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 18 (1809~1814) : 니브유와 니브

“The army could not have less confidence in itself. It is distressing to see everyone convinced that we are going to be beaten.” (우리 군의 자신감은 땅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모두가 패배를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괴롭습니다.) 이는 술트 원수 휘하에서 상세사항을 파리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던 발타자르 소령이 전쟁장관 앙리 끌라르크에게 보낸 1813년 10월 8일의 보고 내용이다. 비다쏘아 전투 후 하루가 지난 때였다.

(요즘 이 ‘Ministre de la guerre’ 또는 ‘Minister of War’란 단어를 직역하지 말고 그냥 ‘군무대신’ 정도로 번역하는게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고 있다)

영국군의 국내 침입을 막아내지 못한 프랑스군의 사기와 의욕은 극히 저하된상태였다. 하지만, 그 우울한 군대의 지휘관 술트 원수는 오히려 이 상황변화 덕택에 커버해야 할 전선과 보급선의 길이가 줄었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며, 즉각 기존 전선에서 대대적인 참호와 방어진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사실, 영국군이 비록 프랑스 국토로 들어오긴 했으나 여전히 프랑스군은 유리한 방어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비다쏘아 강 너머에는 니브유Nivelle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니브유와 비다쏘아 사이에는 긴 바위투성이의 능선이 존재해 여기에 프랑스군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니브유 강 하류에는 중세 시대부터 내려오는 성채들과 방벽들이 다수 존재하여 방어거점을 마련해 주었다. 니브유 강 너머에는 니브Nive 강이 흘렀고 니브 강 너머에는 또 아두르Adour강이 있었고 아두르를 넘어야 바욘느와 뚤루즈 등의 주요 도시가 나왔다. 병력만 온존시킬 수 있다면, 방어선을 뒤로 물리면서 축차적으로 영국군에 피해를 입히는 것도 가능했다.

또한, 영국군의 상당수는 아직도 피레네 산맥의 고개들에 발이 묶여 있었다. 비스캐이 만 방면으로 영국군의 진공을 허용했으나, 그 이외의 내륙 쪽에서는 프랑스군이 계속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비다쏘아에서 뼈아픈 병력손실을 겪긴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욘느 등의 요새도시들에 주둔시킬 병력들과 예비대들을 제외하고도 술트에게는 아직 5만 2천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물론 이 병력은 아주 효율적으로 배치, 운용되어야 할 터였고 여기에는 일말의 여유도 없었다.

웰링턴은 이러한 상황에서 최대한 신속하게 다음 움직임을 결정해야 했다. 아직 피레네에 남아있는 병력을 겨울이 오기 전에 전진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다시 한번 두드려야 했다. 11월이 다가오면서 피레네 산맥에는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고 그 위에 진을 친 부대들은 매일 아침 눈 속에 파묻힌 텐트 속에서 기어 나와야 했다. 당시 아직 피레네 안 론세스발레스 고개에 배치되어있던 제 95 라이플 연대 소속의 죠지 시몬스 대위가 이 때 남긴 기록이 인상적이다.

“우리 텐트들은 갑작스레, 그리고 자주 휘몰아치는 엄청난 강풍과 우박들에 맞아 찢기고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이럴 때 적진의 (영어를 구사하는) 프랑스군 장교들이 우리에게 ‘그대들은 이 암울한 산 위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할거요. 우리는 당신들이 곧 겨울을 나러 스페인으로 후퇴할거라 생각하오.’라고 외쳤다. 우리의 대답은, ‘그렇게 명령 받는다면, 그렇게 할 것이오(Very likely we may, if we are ordered so)’였다.”

하지만 영국군에게 있어 후퇴는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웰링턴은 1813년이 가기 전에 확실하게 프랑스 내로 깊이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기껏 얻은 교두보를 다시 내줄 수도 없었다. 능선에 참호를 파는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을 멀리서 보며 웰링턴은, 그 옆에 부관으로 있었던 해리 스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친구들은 자신들이 무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저들을 아주 쉽게 때려 이길 것이야. 저들은 자신들이 구축하고 있는 방어선에 배치할 병력이 없네. 나는 특정 지점에 저들이 배치할 수 있는 전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지.”

