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네이비의 탄생 - 4. 피프스의 시대

1660년 1월. 영국은 크롬웰 사후의 혼란 정국 속에서 무너져가는 공화국 아래 많은 이들이 이권 다툼에 눈이 멀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몽크 장군은 콜드스트림 부대 (훗날 The Regiment of Coldstream – 최정예, 왕실 근위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부터 남하해 내려오며 쿠데타를 감행하고 있었다. 이미 망명 왕가와 접촉하여 왕정복고의 계획을 다 짜 놓은 후였다. 그리고 크롬웰 치하에서 바다를 누볐던 블레이크 제독의 후임, 해군 총사령관 에드워드 몬타규 제독이 그 몽크 장군과 손을 잡는다.

이렇게 해군도 왕정복고 지지를 천명한거나 다름 없고, 기존 의회는 해산되며 찰스 2세를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추대하는 절차가 기정 사실처럼 진행되어가던 1660년 2월의 어느 날, 몬타규 제독은 자신이 아끼는 사촌 동생 한 명을 만나 자신의 비서로 일하며 잠시 바다에 나갔다 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한다. 그 사촌동생은 평생 배를 타본 적도 없었으나 사촌 형의 제의에 뛸듯이 기뻐하며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 바다로 나가는 일은, 영국 해협 건너편에서 대기중인 찰스 2세와 그 외 왕가의 일원들을 다시 잉글랜드로 모셔오는 일을 의미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26세의 백수 청년이었던 사뮤엘 피프스Samuel Pepys가 생천 처음 해사海事를 접했다.

새 국왕 찰스 2세는 이미 죽고 없는 과거 해군의 영웅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을 부관참시했으나, 반면 에드워드 몬타규 제독은 순식간에 새 국왕의 신임을 받게 되어 작위를 받아 제 1대 샌드위치 백작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사촌이자 비서인 사뮤엘 피프스도, 1660년 3월, 막 새로이 개편된 해군성에 총무로 들어가게 된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Samuel Pepys, 1633~1703]



사뮤엘 피프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런던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술과 여자를 방탕하게 밝혔으며 (그러나 불성실할망정 아내도 분명 사랑하기는 했다) 아마츄어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고급 가구 수집가였으며 사치를 좋아했다. 그리고…?

오전 네 시 기상, 채텀의 해군 병기창으로 배를 타고 가 함선과 무기, 기자재들 점검. 저녁 다섯시까지 조선소를 방문해 건함 작업 실태 점검 또는 군함 설계사들과 토론 및 설계 검토, 공부. 그리고 정박해 있는 모든 군함들을 돌아다니며 함의 구조를 점검하고 공부. 식사 후 자기 전까지 해사에 관련된 서적들 탐독, 동시에 항로와 해도 연구 후 밤 열한시에 취침.

해군성에 들어가고나서, 이 20대 청년은 그야말로 일에 미친, 정열적 워커홀릭이 되어 있었다.

어느날 밤 들어간 술집에서 마주친 네덜란드의 밧줄 제작사 직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더니, 바로 그 다음날에는 그 제작사에서 만든 밧줄들을 직접 점검하고 품질을 확인. 그리고는 당장 그 밧줄 제작사의 제품을 해군 전함들에 납품하는 식이었다. 돛대도 마찬가지였다. 벌목장으로 직접 달려가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과 그 나무들의 질과 용도를 확인하고 익히고는 기존의 목재 거래상과 거래 중단, 같은 품질의 목재를 싼 가격에 공급하는 곳과 계약 체결. 납품이 늦어지는 곳에는 직접 달려가서 채근.

거의 결벽증 환자에 가까운 듯한 이 태도로 피프스는 근무 시작 5년만에 해군성의 총 감독관Chief Surveyor General이 되어 있었다. 그는 뱃사람이 아니었으며 군인도 아니었다. 그는 관료였다. 그러나 이 관료 한 사람이 영국 해군에 끼친 영향은 그 어떤 명 제독의 업적보다도 거대한 것이었다.



피프스가 승진한 그 1665년은, 영국이 역사상 두번째로 네덜란드와 다시 전쟁에 돌입한 해였다.

