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95년, 오피우스 법안 철폐와 여성권익의 신장

deokbuksin님이 대 카토 글에 달아주신 덧글을 보고 생각난 김에 쓴 얘기.

리비우스나 타키투스 같은 로마의 대 사가들은 비록 역사가로서의 업적이 클 지라도 고대사회의 인식 한계 또한 잘 보여주는데, 그런 부분의 예가 바로 여성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다. 남자들을 능가하는 지력이나 현실정치 참여, 또는 영향력 행사를 보여준 여자들에 대해 기술할 때마다 이 사가들은 비판적인 톤을 감추지 않으며, 이야기를 은근히 ‘이래서 여자가 남자 일에 나서면 뒷끝이 안좋아’란 분위기를 풍기며 끝맺는다. 아무튼, 이런 그들에게 있어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오피우스 법안과 그 법안의 철폐과정이다.

특히 리비우스는 ‘심각하고 진지한 전쟁사를 다루는 도중에 오피우스 법안 논쟁같이 ‘하찮은’ 문제에 대해 언급하게 된 것이 유감이다’, 는 식의 표현까지 해가면서도 이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오피우스 법이란게 대체 무엇이었는가.

[고대 로마의 여인들]



LEX OPPIA렉스 오피아. 직역해서 오피우스 법.
이 법안은 기원전 215년에 당시 호민관 중 하나였던 가이우스 오피우스 (100년 뒤 카이사르의 친구와는 동명이인)가 입안하여 통과된 것으로, 여성의 재산관리와 치장을 금하는 사치제한법이다. 이 법안이 통과된 기원전 215년은 다름아닌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 군대가 파멸한 다음해로,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 치뤄지고 있던, 다시 말해 로마의 국운이 위기에 처한 때였다. 국가위기사태 앞에 시민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검절약하며 전쟁에 전념하고, 또 칸나에 패전이라는 재난 앞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수수한 복식으로 생활해야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을 때 나온 것이기에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럼에도 이 법은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의 발로라고밖에 볼 수 없는 물건이다.

이 법안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여성은 금이 섞여 있는 장신구를 착용해서는 안되고, 두가지 색 이상이 들어간 의복을 입어서도 안되고, 1마일 이내의 거리를 이동할 때는 탈것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성의 삶을 제한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대체 얼마만큼 도움이 된단 말인가? 이 법안이 남자에게까지 구속력을 가졌다면 모르나, 여성에게만 한정된 것은 여자의 생활 양식이 국익을 망친다는 고대사회 특유의 여성비하적 사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런데.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패배와 함께 로마의 승리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국고는 다시 채워졌고 지중해 전역에서 노예와 보물들이, 다시 말해 부가 로마 공화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치금지법은 그 존재의의와 이유, 효력을 잃기 마련이다. 법안이 통과된지 20년만인 기원전 195년에 두명의 호민관, 마르쿠스 푼다니우스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가 오피우스 법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선다. 이들을 그해의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지원하고 나서면서, 여기서 대 논란이 벌어진다. 오피우스 법의 존속을 주장하는 측과 철폐를 주장하는 측이 원로원과 시민 집회에서 토론을 벌인다.

존속을 주장하는 호민관도 두 명이었는데, 둘 모두 브루투스 가문 출신으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의 암살자와는 동명이인)와 푸블리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이 두 호민관을 원로원에서 지원하는 것도 집정관으로, 다름아닌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大)였다.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로마는 집정관을 한번에 두 명 선출했다)

이 문제에 대한 원로원에서의 카토의 연설 논지가 일품이다. 누가 집에서는 자기 아내를 마치 노예와 동급으로 취급하던 양반 아니랄까봐, 그는 사치를 금지하면 여자들끼리의 질투심과 투정도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정이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 카토의 동료 집정관 플라쿠스는 이에 대해 이탈리아 동맹시의 여인들이 양껏 멋내며 뽐내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로마 여인들이 얼마나 부럽고 화가 났을지 아냐고 반론해, 이에 동조한 의원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여기서, 의원들이 열띈 토론을 벌이고 있는 동안 한바탕 대소동이 인다. 정부에 대한 두려움도, 도덕주의자들의 비난도, 남편들의 만류도 무시한채 로마의 여인들이 포룸으로 대행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로마 시내 거주자들 뿐 아니라 로마 주변의 마을들로부터도 아낙들이 로마로 달려왔다. 아마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페미니스트 시위였을 이 행진에서, 젊건 늙었건 억압에 대한 분노에 가득찬 여인들이 포룸에 모인 그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광경에 집정관 카토는,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야말로 대경실색하며 이렇게 외친다.

