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 17 (1809~1814) : 피레네를 넘어.

[August 1813. The Siege of San Sebastian]



피레네 산맥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토마스 그라함 중장이 이끌던 영국군 제 5사단은 스페인 내 유이한 프랑스군 거점 중 하나인 산 세바스티안에 공세를 감행했다. 요새에 대한 포위 자체는 길었으나 포위만으로는 요새를 점거할 수 없었고, 또 그렇다고 직접적인 대규모 공격이 쉬운 일도 아니었다. 산 세바스티안 성채는 작은 반도에 자리잡고 있어 동으로는 하구, 서와 북으로는 바다를 접하고 있어 공격을 하려면 남쪽으로부터 접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접근로는 산 세바스티안 성채로부터의 포대가 커버하였다. 바다로부터 공격 할 수도 없었다. 로열 네이비가 이곳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정도로 병력이 부족했던 탓이였다. 마침 벌어지고 있던 미-영 전쟁으로, 바다위를 누비는 미 해군 중무장 프리깃함들을 잡기 위해 대서양 무역로 전반에 걸쳐 함대를 쪼개 파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USN 다윗은 어떻게 RN 골리앗을 상대했는가?] 포스팅들을 참조하시라.)

그래서 산 세바스티안 공성은 대대적인 참호 구축과 조심스러운 공성 포대 배치 끝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동안 갖은 방어선 구축 또는 공성진 구축을 통해 잔뼈가 굵은 공병연대The Royal Engineers가 요새로부터 포화를 맞아가면서도 접근로에 긴 참호를 파, 결국 사각지에 성벽을 포격하기 위한 포대들을 설치할 수 있었고, 8월 25일부터 영국군 포대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 후 닷새 동안 포격을 퍼붓고, 그와 동시에 추가 포대들을 구축하여 공격을 증대한끝에 8월 31일에 드디어 보병들이 돌격할만한 균열이 생긴다.

성채로는 썰물이 빠지는 오전에만 접근할 수 있었기에 보통 한밤중에 감행되어야 할 공성전이 해가 화창한 오전 11시에 감행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군의 피해는 컸다. 영국군 제 5사단 예하 포르투갈 여단이 또 다른 붕괴지점으로 보트들을 이용해 접근, 공격했으나 프랑스군 요새 수비대의 격한 저항에 부딪혀 이들도 전진을 하지 못했다. 다들 성벽의 붕괴지점 그 자체까지는 진입해 들어갔으나 그 이상을 가지 못한 채 수비대의 사격에 번번히 막혔다. 그런 상태로 전투 개시 후 세시간 동안 공격이 이어졌으나 붕괴지점에는 영국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일 뿐이었다.

[이 그림에는 산 세바스티안 앞바다에 군함들이 떠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묘사다]



사단장 토마스 그라함 중장은 거듭 공격을 명령하다 아무런 진전이 없자 종국에는 포대들로 하여금 다시 성벽에 집중 타격을 가하게 했다. 전선의 보병들은 아군 포대가 아군에게 불을 뿜자 당황했으나 다행히도 포병 지휘관 찰스 딕슨 대령의 정확한 지시 덕에 포탄이 아군에 떨어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영국군은 요새에 진입할 수 있었고, 한 시간 더 시가전을 벌인 후에야 산 세바스티안은 함락되었다.

산 세바스티안 공성전에서 성채에 접근하기까지 닷새 동안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에 1천 3백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8월 31일의 강습에는 그 두배인 2400여명이 죽거나 다쳐, 연합군은 총 3천 7백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반도 전쟁 내내 영국군이 가장 피해를 크게 입은 전투들은 대부분 공성전이었던 것이 다시 재현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반도전쟁 09: 공성전] 포스트를 참조.) 그래도 이 산 세바스티안이 반도 전쟁 최후의 공선전이었다.

그동안 술트는 산 세바스티안이 함락되기 하루 전에야 그곳을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피레네 산맥 북쪽 끝자락의 비다쏘아Bidassoa 강변으로 클로젤 대장 휘하 7개 사단을 파견했으나 이 시도는 그 비다쏘아 강을 내려다보는 산 마르시알San Marcial 고지를 지키고 있던 스페인군 3개 사단에 의해 좌절되었다. 8월 31일 산 마르시알 고지에는 두번의 대대적 공세가 가해졌으나 스페인군은 두번 모두 그 공세를 격퇴해냈고 프랑스군은 4천명을 잃었다. 산 마르시알 전투는 반도전쟁에 있어 정말 몇 안되는 스페인 정규군의 선전 사례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제 팜플로나와 스페인 극동부를 제외하면 이베리아 반도 내 상황을 확실히 정리한 웰링턴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쳐들어가는 것을 고려했다. (팜플로나는 10월 말에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래도 그는 프랑스 동부 전선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프랑스 진공을 계속 망설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등 동맹국들이 영국 육군의 군사적 역량을 의심한 것처럼 웰링턴도 똑같이 연합국들의 능력과 의사를 의심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실패로부터 회생해, 동부 전선에서 연합군을 격파하거나 해서 연합국들이 다시 프랑스와 화친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웰링턴의 걱정은 기우로, 이번엔 참전국들 모두 이 전쟁의 끝장을 볼 기세였으며, 1813년 여름-가을의 작전기간동안 나폴레옹은 몇차례의 전술적 승리들을 거두었음에도 전략적으로는 전세를 바꾸는데 실패했다. 나중에야 이러한 소식들을 접한 웰링턴은 (그에게 소식을 전해야 할 해로가 미 해군의 게릴라식 통상파괴전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탓도 있다) 1813년 9월 말에나 이르러 프랑스 진공작전을 수립한다.

