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 16 (1809~1814) : 제 1차 피레네 공방전

[1813년 7월부터 8월까지. 피레네 산맥 전역의 모습. ←이쪽이 북쪽임.]



나폴레옹에 의해 지휘권을 인계받은 프랑스 육군 원수 장-드-듀 술트가 피레네 잔여 스페인방면 프랑스군의 지휘를 시작한건 비토리아 전투 후 보름 후인 1812년 7월 12일의 일이었다. 그는 패잔병들을 규합해 유명무실해진 군 편제(북방군, 남부군, 중앙군, 포르투갈 침공군)를 재편하고 재무장시켰다. 모든 야포를 비토리아 전투에서 상실했기에 술트는 프랑스 남서부의 바욘느 병기창으로부터 140문의 야포와 짐말들을 차출해 포병을 충원하고 스페인으로 진공해 들어갈 준비를 했다.

스페인 내에 프랑스군이 아직도 점유하며 영국군을 상대로 농성하고 있는 곳은 단 두 도시였다. 스페인 북부의 팜플로나와 산 세바스티안으로, 두 곳 다 견고하고 엄하게 방어되는 요새 도시였으나 포위된 상태에서 오랫동안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곳을 당장 구원하지 않으면 프랑스군이 다시 스페인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영국군 입장에서도 술트의 재편된 프랑스군이 다시 피레네를 넘어 오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였다. 영국군 총사령관 웰링턴 공작(이제 공작으로 승급) 아서 웰즐리 원수는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로 침공하는 건 어려워도 피레네 산맥을 지키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호언장담했으나 휘하 제장들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며 실제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국군은 6만 2천명의 병력으로 넓은 범위에 걸쳐 놓인 피레네 산맥의 주요 관문들을 지킴과 동시에 앞서 말한 팜플로나와 산 세바스티안을 공성해야 했으며, 침공해 들어올 술트의 프랑스군은 7만 9천에 달했다. 결국 나중에는 웰링턴도 “산 세바스티안을 공격하고 팜플로나를 포위하는 두 작전목표를 동시에 수행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지 않게 되었다.”고 작전의 어려움을 인정했다.

한편, 술트 원수는 사기가 땅에 떨어진 패잔병 무리에 불과했던 스페인 방면군을 제대로 싸울 수 있고 규율이 잡혀있는 전투병력으로 재편하는데 있어 아주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전략과 전술은 또 다른 문제였다. 피레네의 영국군 방어선을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길목을 선택해서 공격할 것인가의 문제로 술트와 웰링턴 둘 다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웰링턴은 술트가 당장 공격받고 있는 산 세바스티안 방면으로 진공해 들어올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7월 24일 진군을 시작한 술트의 목표는 팜플로나였다. 산 세바스티안의 총독은 프랑스 본국으로 계속 서신을 보내어 요새도시의 방비가 철저하며 문제가 없다는 확신에 찬 의견을 전하는 중이었으나 팜플로나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술트가 팜플로나 방면으로 진군을 시작한 바로 그날 토마스 그라함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 육군 제 5 사단이 산 세바스티안에 전면공세를 가하기 시작했으니, 술트가 선택을 잘못한 셈이다.

피레네 산맥 방어거점에서, 팜플로나로 향하는 길목들 중 가장 중요한 곳은 마야 계곡과 론세스발레스 계곡이었다. (그렇다. 그 유명한 ‘샹송 드 롤랑’의 최후 결전지. 스페인어로 론세스발스, 불어로 롱스보) 술트는 에를롱 백작 장 밥티스트 드루에 중장의 1개 군단 2만명에게 마야 계곡의 공격을 명했고 베르트랑 클로젤 대장과 샤를르 라이유 중장의 2개 군단 4만명으로 하여금 론세스발레스를 공격하도록 했다. 자기 자신이 지휘하는 본대는 론세스발레스가 뚫리면 뒤따라 들어갈 예정이었다.

