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手의 칼과 5/18의 기억

어렸을 때 나름 많은 책을 읽었지만 소설, 특히 한국 소설 쪽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었다.

왜일까. 집 안에는 엄청난 분량의 한국 문학 서적들이 흘러 넘쳤는데.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 소설을 읽을 때도 염상섭 보다는 까뮈가, 현진건 보다는 모파상이 더 가까이 느껴졌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보다는 "비곗덩어리"가 취향에 맞았달까. 그럼에도 '중/고등 학교 국어 시간에 다루는 것 이외'에 읽은 한국 소설들 중 기억에 특히 남는 게 몇가지 있는데... 어린 시절 기억이라 더 깊게 각인 된 걸까, 10여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심심해서 아버지 서재에서 꺼내 읽었던, 김병언 선생님의 "목수의 칼"이 그것이다.

우왕 이래 뭔가 재밌을 것 같에.... 하고 읽었던 책은 눈물 흘리는 목수의 섬뜩한 표정을 뇌리에 남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사우디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목수 임성구. 그는 누군가를 향해 휘두를 복수의 칼을 간다. 무엇의 복수이고 복수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의 대학생 딸은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딸의 죽음을 복수하고 싶어하지만 그 분노를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몰라, 그리고 실행에 옮길 용기도 없어 그저 칼을 갈 뿐이다. 칼을 가는 그 행위 자체가 매일 저승의 딸에게 지내는 제사가 되고, 그는 어느순간 실종되어 버린다.

소설 속 목수의 공허함과 정처없음은 오늘날 당시 광주 사태에 대한 기억과 의미와 일치한다.

광주에서 목숨을 잃은 무고한, 그리고 죄가 있다면 폭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한 죄가 있는 시민들의 원혼은 대체 누구를 저주할 것인가. 문어대가리 전모씨? 제 7, 제 11 공수여단 부대원들? 당시 여단장 신우식 준장? 신군부 세력 전체? 사태를 방관한 미국? 아니면 더 나아가, 박정희?

광주의 유산을 소위 '민주정권'에서도 제대로 활용하지도 청산하지도 못했다. 자칭 좌파/진보 세력은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인민군 개입설에 무장폭도설까지 당당히 나도는 동안 반대쪽에 선 사람들의 공격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확실히 해야하는지도 모른채 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목수 임성구처럼 공허한 외침을 지속할 뿐 아닌지.

우리의 칼은 어디로 갔을까? 목수의 칼처럼 갈다 갈다 갈다 못해 닳아 없어져 버렸나?


그냥 슬픈 생각이 들어서 주절여 봤다.

덧글

  • 反영웅 2010/05/22 14:26 #

    아.........................!
  • 모에시아 총독 2010/05/23 09:23 #

    한국의 민주화는 그렇게 열심히 투쟁하고도 결국 노태우를 뽑아준 걸로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죠. 그리고 민주화 세대는 그 다음 세대에게 자신들처럼 멍청하게(?) 살지 말라고, 영악하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 결과물이 지금의 세상이겠죠. 시민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흘린 피 위에 살고 있지만 저 자신도 그런 것처럼 온갖 핑계만 대고 그 성과만 얻어먹었지 나서진 않아요. 씁쓸한 세상이네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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