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에 대한 영국 정치권의 반응과 진보개혁파의 쇠퇴

[1793년 2월, 프랑스의 대영 선전포고에 관해 하원에서 연설하는 총리 윌리엄 피트]


2009년 2월에 제가 "프랑스대혁명기 영국 사회의 분위기"라는 포스팅을 한 바 있습니다만, 이에 관련해 좀 더 정치사적인 부분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씁니다.


사실 1789년 바스티유 요새가 함락당하고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 선포되고 하는 등 프랑스가 대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져있을 때, 이러한 격변의 소식들은 영국에 도착해 불러일으킨 것은 걱정과 우려가 아닌 축하와 환호의 목소리였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입헌군주제 모델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이제 혁명의 프랑스인들이 선진 영국의 제체를 본받아 입헌군주제를 수립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총리 윌리엄 피트William Pitt(小)와 토리당 내각도 혁명의 소식을 반겼다. 프랑스 내에서의 정치적 개혁과 왕권의 약화는 프랑스 대외정책을 유화시키고 왕정국가의 강경하고 팽창주의적인 외교력을 상실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정부 내 정치적 혼란이 커지면 커질 수록 프랑스가 국외로 눈을 돌리는, 다시 말해 영국의 권익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줄어들면 줄어들테니, 이건 좋은 일이었다.

당시 피트 정부가 추진해 오던 경제정책과 평시내정의 결과는 서서히 ‘여물어 갈’ 단계에 와 있었고, 피트는 이러한 정책 성공에는 앞으로도 평화가 적어도 10년은 더 지속되어야 한다고 봤다. 특히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전쟁은 지양되어야 했고 이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프랑스가 혼란상태에 빠져 제 몸을 가누지 못해야 하는 것 또한 필수조건이었다.

한편 당시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 의원이 이끌던 야당, 휘그당 급진 개혁파들 또한 프랑스 혁명을 크게 반겼다. 폭스는 바스티유 함락 소식을 전해듣고 이를 인류 역사상 최대 최고의 사건이라 칭하며 환호했다고 한다. 기나긴 피트 정권 체제를 무너뜨리고 정부와 헌법을 보다 더 민주적으로 개혁하며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것이 당의 최종 목적이었던 휘그당측은 프랑스 혁명이 영국 내 개혁운동에 상당한 힘을 실어줄 수 있으리라 봤다. 무엇보다도, 일단 프랑스 절대왕정(절대주의Absolutism)이 무너지는 것은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모두 환호할 일이었습다.


프랑스 내 입헌군주제가 성공적으로 수립되자 영국 내 개혁파들은 ‘프랑스인들이 영국 체제를 따라하다가 아예 더 진보했구나’ 하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에 심지어 국왕 죠지 3세 또한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을 지원함으로써 자길 물 먹인 루이 16세의 몰락을 인과응보라며 고소해하는 상황이기까지 했다.

1789년 여름의 영국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심각한 걱정도 불안도 없는, 전반적으로 사태 진행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몇몇 이들은 혁명 과정에서의 폭력 사태들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의 절대주의 앙씨엥 레짐의 폭압 밑에 짖눌려오던 민중들이 그정도 분풀이 하는 건 타당하지’ 정도의 반응을 보였습다. 그러한 폭력 사태는 걱정이 아닌 동정심의 대상에 가까웠다.

테니스 코트의 맹세, 국민의회의 수립, 인권선언, 성직자와 귀족 권리의 몰락, 바스티유 함락, 지방에서의 민중 봉기 사태 등등, 이런 일들은 모두 당시 강성했던 휘그당 개혁파들에게 있어 영국 내에서의 개혁시기도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표시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피트의 집권과 피트-죠지 3세의 유착관계는 많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휘그당의 개혁운동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클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은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킬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휘그당 내에서 보수파이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철학자이자 하원의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프랑스 혁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개혁파이자 1688년 명예혁명 정신으로 회귀하자는 복고파였으나 버크는 영국 명예혁명의 성공요인은 그 조심성과 보수성에 있다고 보았고, 프랑스에서의 과격한 정치상황과 개혁운동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기에 프랑스 혁명의 반종교적 성향 또한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버크는 1790년 11월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라는 책자를 출간한다.

