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7월 17일, 샹 드 마르스 광장 학살 사건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사회 전반에서의 계급 투쟁의 결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학자들간의 복잡한 논의의 대상이다. ‘단순 폭도’들을 산업 부르쥬아지들이 배후에서 조종해 귀족들을 몰아냈다는 식의 해석도 결국은 여러 이론 중의 하나일 뿐이고, 혁명 과정에 참가했던 일반 대중의 정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이들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반적인 시민들이었는가, 아니면 목적없는 폭력과 분노를 표출하는 부랑자와 극빈층들들이었는가? 이런 분분한 해석들의 한가운데에서 상징적으로 쟁점 주제가 되는 것이 1791년 7월 17일의 샹 드 마르스 광장의 학살 사건(Fusillade du Champ-de-Mars)다.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산업 부르쥬아들을 무찌르려 든 일반 시민과 노동자 계급의 투쟁, 그리고 이를 억압하려 한 부르쥬아들의 폭력 진압?

한편, 이 사건에 대한 분분한 해석에서, 거국적 시야에서의 계급투쟁에 관한 것이 아닌, 또다른 논의의 대상이 되는 한 개인이 있다. 바로 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뒤 모티에다.


[도주 중 체포당하는 루이 16세 일가]


1791년 6월 20일에 국왕 루이 16세 일가는 국외로 탈출을 시도했다. 시민들은 이를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이자 외세와의 협력 시도로 보고 크게 분노해 국왕을 규탄했다. 그렇게 해서 그전까지 위태롭게 유지되던 입헌군주정은 무너질 상황에 처했다. 상퀼로트들과 과격 자코뱅파들은 당장 입헌군주제의 폐지와 공화정의 수립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들은 파리에 모여 집단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 사태가 점점 심각하게 돌아가, 민심이 과격해지게 된 것이 7월 16일의 일이다. 그 동안 국민의회에서는 장시간 입헌군주정 유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나 결론은 루이 16세를 계속 프랑스의 입헌군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고, 이 결정은 7월 17일에 공포된다.

그 때 죠르쥬 당통과 카미유 데물랭을 위시한 코들리에 클럽 일파가 파리 시민들을 선동,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에 서명하자며 샹 드 마르스Champ de Mars 광장에 모이게 한다. 수천에서 거의 만여명에 달하는 감정적으로 격해진 인파가 모이자 의회는 국방군Garde Nationale(갸흐드 나씨오날)을 투입해 치안을 유지케 한다.


[Champ de Mars, Paris]


처음 오전 동안은 시민들이 평화롭게 단상에 올라 발언하고 구호를 외치는 수준의 평화로운시위가 벌어졌고, 국방군은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고 경비를 서는데 있어 성공적이었고, 딱히 무력 충돌은 없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죠르쥬 당통이 이끄는 과격파 선동가들이 군중에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달라다. 그리고, 국왕 폐위의 청원서는 급조되는 터라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기다림의 시간동안 점점 더 과격해졌다. 시민들은 아예 그자리에서 청원문을 작성하려하기도 했다. 이 때가 오후 1시 경으로, 푹푹 찌는 더위의 한가운데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싸 서 있는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당시 국방군 대부분이 평범한 파리 시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계급 투쟁에서 어떤 가치도 대표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시민들의 군대에 대한 적개심 표출은 다분히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정확히 2년 전인 1789년 7월 16일에 의회에 의해 만장일치로 이 국방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던 사람이 바로 라파예트 후작 쥘베르 뒤 모티에였다. 그는 프랑스 혁명 전개 과정에서 대표적인 중도 보수파 인사로, 중도노선과 더불어 입헌군주제와 영국식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과격 공화파들에게는 거센 공격의 대상이 되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가 시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장의 단상 위에 올랐을 때 쏟아진건 야유와 욕설이었다. 누군가가 돌을 던지자 라파예트는 뒤로 물러섰다. 오후 2시 경에는 군중 속 누군가가 라파예트에게 총 한 방을 쐈으나 빗나갔다. 이러한 광경들에 크게 걱정 된 당시 파리 시장 쟝 실뱅 배일리는 공권력의 무력 행사를 허용하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계엄령 선포를 전달받은 라파예트는 병사들에게 공포탄을 쏘게 한다. 공포탄 일제 사격에 시민들은 잠시 추춤해 하며 물러섰으나, 곧 그저 공포탄일 뿐이니 겁먹지 말라는 군중 속 누군가의 외침에 시민들은 오히려 더욱 과감해졌다. 돌덩어리들이 국방군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적색의 쟈코뱅파와 녹색의 코들리에파가 군중을 선동하며 돌과 자갈을 던져댔다. 웃기는 건, 오늘날 프랑스 공화국과 그 혁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청-백-적의 삼색기는 다른 이도 아닌 라파예트 후작의 디자인으로, 국방군의 상징기이자 제복 색으로 체택되었던 것이었기에, 청백적의 삼색이 적색과 녹색에 의해 찢겨지고 공격받는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령관 라파예트는 실탄 장전을 지시했다. 그리고 국방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전진했다. 정식 사격명령은 내려지지 않은 상태였으나 누군가가 총을 쐈고, 곧 사격전이 이어졌다. 총연이 걷히고 나자 수천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광장에는 군인과 시민 포함해 약 30여명이 쓰러져 있었다.



