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 15 (1809~1814) : 비토리아 전투.

죠제프 왕과 쥬르당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가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주둔한 곳은 비토리야였다. 비토리아는 황야 한가운데에 작은 언덕들과 함께 위치했고, 북쪽으로는 사도라 강(River Zadorra)이 흘렀다. 비토리아는 작은 도시였으나, 교통의 중심지였다. 마드리드에서 프랑스까지 직통하는 동-서 대로가 비토리아를 통과했고, 빌바오에서 타라고나까지 통하는 북-남 대로가 이를 교차했다. 그 외에 수많은 작은 길들도 비토리아로 향했다. 비토리아는 방어 거점으로서는 아무런 이점이 없는 곳이었으나, 이렇듯 교통 요지였기에 북쪽에서부터 합류하러 오고 있는 클로젤 대장의 군세를 포함한 각지의 부대들을 규합하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

다만 이러한 교통 요지가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이 있는데, 이것은 동족들의 보복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친불 스페인인들의 피난 행렬, 그리고 죠제프과 그 군세가 스페인 전역에서 긁어 모은 재화와 약탈품, 자질구레한 가산들을 모조리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도로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수레들과 난민들로 가득했고, 이는 프랑스군의 이동과 전투 능력을 어느 정도 저하시켰다. 군대는 하루 빨리 이동해야 했으나 죠제프은 이 난민 행렬과 재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비토리아에 더 머물기를 원했다.

프랑스군의 본대는 비토리아의 서쪽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쥬르당과 참모진은 웰링턴이 북쪽의 빌바오로부터 접근, 프랑스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그들의 우익, 다시 말해 비토리아시의 동쪽을 통해 들이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예비 병력을 모두 비토리아 방면에 집중시켜 놓은 상태였다. 나머지 병력들은 대로와 강변을 따라 배치되었다. 그동안 6월 20일에는 쥬르당 원수가 열병으로 몸져 누웠고, 실질적인 군사령관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죠제프의 사령부는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고, 이 때문에 영국군이 정확하게 어디로 어떻게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정찰도 하지 않았다.

6월 21일 새벽 쥬르당 원수는 열병에서 회복되었고, 그제서야 원수와 죠제프 왕은 함께 부대 배치를 점검하러 말을 타고 전군을 둘러보았다. 비토리아에 집결한 프랑스군은, 보병 6만명(8개 사단)에 기병 1만 1천(7개 기병 사단), 그리고 야포 138문의 병력이었다. 죠제프 왕과 쥬르당 원수는 느긋하게 진지를 시찰하다가 후위 (가장 서쪽)의 언덕지대의 방어를 맡고 있던 가장Gazan 중장을 불러 앞으로의 작전을 논의하려 했다. 그런데 가장 중장 본인은 안오고 연락병이 돌아와 가장 중장의 말을 전하길, 서쪽으로부터 대규모의 군세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813년 6월 21일, 스페인 비토리아Vitoria.]



그 대규모의 군세는, 다름 아닌 웰링턴 휘하 로울란드 힐 중장이 지휘하는 2만명의 영국군이었다. 영국군이 예측하고 있던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부터 접근하자 쥬르당과 죠제프은 크게 놀라 당장 전 병력을 재배치, 후위의 언덕지대로 예비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쥬르당은 자신들의 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생각 때문에 당황해 이젠 영국군 본대가 아예 남쪽으로부터 공격해 올 것이라는 우려에 사로잡혔고, 남서쪽의 방어를 황급히 보강했다. 그리고 이는, 웰링턴에게 있어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반도 원정부대 총사령관 웰링턴 후작 아서 웰즐리 대장의 생각은 이러했다. 전 병력을 네 군세로 나누어, 힐 중장 휘하 군세를 가장 서남쪽에서 공격시키고, 그 동북쪽으로 자기 자신이 지휘하는 본대와 타격부대를, 그리고 죠지 램지 중장의 병력으로 자도라 강 전역을 경계하고, 마지막으로 토마스 그라함 중장 휘하 군세를 비토리아 방면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반포위 작전이었다.

비토리아 전투 대부분의 치열한 교전은 영국의 로울란드 힐 휘하 부대와 프랑스의 가장 휘하 부대 사이에서 벌어졌다. 언덕지대에 방어를 집중한 프랑스군은 힐의 공격을 계속해서 격퇴했다. 이에 프랑스 사령부는 잠시 안심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이들이 처음 예측했던 영국군의 동쪽으로부터의 접근도 틀린 예측이 아닌, 사실이었다는데 있었다. 토마스 그라함의 군세는 전장을 우회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정오 경에 비토리아 북쪽에 도달하게 된다. 갑자기 북동쪽에서 들리는 대규모의 총성을 듣고 자신의 판단 착오를 깨달은 쥬르당 원수는 즉시 다시 병력을 비토리아로 보냈다.


