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정치생명을 단축시키면서까지 노동인권을 옹호했던 주지사 알트겔드

지난번 헤이마켓 노동운동 건에 이어서 씁니다.

존 피터 알트겔드John Peter Altgeld, 1847~1902는, 법조인이자 1892년부터 1896년까지 미국 일리노이 주의 주지사를 지낸 사람이다. 그는 동시대 정치가들 중에서 가장 격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고 당대에 가장 악명 높은 정치가였다. 하지만 사후 그는 일종의 성인처럼 추앙받았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그다지 기억되고 있지 않지만..



존 피터 알트겔드는 1848년 독일 작센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 나이 단 생후 2개월 때 그의 부모는 미국 이민을 결심했고 알트겔드 일가는 대서양을 건너고도 또 미국 내에서 내륙으로 이동, 존 피터가 한 살이 채 되기 전 오하이오 주 맨스필드 인근에 정착한다. 일가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존 피터는 책을 읽는데 관심을 더 보였다는 것 같다. 그래서 알트겔드는 스무살에 학교 선생이 되었고, 이 때 동료 교사였던 엠마 포드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가 청혼했을 때 포드의 아버지는 알트겔드의 가난함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고, 이 때문에 알트겔드가 직업을 찾아 고향을 떠난 후, 1871년 최종적으로 택하게 된 직업은 변호사였다. 1877년, 그가 스물 아홉이 되었을 때 그는 시카고에서 성공적 변호사로 일하며 이미 상당한 돈을 모은 후였고 그 때 그가 다시 엠마 포드에게 청혼했을 때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알트겔드는 정치와 극빈층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884년 시카고에서 하원의원 출마를 하였으나 당시 공화당 득세로 인해 당선되지 못했다. 그 직후부터 그는 여러가지 팜플렛과 사설들을 써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부분 노동자 권익 보호에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알트겔드는 1886년 쿡 카운티의 고등법원 판사직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판사로 지내면서도 그는 계속 글들을 썼다. 그 중 하나인 “Our Penal Machinery and Its Victims”(우리의 형법 제도와 그 희생자들)에서 알트겔드는 미국의 자비 없는 형법 제도와 경범죄에 대한 과도한 처벌, 죄수의 재범 방지 대책의 부재를 가지고 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판사직을 1891년까지 5년 동안 수행했는데, 그 동안 특히 청소년 범죄자들에 대한 융통성 있는 판결들이 특기할 만 하다.

판사직을 지내는 내내 알트겔드는 계속 제퍼슨식 진보주의적 성향을 표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그의 글과 판사로서의 판결들은 결국 언론의 주목과 공격을 받게 된다. 노동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80년대 말 그의 친 노동자 성향 글들은 논란이 될 만한 것이었고, 시카고 트리뷴 지는 ‘Mr. Altgeld is no less than a follower of Marx’라면서 알트겔드를 공산주의자 취급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일반 대중 –특히 의 주목과 지지도 얻게 되었다.

그래서 1892년 일리노이 주지사 선거 당시 민주당에서는 자연스럽게 알트겔드를 후보로 선택했고, 소위 ‘클리블랜드 강풍’, 즉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몰아닥친 민주당표의 집중 현상과 함께 알트겔드는 쉽게 주지사직에 선출된다. 당시 알트겔드의 주지사 취임에 그다지 큰 기대 또는 우려를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알트겔드 또한 ‘개인적으로는 청렴하나 딱히 뭘 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닌’ 평범한 주지사들 중 하나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트겔드는 당시 일리노이 주 정계 내 유력 개혁 운동가들과 법조인들의 큰 지지와 협조를 받고 있었고, 그 스스로 또한 매우 정력적인 개혁가였던 탓에, 그의 주지사 임기는 순탄히 흘러가지 않게 되었다.

