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okbuksin님이 대 카토 글에 달아주신 덧글을 보고 생각난 김에 쓴 얘기.
리비우스나 타키투스 같은 로마의 대 사가들은 비록 역사가로서의 업적이 클 지라도 고대사회의 인식 한계 또한 잘 보여주는데, 그런 부분의 예가 바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다. 남자들을 능가하는 지력이나 현실정치 참여, 또는 영향력 행사를 보여준 여자들에 대해 기술할 때마다 이 사가들은 비판적인 톤을 감추지 않으며, 이야기를 은근히 ‘이래서 여자가 남자 일에 나서면 뒷끝이 안좋아’란 분위기를 풍기며 끝맺는다. 아무튼, 이런 그들에게 있어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오피우스 법안과 그 법안의 철폐과정이다.
특히 리비우스는 ‘심각하고 진지한 전쟁사를 다루는 도중에 오피우스 법안 논쟁같이 ‘하찮은’ 문제에 대해 언급하게 된 것이 유감이다’, 는 식의 표현까지 해가면서도 이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오피우스 법이란게 대체 무엇이었는가.
[고대 로마의 여인들]
LEX OPPIA렉스 오피아. 직역해서 오피우스 법. 이 법안은 기원전 215년에 당시 호민관 중 하나였던 가이우스 오피우스 (100년 뒤 카이사르의 친구와는 동명이인)가 입안하여 통과된 것으로, 여성의 재산관리와 치장을 금하는 사치제한법이다. 이 법안이 통과된 기원전 215년은 다름아닌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 군대가 파멸한 다음해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 치뤄지고 있던, 다시 말해 로마의 국운이 위기에 처한 때였다. 국가위기사태 앞에 시민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검절약하며 전쟁에 전념하고, 또 칸나에 패전이라는 재난 앞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수수한 복식으로 생활해야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을 때 나온 것이기에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이 법은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의 발로라고밖에 볼 수 없는 물건이다.
이 법안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성은 금이 섞여 있는 장신구를 착용해서는 안되고, 두가지 색 이상이 들어간 의복을 입어서도 안되고, 1마일 이내의 거리를 이동할 때는 탈것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성의 삶을 제한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대체 얼마만큼 도움이 된단 말인가? 이 법안이 남자에게까지 구속력을 가졌다면 모르나, 여성에게만 한정된 것은 여자의 생활 양식이 국익을 망친다는 고대사회 특유의 여성비하적 사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런데.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패배와 함께 로마의 승리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국고는 다시 채워졌고 지중해 전역에서 노예와 보물들이, 다시 말해 부가 로마 공화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치금지법은 그 존재의의와 이유, 효력을 잃기 마련이다. 법안이 통과된지 20년만인 기원전 195년에 두명의 호민관, 마르쿠스 푼다니우스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가 오피우스 법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선다. 이들을 그해의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지원하고 나서면서, 여기서 대 논란이 벌어진다. 오피우스 법의 존속을 주장하는 측과 철폐를 주장하는 측이 원로원과 시민 집회에서 토론을 벌인다.
존속을 주장하는 호민관도 두 명이었는데, 둘 모두 브루투스 가문 출신으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의 암살자와는 동명이인)와 푸블리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이 두 호민관을 원로원에서 지원하는 것도 집정관으로, 다름아닌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大)였다.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로마는 집정관을 한번에 두 명 선출했다)
이 문제에 대한 원로원에서의 카토의 연설 논지가 일품이다. 누가 집에서는 자기 아내를 마치 노예와 동급으로 취급하던 양반 아니랄까봐, 그는 사치를 금지하면 여자들끼리의 질투심과 투정도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정이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 카토의 동료 집정관 플라쿠스는 이에 대해 이탈리아 동맹시의 여인들이 양껏 멋내며 뽐내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로마 여인들이 얼마나 부럽고 화가 났을지 아냐고 반론해, 이에 동조한 의원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기서, 의원들이 열띈 토론을 벌이고 있는 동안 한바탕 대소동이 인다. 정부에 대한 두려움도, 도덕주의자들의 비난도, 남편들의 만류도 무시한채 로마의 여인들이 포룸으로 대행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로마 시내 거주자들 뿐 아니라 로마 주변의 마을들로부터도 아낙들이 로마로 달려왔다.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페미니스트 시위였을 이 행진에서, 젊건 늙었건 억압에 대한 분노에 가득찬 여인들이 포룸에 모인 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광경에 집정관 카토는,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야말로 대경실색하며 이렇게 외친다.
“대체 가장이란 작자들이 어떻게 자기 여자들도 제대로 제어 못하고 저렇게 날뛸 때까지 뭘 한건가! 아내에게 약한 모습이나 보이니까 우리 공화국의 이름에 먹칠을 할 이런 위기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저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우리는 저들을 영원히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이 쇼비니즘과 마초이즘의 궁극을 보는 듯한 언사를 보라.