한편, 이렇게 다가올 영국군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술트 원수와 그 휘하 프랑스군의 입장은 그로부터 3개월 전 웰링턴과 영국군의 상황과는 정 반대로, 방어전이 매우 여의치 않은 상태였다. 그 피레네 산맥 공방전에서 1만 3천의 병력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 병력 충원은 불가능했고, 방어해야 하는 전선의 길이는 스페인 쪽보다 프랑스쪽이 더 길었다. 술트는 가용병력 6만 2천을 가지고 웰링턴 휘하의 영국군 – 스페인군 8만 9천을 막아야 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또다른 문제가 군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술트 휘하의 군인들이 무절제하게 자국민을 상대로 약탈을 시작한 것이다. 피레네 공방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어차피 적군이 와서 약탈할 것이니, 적에 의해 약탈되느니 우리 손에 약탈 되는게 낫다!’는 굉장한 논리를 내세우며 날뛰는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마을 하나를 약탈하도록 부하들을 종용하고 이를 막으려던 마을 경찰관(gendarme)을 폭행한 혐의로 중대장(대위) 한 명을 공개 총살형에 처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이에 지방 시민들의 청원서와 민원이 파리의 전쟁부로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이에 전쟁부장관 앙리 클라르크는 술트에게 최대한 민간인 거주지에서 멀리, 국경선에 최대한 인접한 지역에서만 작전에 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는 전략적 행동에 유연성을 잃어야 했고, 차차 지킬 수 없는 지시가 될 터였다.

어쨌던 술트는 이제 전체 6만 2천명으로 줄어들은 휘하 병력을 피레네 북부의 국경선을 따라 3개 구역에 걸쳐 나눠 배치했다. 그는 영국군이 주력을 그 방어선 중에도 가장 남쪽인 마야 고개에 집중시켜 공세를 펼 것이라 예상했기에 자신도 그곳에 2만명의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가 가장 안전하게 방비되고 있다 믿어 안심한 곳은 가장 북쪽의 방어선, 비스카이 만과 맞닿아 있는 비다쏘아 강이었다. 그렇게 해서 샤를르 라이유 중장 휘하에 1만명이 북쪽(프랑스군 입장에서 전선 우익)에, 베르트랑 클로젤 중장 휘하에 1만 5천명이 전선 중앙의 라룬 고지를, 그리고 전선 좌익의 마야 고개에는 에를롱 후작 휘하 2만명이 배치되었다. (전선 후방에 예비부대 1만)

한 달 전 8월 31일에 프랑스군이 산 마르시알 전투 후 퇴각하면서 다리를 폭파했기 때문에, 비다쏘아 강은 대병력이 건너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급경사를 따라 내려왔기에 수온이 낮고 물살이 빠르며 수심이 깊었던 그 강은 가장 넓은 구간의 강폭은 무려 1km에 달했고 평균수심도 6미터나 되었기에 프랑스군은 이곳의 방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프랑스군이 몰랐던 사실은, 그 강의 하구가 가을에는 썰물로 인해 수심이 1.2미터 정도로 폭삭 낮아질 때가 이따금씩 있었다는 점이었다. 술트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이 정보를 웰링턴은 그 지방 바스크인 어부들에게서 얻어내었다. 다음 썰물은 10월 7일에 찾아올 예정이었다. 결국, 작전을 정한 영국-포르투갈 군 6만 9천과 스페인군 2만, 거의 9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프랑스 국토 내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10월 6일 출병한다.


10월 7일 오전 9시, 마야 고개에서 영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보고를 받고 달려온 술트 원수는 전황을 관전하며 영국군 주력의 도착을 기다렸다. 한시간 정도 교전이 지속되었을 때 망원경을 들여다 보던 술트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남색 군복을 입은, 영국군 예하 포르투갈군 1개 여단만이 적극적으로 돌격을 해오는 모습이 눈에 띄였으나 정작 레드코트들은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고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술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적의 주력은 여기가 아니라 비다쏘아를 노리고 있다! 마야 고개로 왔던 영국군은 고작 1개 사단에 불과했다. 이 양동작전을 알아챈 술트는 즉각 북쪽의 라이유 중장 사령부가 있었던 우뤼뉴 마을로 전력질주하였고, 그가 우뤼뉴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경에 이르러서 였는데… 그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Into the Breach]



