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노예 티로(B.C. 80? ~ B. C. 4)에 관하여.



이게 뭘까요.


고대에서 중세시대까지 널리 활용된 알파벳 속기법입니다. 문자들을 간략한 부호로 생략시켰죠. 중세 수도원들에서는 모두 이 속기법이 표준 교육과정이었고 17세기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습니다. 속기법은 왜 사용했을까요? 구술되는 내용을 빠르게, 말하는 속도에 맞추어 받아적기 위해서입니다. 일일히 문자들을 또박또박 적고 있으면 시간에 맞춰 쓸 수 없겠지요? 이렇게 써 놓고 난 다음에 나중에 정식으로 다시 쓰고. 오늘날에야 키보드로 타타타 입력하면 되니까 필요없지만 말입니다.

이 속기법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노타이 티로니아나이'. 티로식 필기란 뜻입니다. 티로란 고대 로마인이 발명한 기법이란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티로가 이 기법을 창시했다는 증거나 문헌적 물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야사'로 전해져 올 뿐이지요. 다만 이 야사가 전해지는건, 티로의 직업은 비서였고 그의 고용주가 수사와 언변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티로는 그 고용주의 글과 업적들을 역사에 보전한 사람이었지요.



마르쿠스 툴리우스 티로Marcus Tullius Tiro는 기원전 103년 경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의 저자는 신뢰도가 무척 떨어지는데다 사실관계와 증거들을 따져보면 신빙성이 없는 나이가 됩니다. 동시대 관련 문헌들을 조사한 학자들은 그보다 최소 20여년은 후인 기원전 80여년경이라고 추측합니다.

어쨌던 티로는 이탈리아 아르피눔의 부농 집안에서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그 부농 가족이 로마로 갈 때도 같이 따라다녔고. 그는 노예는 노예였지만 그의 임무는 노동이 아닌 필기와 문서해독, 암기 등 비서로서의 임무였습니다. 양식있는 집안에서는 verna(가문 안에서 태어난 노예)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켰고 이는 티로의 주인 집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티로는 그 중에서도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주인 본인이 노예의 교육에 힘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티로는 교육 받은 것 이상의 재능을 보였는데, 스스로도 맹렬히 공부했던지라 학식과 문장력이 정말 뛰어난 비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문학 양자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명 비서로서 주인의 재정관리, 문서정리, 심지어 정원일까지 거의 모든 일들에 있어 주인을 보좌하여, 그의 주인은 그 비서를 정말 마음에 들어했고 아꼈습니다.

관련 문건들을 보면 노예 티로는 집안에서 완전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과 주인의 형이 그에게 쓴 편지, 또는 그에 관해 주인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면 따스한 애정이 넘쳐흐릅니다. 그는 기원전 52년경에 병을 앓는데 주인이 그에게 쓴 편지는 "자네가 나를 위해 해준 모든 일들을 전부 능가하는 업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네가 완쾌되는 일일세. 어서 빨리 낫게나" 라며 걱정합니다. 주인이 노예에게 쓴 편지같지는 않습니다. 기원전 53년경에 주인은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민으로 만들고 정식 고용인으로 임명합니다.

비서 티로는 고용주의 아들의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했는데, 그 아들이 유학갔다가 공부는 안하고 흥청망청 놀기만 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이 노발대발 할 때 이에 겁먹은 아들이 도움을 요청한게 티로입니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답하지 않고 대신 그 비서에게 편지를 보내어,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혼미해져 본분을 다하지 않았는데 이젠 정신을 차렸기에 열심히 공부할 겁니다. 아버지께 그리 전해주세요. 그런데 강의 필기들을 정리할 비서 한명만 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가깝고 편히 여기는 상대였기에, 그리고 어려운 아버지를 직접 상대하기 보단 그 사이에 중재자에게 호소하고파 나오는 말들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긴밀한 관계에 있던 고용주가 기원전 43년에 갑작스레 죽습니다. 칼에 살해당한 겁니다.



망자의 비서였던 티로는 그의 가르침들과 글들과 편지들을 모두 모아, 주인의 친구와 함께 그 편지들을 정리해 책으로 내고, 또 자신은 존경하고 사랑하던 스승이자 가족이었던 주인에 대한 전기를 집필합니다. 그 후 유서에 의해 분배받은 주인의 유산으로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에 장원을 하나 사 거기서 여생을 철학과 문학을 논하는 글들을 집필하며 살아가지요. 그는 기원전 4년 경에 사망합니다.


네.

그 주인이란 다름 아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입니다.





티로가 해방되었을 때 택한 가문명과 부족명도 모두 주인의 이름에서 받은 거지요.

