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 옥스퍼드, 막달렌 칼리지 학장 임명권 투쟁

상지대 사태를 보며 쓸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제사 뒤늦게 쓴다.


1687년 3월 24일, 옥스퍼드 대학의 막달렌 칼리지Magdalen College의 학장 헨리 클러크Henry Clerk 박사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 후임으로 누가 임명될 것인가가 이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본디 옥스퍼드 대학의 전통적 체제 아래 선임연구원(Fellow)들은 학장을 투표로 선출할 권리가 있었고 그 후보들은 그 선임연구원들 중 하나이거나 옥스퍼드 내 교직원 중에서 뽑혔다. 물론, 행여나 왕실에서 특정후보를 거론하며 추천할 경우 왕실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해당후보를 선출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것은 제도적인 것이 아니었고 강요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Magdalen College, Oxford]



이 때 막달렌 칼리지 Fellow (선임연구원) 중 하나였던 토마스 스미스 박사Dr. Thomas Smith, 1638~1710가 학장직에 선출되기 위해 나섰다. 스미스 박사는 동방문화와 동방정교를 콘스탄티노플에서 현지답사까지 해가며 연구한 학자였으며 상당한 고문서 수집가였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는 열렬한 토리파였으며 학장직에 걸맞는 지식인임을 자부하고 어필하면서 학장에 선출되려 했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기도 했던 옥스포드 주교 사무엘 파커Samuel Parker, 1640~1688을 통해 왕실에 자신에 대한 호의적 언질을 부탁했다. 파커 주교는 부탁을 들어주었으나 성과 없이 돌아와 스미스 박사에게 말했다.

"The King will recommend no person who is not a friend to His Majesty's religion." 국왕 전하께서는 자신과 같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인가하지 않으실 걸세.


[국왕 제임스 2세]



스미스 박사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고, 제임스 2세가 당시 보여주고 있던 악명높은 성향은 바로 카톨릭 신자 우대성향이었다. 그러자 스미스 박사는 자신이 학장이 되면 막달렌 칼리지를 진정한 학문의 전당과 왕실에 대한 충성을 고취하는 곳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커 주교는 "그걸로는 불충분하네"라 답했고, 스미스는 이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난 최선을 다해 선거에 임할 것이나 내 종교를 바꿀 수는 없네"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1687년 4월, 차기 학장 선출일이 가까워지자 선임연구원들이 소환되었다. 그런데 사람들 간에 안좋은 소문이 돌았다. 국왕이 앤써니 파머Anthony Farmer, 1657~1730?를 학장으로 추천할 것이란 소문이었다. 앤써니 파머는 무엇보다도 막달렌 칼리지는 물론이고 옥스포드 대학의 일원도 아니었다. 그는 케임브릿지 대학의 세인트 존 칼리지의 일원이었다가 불량한 행실 때문에 쫓겨날뻔 해서 트리니티 칼리지로 옮겨간 사람이었다. 그는 몬모스 반란 사건 때 제임스 2세의 편을 들고 나선 열렬한 충성파이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또한 그는 학문에 몰입하기 보다는 탬즈 강가 술집에서 술 마시고 여자 유혹하는 것을 선호하는 행태로 악명이 높았다. 학문적 업적이나 성과도 없었고 그는 겨우 서른 살 젊은이에 불과했다. 쟁쟁한 학자들을 제치고 학교의 일원조차 아니었던 서른 살 바람둥이가 국왕의 총애로 학장에 낙하산 임명된다?


이 때문에 막달렌의 Fellow들은 국왕 제임스 2세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국왕이 추천하는 후보는 학장의 자격 조건을 제대로 갖춘 학자였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그러나 정중한 청원서였으나 왕실에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받아 읽어 봤다'는 말조차 없이 깨끗이 무시했다. 며칠 후 국왕의 서한이 당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한은 앤써니 파머를 학장으로 추천하고 있었다.

선출회의일인 4월 13일에 모인 Fellow들은 이틀간 어찌 할 것인가를 토의하였다. Fellow들 중에서도 최선임 학자들 세 명이 (그 셋 중에는 앞서 말한 스미스 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왕의 심기를 거스르기 보단 청원서를 한 번 더 보내어 답신을 기다리며 선거를 연기하자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Fellow들은 더 이상 선출을 연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임원들은 국왕에게는, 설사 자격이 있고 훌륭한 후보라 할지라도 특정 인물의 선출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결국 15일에 선출된 것은 열렬한 반-카톨릭파이자 성공회 신자였고 1676년에 막달렌 칼리지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존 하우John Hough, 1651~1743였다.