이 책자는 영국 사회에 아주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 전개 과정과 그 성격에 대해 여러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고 책자 내용도 오류가 많긴 했으나, 그 본질적인 내용 자체는 굉장히 예언서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으니.

프랑스의 혁명사상은 중앙집권화에 힘을 실어줄 위험이 크며, 이 혁명사상은 일종의 종교적 색체를 띄게 될 것이고, 이에 대한 광신적 보호로 혁명정부는 결국 자유를 억압하고 기본인권들을 묵살하며 불관용과 압제의 정책들을 펴, 결국 혁명사상의 중앙집권적 성격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 자유는 말살되고 말 것이다, 이게 버크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의 말살로 인해 내정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며, 혁명정부는 독재적으로 변할 것이고, 국내에서의 불안과 국외로부터의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혁명정부는 결국 군사력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그 강성한 군사력 속에서 군사 독재자가 등장할 거라는 내용으로 결론 짓는 이 책자가 출판된 시기는 1790년. 아직 어떠한 독재정권의 출현도 감지되지 않았으며 혁명전쟁은 시작하려면 아직 먼 때였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향방이 결국은 절망적이고 피폐한 사람들이 공익을 파괴하고 사회를 희생시켜 자신들의 이기적 행복을 추구하는 악행으로 점철될 것이라 보았다.



물론 버크의 이 책자는 당시 개혁파/혁명 동조적 영국인들에게 근거 없는 탁상공론이라는 비난을 거세게 받았고 버크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과 책들도 거듭 출판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당시 개혁 운동의 선두에 선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이다. 다만 페인의 주장은 버크의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보다는 혁명사상과 공화주의 전반에 대한 옹호에 가깝다. 페인의 저작은 당시 영국 내 과격 개혁파 사상을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내 상황은 점점 버크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점차 버크의 주장에 무심하던 휘그당 내 다수파이던 보수파가 결국 버크와 동조하기 시작하면서 휘그당 당론은 크게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수인 폭스와 버크의 사이도 점차 벌어진다. 1791년에는 프랑스 내에서 자코뱅파와 코들리에, 상퀼로트의 준동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고 이런식으로 영국의 이상적인 개혁 모델로부터 멀어지며 점차 급진적으로 변해가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을 본 영국 내 혁명 동조자와 개혁파들의 의견도 자잘히 분열되게 되었다. 폭스와 버크는 그 해 4월에 화해를 하고 당내 계파간 화합을 추구하려 하였으나 폭스파 중에서도 급진적 의원들의 행동에 화가 치민 버크는 결국 폭스와 결별한다.

영국 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가 일소되게 된 것은 1792년 루이 16세의 바렌느로의 도주 사건을 다루는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에 의해서였다. 이제 혁명은 끝장났으며, 혁명정신을 저버린 폭압적 자코뱅 도당들이 프랑스를 장악했으며, 그 자코뱅주의는 영국적인 것과 영국 헌법, 영국 전통 모든 것에 해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확연해지게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트 정권은 프랑스와의 전쟁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앞서 말했듯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고려가 우선되었고, 총리 피트는 혁명정부가 국제협약을 준수하고 정상적인 외교와 무역관계를 유지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혁명 프랑스를 합법적 주권국가로 인정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격퇴함과 동시에 점점 플랜더즈, 네덜란드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갈 야욕을 보였고, 그 군사 작전들은 영국의 국익에 큰 위험을 가져다 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른 곳은 다 건드려도 네덜란드 지역에 대한 공격만큼은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만큼이나 심대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야 어찌되었든 결국 선전포고를 먼저 한 것은 프랑스였으니.