그러나 영국 함대는 이 전쟁에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화국 시대에 비대해진 영국 해군은, 이제 정부/의회 인가 예산의 정도를 뛰어넘는 엄청난 ‘돈먹는 괴물’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피프스가 해군성 들어와서 한 모든 노력들은 그 ‘예산 사용량’을 가능한한 최대로 줄이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원들에 대한 월급 지급조차 언제나 불확실했다. 때로는 종이 보증서만이 유일한 지불 수단이기도 했다. 그동안 해군 제독들은 서로를 불신했다. 공화국 시대에 고속 승진한 ‘타폴린’ 계열 지휘관들과, 왕정복고 후의 귀족 출신이나 부자 젠틀멘 계층 출신의 지휘관들이 극심한 대립과 알력을 해군에 가져오면서 모두들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해군이 맞서 싸워야 했던 네덜란드 해군에게는 잘 훈련되고 준비되었으며 월급도 충분히 받는 함대와 그 함대를 지휘하는 명장 미키엘 드 로이테르 제독이 있었다.


[1666년 'Four Days Battle']


제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여러모로 영국에 있어 고난의 시기였다. 1665년 런던에서는 역병이 대규모로 창궐했고, 포츠머스 조선소 노동자들과 군함의 선원들이 파업을 선언하거나 폭동을 일으켰다. 업친데 덥친 격으로 1666년에는 런던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런 저런 재해들로 인한 피해 복구만으로도 영국 정부는 예산을 탕진하여 해군 선원에게 지급할 돈 같은건 아무도 신경쓰지 못할 지경이었다. 네덜란드와 맞서 싸워야 하는 영국 해군에게는 돈이 없었기에 물자가 없었고 물자가 없었기에 싸울 수도 없었다.


[1667년 6월 Medway, 또는 Chatham의 습격]



그 결과가 1666년 6월 ‘4일 전투’에서의 영국 함대의 대패였고, 그 1년 후 벌어진 메드웨이의 대참사였다. –네덜란드의 입장에서는 대승리- 1667년 6월 9일 로이테르 제독의 네덜란드 함대가 탬즈 강 하구로 침입해 들어와 채텀의 해군 기지로 쳐들어와 (메드웨이 인근) 그곳에 정박 중이던 영국 함대를 그야말로 박살내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영국 해군의 자랑이던 대형 전열함 로열 찰스Royal Charles가 나포당했으며, 그 외 수 척이 불살라졌다. 그곳의 지휘관은 함선들의 나포를 막기 위해 귀중한 함선들을 자침시켜야 했다. 여기에서 해군이 입은 손실을 액수로 따지면 20만 파운드에 달했다. 해군의 1년 예산은 50만 파운드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에게 종전을 제의했고 1667년 7월 31일, 브레다 협약이 조인되었다. 영국 측의 항해조례는 완화되었으며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의 지배권을 확실히 장악했다. 이는 네덜란드의 제해권 장악이 가져온 결과였는데, 누군가는 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했다. 해군과 해군성의 인사들도 그 책임을 저야 했는데 피프스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1668년 3월 5일, 청문회에 소환된 사뮤엘 피프스는 오히려 의원들에게 큰소리 뻥뻥치며 자신의 입장 뿐 아니라 해군 전체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는 쉬지도 않고 세시간 반 동안 연설을 했는데, 해군의 예산 활용 시스템 전체를 설명하며 온갖 통계자료들을 제시하고 해군 운용의 어려움과 해군이 받은 푸대접과 일반 선원들의 고충까지 모든 것을 설명했다. 속사포처럼 난사되는 통계 자료와 물증들을 통한 변론 앞에 당황한 청문회 측은 이 안건에 대한 투표를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해군의 상황은 크게 변하지 못했다.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측이 제시하는 유혹 (그리고 자금 지원)에 굴복한 찰스 2세로 인해 체결된 영-불 동맹이 1672년에 네덜란드를 상대하며 전쟁이 다시 터졌을 때, 양국 연합 함대는 네덜란드를 잘 몰아붙이는 듯 하다가도 테슬 전투와 솔베이 전투 등에서 드 로이테르 제독과 그 함대를 이길 수 없었다. 그 해 5월 솔배이 전투Battle of Solebay에서는 피프스의 후원자였던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타규 제독이 기함 로열 제임스가 굉침당하면서 전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몬타규의 너덜너덜한 시체는 나중에 해변에 떠밀려왔는데, 입고 있던 옷 조각 몇자락을 통해서 간신히 그라는 것을 판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에 실망한 의회가 국왕에게 압력을 가해 전쟁이 끝나고 영-불 동맹도 끝장이 났을 때 (그와 동시에 네덜란드에서도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오라녜 공 빌렘 3세가 권력을 잡았고) 해군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가난했고 타폴린 계 함장들과 귀족 함장들의 반목은 계속 되는 중이었다. 그러던 1673년 6월, Navy Board는 Admiralty (둘다 그냥 해군성이라 하겠다)가 되었고 사뮤엘 피프스는 그 책임자, The First Secretary of the Admiralty가 된다. (해군성 장관)