92년 6월 26일, 알트겔드는 헤이마켓 사건 주동자들의 전면 사면을 1만 8천 단어짜리 장문의 글과 함께 선언한다. 이 사면령은 주도면밀한 검토와 오랜 조사 끝에 나온 결과물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운동가들에 대한 옹호와 우익 보수파/기업계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가득한 성명서였다. 배심원단은 무작위로 추첨된 게 아니라 특정 성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가려 뽑혔으며, 이 과정을 재판을 담당했던 죠셉 개리 판사가 뒤에서 조작했으며, 경찰측에선 증거를 조작하고 뇌물로 증인들의 증언을 바꾸게 했고, 당시 시카고 노동운동 진압 경찰 지휘관이었던 본필드 경감의 난폭한 진압방식 자체가 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판 과정 전반에 걸쳐 보여진 법조계 전반의 타락과 공정성의 상실이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남아 있던 무기징역 복무자 세 명은 모두 풀려난다.


이 선언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보수 언론은 이 버릇 없는 신임 일리노이 주지사에게 가차없는 공격을 가했고 특히 시카고 트리뷴의 공격은 거의 광증에 가까운 무차별 인신공격이었다. 이치를 따져 조목조목 반론을 제시한 것은 없이 ‘체제에 감히 반발한’ 죄로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변태, 정신병자 등의 멋진 라벨들이 알트겔드의 이름 앞에 붙여졌다. 심지어 그에게 표를 던졌던 시민들조차 감히 법원의 정당한 판결을 부정하고 살인마들을 옹호한 알트겔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헌데, 이러한 후폭풍에 대해 한 진보언론 ‘World’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그에게 사면령 발표를 후회하지 않느냐 묻자 그의 답은 이러했다. “Never! If I had the matter to act upon again tomorrow, I would do it over again. (전혀! 만약 같은 사안을 내일 다시 다루어야 한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행동하겠소.)”

공격과 비난 공세에 직면해서도 주지사 알트겔드는 전혀 움츠러들지도, 온순해지지도 않았다. 그는 1893년 주 공장 감사 법안(Factory Inspection Act)을 통과시키고여성 인권 운동가 플로렌스 켈리를 일리노이 주 노동실태 조사 위원단의 단장으로 앉혀 기업가들을 공격하고 노동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당시 미국 제일의 공업단지였던 일리노이에서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대담한 것이었는지는 그가 받은 공격에 비례해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중요한 자리에 여자, 그것도 페미니스트 운동가를 앉히다니!

1894년 노동절에 주지사는 일리노이 주 노동자들에게 시련의 시기가 다가왔으나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니 그만큼 노동계도 질서와 법을 지켜 행동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과격 폭력 운동의 옹호자가 아니었으며 올바른 법조계 출신 답게 법질서의 수호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공산혁명가’라는 당대 보수파의 비난은 전혀 맞는 말이 아니었다.

그 1894년 5월에 또 한차례 정계가 술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풀맨 철도노조 파업 사건The Pullman Strike이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깎이고, 하루 열 두시간씩 일하던, 일리노이주 풀만시의 철도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은 전국적 노조 파업으로 확대되었고 일리노이 주 내에서는 이 파업운동이 큰 파장과 함께 소요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주지사 알트겔드는 주 방위군의 투입과 진압을 반대했고 기업가들은 그냥 D.C.에 직통으로 로비, 민주당 출신이나 친기업 성향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지지와 연방군 투입 약속을 얻어낸다. 대통령의 연방군 투입 결정에 알트겔드는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주 자치권에 대한 중대한 위헌 사항이라는 것이었다.