1813년 7월 25일, 마야 계곡에서 영국군 방어병력은 2개 여단으로 많지 않았으나 즉각 후방에 위치한 지원병력들이 투입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 2개 여단을 지휘하던 윌리엄 스튜어트 중장은 상당한 무능함을 보였다. 그는 적이 산 세바스티안으로 향할 거라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위치가 안전하다 여겨, 휘하 병력을 방어해야 할 산 위에서 멀리 떨어진 평지에 주둔하게 하고, 자기 자신은 그보다 10마일 더 후방의 도시로 가 쉬었다. 에를롱 백작의 프랑스군 전초 부대가 산 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이는 단순한 소규모 양동으로 폄하되었다. 몇시간 후 정말로 프랑스군이 마야 계곡을 통해 들어올 것이라 파악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영국군은 뒤늦게 산위로 다시 올라가느라 진을 다 빼다 프랑스군 포화에 의해 격퇴되었다. 스튜어트의 2개 여단 4천은 곧 전멸당할 위기에 빠졌으나, 때마침 근방에서 주둔하던, 스튜어트 소장보다는 훨씬 더 능력있고 적극적인 지휘관이었던 에드워드 반즈 소장의 1개 여단이 공격해 내려오는 프랑스군의 측면을 쳤기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7월 25일 마야에서의 전투]



하지만 마야 계곡에서의 전투 후 3개 여단 6천명은 이미 2천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해당 지역의 방어를 총괄하고 있던 로울란드 힐은 후방의 엘리손도라는 도시로 군단의 후퇴를 지시해야 했다. 하지만 영국군에 있어 다행이었던 점은, 에를롱 백작이 반즈 소장의 측면 공격에 너무 놀란 나머지, 그리고 영국군과 비등한 피해를 입은 나머지 자신의 위치에서 더 진격해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척후병만 내보내며 시간을 허비했다는 점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론세스발레스에서는 로우리 콜 중장의 영국군과 스페인군 1만 1천이 프랑스군의 공격을 일단은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곳에 모인 프랑스군은 4만명이었고, 적의 숫적 우세에 질린 콜 중장은 오후에 안개가 끼자 후퇴를 결심한다. 여기서 문제는 콜의 판단이 아니라 콜이 자신의 움직임과 프랑스군의 규모를 사령관인 웰링턴 원수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음 날인 26일까지도 웰링턴은 콜이 론세스발레스를 잘 막고 있다고 알고 있었고, 또 프랑스군의 주 침공부대는 마야 계곡으로 들어오리라 믿고 있었기에, 병력을 마야 계곡 방면으로 향하게 하던 차에 그날 저녁에서야 멀리 후방으로 후퇴한 콜의 암담한 편지를 받고서 당황했을 것이다. 웰링턴은 그나마 용맹무쌍함으로 유명한 토마스 픽튼 중장의 군단이 콜의 위치로 향해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라 믿었으나, 콜이 이미 픽튼과 합류해 팜플로나로의 후퇴를 건의해 설득시켰기에 이 희망도 무산되었다.


[피레네의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 웰링턴 공작]



그러나 영국군에게는 전열을 정비할 시간은 어느정도 주어졌다. 앞서 말했듯 마야 방면에서 에를롱의 프랑스군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고, 론세스발레스 방면에서는 콜의 영국군이 안개 속에 후퇴한 덕분에 영국군이 이미 가고 없다는 것을 모르는 프랑스군 주력도 시간을 낭비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덕에 술트는 라이유의 군단으로 하여금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는 지름길 –산에서 사는 바스크인 염소몰이꾼들이 이용하는-을 택해 진군하게 하였으나, 프랑스어도 스페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스크인 가이드의 실수와 자욱한 안개 덕택에 이 부대는 길을 잃고 헤매다 다시 시작지점으로 돌아오는 난리통에 하루를 통째로 허비했다. 따라서 클로젤의 군단이 이미 한창 혼자 앞서 나간 동안 라이유의 군단은 하루 거리 뒤로 늦춰져 있었다.