카토의 열화와 같은 연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포룸을 완전히 장악하고 길목들을 차단하고 나선 여인들은 그 다음날에는 아예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가두행진을 벌이고, 오피우스 법안 철폐 반대를 주장한 두 호민관들(브루투스들)의 저택을 포위하고 대문을 두들기며 소리높여 외쳤다. 여자에게 자유를 달라! 집정관 카토가 어찌 생각하던, 두 호민관들은 길게 농성하지 못하고 굴복했다. 두 호민관들이 반대의사를 거두고, 원로원에서는 집정관 플라쿠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결국, 그 해 민회에서 오피우스 법안은 철폐된다.
리비우스는 카토쪽 의견에 호의를 보이며 이 사건에 대해 기록했고, 더 후대의 타키투스는 이 상징적 사건이 훗날 ‘음탕한’ 황비 발레리아 메살리나나 ‘주제넘게’ 군대 반란을 진압한 아그리피나 같은 이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오피우스 법안 철폐와 여성들의 대규모 집회운동 등의 사건들이 없었다면 자신을 꾸민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 본능을 억제당한 로마의 여인들은 얼마나 더 암울하게 살아가야 했을까. 그리고 오피우스 법안 철폐라는 기원전 195년의 이 사건은 당시 공화국 사회에 있어 일대 진보라고까지 불러도 될 사건이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비록 타키투스는 질타해 마지 않으나, 그렇게 '여성의 영향력 행사'가 증대될 수 있었던 것이니ㅡ 이는 결국 오늘날의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원조’격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참고 문헌:
Carlson, A. J. 1993. "Mundus Muliebris: The World of Women Reviled and Defended ca. 195 B.C. and 1551 A.D. and Other Things".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4 (3): 541-560.
L'Hoir, Francesca Santoro. 1994. "Tacitus and Women's Usurpation of Power". The Classical World. 88 (1): pp. 5-25
ps.현재 이오공감에 올라와 있는 몇 글들이 이 여성의 사치[...]에 관한 내용들이니 연관성이 커,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리비우스나 타키투스 같은 로마의 대 사가들은 비록 역사가로서의 업적이 클 지라도 고대사회의 인식 한계 또한 잘 보여주는데, 그런 부분의 예가 바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다. 남자들을 능가하는 지력이나 현실정치 참여, 또는 영향력 행사를 보여준 여자들에 대해 기술할 때마다 이 사가들은 비판적인 톤을 감추지 않으며, 이야기를 은근히 ‘이래서 여자가 남자 일에 나서면 뒷끝이 안좋아’란 분위기를 풍기며 끝맺는다. 아무튼, 이런 그들에게 있어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오피우스 법안과 그 법안의 철폐과정이다.
특히 리비우스는 ‘심각하고 진지한 전쟁사를 다루는 도중에 오피우스 법안 논쟁같이 ‘하찮은’ 문제에 대해 언급하게 된 것이 유감이다’, 는 식의 표현까지 해가면서도 이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오피우스 법이란게 대체 무엇이었는가.

LEX OPPIA렉스 오피아. 직역해서 오피우스 법. 이 법안은 기원전 215년에 당시 호민관 중 하나였던 가이우스 오피우스 (100년 뒤 카이사르의 친구와는 동명이인)가 입안하여 통과된 것으로, 여성의 재산관리와 치장을 금하는 사치제한법이다. 이 법안이 통과된 기원전 215년은 다름아닌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 군대가 파멸한 다음해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 치뤄지고 있던, 다시 말해 로마의 국운이 위기에 처한 때였다. 국가위기사태 앞에 시민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검절약하며 전쟁에 전념하고, 또 칸나에 패전이라는 재난 앞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수수한 복식으로 생활해야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을 때 나온 것이기에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이 법은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의 발로라고밖에 볼 수 없는 물건이다.
이 법안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성은 금이 섞여 있는 장신구를 착용해서는 안되고, 두가지 색 이상이 들어간 의복을 입어서도 안되고, 1마일 이내의 거리를 이동할 때는 탈것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성의 삶을 제한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대체 얼마만큼 도움이 된단 말인가? 이 법안이 남자에게까지 구속력을 가졌다면 모르나, 여성에게만 한정된 것은 여자의 생활 양식이 국익을 망친다는 고대사회 특유의 여성비하적 사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런데.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패배와 함께 로마의 승리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국고는 다시 채워졌고 지중해 전역에서 노예와 보물들이, 다시 말해 부가 로마 공화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치금지법은 그 존재의의와 이유, 효력을 잃기 마련이다. 법안이 통과된지 20년만인 기원전 195년에 두명의 호민관, 마르쿠스 푼다니우스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가 오피우스 법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선다. 이들을 그해의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지원하고 나서면서, 여기서 대 논란이 벌어진다. 오피우스 법의 존속을 주장하는 측과 철폐를 주장하는 측이 원로원과 시민 집회에서 토론을 벌인다.