티로 이후 키케로의 행적에 대해 적는 사가들 (ex: 플루타르코스)은 티로가 쓴 키케로 전기를 참고문헌으로 제시합니다. 안타깝게도 티로판 키케로 전기는 오늘날 전해내려오지 않습니다. 다만 키케로의 친구였던 아티쿠스와 함께 정리해 출판한 키케로의 수많은 서한들은 서한집이란 이름으로 대다수가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와, 키케로의 사상과 행적, 생각들을 세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 기록하고 그 기록을 보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해방노예 티로는 바로 그런 기록의 보전자이자 기록자로서 소중한 임무를 수행한 거지요. 여기서 그와 키케로 가족간의 따뜻한 우정의 모습은 이에 관해 읽는 이의 마음도 훈훈하게 합니다.





ps. 한편... 사실 티로가 키케로가 결혼 전에 낳은 서자이며, 키케로 아들 키케로와 티로가 그리 친했던 것도 사실 이복 형제간이어서 였다는 그런 이론이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문헌:

M. Cicero and M. Tiro
Author(s): William C. McDermott
Source: Historia: Zeitschrift für Alte Geschichte, Vol. 21, No. 2 (2nd Qtr., 1972), pp. 259-286


The Freedmen of Cicero
Author(s): Susan Treggiari
Source: Greece & Rome, Second Series, Vol. 16, No. 2 (Oct., 1969), pp. 195-204

덧글

  • G-32호 2010/07/18 20:41 #

    이래서 상사는 부하를 아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상사들이 아랫것들에게 되례 역관광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역사판에서

    이건 몇 안되는 훈훈한 상하관계
  • Esperos 2010/07/18 20:43 #

    주인이 노예를 해방하고자 할 때 법률적으로 유효하고자 정해진 법식마저 있었지요. 고대의 노예제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예가 아닐까요, 특히나 키케로 경우는.
  • asianote 2010/07/18 21:34 #

    뭐 이 경우가 특이한 사례지요. 사실 대다수 노예들은 농장에서 광산에서 굴러야 했지요... 뭐 운 좋은 노예야 그리스어 할 줄 아는 노예로써 지배계급의 시중을 드는 애들이지만요.
  • nighthammer 2010/07/18 21:49 #

    가노니까요. 집에서 주인하고 동고동락하는 노예는 꽤나 인간적으로 대우받는 경우가 왕왕 있었죠.
    덕분에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는 노예도 자주 나옵니다. 그라쿠스 형제도 비슷한 경우가 있던걸로.

    물론 농장이나 광산에서 대량으로 투입되는 노예들에겐 그런거 없습니다. 이쪽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노예' 죽을때까지 굴려지고 다쓰면 버려지는 도구로서의 노예는 이쪽을 말하지요. 숫자도 이쪽이 절대다수고.
  • 월광토끼 2010/07/22 04:26 #

    가노의 특수성 때문이지요. 이건 미국의 사례에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가노도 어디까지나 노예였습니다만 플랜태이션 노예와 가노는 애초에 비교가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말씀하신 '현대인의 인식'을 보면 애초 가노와 노동노예의 차이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말도 맞긴 합니다. 허허.
  • Allenait 2010/07/18 20:45 #

    이름만 보고 어? 했는데 키케로의 비서였군요
  • 漁夫 2010/07/18 20:54 #

    뭐 제가 읽은 몇 진화심리학 관계 서적에서도 '로마 귀족들이 노예들을 그리도 젊은 나이에 재산까지 많이 주면서 해방시킨 이유가 서자였기 때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 asianote 2010/07/18 21:05 #

    혹시 참고할만한게 있는지요?
  • 월광토끼 2010/07/22 04:27 #

    물론 순전히 재능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우대해주는 예도 있겠습니다만.

    '쿼바디스'의 주인공이 노잡이일에서 해방되는 것처럼.
  • intherain 2010/07/18 21:04 #

    왠지 그럴거같았습니다(..)비록 저걸 대충안게 로마인 이야기지만(...)

    분위기랑 연도상 그럴거 같더라구요 ㅎㅎ
  • 월광토끼 2010/07/22 04:27 #

    ㅎㅎ 눈치가 빠르셨습니다
  • 아브공군 2010/07/18 21:09 #

    대단한 발명을 했군요... 무려 1700년간 사용된 속기법이라니....
  • asianote 2010/07/18 21:17 #

    이복 형제간이어서 였다는 그런 이론이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이복 형제간은 일반적으로 콩가루로 알고 있습니다. 저 가설은 설득력이 빈약한지도요...
  • 월광토끼 2010/07/22 04:27 #

    그건 현대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입니다.
  • 시스 2010/07/18 21:31 #

    드라마 로마에서 보레누스와 함께 로마 중심 조폭을 썰어버린 폴로에게 몽둥이 하나 들고 덤벼들었던
    그 분의 이야기였군요.
    드라마에서도 둘의 관계가 주종관계보다도 친구의 관계로 보였었는데 납득이 가네요^^
    시오노 나나미씨의 글은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로마인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보아야겠네요.
  • 漁夫 2010/07/18 22:27 #

    저 사람 얘기는 별로 나오지 않으며 이름도 나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꼭 한 번 언급만 했다고 압니다.
  • 월광토끼 2010/07/22 04:29 #

    아니,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시면 안되죠!!!!!!!!!!!!!!!!!! 왜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시려 합니까?;; 그건 대하 역사소설일 망정 역사책은 아닙니다.