신설 해군성의 장관 피프스는 처음 Navy Board의 총무 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격무에 매진했다. 1677년 하원에서의 연설 중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The French and the Dutch are daily building!” (프랑스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은 매일같이 배를 뽑아내고 있습니다!) 그는 신예함 30척의 건조 계획을 입안했다. 그 계획은 10척의 80문 이상 탑재 대형함과 20척의 ‘3등급’ 전함들의 건조였는데, 이 건함 계획은 군함의 설계에 있어서도 엄청난 개혁을 가져왔다. Rate의 규격화와 더불어 찾아온 것이 바로 영국 해군 역사 최초로 도입된 ‘Class급’ 개념 이었다. 각 ‘급’의 함들은 각자 균일한 배수량과 규격, 동일한 설계 아래, 양산 건조되게 되었다. 특정 디자인의 함급을 여러척으로 양산하는 일대 혁명이었다.

그리고 피프스의 연설가로서의 재능은 하원에서 꽃피어, 결국 그 수전노 의원들은 해군성에 무려 60만 파운드라는 예산을 인가, 그 건함 계획 추진을 가능케 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10여척의 1등급/2등급 대형함들과 ‘1677 class 3rd Rates’라불리우는, 각각 만재 배수량 1천톤에 전장 50여미터에 전폭 12미터의 스무척의 균일한 설계의 양산 함대였다. 그리고 이 함들 전부 그때까지 쓰이던 황동 대포가 아닌 철제 대포들을 탑재하였다.

피프스는 한편 그리니치의 조선소에 자주 방문했고, 그곳에서 수학자 조나스 무어와 친분을 다졌다. 그 둘의 관계는 곧 해군과 과학계의 뗄 수 없는 긴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렇게 해서, 피프스의 비호와 함께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가 1675년 설립되었고 피프스는 이 천문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기술들은 해군에게도 축적될 것이었다.

그리고 1678년에는 예비역 해군 장교들에게 드디어 봉급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소위 ‘Half-Pay’라 불리우는 그 급여는 이름 그대로 현역일 때 절반의 봉급이었으나 어쨌든 이것은 해군 장교 집단을 완전히 고착시키고 전문화 시키는 주요 제도 중 하나였다. 그와 동일한 선상에서 피프스는 또다른 개혁을 일구어 냈으니, 바로 장교 임관 심사 제도의 도입이었다. 누구든 장교가 되려면 시험을 봐야 했다. 그 시험 내용은 아주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것으로, 항해술은 물론이고 천문학, 포술, 통신기술까지 포함한 넓은 분야에 걸쳐 전문지식을 요하는 것이었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귀족이라도, 또는 아무리 억만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승진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시험 도입과 함께 탄생한 것이 Midshipman생도 계급이었다. 임관 시험에 응시하려면 반드시 만 스무살 이상은 되어야 했고 배의 중앙부에 거처하며 최소 3년 이상 지휘관 계급으로의 준비과정을 거치며 바다에서 생활했어야 했다. 이 배 중앙부에서 거주하며 일하는 장교 준비생들, 즉 Midshipman 개념은 이미 1662년부터 생겨났었으나, 피프스 재임 기간에 이것이 공식 제도화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생도 생활 내내 함장들에게는 생도들의 근무 실적을 기록해야 하는 의무가 생겨났다. 모든 진급심사에는 이 함장들의 근무실적 기록부가 큰 요소로 작용했다.