“대체 가장이란 작자들이 어떻게 자기 여자들도 제대로 제어 못하고 저렇게 날뛸 때까지 뭘 한건가! 아내에게 약한 모습이나 보이니까 우리 공화국의 이름에 먹칠을 할 이런 위기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저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우리는 저들을 영원히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아 이 쇼비니즘과 마초이즘의 궁극을 보는 듯한 언사를 보라.

카토의 열화와 같은 연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포룸을 완전히 장악하고 길목들을 차단하고 나선 여인들은 그 다음날에는 아예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가두행진을 벌이고, 오피우스 법안 철폐 반대를 주장한 두 호민관들(브루투스들)의 저택을 포위하고 대문을 두들기며 소리높여 외쳤다. 여자에게 자유를 달라! 집정관 카토가 어찌 생각하던, 두 호민관들은 길게 농성하지 못하고 굴복했다. 두 호민관들이 반대의사를 거두고, 원로원에서는 집정관 플라쿠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결국, 그 해 민회에서 오피우스 법안은 철폐된다.


리비우스는 카토쪽 의견에 호의를 보이며 이 사건에 대해 기록했고, 더 후대의 타키투스는 이 상징적 사건이 훗날 ‘음탕한’ 황비 발레리아 메살리나나 ‘주제넘게’ 군대 반란을 진압한 아그리피나 같은 이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오피우스 법안 철폐와 여성들의 대규모 집회운동 등의 사건들이 없었다면 자신을 꾸민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 본능을 억제당한 로마의 여인들은 얼마나 더 암울하게 살아가야 했을까. 그리고 오피우스 법안 철폐라는 기원전 195년의 이 사건은 당시 공화국 사회에 있어 일대 진보라고까지 불러도 될 사건이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비록 타키투스는 질타해 마지 않으나, 그렇게 '여성의 영향력 행사'가 증대될 수 있었던 것이니ㅡ 이는 결국 오늘날의 페미니즘 운동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원조’격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참고 문헌:
Carlson, A. J. 1993. "Mundus Muliebris: The World of Women Reviled and Defended ca. 195 B.C. and 1551 A.D. and Other Things".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24 (3): 541-560.

L'Hoir, Francesca Santoro. 1994. "Tacitus and Women's Usurpation of Power". The Classical World. 88 (1): pp. 5-25




ps.현재 이오공감에 올라와 있는 몇 글들이 이 여성의 사치[...]에 관한 내용들이니 연관성이 커,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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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의 토끼집' : 시스템과 무관히 내 멋대로 해보는 2010 이글루 결산 2010-12-28 08:37:17 #

    ... , 많이 글을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년에는 그리 해야겠습니다. 3. 고대 로마사 부분에서 또 쓴 글이 있는데, 이건 대단히 가부장적이던 고대 로마 공화정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그 가부장적 체제에 대항했는가를 묘사한 것이지요.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과 전쟁 사건들이 주로 주목받는 공화정 로마사의 와중에서도 대단히 ... more

덧글

  • 알츠마리 2010/08/12 19:31 #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라.;;
  • deadline 2010/08/12 19:32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매번 눈팅만 하는게 죄송스러워 이오지마로 글을 쏴버릴려 했으나 '해당 블로그는 최근 추천받은게 너무 많아서' 안된다고 나오네요....-_-;;
  • 월광토끼 2010/08/12 19:35 #

    아하 -_-;; 그렇군요 ㄱ-; 정말 이해가 안가는 이글루스 신규 정책이네요.
    마음만이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 dunkbear 2010/08/12 20:13 #

    참나...
    그럼 발레리아 메살리나나 아그리피나의 '전횡'을 보고도 막지 못한 건 누구였는지... ㅋㅋㅋ
  • 스즈카 2010/08/12 20:18 #

    확실히 남성들까지 제한했다면 사치방지법으로서의 의의라도 있었겠지만 여자들만 제한한 건......로마 시대 남자들의 사치도 굉장했다고 들었는데요.