[교전중인 라이플 연대]



비록 그라함 중장의 군세는 치열한 교전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비토리아로 진입할 수 없었지만, 이는 프랑스군의 진용을 흐트려놓는데 충분했다. 이 때 웰링턴의 본대와 죠지 램지 중장의 군세에서 나온 경보병 여단과 후사르 기병 여단들이 사도라 강을 건너 프랑스군의 중앙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램지 휘하 토마스 픽튼 중장의 제 3 보병 사단이 공격하러 들어가는 동안 경보병 여단의 제 95 라이플 연대가 제 3 사단의 진격을 돕기 위해 투입되었는데, 이 녹색 외투의 보병들 사이에는 총사령관인 웰링턴 후작 본인도 끼어 있었다. 웰즐리 대장은, 쏟아지는 포화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모자를 마구 흔들며 라이플 연대원들 사이를 누비면서 “That’s Right, my lads!! Keep up a good fire!”(아주 좋았어, 친구들! 계속 퍼부어주라고!)라고 외치고 다녔다.


토마스 픽튼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제 3 사단이 강을 건너 진격해 들어가자 이에 프랑스군 포병대의 집중포화가 가해졌다. 60여문의 야포가 제 3 사단을 향해 일제 포격을 퍼부었고, 이 포격 때문에 영국군 보병 2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보병들은 포병들만큼 잘 싸우지 못했다. 쥬르당 원수는 계속된 혼란과 판단 실수 때문에 제대로 부대를 지휘하질 못했고, 프랑스군의 혼란은 가증되었으며, 계속된 후퇴로 인해 사기가 낮아져 있던 보병들은 곧 전선을 무너뜨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 마당에 영국군 후사르 기병대가 들이닥쳐 프랑스군을 패주로 몰아넣었고, 이에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프랑스군 사령부는 전군의 전장 이탈을 결정했다.

다만, 이 때 프랑스군이 패주하면서 버려놓고 간 엄청난 양의 재화와 약탈품 수레들, 그리고 민간 물품들은 영국군 기병대의 추격을 막았다. 약탈에 환장하는 영국 군인들은 이에 현혹되어 프랑스군을 추격 섬멸하는 대신 당장 대열을 무너뜨리고 달려가 전리품을 챙겼다. 보병들은 이미 그 날만 20여 마일의 긴 행군을 거친 후였고 더 이상 적을 추격할 여력이 없었다. 웰링턴은 전리품 약탈 행위에 대해 노발대발하였으나 어쨌든 비토리아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영국군 기병대 손에 들어오는 죠제프 왕의 마차와 재산]
[이 때 영국군 손에 들어와 오늘날까지 남은 죠제프 왕의 은제 요강(쿨럭)]



패주한 죠제프 왕과 참모진은 밤 11시 경 안전한 살바티에라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늦은 저녁을 먹었는데, 패잔병들을 수습한 쥬르당 원수가 뒤늦게 식탁에 합석했다. 쥬르당 원수는 "여러분, 우린 오늘 전투를 벌였고, 아무래도 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고 그 간소한 식사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다.

쥬르당의 원수봉은 영국군 전리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서 웰즐리 대장은 이 원수봉을 황태자이자 섭정공인 죠지 왕자 (훗날 죠지 4세)에게 보냈고, 이는 승전보와 함께 7월 3일 런던에 당도한다. 섭정공 죠지는 웰즐리에게 보낸 답장에서 “그대가 거둔 위업의 트로피로 프랑스 육군의 원수봉을 보냈구려! 나는 이에 상응하는 영국의 원수봉을 그대에게 보내려 하오.” 라며 그의 육군 원수Field Marshal로의 승진을 알렸다.

(이는 영국 내에서 작은 소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제껏 영국 육군 원수에게는 공식적 원수봉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고, 섭정공 죠지는 이에 무척 창피해했다. 그제서야 최초로 영국 육군 원수봉이 제작되게 된다. 훗날 워털루 전투를 치르고,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12개국으로부터 원수봉들을 수여받게 된다.)


비토리아 전투는 반도 전역의 다른 대규모 교전들에 비하면 그렇게 사상자 규모가 큰 전투는 아니었다. 영국-포르투갈군 8만 중 사상자는 5천여명이었고 패주한 프랑스군은 6만명 중 8천여명을 잃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전쟁물자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야포를 이 전투에서 잃어버린 점이었다. 야포 140여문이 모두 고스란히 영국군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로서 프랑스의 이베리아 반도 내 세력은 완전히 끝장이 났다. 만신창이가 된 6만명의 병력이 아직 존재했으나 이들이 점유하는 땅은 더 이상 없었다.