이런 해군의 전문화를 통해 앞서 계속해 문제를 초래했던 타폴린 출신과 귀족 출신 장교간의 알력은 사라져 간다.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고 이제 귀족도, 타폴린도 젠틀맨도 아닌 'Navy Officer'란 신 '계급'이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모든것이 전문화 되어 갔다. 피프스는 늘 이렇게 말했다. "I like to keep everyhing neat." (난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있는게 좋다) 피프스에 의해 해군은 아주 Neat한, 마치 기계같은 전문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편, 불철주야로 일하며 해군을 만들어가던 피프스는 제임스 2세 치세 때 모함을 받고 정치 공세 끝에 관직을 내려놓고 은퇴해야 했다. 1684년, 은퇴한, 이제 51세의 피프스는 해군을 떠나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회장이 되었다. 그가 회장으로서 한 일 중 가장 큰 것은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마스마티카 출판 허가였다. 그러나 피프스가 공직에서 물러날 무렵 영국 해군 함대는 이제 총 톤수로 13만 2천톤에 달했으며, 언제라도 전쟁이 터지면 즉시 바다로 뛰쳐나갈 수 있는 전문 상비군 집단, 그것도 세계 최고의 정예 집단이 되어 있었다.


[18세기 무렵 채텀 조선소의 모습]



Coote, Stephen. 2001. Samuel Pepys: a life. New York: Palgrave for St. Martin's Press.
Davies, J. D. 1993. "The Navy, Parliament and Political Crisis in the Reign of Charles II". Historical Journal. 36 (2): 271-288.
Herman, Arthur. 2004. To rule the waves: how the British Navy shaped the modern world. New York, NY: Harper Collins.
Hore, Peter. 2005. The habit of victory: the story of the Royal Navy, 1545 to 1945. London: Sidgwick & Jackson



로열 네이비의 탄생 - 1. 버킹엄 공작의 시대
로열 네이비의 탄생 - 2. 건함세의 시대
로열 네이비의 탄생 - 3. 공화국의 시대
로열 네이비의 탄생 - 4. 피프스의 시대


앞으로 이어질 글들:

5. 안슨의 시대
6. 샌드위치의 시대


ps. 사뮤엘 피프스는 매일같이 일기를 썼습니다. 그가 남긴 상세한 일기는 오늘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최고의 사료지요.
ps.2. 참고로 오늘날 현대화된 ROKN 함대 총톤수가 16만톤 가까이 되지요? 당대 최대의 목재 전열함이 오늘날 프리깃함 정도의 배수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저 영국해군 총톤수는 정말 아마어마한 겁니다.


*Pepys는 페피스가 아니라 피-프스 입니다.

페피스라 썼었는데 이건 제 오기. 정확한 발음을 위해서는 아래 BBC 역사 드라마를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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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듀란달 2010/09/14 17:49 #

    한 사람의 열정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대들보 중 가장 중요한 기둥을 세웠군요. 읽다보니 감탄을 넘어 오싹해졌습니다.
  • 듀란달 2010/09/14 18:44 #

    좀 뜬금없는 이야깁니다만, 이런 인물이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쯤에 호조판서 정도에 앉아 있었다면 이순신 장군도 그렇게 고생할 필요는 없었지 않았을까 하네요.
  • 월광토끼 2010/09/15 09:35 #

    그쯤 되는 인물이 호조판서에 있었다 해도 질투심 많은 선조가 째려봐서 별 일은 못하지 않았겠습니까
  • 검투사 2010/09/14 18:18 #

    역시 누가 윗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조직 전체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물론 특정한 누군가를 부정하고 싶은 어떤 분들은 "그래도 밑에 애들이 캐중요! 윗놈은 아무나 해도 됨!"이라고 주장하지만...


