서 미국 외 문제로 시선이 분산되어 미국내 문제가 많이 가려졌지만 그와 동시에 미국 내부에서 가진 문제가 바깥에서 드러난 계기가 되었죠.
아까 글에서도 적은 흑인의 대우라든가, 여성들의 사회진출들은 미국 내부의 문제에 대해 외적(전쟁)요인이 개입해 공론화 된 사례기도 합니다.
문제는 지적해주신 배트남전의 경우 미국이 다시한번 그런 효과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가 나오고 말았죠. 그 다음부터는 미국이스스로 개입하지 않지만 대리전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상황이 오고 그게 다시 역작용이 되어 미국을 압박하고 미국 내부의 문제로 다시 떠오르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탈리반입니다. 아프칸이고.
좋은지적 감사합니다.
<strong>아니네요</strong>
하지만 내용은 약간 씁쓸하군요.
지금껏 지탱해왔던 삶이 뒤엎히는 것에 대한 처절한 적응 노력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려나요.
p.s 이 이글루를 링크해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http://www.ddanzi.com/news/3397.html
좀 기분이 나쁘네요.
이런걸로 기분 나뻐하실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
오히려 재들이 햇으니 나는 더 질 좋게 더 멋지게 해보이겠다! 는 어떠신지요 ㅋㅋ
그러고보니 경찰을 기리는 동상이 파괴된 사건 하나는, 왠 트럭기사 하나가 동상을 들이받아 놓고는, '저거 재수가 없어서.'라고 했다는 괴담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네요..=_=;;
http://en.wikipedia.org/wiki/File:HaymarketPoliceMemorial.jpg
사실 이렇게 생겨먹은 물건이었으니 성질이 안 날리가 없지만...=ㅅ=
그 전차 운전수가 말하길 "sick of seeing that policeman with his arm raised"
어느 독재 국가의 노동자모습이 또오르는 이유는뭘까요.
그나저나 록펠러,카네기 이 인간들....어렸을때 위인전 읽고
'오오 멋지다' 했는데 요즘 다시보니...
이상하게 한국에선 그런 기업가들 하면 무슨 영웅 추앙하듯이 흠모의 시선을 보내더군요.
과거의 일이라고 넘길 수가 없는 일입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거든요.
고맙습니당^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