이는 프랑스에 있어 아주 큰 충격이었다. 이미 동부전선을 프러시아-러시아 연합군으로붜 방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나폴레옹으로써는, 서부전선이 생기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또한, 반 나폴레옹 연합에 있어 그제껏 영국의 위치는 그저 ‘돈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합국들은 실제 피를 흘리는 것은 자기들 뿐이였고 영국은 돈만 대줄 뿐 제대로 참여하고 있지 않다 느꼈으나, 비토리아 전투의 결과는 이러한 견해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연합에 참여하고 있지 않던 오스트리아는 이 비토리아 전투의 결과로 인해 연합에 가담한다. 비토리아 전투 소식이 비엔나에 당도한 것은 7월 6일 한밤중의 일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잠을 자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벌떡 일어났고, 그 다음달에는 오스트리아 전군에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파리에 전투 결과가 알려진 것은 7월 1일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즉각 쥬르당 원수를 해임함과 동시에 술트 원수를 스페인 방면으로 내려보냈다. 나폴레옹은 동시에 경찰총장 죠제프 푸셰에게 형이 파리에 입성하면 당장 체포, 구금하라고 지시했다. 모든 것은 죠제프 보나파르트의 무능 탓으로 돌려질 것이었다. 7월 20일 깡바세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모든게 그 (죠제프)의 잘못이다. 영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프랑스 군대가 얼마나 멍청하게 지휘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왕은 군인이 아니지만,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하며,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것에 대해 함부로 참겨낳고 나섰다는데 있다. 그 군대(스페인 주둔 프랑스군)에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그건 지도자였다. 지나치게 많은게 있었다면 그건 바로 죠제프였다.”

이는 정말 타당한 평가가 아니었으나, 어쨌든 나폴레옹은 이 망신과 불명예를 공표할 생각이 없었기에 고관대작들에게는 모든 것을 죠제프의 탓으로 돌리는 한편 대중과 언론에는 아예 전투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언론 보도는 모두 통제되었고 황제 명의로 발표된 것은 아주 제한된 포고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달마시아의 공작 (술트 원수)을 스페인에 주둔 중인 폐하의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셨다. 술트 원수는 7월 12일부터 즉각 지휘를 맡아 팜플로나를 공격중인 영국인들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비토리아 전투 승전과 웰링턴의 승진으로 인해 만들어진 영국 육군 원수봉]




연재 기획 전체로 통하는 링크: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덧글

  • 푸른미르 2010/07/03 10:46 #

    요강이 참 아스트랄하네요.
  • 울트라김군 2010/07/03 10:58 #

    원수봉을 주고 받는 훈훈한 광경이 인상적이로군요[...]
  • 네비아찌 2010/07/03 11:45 #

    daum 블로그의 나폴레오닉 시대를 다루시는 파워블로거 nasica 님이 전에 영국군의 전리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전투의 전리품 약탈에 대해서 언급하신 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 친숙하게 느껴지네요.이때 영국군 병사들과 비토리아 주민들은 약탈로 한몫 단단히 잡았는데 웰링턴 본인이 얻은 전리품은 별볼일 없어서 웰링턴이 화가 단단히 났었다던가요^^
  • 개발부장 2010/07/03 13:59 #

    그게 원인이었던 겁니까 진격이 지체돼서가 아니라!?
  • 네비아찌 2010/07/03 22:30 #

    물론 주 원인은 진격 지체이지만 전리품 때문에도 화는 났었다더라구요^^
  • 크핫군 2010/07/03 12:13 # 삭제

    이거 설마 로또사건 아닌가요???
  • 행인1 2010/07/03 12:40 #

    웰링턴 이전에는 영국군에 원수봉이 없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프랑스군에게는 수년 동안 모은 약탈품 보다도 야포를 죄다 잃어버린게 뼈 아프겠군요.
  • Allenait 2010/07/03 16:07 #

    은제 요강이라(...) 묘하군요
  • 들꽃향기 2010/07/03 16:31 #

    모든 것을 조제프 탓으로 돌린 탓에 조제프는 멍청이라는 이미지가 현대까지도 생긴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_=;;

    왠지 비토리아 전투를 보면 쾨니히그래츠 전투와도 비슷한 전투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ㄷㄷ
  • 누렁별 2010/07/03 17:33 #

    은요강엔 역시 황금색 변... (그만)
  • 하텔슈리 2010/07/05 19:59 # 삭제

    진짜 이렇게나 허벌나게 당해놓고도 어떻게 워털루까지 가서까지도 웰링턴을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네요. (웰링턴과 여러번 싸운 술트는 제대로 봤다지만...)
  • 꾸질꾸질한 범고래 2022/07/19 19:27 #

    역시 프랑스 군의 약탈은 ㅎㄷㄷ 했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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