    키케로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시다면 앤쏘니 에베릿의 키케로 전기 (한글로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를 읽어보시는게 좋겠습니다.
  • nighthammer 2010/07/18 21:39 #

    소설 '임페리움'의 서술자 되시는 분이군요.
    어쩐지 익숙하다 했습니다.
  • 월광토끼 2010/07/22 04:29 #

    아, 임페리움의 화자가 티로입니까?! 흥미가 생기는군요
  • 네비아찌 2010/07/18 22:33 #

    티로가 실은 서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가까웠다는 설은 마치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서자였기 때문에 운운 하는 가설을 떠오르게 하는군요^_^
  • ㅎㅎ 2010/07/20 19:59 # 삭제

    "What are you doing my son?" "Succeeding you, father."
  • 월광토끼 2010/07/22 04:29 #

    ..하지만 브루투스의 카이사르 서자 설은 아예 설득력이 없기에..
  • 행인1 2010/07/18 23:34 #

    '속기법'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되었군요. (국내에는 잘 안 알려진)티로란 인물에 대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월광토끼 2010/07/22 04:30 #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 지나가던과객 2010/07/19 01:03 # 삭제

    해방노예의 출신에 그런 비밀이!!
  • 들꽃향기 2010/07/19 04:20 #

    잘 읽었습니다. 정치 투쟁과 그 와중에서의 지식인의 희생이라는 암울한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 그래도 훈훈함과 희망이 있는 것 같네요 ^^
  • 월광토끼 2010/07/22 04:30 #

    그래서 저도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 initial D 2010/07/19 07:50 #

    옛날엔 속기법이라는걸 듣기만해서 그런지..

    직접 이미지를 눈으로 확인해보니

    간단하면서도 어렵군요..
  • 월광토끼 2010/07/22 04:30 #

    쓴 사람이나 저게 뭔 소린지 알지, 해독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 엽기당주 2010/07/19 11:23 #

    전 티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대시대의 '슈퍼컴퓨터'라면 이런 지식노예가 아니었을까 합니다만..

    그나저나 인간이 꼴통이었다면 이렇게 박학다식하고 '자신의 의견'도 있는 노예는 거추장스러웠을텐데..

    이런 노예를 잘 다루고 키울수 있는 키케로라는 인물이 더 호감이 가는군요.

    만약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네 가노였다면 어땠을까요? 흐흐흐.
  • 월광토끼 2010/07/22 04:31 #

    키케로가 스스로 그런 박학다식한,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지적 수준에 맞는 사람을 키워내고자 했겠지요. 키케로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그런 거였으니까.
  • 곰소문 2010/07/19 15:14 # 삭제

    아..좋은 글 감사합니다.

    키케로에 대한 월광토기님의 애정이 엿보여서 더 보기 좋습니다.
    덕분에 키케로에 대한 저의 인식이 이 블로그를 통해 계속 변하고 있네요.

    우리나라 인터넷에서는 보기어려운 내용들을 다루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 월광토끼 2010/07/22 04:31 #

    제가 도움이 된다니 저야말로 정말 기쁩니다.
  • 모에시아 총독 2010/07/19 20:39 #

    최근 월광아재의 글을 통해 키케로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습니다. 비록 더이상 로마에는 맞지 않은 체제를 지키려고 구체제에 매달리긴 했지만 키케로 개인은 정말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키케로로 뿐만 아니라 로마사에 대한 균형있는 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건필하시기를.
  • 월광토끼 2010/07/22 04:32 #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 돌아보면 제가 키케로 관련글도 지금껏 근 10여개를 썼군요...
  • MK 2010/07/22 07:38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리고, 비로그인을 탈피하고자 만든 이글루스 링크도 신고합니다. :)
  • 시스 2010/07/22 07:42 #

    제가 로마를 좋아하긴 하지만 좋아한다고 남들에게 말하긴 민망할 정도의 지식밖에 없어서요.
    시오노 나나미의 글은 저도 싫어합니다^^
    그 사람 글은 읽으면 왠지 거부감이 드는데다가
    전에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서평 과제 하면서 다른 책들이랑 비교해볼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은 상당히 편애하면서 글을 전개하는 것을 보고나니 별로더군요.
    그래서 로마인 이야기는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추천해주신 책 외에도 로마사의 전반적인 부분을 다룬 책이 있으면
    수고스러우시더라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a
  • 2010/07/22 10:41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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