웰링턴의 말은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웰링턴에게는 근 8만의 가용 병력이 존재했고, 사령관과 그 부대는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11월 8일 새벽으로 공격일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11월 8일에는 폭우가 내려 작전이 이틀 연기되었다. 헌데 그 다음날인 11월 9일에 영국군에 아주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 들어온다.이 날 웰링턴과 저녁 식사자리를 같이 했던 그레고리 라펜트 (훗날 법관을 지냄. 당시 육군 대위)는 그날의 일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프랑스군 탈영병들로부터 보나파르트가 3개 사단을 잃으며 라인 강 서쪽으로 내쫒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나는 웰링턴 공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고 저녁 10시까지 동석해 있었다. 공께서는 식사 내내 기분이 좋고 기운이 충천해 계셨고, 식사를 끝내고 방을 나서며, ‘기억하게나! 내일 오전 네 시일세!’라고만 말씀하셨다.”

[The Battle of Leipzig]



웰링턴을 기쁘게 한 그 소식은, 그날로부터 보름 전에 벌어진, 다름아닌 라이프치히 전투의 소식이었다. 1813년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사흘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라이프치히에서 두배를 훌쩍 넘는 규모의 연합군을 상대로 결전을 벌인 끝에 6만의 병력과 300문의 야포를 잃는 결정적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온 것이 프랑스군 탈영병이었다는 점은, 프랑스군에 패전 소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이 때문에 전의를 상실한 자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또한 영국군으로서는 아주 반가워 사기가 오르게 될 이야기였다. 웰링턴이 말한대로 11월 10일 새벽 네 시에 공격을 준비하는 영국군은 확실한 우위에 서 있었다.




이 날 웰링턴의 공격 작전은 바다 쪽이 아닌 내륙 쪽을 통해 공격해 들어가, 니브유 강의 양변을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듯이 프랑스군을 바다쪽으로 밀어내며 방어진들을 공략하는 것이었고, 이는 술트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비다쏘아 전투에서 영국군이 내륙 쪽으로 들어올 것이라 믿었다가 피를 본 술트는 이번에는 영국군이 바다쪽으로 들어올 것이라 생각해 그 쪽에 방비를 가장 단단히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아침 영국군이 들이친 방어거점들은 모두 순식간에 함락당하거나 버려졌다. 새벽의 기습이 효과적이었고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프랑스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고립되는 것을 피해 후방으로 후퇴했다. 비다쏘아 전투 때처럼, 술트는 양동부대에 낚여 양동부대의 공격을 기다리며 바다에 가까운 지점에서 전황을 관망하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술트가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영국군의 주공은 프랑스군의 주 방어선들을 끊어 놓았다. 프랑스군의 주력 부대들은 분단 당해 서로간의 연락이 불가능한 상태로 영국군의 진공에 밀려나갔다. 영국군의 주공 부대는 프랑스측 포병들의 포화에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 포화도 오래가진 못했다. 오후가 되자 프랑스군의 니브유 방어선 전체가 무너졌고 뒤늦게 주 전선에 당도한 술트는 후퇴 지휘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후 2시경에는 이미 니브유 강 이남이 모두 영국군에 장악되었다.