존속을 주장하는 호민관도 두 명이었는데, 둘 모두 브루투스 가문 출신으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의 암살자와는 동명이인)와 푸블리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이 두 호민관을 원로원에서 지원하는 것도 집정관으로, 다름아닌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大)였다.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로마는 집정관을 한번에 두 명 선출했다)
이 문제에 대한 원로원에서의 카토의 연설 논지가 일품이다. 누가 집에서는 자기 아내를 마치 노예와 동급으로 취급하던 양반 아니랄까봐, 그는 사치를 금지하면 여자들끼리의 질투심과 투정도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정이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 카토의 동료 집정관 플라쿠스는 이에 대해 이탈리아 동맹시의 여인들이 양껏 멋내며 뽐내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로마 여인들이 얼마나 부럽고 화가 났을지 아냐고 반론해, 이에 동조한 의원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기서, 의원들이 열띈 토론을 벌이고 있는 동안 한바탕 대소동이 인다. 정부에 대한 두려움도, 도덕주의자들의 비난도, 남편들의 만류도 무시한채 로마의 여인들이 포룸으로 대행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로마 시내 거주자들 뿐 아니라 로마 주변의 마을들로부터도 아낙들이 로마로 달려왔다.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페미니스트 시위였을 이 행진에서, 젊건 늙었건 억압에 대한 분노에 가득찬 여인들이 포룸에 모인 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광경에 집정관 카토는,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야말로 대경실색하며 이렇게 외친다.
“대체 가장이란 작자들이 어떻게 자기 여자들도 제대로 제어 못하고 저렇게 날뛸 때까지 뭘 한건가! 아내에게 약한 모습이나 보이니까 우리 공화국의 이름에 먹칠을 할 이런 위기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저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우리는 저들을 영원히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이 쇼비니즘과 마초이즘의 궁극을 보는 듯한 언사를 보라.
카토의 열화와 같은 연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포룸을 완전히 장악하고 길목들을 차단하고 나선 여인들은 그 다음날에는 아예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가두행진을 벌이고, 오피우스 법안 철폐 반대를 주장한 두 호민관들(브루투스들)의 저택을 포위하고 대문을 두들기며 소리높여 외쳤다. 여자에게 자유를 달라! 집정관 카토가 어찌 생각하던, 두 호민관들은 길게 농성하지 못하고 굴복했다. 두 호민관들이 반대의사를 거두고, 원로원에서는 집정관 플라쿠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결국, 그 해 민회에서 오피우스 법안은 철폐된다.
리비우스는 카토쪽 의견에 호의를 보이며 이 사건에 대해 기록했고, 더 후대의 타키투스는 이 상징적 사건이 훗날 ‘음탕한’ 황비 발레리아 메살리나나 ‘주제넘게’ 군대 반란을 진압한 아그리피나 같은 이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오피우스 법안 철폐와 여성들의 대규모 집회운동 등의 사건들이 없었다면 자신을 꾸민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 본능을 억제당한 로마의 여인들은 얼마나 더 암울하게 살아가야 했을까. 그리고 오피우스 법안 철폐라는 기원전 195년의 이 사건은 당시 공화국 사회에 있어 일대 진보라고까지 불러도 될 사건이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비록 타키투스는 질타해 마지 않으나, 그렇게 '여성의 영향력 행사'가 증대될 수 있었던 것이니ㅡ 이는 결국 오늘날의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원조’격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참고 문헌:
Carlson, A. J. 1993. "Mundus Muliebris: The World of Women Reviled and Defended ca. 195 B.C. and 1551 A.D. and Other Things".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4 (3): 541-560.
L'Hoir, Francesca Santoro. 1994. "Tacitus and Women's Usurpation of Power". The Classical World. 88 (1): pp. 5-25
ps.현재 이오공감에 올라와 있는 몇 글들이 이 여성의 사치[...]에 관한 내용들이니 연관성이 커,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덧글
마음만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발레리아 메살리나나 아그리피나의 '전횡'을 보고도 막지 못한 건 누구였는지... ㅋㅋㅋ
한동안 월광토끼님 블로그에 덧글 올리기 버튼이 없어서 덧글을 못 달았는데 이제야 보이네요.;;
어딘지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테]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네요. 집단행동이란 게 말이지요.
어찌됬든 대카토 아즈씨가 의외루 순수했다는 생각만 드네요. ㅎ
멋있습니다. 즐거운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ㅁ^)/
고대 로마 부인들의 전투력은 세계제이이이이이일!!!=ㅁ=/
"세계의 정복자가 된 우리 로마시민의 위에, 다시 마눌님들이라는 정복자가 있을줄은 몰랐습니다."라던가요...=_=;;
로마 시대 역사가가 쓴 책 하나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여성이 지적 교양이 있는 것을 어필하는 것조차 굉장히 금기시하듯 서술하더군요 =_=; 월광토끼님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