감히 주지사가 연방 정부 결정에 그렇게 정면으로 부딪히고 나온 것은 이 사례가 정말 특출난 사례로, 알트겔드는 그렇게 해서 자기 정치 인생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헤이마켓 사면 사태 때보다 더욱 엄청난 정치권과 언론의 공세가 가해졌다. 물론 알트겔드는 폭력 사태를 조장하지 않았고, 질서유지를 위해서 주 방위군을 투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나 (거의 대부분의 파업 사태에 주 방위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진압’행위 만큼은 절대로 허가하지 않았고, 노사간의 무력충돌 방지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런건 여론에 있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들의 눈에 알트겔드는 폭력적 공산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주지사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1894년 일련의 사태에 대한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While we welcome, every honest enterprise and industry, we cannot allow our State to become merely a forage ground for wolfish greed. (정직/성실한 모든 회사와 기업들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바이지만, 우리는 우리 주가 욕심에 가득 찬 승냥이 떼의 사냥터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알트겔드는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에서조차 공격받았다. 사실 알트겔드의 주의주장과 영향력은 민주당을 분열시키는데 일조했다.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로 대표되는 민주당 내 친기업 보수파와 하원의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이 이끄는 진보 개혁파로 분열된 민주당은 (그리고 브라이언 의원은 보수언론으로부터 ‘알트겔드의 꼭두각시’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이어진 크고 작은 선거들에서 패배했다.

어쨌든, 1897년에 주지사 임기가 끝난 후로 알트겔드의 정치생명은 끝났다. 당연히 재임에도 실패했다. 1897년의 주지사 선거 결과를 지켜 본 시카고 트리뷴지는 일리노이 주의 시민들에게 ‘축하’ 인사를 떠들어댔다. 청렴했던 전직 주지사는 공직에서 물러날 즈음에는 돈 한 푼 없이 가난해 졌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공석에 나타나 진보 개혁파의 의견을 대변하고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 일생을 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점철해 온 알트겔드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1902년 3월 11일, 그는 오전 법정에서 목수 노조를 변호하며 긴 공방을 치른 후, 오후에 당시 치뤄지고 있던 영국의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을 옹호하기 위해 열린 대회에 참석,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연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Wrong may seem to triumph. Right may seem to be defeated. But the gravitation of eternal justice is toward the throne of God. Any political institution which is to endure must be plumb with that line of justice. (언제나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정의는 패배하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하지만 정의의 저울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합니다. 어떠한 정치적 단체, 체제라도 그 저울의 추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게 곧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알트겔드는 말을 끝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다 뇌졸증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오늘날 시카고 다이버시 공원에는 그의 조촐한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정말 정의는 패배하고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하지만 비록 꽝하고 터지는 거대한 혁명과 개혁이 없었더라도, 많은 이들의 피땀이 무익하게 소모된 것 같아 보이더라도, 알트겔드 같은 소수라도 용감하고 뜻 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세월에 걸쳐 쌓이고, 싸워가면서 점진적으로라도 Justice를 일궈낼 수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나마 좀 더 따뜻하게 된 것이 아닐까. 아직도 멀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조금씩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알트겔드 같은 이들을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Madison, Charles A. 1945. "John Peter Altgeld: Pioneer Progressive". The Antioch Review. 5 (1): 121-134.
Wish, Harvey. 1941. "Altgeld and the Progressive Tradition".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46 (4): 81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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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schh 2010/05/22 10:40 #

    A few good man.
  • RLamiel 2010/05/22 10:46 #

    뭐랄까, 한 사람의 힘이 어떨지는 몰라도 '한 사람'은 분명히 중요하고 또 따라나가야 될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이렇게 2010/05/22 10:55 #

    LSU 수학과 건물이름이 알트겔드홀인데 이분 이름을 따서 지었군요!
  • Allenait 2010/05/22 16:10 #

    진짜 a few good man이로군요
  • 들꽃향기 2010/05/22 17:29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존 알트겔드의 삶은 당대에는 수많은 모욕과 오명으로 가득찼지만, 지금에는 선구자로 기억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부족함이 없네요. ㄷㄷ

    "전혀! 만약 같은 사안을 내일 다시 다루어야 한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행동하겠소"라는 말에서 기개와 포쓰가 넘치는군요 ㄷㄷ
  • 행인1 2010/05/22 19:40 #

    '도금시대'를 살다간 진짜 위인이로군요.
  • 차원이동자 2010/05/22 21:21 #

    아아...아름다운 사람. 덕분에 멋진분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 책벌레 2010/05/23 01:04 #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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