니브유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9문의 야포와 1천 250명의 병력을 영국군에 내주었고 4천 4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공격한 영국군과 휘하 포르투갈/스페인군의 사상자는 다 합해 2천 6백명에 불과했다. 훗날, 수행한 모든 작전들 중 어떤 전투가 가장 잘 계획되고 또 잘 실행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웰링턴 공은 “Well, I think the battle of the Nivelle was my best work.”라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한편, 프랑스 내로 깊이 들어갈수록 약탈행위는 더욱 심한 문제가 되었다. 웰링턴은 이를 아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설사 지금보다 다섯 배는 더 강력한 병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만약 약탈 행위들을 근절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프랑스 내로 진공할 수 없다.”
“나는 프랑스로 약탈을 하러 오지 않았네. 나는 생존자들에게 프랑스인들을 약탈할 기회를 주고자 수천의 장교들과 병사들을 죽음과 부상으로 내몰며 여기까지 온게 아니네. 내 의무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의무는, 약탈을 하지 않는 것이네. 특히나 우리 병사들을 이 나라의 자원을 통해 유지시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이.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스페인으로 들어와 벌였던 민간약탈행위와 민간인 학살등의 행위가 게릴라 저항 운동을 조장했던 것처럼, 이번엔 반대로 연합군의 행위가 프랑스 민간인들의 게릴라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을 크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약탈의 주체가 영국군보다는 휘하 스페인군들인 경우가 더 많았다. 스페인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한 나머지 그 소속 병사들에 대한 보급을 하지 않거나 장부를 조작하는 등의 행위로 병사들을 굶겼고, 또한 고국이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스페인 정규군은 거리낌 없이 마구잡이로 프랑스 민간인들에 대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던 것이다. 웰링턴은 이러한 스페인군의 취약점이 작전 행동 전체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 거의 2만 명, 즉 전 병력의 25%에 달하던 휘하 스페인 부대를 모두 스페인으로 귀국시켜 버린다. 이러한 조치는 지나치게 과감한, 또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결정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미프랑스인들은 술트 휘하의 자국 군대에 의해 약탈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런 이들이 연합군에 대해 민간 게릴라 전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부 국경선 인근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프랑스 시민권은 있으나 불어도 제대로 못하는 바스크인들이었다.)

한편, 1813년 말은 프랑스에 있어 매우 절망적이고 고된 시간이었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의 패잔병 6만여명을 가지고 어떻게든 연합군의 진군을 저지하려 발악하고 있었고 프랑스 남부의 술트는 영국군의 매서운 공세를 저지하려 하고 있었다. 이 때 나폴레옹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는 그의 스페인 방면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생각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는 스페인 방면에서 고군분투 중인 8만명 (서남부의 술트 부대와 동남부의 스셰 부대 총합)의 ‘반도’ 참전부대를 라인강 전선에 투입하려는 생각을 했고, 이때문에 그동안 딸레랑의 농촌 별장에 연금시켜두었던 스페인 정통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1813년 11월 17일에 풀어준다.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사이를 이간시켰던 것은 오로지 영국의 계책이었으며 자신이 스페인을 침공한 것도 그 영국인들의 계책 때문이었던 것이 밝혀졌으니 이제 과거의 앙금은 다 잊고 페르디난드 7세를 다시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하며 스페인의 주권을 통해 영국인들을 스페인 땅에서 추방하라’는 내용의 조건을 내걸었다. 그와함께 엄청난 양의 현금과 죠셉 보나파르트의 딸 제나이드와의 결혼이라는 조건도 덧붙여졌다.

[Ferdinand VII]


페르디난드 7세는 결혼은 거절하고 돈은 더 많이 받은채 나폴레옹의 모든 조건들을 수락했다. 페르디난드 7세가 정말 약속을 지킬 것이고 그가 스페인으로 돌아가 한마디만 하면 당장 이베리아 반도 전선이 끝나고 영국인들이 추방될 것이다, 라고 나폴레옹이 진심으로 생각했다고는 도저히 믿기가 힘들 지경이나, 나폴레옹은 그리 조치하고서는 즉각 겨울이 오자마자 술트와 스셰 휘하의 병력들을 빼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전선에서의 진짜 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 페르디난드 7세의 스페인 왕위 복귀가 아닌, 니꼴라 술트 원수와 그 휘하 군대가 웰링턴의 영국군을 극적으로 격파하는 경우였다. 이제 니브 강 ~ 아두르 강 방위선으로 군을 물린 술트에게는 요새도시 바욘느와 그 주둔군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였고 후방 부대들을 모두 규합하고 나면 니브유에서 겪은 인명손실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6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한편 웰링턴은 2만이나 되는 스페인인들을 막 되돌려 보낸 참이었다. 양군 규모는 엇비슷하게 되었다. 게다가 바욘느 요새와 주변 방어진은 낡았음에도 지난 6월의 비토리아 전투 직후부터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해 12월에 이르면 상당히 견고하게 보강된 상태였다.