이런 일련의 사태 속에서 폭스는 휘그당 내 자신의 계파를 간신히 유지해 나갔다. 사상과 이념에 의한 것이 아닌 순전히 폭스 개인의 인간미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나 다름없었고, 그 막강하던 폭스의 세력은 하원 내에서 겨우 50명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폭스는 새로 시작된 프랑스와의 전쟁을 과거 미국과의 전쟁과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 오판, 미국이 승리하여 노스 총리 정권이 몰락했던 것처럼 피트 정권도 프랑스에 패해 무너져, 개혁파가 정권을 잡게 될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기대었다. 이러한 행보는 점점 반국가적인 행태로 비춰져 ‘정권교체를 위해서라면 우리 군대가 박살나도 좋단 말이냐’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 때 휘그파에서 폭스를 옹호하며 영향력도 크던 포틀랜드 공작 윌리엄 캐븐디쉬 벤팅크가 결국 버크의 손을 들어주면서 1794년, 토리-휘그의 연합내각이 탄생한다. 폭스 일파는 버려지고, 휘그당 다수파도 연정을 적극 지지하게 되면서 폭스와 페인으로 대표되던 급진 개혁파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어버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휘그당 내 급진파와 개혁주의 운동을 무너뜨린 것은 피트 정권의 실질적인 압력행사가 아닌, 바로 민중 여론의 힘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프랑스 자코뱅주의와 영국 내 급진 개혁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이는 폭스파의 대외 이미지에 크나큰 타격을 주며 그 힘을 상실케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폭스와 개혁주의 휘그당파의 정권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올바른 대외선전의 부재에 큰 책임이 있다. 자코뱅주의와 확실한 이념적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또는 프랑스 혁명 사태가 자코뱅주의로 흘러가지 않았다면 영국 내 사회개혁이 행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좌에서 우로: 총리 윌리엄 피트(小) / 하원의원 에드먼드 버크 / 연정 당시 국무장관 포틀랜드 공작 / 좌파 지식인 토마스 페인 / 휘그당 당수 하원의원 찰스 제임스 폭스]




참고문헌:

Christie, Ian R. Myth and reality in late-eighteenth-century British politics, and other paper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0.

Derry, John W. Politics in the age of Fox, Pitt, and Liverpool: continuity and transformation. British history in perspective. Houndmills, Basingstoke, Hampshire: Macmillan. 1990.

Rogers, Nicholas. Whigs and cities: popular politics in the age of Walpole and Pitt. Oxford: Clarendon Pres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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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의 토끼집' : 시스템과 무관히 내 멋대로 해보는 2010 이글루 결산 2010-12-28 08:37:37 #

    ... 을,토머스 칼라일의 고전적 서사를 통해 집중 조명해 보았습니다. 10.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 영국 정치권의 진보세력이 어떻게 그 국외의 혼돈을 받아들이고, 대처하여, 또 그것이 영국 정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서술하는 글도 썼습니다. 이것이 현대 정치권에서도 한번 교훈으로 받아들여볼만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 ... more

덧글

  • 빼뽀네 2010/07/27 16:20 #

    프랑스 혁명에 대한 영국의 반응도 무척 재미있었으며,
    밖에서 본 프랑스 혁명에 대한 내용도 매우 유익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월광토끼 2010/07/30 04:49 #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 행인1 2010/07/27 16:21 #

    버크의 의견은 뭔가 통찰력이 있다고 밖에는 평할 수 없겠군요.
  • 월광토끼 2010/07/30 04:50 #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 과정을 돌이켜 보면서 해석한 거겠지요
  • 모에시아 총독 2010/07/27 16:30 #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는 다르군요. 역시 결과론만 보면 안된다니까....... 그런 의미에서 참 흥미롭네요. 애초에 프랑스혁명이 그렇게 과격한 쪽으로 갈 거라고는 혁명의 주체세력들도 생각을 못 했을 것 같아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민중에게 등이 떠밀려 '어? 어? 어?' 하다보니 혁명이 과격화로 치닳은 점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영국정치인들이 초기에 프랑스 혁명에 대해 긍정적이게 생각한 것도 '자기네'생각에는 프랑스 혁명이 자기네와 마찬가지 결과를 낳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겠네요. ㅎㅎ
  • 월광토끼 2010/07/30 04:51 #

    그렇습니다. 다만 프랑스인들이 영국 정치가들이 생각한 것처럼 '신사'들이 아니었기에..
  • 네비아찌 2010/07/27 16:57 #

    저도 버크의 통찰력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 Mr 스노우 2010/07/27 17:46 #

    잘 읽었습니다 ^^
  • Allenait 2010/07/27 17:54 #

    야.. 이거 정말 대단하군요
  • 샤티엘 2010/07/27 18:38 #

    저는 폭스와의 결별 이후, 버크의 행보가 궁금해 지는 군요. 오해가 있엇더라고 해도 거의 노스트라다무스 빰치는 예언을 했던 사람 인데 말입니다.
  • 월광토끼 2010/07/30 04:53 #