공화주의자들과 과격파들은 아주 신나게 자기들 시각에서 쓴 팜플렛과 신문들을 돌렸고, 국방군, 특히 그 사령관 라파예트에 대한 공격이 거세게 행해졌다. 라파예트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의회 내에서도 그에 대한 지지가 사라졌다. 수십명의 시민들이 혁명 정부 군대의 사격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정말 중대한 사건이자 충격이었고 이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 그 이름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라파예트를 비난했다.

라파예트 혼자서만 공격을 받은 건 아니었고, 계엄령을 선포한 파리 시장 배일리도 엄청난 후폭풍을 맞았다. 악화되는 여론에 의해 같은해 10월, 라파예트 후작은 국방군 사령관직을 사임했고 시장 배일리도 퇴임했다. 배일리는 즉시 파리를 떠나 낭트에서 숨어지내다 그 2년 후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단두대에 목이 날아간다. 그리고, 시위대가 원한대로 같은 해 10월 1일에 루이 16세는 폐위된다.


자, 그러면 이 사건에서, 직급으로서의 책임이 아닌 행위로서의 책임을 물을 때, 라파예트 후작은 정말 '학살을 지시한 압제자'였는가? 시장 배일리와 사령관 라파예트는 얼마만큼 프랑스 부르쥬아 계층을 대표하는가? '학살'은 계획적이자 의도적으로 행해졌는가? 오늘날 학계에서 책임소재는 명확하지 않더라도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 의도와 목적, 사상이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이였던 간에, 1791년 7월 17일 광장에 모인 시위대는 평화적 군중이 아닌 폭도로 변했다는 것. 여기서 라파예트 후작 개인의 책임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 다만 이제 그 사건이 가지는 프랑스 공화주의의 전개에서의 큰 의의 때문에 논란은 지속된다.


한편 라파예트는 그럼에도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유능하다 판단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에에 1792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발발 때 다시 프랑스군의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행적은 나중에 이어 포스팅하겠다.


참고:
The Denial of Social Conflict in the French Revolution: Discourses around the Champ de Mars
Massacre, 17 July 1791

Author(s): David Andress
French Historical Studies, Vol. 22, No. 2 (Spring, 1999), pp. 183-209

Bailly and the Champ de Mars Massacre
Author(s): George Armstrong Kelly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 52, No. 1, On Demand Supplement (Mar., 1980), pp. D1021-D1046

덧글

  • 소시민 2010/07/17 12:24 #

    평화로운 시위대에 발포한게 아닌 평화로웠다가 폭력적으로 돌변한 시위대에 발포한 것이로군요...

    물론 발포 자체를 완전히 정당화 할수는 없지만 사실 관계는 명확히 해야 할듯 싶습니다.
  • 네리아리 2010/07/17 13:39 #

    이것과는 별개로 2002년 월드컵때인가? 외국사람들은 저런 축구경기로 몰려들어온 사람들이 훌리건으로 초☆변☆신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 놀랐다고 하지요.
  • Allenait 2010/07/17 15:04 #

    평화로운 시위대에 발포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 효우도 2010/07/17 15:32 #

    프랑스 혁명에 이런일도 있었군요.
  • 누군가의친구 2010/07/17 17:16 #

    이당시 프랑스의 상황은 그야말로...(...)
  • 행인1 2010/07/18 18:26 #

    그리고 이 시위를 주도했던 당통도 나중에는 목이 뎅거덩...
  • 파파게노 2010/12/30 13:25 #

    라파예트 백작은 당통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 시기의 수수께끼 인물인 것 같습니다. 미국 혁명의 영웅이자 몽따뉴 파로서 공화국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귀족. 허나 그 와중에도 루이 왕가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반데의 반란을 어느정도 이해했다는 면면을 보면, 단순한 기회주의자인가?, 혁명의 시발점인가? 아니면 좀더 비급진적인 공화정 체계를 원한 노인의 지혜인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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