영국군은 니브유 전투 후 11월 중순부터 서서히 북부로 진군했고 12월 초순에 니브 강을 도하하면서 부대간 연계와 거리가 조금 벌어지게 되었다. 니브 강 도하가 주요 다리 몇 곳을 프랑스군이 후퇴하며 끊어 놓은 덕에 지체되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술트는 바로 이 때를 기회라고 보았다. 영국군이 방어진에 공격을 가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진군하면서 생긴 균열상태를 기습 공격하여 각개격파 전법으로 영국군을 패퇴시키는 방법이 유효할 것이라 믿은 것이다. 아래는 술트가 12월 파리에 보낸 보고 내용 중 일부다.

“적군은 니브 강 양변에 두 부대로 나뉘었습니다. 적장은 전선을 늘리는 바람에 자신이 가진 숫적 우세를 잃었고, 본관은 적장의 그 실책에 공격을 가할 것입니다.”

그렇게, 술트는 가용 야전 병력을 모두 집결해 대규모 공세를 기획한다. 니브 강을 건너는 일 자체가 힘든 일이었고 여지껏 술트가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움직임만을 보였기에 이 때만큼은 웰링턴이 예상치 못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웰링턴은 프랑스군의 공격이 임박했던 12월 9일 밤에 도하 작전의 다음 단계를 기획하며 전선에서 떨어진 후방에 있었고 대규모 공격이 당장 다가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영국측 최전선에서는 적군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여러 전방 초소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경보병 사단 (라이플 연대들도 포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중 최전방 초소를 지휘하고 있던 제 43 경보병 연대의 존 쿠크 중위는 이 날의 일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쿠크 중위의 기록에 따르면, 12월 10일 아침 8시에 그의 직속 상관인 윌리엄 네이피어 소령과 그보다 더 상관인 경보병 사단 제 1 여단장 켐트 준장이 그의 초소에 시찰을 나왔을 때 프랑스군이 뭔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단장과 그 참모들은)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며 적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때 네이피어 소령이 프랑스 군 낙오병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에 다른 장교들이 창가에 다가가 네이피어 소령이 본 움직임을 찾으려 했으나, 별 이상한 점을 못 느끼자 소령이 너무 예민하게 군다며 폭소했다. 그러나 네이피어 소령은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자신이 ‘한 둘이 오가다가 그 한 둘이 점점 한 곳으로 집결하고, 공격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대규모 공세가 벌어지기 직전에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말,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 한 두명의 낙오병들이 단위부대급으로 불어나는 모습이 관측되었다.”

여단장 켐트는 처음에는 이 주장을 웃어넘기려 했지만 나피에 소령이 하도 진지하게 나오자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일단 여단 전체에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이는 매우 올바른 결정이었던 것이, 오전 10시가 되자, 각 전선에서 이런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n avant, en avant, Francais! Vive l’Empereur, vive l’Empereur!” (전진하라, 전진하라 프랑스인들이여! 황제폐하 만세! 황제폐하 만세!)




(계속)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ps. 비행기 탑승 직전에 올리는 것임

핑백

덧글

  • dunkbear 2010/08/26 07:56 #

    다음편이 기다려지는군요. 과연 술트가 지난 패배를 설욕할 지?

    ps. 여기로 오시는군요. 잘 지내시길.. ^^
  • hyjoon 2010/08/26 08:30 #

    점점 흥미로워지는군요. 다음 편 기대하겠습니다.ㅎㅎ
  • 네비아찌 2010/08/26 10:09 #

    일반 역사책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전역이라 더 흥미롭습니다.
    즐거운 비행 되시길 바래요~~~
  • 행인1 2010/08/26 10:55 #

    한번 밀리니까 (게다가 웰링턴) 술트가 무능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힘들어지는군요.
  • Mr 스노우 2010/08/26 11:01 #

    잘 보았습니다 ㅎㅎ
  • Allenait 2010/08/26 11:13 #

    재미있어지는군요. 과연 술트는 성공할지가 기대되는군요
  • 조이 2010/08/26 12:47 # 삭제

    재밋게 읽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는..... 역시 사람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지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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