비다쏘아 강 하구를 지키던 프랑스군 초병들은 10월 6일 한밤중에 영국군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이를 보고하나, 이 보고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어버려, 그 지역을 방어하던 라이유 중장의 사령부에 전달된 것은 여러시간이 지난 오전 8시가 되어서였다. 영국군 주력은 이미 수심이 가장 낮은 오전 7시 25분에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진두에 선 것은 한 달 전 산 세바스티안 요새를 함락시켰던 제 5 사단이었다. 비록 수심이 낮았어도 여전히 거의 겨드랑이 높이까지 차오르는 강물 속에서 병사들은 탄약과 무장을 머리 위로 높게 치켜들고 건너야 했고, 또 차겁고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Crossing the Bidassoa]


전체 병력 중 물살이 가장 거센 지점을 건넜던 국왕의 독일군단(KGL) 연대의 에드먼드 휘틀리 소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물살이 어찌나 거세던지 우리는 모두 한 팔로는 무기를 높이 들고, 다른 팔로는 모두 함께 팔짱을 낀 채 서로에 기대며 전진해야 했다. 그리고 뼛속까지 시리게 차가워서 적군이 쏘는 총탄이 가슴을 스치는 것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저 증언에서 볼 수 있듯, 이 도하순간이 가장 영국군에 있어 위험한 순간이었으나 이 때 강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은 겨우 1개 여단에 불과했다. 이들은 강변에서 몇차례 사격을 가하다가 곧 강을 건너는 연합군의 규모에 질려 재빨리 후퇴하여 2차 저지선인, 강을 내려다보는 능선에서 방어하려 했으나 오전 8시 경에 이르러 이미 영국군 주력 대부분이 강을 건넜거나 건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기습에 허를 찔린 라이유 중장 휘하의 프랑스군 병력은 영국군의 진공을 막지 못한채 후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포르투갈군은 4백명도 채 안되는 사상자를 내었으니,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한편, 그동안 주력부대를 앞질르며 빠르게 진격한 영국군 경보병 사단과 스페인군이 클로젤이 지키고 있던 라룬 고지에도 당도,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날 (10월 7일)에서 연합군측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이 라룬 고지에서였다. 스페인군은 용감하게 공격을 여러차례 감행했으나 모두 격퇴되었고, 여기서 1천 2백여명이 죽거나 다친다. 총사령관 웰링턴 공작은 이에 공격을 중지시켰으나, 포위 섬멸 당할 것을 우려한 클로젤이 이 때 병력을 철수시켰고, 10월 8일에는 라룬 고지도 연합군의 손에 떨어진다.


결국 10월 8일에 이르러, 연합군 총 8만명이 프랑스 남서부 극단에 교두보를 세운다. 이 과정에서 영-포-서 연합군 1천 5백여명과 같은 규모의 프랑스군이 죽거나 다쳤고, 술트는 웰링턴의 진공을 막지 못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즉위 이후, 외국 군대가 처음으로 프랑스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본 연재 기획 전체: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Ceterum censeo, historia fictum esse delendam

덧글

  • Allenait 2010/08/10 16:46 #

    허. 웰링턴이 저렇게 프랑스에 발을 내딛었군요.
  • 행인1 2010/08/10 18:03 #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막아내고 그게 승리에 공헌한 경우도 있었다니... 그나저나 gendarme는 경찰로 번역해야 할지 헌병으로 변역해야 할지 종종 애매하더군요.
  • 함부르거 2010/08/10 18:16 #

    프랑스 '시민군'이 징발도 아니고 자국민을 '약탈'이라...
    패잔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의 자질이 낮아진 것인지...
  • 보거스 2010/08/10 20:52 #

    월광토끼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월광토끼님 덕분에 많은 것을 알아가네요.^^
  • 상처자국 2010/08/10 22:19 #

    흐음...
    뭐, 8월 28일이면 토욜이니까.. 노동은 6시쯤 끝나려나.
    일욜은 노동이 없고
    주중에는 5시~10시 반 사이가 노동타임.
  • 누군가의친구 2010/08/10 22:47 #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기동력을 택한 댓가로 보급을 팔았으니까 말입니다. 고작 병사가 들고가는건 3일치 분량이고, 그게 동나면 '현지조달'이라는 명목하에 약탈을 하고 말았죠.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이탈리아라면 '현지조달'이 통했겠지만 러시아에서는...ㄱ-
  • 들꽃향기 2010/08/11 21:40 #

    비슷한 사정은 스페인에서도 반복되었죠. ㄷㄷ 스페인 농촌은 프랑스나 기타 유럽지역과 너무나도 다른 곳이다 보니..(...)
  • 누군가의친구 2010/08/11 22:05 #

    스페인 빼먹었군요. 덕분에 '게릴라'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 들꽃향기 2010/08/11 21:41 #

    미 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산 세바스티안의 해상 공격을 시도할 여력이 없었다니, 당시 영국도 힘든 측면은 상당히 있었군요. ㄷㄷ

    그런데 왠지 이런 식의 우연(?)을 보면서 당시 영국인들은 "더러운 양퀴들이 개구리들과 결탁해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라고 생각했을거 같다는 망상도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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