[존 하우]



제임스 2세는 이 발칙한 결정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같은해 6월, 막달렌 칼리지에 Fellow들은 런던 웨스트민스터로 소환되었다. 고등 사문위원회 앞에 출두하란 것이었다. 이에 걱정된 막달렌 칼리지 측은 옥스퍼드 대학 전체의 후원자였던 올몬드 공작Duke of Ormond와 막달렌 칼리지의 객원 교수였던 윈체스터 주교Bishop of Winchester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그 중재 시도를 싹 무시했다.

소환된 막달렌 칼리지의 임원들 중 다섯 명이 대표로 소환에 응했다. 이 사문회의 성격은 명약관화했다. Fellow들 중 대표로 나선 헨리 패어팩스 박사Dr. Henry Fairfax, 1634~1702가 사문회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사문위원장이 진노해 소리쳤다. "Who is this man? What commission has he to be impudent here? Seize him, put him into a dark room!"이 건 대체 누구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저리 발칙하게 구는가! 저자를 당장 구속해 어두운 방에 가두어라!

사문회는 결정을 내렸다. 패어팩스 박사를 즉각 막달렌 칼리지 임원직에서 퇴출시키고, 존 하우의 학장직 선출은 무효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실히 앤써니 파머는 학장직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판명되었고, 더 큰 반발을 우려한 제임스 2세는 입장을 한 발 양보해 앞서 언급한 사무엘 파커 주교를 대신 학장직에 추천했다. 그러나 막달렌 칼리지의 Fellow들은 일치 단결해 이 추천도 거부했다. 자신들은 이미 존 하우를 투표로 선출했고, 선출된 학장을 끝까지 지지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제임스 2세는 아예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 해 8월 20일, 국왕은 옥스퍼드에 행차했다. 다음 날 막달렌 칼리지의 임원들이 국왕 앞으로 소환되었다. 제임스 2세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You have not dealt with me like gentlemen. You have been unmannerly as well as undutiful."그대들은 나를 신사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불복종적임은 물론이고 예의도 없었다. 이에 교수들은 당장 무릎을 꿇고는 청원서를 내밀며 국왕의 재고를 간청했다. 하지만 국왕은 청원서를 받으려 하지도 않고 벌컥 화를 내며 외쳤다. "I am King. I will be obeyed." 교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청원서를 내밀자 그는 이를 손으로 확 내치며, "I will receive nothing from you till you have admitted the Bishop." 라 답하니, 교수들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 예배당에 모인 막달렌 칼리지의 교수들은 다시한번 자신들의 의사를 확인했다. 국왕에게는 충성하나, 자신들의 의무와 학자의 맹세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제임스 2세는 이 선언에 기가 막혀하면서도 일단은 물러났다. 그는 일단 교수들을 회유해 보려 9월에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을 옥스퍼드로 보냈다. 펜은 파커 주교는 건강이 안좋아 오래 살지 못할테니, 일단 파커 주교를 학장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죽고 나면 그 때 다시 존 하우를 학장으로 선출하면 되지 않겠냐고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요지부동이었고, 펜은 하는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갔다.

1687년 10월 20일, 국왕이 임명한 특별 교무 위원 세 명이 중무장 기병들과 함께 막달렌 칼리지 캠퍼스에 나타났다. 막달렌 칼리지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있는 한가운데에 위원회는 학장 하우를 직위에서 해임했다. 하우는 정중하게 이에 항의했다.

"My lords, you have this day deprived me of my freehold. I hereby protest against all your proceedings as illegal, unjust, and null, and I appeal from you to our sovereign Lord the King in his courts of justice."
공들께서는 오늘 제 자유를 빼앗으셨습니다. 이에 저는 이 공청회를 불법적이고, 부당하며, 무효한 것으로 선언하며, 우리의 주군 국왕 폐하의 법원에 이에 대해 청원하겠습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뒤따랐다. 긴장한 군인들은 학생들이 반발하는 것을 대비해 실탄을 장전하기까지 했다. 위원회는 학장 하우에게 1천 파운드의 벌금을 추가로 물렸다. 하지만 결국 Fellow들이 굴복했다. 오로지 아직 학교에 남아있던 패어팩스 박사와 학장 하우만이 불복했고 Fellow들은 파커 주교를 학장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런데 옥스퍼드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용감한 하우와 정직한 패어팩스가 그들의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졌다고, 그렇게 학문이 어쩌고 저쩌고 고등한 말을 일삼던 자들이 결국은 자기 맹세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었다고.

Fellow들은 결국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국왕의 결정이 적법했다는 선언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국왕에게 승복한 토마스 스미스 박사를 제외한 전원이 교직에서 사임했다. 그러자 '그 조용한 대학도시 옥스퍼드가 마치 찰스 1세에게 반기를 들던 날의 런던처럼 술렁였다'. '배신자' 스미스 박사가 커피숍에 갔다가 쫒겨나는 지경이었고, 옥스퍼드 전체에서 왕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 퍼져나갔다. 사태는 곧 옥스퍼드 뿐 아니라 전국의 학교와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나가 브리스톨과 런던의 커피숍들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파커 주교가 정말 몇 달 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1688년 3월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사임한 막달렌 칼리지의 임원들의 자리에는 이미 카톨릭 교수들과 주교들이 들어가 앉아 있었고 그들은 파커 주교의 후임으로 카톨릭 주교 보나벤쳐 지파드Bonaventure Giffard, 1642~1734를 4월에 학장으로 선출해버렸다.