    한동안 월광토끼님 블로그에 덧글 올리기 버튼이 없어서 덧글을 못 달았는데 이제야 보이네요.;;
  • 한양댁 2010/08/12 20:35 #

    맹수들...푸후훕...
    어딘지 아리스토파네스의 [리시스트라테]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네요. 집단행동이란 게 말이지요.
  • ArchDuke 2010/08/12 21:05 #

    ㄱ-; 대 카토씨는 어째 점점 정이 안듭니다;
  • 스토리작가tory 2010/08/13 03:39 #

    저도 묘하게..;;
  • 블루 2010/08/12 21:39 #

    모랄까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생각이.... ;;;;
    어찌됬든 대카토 아즈씨가 의외루 순수했다는 생각만 드네요. ㅎ
  • 누군가의친구 2010/08/12 21:47 #

    여성만 사치를 금하는건 억압이지요. 자기의 소득을 벗어난 소비는 비판해야겠지만 소득내 소비에 대해 성별에 차별두는건 참...ㄱ-
  • 연리 2010/08/12 22:41 #

    아아, 고대의 여성들에게도 행동하는 지성은 있었던 게로군요.(?!)
    멋있습니다. 즐거운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ㅁ^)/
  • 이안 2010/08/12 23:02 #

    방금전에 읽고온 모두루님 포스팅과 어째서인지 오버랩이 되는군요.
  • 이안 2010/08/12 23:03 #

    아,다시 정독하니 모두루님 포스팅이 월광토끼님 포스팅을 트랙백 한거였네요;;;
  • 행인1 2010/08/12 23:07 #

    전해지는 발언으로 미루어보아 카토 선생은 아마 바로 옆에 최루탄과 물대포, 고무탄 테이져 건 등등이 있었다면 주저 없이 사용하셨겠군요.
  • 맛있는쿠우 2010/08/12 23:21 #

    기원전부터ㅎㄷㄷ 로마시대 여자들 멋진데요?....
  • Allenait 2010/08/12 23:53 #

    야.. 이런 일이 있었군요.
  • 진냥 2010/08/13 00:12 #

    오비디우스의 [축제력]에는 원로원이 이륜마차를 타지 못하게 하자 무려 낙태=ㅅ=로 시위한 로마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얼마나 진실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비디우스도 짚이는 바가 있으니 그렇게 쓴 것이라 여겨집니다...
    고대 로마 부인들의 전투력은 세계제이이이이이일!!!=ㅁ=/
  • Mr 스노우 2010/08/13 00:19 #

    확실히 여권운동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사건일 것 같습니다.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 萬古獨龍 2010/08/13 01:04 #

    뭔가 멋지다...
  • 트윈드릴 2010/08/13 04:59 #

    쇼핑뇌를 억압하면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거죠...-_-;;
  • 아브공군 2010/08/13 08:34 #

    그야말로 "우리는 지중해의 패권자인데 마누라라는 패권자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네요." (이게 대 카토 말이었던가요?) 가 생각나는....
  • 들꽃향기 2010/08/13 11:24 #

    그러고보니 카토의 명언 하나가 생각나네요 ㄷㄷ;

    "세계의 정복자가 된 우리 로마시민의 위에, 다시 마눌님들이라는 정복자가 있을줄은 몰랐습니다."라던가요...=_=;;
  • Caesaris 2010/08/18 02:06 #

    뭐랄까, 확실히 저런 강한 여성들이 195년부터 제정시대까지 많았지만 확실히 옛 로마시대 역사가들의 사관/일반인들의 인식은 남성중심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 시대 역사가가 쓴 책 하나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여성이 지적 교양이 있는 것을 어필하는 것조차 굉장히 금기시하듯 서술하더군요 =_=; 월광토끼님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
  • NightKein 2010/09/01 17:49 #

    그러고보니 고려의 여성들도 일부다처제를 주장한 대신이 퇴청하자마자 '저 늙은이가 첩을 들이자 고 한 인간이다!'하고 대차게 들고 일어나서 결국 철회되었던적이 있었죠, 그게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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