    몇년 후에 위장에 병이 생겨 허약해져 97년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예언이라기 보다는 성찰..이지요.
  • 격화 2010/07/27 19:28 #

    저도 버크의 통찰력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2)

    누구나 긍정적으로 바라볼때 냉정하게 파악하고 예측했다는 점만으로도 비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측이 정확하기까지했으니...!!!
  • gforce 2010/07/27 20:07 #

    그래서 전 버키안(Burkean)
  • 월광토끼 2010/07/30 04:54 #

    리베럴 컨서버티즘...
  • 소시민 2010/07/27 22:55 #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는 얘기는 예전에도 들었지만 이번 포스팅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

    그나저나 페인의 버크의 주장에 대한 반박은 웬지 현실주의적 비판에 "이 현실을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이냐"라고 당위적 반박을 하는 일부 국내 진보 진영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네요.
  • 월광토끼 2010/07/30 04:55 #

    그런 비교도 가능하겠지요
  • Cheese_fry 2010/07/27 23:50 #

    토마스 페인..; 왜 제 기억에는 뜨내기 지식인;;이라고 남겨졌는지. (응?)
  • 월광토끼 2010/07/30 04:55 #

    그는 뜨내기가 아니었지만 오늘날 뜨내기 진보 젊은이들에게는 영웅적 우상으로 추앙받으니..?
  • 먼훗날언젠가 2010/07/28 10:20 #

    저도 버크의 통찰력에 머리가 숙여집니다.(3)

    학부 수업 때 교수님이 버크에 대해서 좋게 평하시면서 위에서 언급하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 원문을 프린트해서 주셨나 해서 번역판이 있나
    여기 저기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고-ㅁ- 생각보다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언급이 안되있더라구요. 결국 원문 독해를 할 수 밖에 없었죠.
    미천한 독해 실력에도 원문의 내용에는 탄복했던 기억이 나네요.
  • 월광토끼 2010/07/30 04:56 #

    당대 최고의 지성 중 하나였으니까 말입니다
  • HANNA 2010/07/29 01:18 # 삭제

    올 때마다 정성스레 써 주신 글들을 정말 흥미있게 읽고 가다 처음으로 글을 남기게 되었네요 ^^

    갠적으로 앙드레 모로아 넘 아껴서 중학교때부터 옆에 두고 거의 20여번씩은 읽은 것 같습니다만...;; 이곳에서 정말 많은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특히 버크에 대한 부분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영국사회의 분위기 변화와 관련해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점인데 핀포인트 시군요. ㅎㅎ
  • 월광토끼 2010/07/30 04:57 #

    제 글들을 유익히 봐 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영국사를 처음 본격적으로 접한건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였지요..
  • deokbusin 2010/07/29 07:07 # 삭제

    개인적으로는 버크가 단지 통찰력만이 뛰어나서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기 보다는 백여 년 전의 영국에서 벌어진 일들이 지금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발견한 후에 본문에서의 주장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버크는 영국인으로서 영국이 선구적으로 행하였던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현재 벌어지는 사태의 방향성을 "예언"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나 합니다.


    하지만, 버크가 주장한 것이 통찰 혹은 "예언" 둘 중 하나이더라도, 역사적 체험에서 현재 진행되는 사태의 방향을 추정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당장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 중에서 과연 얼마나 될련지 그것이 진정한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 월광토끼 2010/07/30 04:58 #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버크만한 통찰력의 인물이, 또는 페인만한 열정의 인물이 한국 지도층에서는 그다지 나오리라 생각되지 않는 점에서 참 안타깝습니다.
  • 2010/07/29 19:0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월광토끼 2010/07/30 04:58 #

    물론입니다. 출처만 명시하신다면 언제든지.
  • 들꽃향기 2010/07/30 02:21 #

    잘 보았습니다. 사실 정치가 상층부 뿐만이 아니라 민중운동에서의 운동의 조직부의 사상적 성격까지 프랑스 혁명이 자코뱅주의와 거리를 두다보니 성격이 변화하게 된 것은,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네요. 어찌본다면 영국의 사회변화에 진정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 혁명이었을지도요. ㄷㄷ
  • 월광토끼 2010/07/30 05:00 #

    네, 당시 휘그당의 세와 폭스파 Foxite 개혁운동을 무너뜨린게 프랑스 혁명의 전개과정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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