그동안 픽튼과 콜은 팜플로나 인근의 작은 마을 소라우렌에서 방어선을 구축했고, 여기에 웰링턴의 본대가 합류했다. 소라우렌 방어선은 지형적으로 방어자의 포병대가 효과적으로 전장을 커버할 수 있었기에 적절한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7월 27일에 클로젤과 술트의 프랑스군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 영국군의 전열도 아직 정비를 완료하지 못했고 주력 부대가 합류를 끝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날 정오 무렵 클로젤과 술트의 프랑스군은 2만에 달했고 소라우렌에는 1만 5천의 영국군이 있었다. 클로젤은 술트 원수에게 당장 숫적 우세를 이용해 공격을 개시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가 일종의 쇼를 연출한다.

웰링턴은 홀로 말을 타고 나가 소라우렌 주위의 언덕들을 오르내리며 영국군 전열과 프랑스군 전열 사이를 내달렸다. 그 특유의 회색 프록코트와 장식 없는 검은 모자를 쓴 채 점박이 말을 타고 달리는 총사령관의 모습을 본 영국군 (+포르투갈 사단)은 두려움도 있고 사기충천한채 환호성을 질렀고, 웰링턴은 만세삼창 속에 어느 한 언덕 위에 멈춰서서 마치 도발하듯이 프랑스군 전열을 응시했다.



술트 원수는 이 모습을 보고 영국군의 방어태세와 사기가 지나치게 철저한 모양이라고 판단, 당장 공격하면 패배할 것이라 여겨 공격을 하루 늦췄다. 라이유의 군단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을 웰링턴의 이 연극적 행위는 매우 성공적으로 만 24시간의 여유를 벌 수 있었다.


[1813년 7월 28일, 소라우렌 전투]


라이유의 군단이 합류하고 나자, 술트는 7월 28일 오전에 소라우렌에 전면 공세를 명한다. 프랑스군 3만 5천에 영국-포르투갈군은 2만 4천이었다. 마을 주변 능선들에 걸쳐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고, 술트가 바욘느에서 끌고 온 야포들과 팜플로나를 포위하던 영국군 야포들이 포화를 교환했다. 양군은 두시간 무렵을 비등하게 맞붙었고 클로젤은 맹렬하게 영국군 전열을 뚫으려 했으나 여기서 영국군 휘하 포르투갈 사단이 특히나 용맹하게 전선을 유지했다. 이 때 정오 무렵 서북쪽에 위치했던 에드워드 페이큰함 중장의 영국군 1개 사단이 전장에 도착, 프랑스군의 측면을 강타했다. 결국 프랑스군의 공세는 격퇴되었다.

술트는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하루 정도 더 꾸물거렸다. 하지만 소라우렌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천 9백명에 가까운 대피해를 입었다. 반면 영국군은 2천 6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이었다. 점유하고 있던 숫적 우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7월 29일에 프랑스군의 야전식량이 바닥났다.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도, 위치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더 북쪽의 마야 방면으로 향했던 에를롱의 군단은 일시 후퇴하여 흩어져있던 병력을 규합한 로울란드 힐의 영국군에게 견제 당해 아무런 소득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술트는 회군을 결정한다. 여기서 그나마 술트가 무능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성공적인 후퇴에서 보여진다. 좁혀져 오는 영국군의 포위망에도 불구하고 술트는 다시 피레네를 넘어 다수의 병력을 안전히 귀환시키는데 성공한다. 물론 피해는 컸다. 술트의 주력 프랑스군이 프랑스 땅을 다시 밟은 건 8월 2일의 일이었고, 후퇴하는 나흘 동안 프랑스군은 다시 3천 5백명의 병력을 잃어야 했다.

그동안 북쪽의 에를롱의 프랑스군도 후퇴를 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유별나게 용맹했던 스페인 정규군 1개 연대에게 1개 군단 전체가 몇시간 동안 퇴로를 차단당해 고전한 사건도 있었다.


결국 제 1차 피레네 산맥 공방전에서 술트의 대공세는 무위로 돌아갔다. 산 세바스티안과 팜플로나 어느 곳도 구원하지 못했으며 총합 1만 3천의 아깝디 아까운 병력만 잃었다. 이제 공은 영국군의 손으로 돌아갔다. 영국군도 이 공세를 막아내느라 7천에 가까운 병력손실을 입었으나, 다음엔 영국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을 차례였다.