국왕과 권력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다섯 달 후,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그 명예혁명 주도세력에 옥스퍼드의 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임원들은 복권되었고 막달렌 칼리지로 복귀했으며, 1689년, 존 하우는 다시 막달렌 칼리지의 학장이 되었다.




Bloxam, John Rouse, and Falconer Madan. Magdalen college and King James II., 1686-1688. Oxford Historical Society, 1886:6. Oxford: Printed for the Oxford historical society at the Clarendon press. 1886.

Macaulay, Thomas Babington Macaulay. The history of England. Penguin classics. London, England: Penguin Books. 1986.

*매컬리 남작의 "The History of England"는 제목이야 '영국사'지만 그 내용은 영국사라기 보단 제임스 2세의 치세와 윌리엄 3세의 즉위 사이의 기간을 다루는, 즉, '명예혁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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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의 토끼집' : 시스템과 무관히 내 멋대로 해보는 2010 이글루 결산 2010-12-28 08:37:38 #

    ... 권과의 대립 끝에 승리하고 주된 권력을 차지하게 된 근간을 마련하는 사건이지요. 그 명예혁명 발발의 배경에는 한 대학이 있었고, 그 대학의 학장 임명을 둘러싸고 부당한 왕명에 항거하는 학자들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흔히 '명예혁명'의 일부로 뭉뚱그려져 취급받는 그 사건을,토머스 칼라일의 고전적 서사를 통해 집중 조명해 ... more

덧글

  • 지나가던과객 2010/08/20 11:18 # 삭제

    왕이 이기긴했지만 혁명으로 뒤집혀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이러니 다시 왕자리를 찾을려고 해도 지식인들이 왕을 지지하진 않았겠군요.
  • 월광토끼 2010/08/21 08:37 #

    의미 전달이 확실하지 않았던 것을 깨닫고 아래에 문구를 하나 더 추가했습니다.

    혁명의 주도세력이 그 지식인들이었다는 겁니다.
  • 위장효과 2010/08/20 11:40 #

    스튜어트 왕가 역대 국왕들의 똥고집은 정말이지...오죽하면 제임스 1세보고 "기독교 왕국 최고의 바보"라고 불렀을까요.
  • 위장효과 2010/08/20 12:17 #

    그런데 술쳐마시고 논다니하고 놀아난다고 옮겨간 곳이 다른 곳도 아닌 트리니티 칼리지라니...이건 트리니티의 굴욕도 아니고 말입니다...
  • 에드워디안 2010/08/20 16:56 #

    스코틀랜드계가 원래 고집이 좀 세죠.ㅎ
  • 월광토끼 2010/08/21 08:37 #

    ㅎㅎㅎ '빽'이 있는 사람은 그게 가능합니다.

    찰스 1세는 그나마 동정과 이해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 dunkbear 2010/08/20 11:48 #

    이런... 마지막이 일종의 반전이군요.... ^^;;;
  • 월광토끼 2010/08/21 08:38 #

    의미전달을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빨간색 문장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반전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였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다보니...
  • 누군가의친구 2010/08/20 23:37 #

    결과는 메데타시, 메데카시...(...)
  • 월광토끼 2010/08/21 08:38 #

    그게 무슨 뜻인가요?;
  • 누군가의친구 2010/08/21 12:05 #

    '잘됬군, 잘되었어', 혹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명예혁명으로 모두 복권되었으니 말입니다.
    PS: 그러고보니 덧글에 오타가 있었습니다;;
  • 네비아찌 2010/08/21 11:57 #

    낙하산 학장 보나벤쳐 지파드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 월광토끼 2010/08/22 19:10 #

    혁명 직후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몇년 후 풀려나 그냥 카톨릭 성직자로서 교무에만 신경쓰며 1734년까지 살았나 봅니다. 92세까지 살았으니 엄청 장수했지요. 이 사람은 그렇게 '무자격'의 인물은 아니어서 파리에서 신학공부하러 유학도 갔다온 신학자이자 주교였기에..
  • 소시민 2010/08/21 12:27 #

    웬지 글에 언급된 사문회는 양 웬리의 사문회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 행인1 2010/08/21 22:57 #

    왕이 '제임스 2세'라는 것에서부터 설마...했는데 역시나 명예혁명으로 원상복구(?)가 이루어지는군요.
  • ArchDuke 2010/08/22 05:23 #

    음 원래 성공회가 아니면 관직을 맡을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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