이 연재기획 전체와 이전 글들로 통하는 링크: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ps.
그나저나 .

이 친구 돋네요. 뭐야 지가 무슨 왕족이야 왜 자길 3인칭으로 부르는지 어우 손발이 오그라지네요

덧글

  • 지나가던 객 2010/08/04 11:22 # 삭제

    잘보았습니다. ㅎㅎ

    P.S 풍Q가 정신 차리는 날이....올까요?
  • 월광토끼 2010/08/05 09:17 #

    죽기전엔 안 올듯
  • Allenait 2010/08/04 11:35 #

    쿨타임이 다되었는지 또 그들이 설치는군요...
  • 전직 환빠 Jes 2010/08/04 11:36 #

    거참 풍Q님은 말투도 못바꾸나요. 스스로 오글거리지도 않는지...

    18세기의 '성 월요일 관행'이 있었다 하는데 알려 주실 수 있으신 가요?
  • 월광토끼 2010/08/05 09:16 #

    네? 별거 아닙니다. 옛날 17세기엔 토요일이 휴일도 아니었으며 월급날이었고 일요일은 가게들이 문을 닫으니 토요일 받은 돈을 쓸 수 있는 여유는 월요일밖에 없었죠. 그래서 공장 주인들도 월요일을 휴일처럼 쓰는 걸 눈감아 줬습니다. 하지만 나중에가서 토요일도 절반은 휴일같이 바뀌면서 19세기 들어 그 관행이 사라졌습니다.
  • 초록불 2010/08/04 11:36 #

    잘 보았습니다. 유럽사는 워낙 지식이 짧은 관계로 연재를 쫓아가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월광토끼 2010/08/05 09:17 #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면 역사 밸리에는 유럽사를 다루는 분들이 없는게 안타깝습니다.
  • 에로거북이 2010/08/04 11:48 #

    프랑스가 완전히 독일 꼴이군요.

    저렇게 사방 전선에서 병력과 국력을 소비 했으니 망하지 않을 수가 ...
  • 월광토끼 2010/08/05 09:18 #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끝난 문제여야 했을 스페인에서 영국이 저렇게까지 몰아칠 줄 몰랐던 거겠지요
  • 누군가의친구 2010/08/04 14:51 #

    웰링턴의 기만술에 슐츠가 너무 신중했던게 탈이군요.

    그러저나 풍큐는 차단당해도 또 멀티 만들어서 등장하니 좀비같습니다...ㄱ-
  • 월광토끼 2010/08/05 09:18 #

    좀비는 머리에 총을 쏘면 죽지만 환빠는 머리에 총맞아도 살아날 것 같습니다.
  • 월광토끼 2010/08/05 09:21 #

    그런데 슐츠는 독일인 이름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건 '술트' 원수 ~_~
  • 누군가의친구 2010/08/05 12:25 #

    컥.. ;;
  • 행인1 2010/08/04 15:08 #

    위기일발의 순간에 웰링턴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했군요. 그나저나 말씀하신 그 양반은 원...
  • The Nerd 2010/08/04 17:08 #

    풍사마는 이제 거의 즐기는 경지에 이르신 거 같아서 그러려니 해야 겠습니다.
    저 동쪽 먼 곳에서는 러시아에서 신나게 깨졌고, 서쪽 끝에서는 영국한테 꺠지고..나폴레옹이 왜 저렇게 무리를 했을지..
  • 월광토끼 2010/08/05 09:20 #

    사실 영국 '육군'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스페인 원정도 무리가 아니었어야 할 문제였지만... 영국군의 전쟁수행이 예상과는 매우 다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겠습니다
  • 한단인 2010/08/05 13:18 #

    손발이 오그라들기보다 시공간이 오그라드네요(응?)
  • 월광토끼 2010/08/07 14:47 #

    블랙홀이 생겨나는 수준인가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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