    ps. "벌목장으로 직접 달려가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들과 그 나무들의 질과 용도를 확인하고 익히고는 기존의 목재 거래상과 거래 중단, 같은 품질의 목재를 싼 가격에 공급하는 곳과 계약 체결."
    이 부분 때문에 문득 김탁구가 생각났습니다... "군함왕 페피스: 나는 군함 굽는 사나이"... ㄲㄲㄲ
  • 월광토끼 2010/09/15 09:35 #

    허허 탁구왕 김제빵이.. 아니, 드라마 김탁구가 그런 내용인가 보군요.
  • hyjoon 2010/09/14 18:47 #

    역시나 군대도 행정가를 잘 만나야 하는군요.....;;;
  • 월광토끼 2010/09/15 09:36 #

    군대는 지휘관과 졸병들로만 하는게 아니라 그 지휘관과 졸병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돈과 무기도 주는 행정가와 행정체계를 필요로 하니까요
  • hyjoon 2010/09/15 10:26 #

    그런 점에서 저도 '무관만 전쟁 수행 잘 하는 것이 아님'이라는 취지의 날림 포스팅을 한 적이 있죠.
  • unknownone 2010/09/15 13:57 #

    어떤 조직이건, 학계이건, 연구이건 간에, 훌륭한 결과는 시스템과 돈이 만들어냅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천재적 역량만으로는 노벨상급의 훌륭한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 행인1 2010/09/14 18:57 #

    혼블로워 시대에 자리잡은 제도들(특히 인사) 상당수가 페피스의 작품이었군요.
  • 월광토끼 2010/09/15 09:37 #

    그렇습니다.
  • 피그말리온 2010/09/14 19:48 #

    사람 하나 배에 잘 태워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었네요....
  • Allenait 2010/09/14 19:52 #

    잘 만난 행정가 하나 열 제독이 안부러운 일이로군요
  • 초효 2010/09/14 20:18 #

    어마어마한 영국해군의 규모가 저때 구축됬군요.

    20세기 초 대영제국 관함식만 해도 수평선 끝까지 함정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지금은...--;;;
  • 함부르거 2010/09/14 21:43 #

    !@#$... 관료 한 사람이 역사를 바꿔 놓았군요... 잘 읽고 갑니다.
  • 계원필경 2010/09/14 21:44 #

    뉴턴 전기를 볼때 패피스라는 이름이 나왔는데 이런 분이셨는 줄 몰랐군요 ㄷㄷ;;;
  • kidovelist 2010/09/14 22:40 #

    관료로서 저토록 대단한 업적을 남기다니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 들꽃향기 2010/09/14 22:46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페피스는 문학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었는데, 이런 업적과 군사적 문제에 대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군요. ㄷㄷ

    더군다나 로이테르의 난동질(실질적 패배뿐만 아니라, 빗자루를 함선에 메달고 템즈강을 다니며 "너희는 나에게 쓸려버렸음요 ㄳ"라던 정신적 굴욕 OYL) 이후의 정국에서 오히려 당당하게 해군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니 그 용기에 경의를 표할 따름입니다.
  • 월광토끼 2010/09/15 09:44 #

    BBC 다큐멘터리를 보면 언제나 높으신 분들께 해군의 문제점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옆에서 '저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아!'라고 번번히 말리는 장면도 나오더군요 허허

    Pepys는 그 군사적 업적만으로 해군성에서 길이 추앙하는 인물입죠
  • 소시민 2010/09/14 23:04 #

    프랑스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은 매일같이 배를 뽑아내고 있습니다!

    - 경쟁자들의 현황을 강조하는 것은 나름 효과적인 수사인듯 합니다.
  • 월광토끼 2010/09/15 09:45 #

    그런데 이건 정말 사실이었으니까요
  • 지나가던과객 2010/09/15 00:05 # 삭제

    사생활은 그냥 건달같은데 공직에 있으니 이건 통제사 어른과 맞먹는 활약을 펼친 양반이군요.
  • 네비아찌 2010/09/15 01:15 #

    저도 페피스 하면 그의 연대기가 먼저 떠올랐는데 해군 쪽에 큰 업적을 남긴 분이군요.
    그러고보니 어떤 외국 학자가 충무공과 페피스를 비교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것 같네요.

    p.s. 생활사 책에서 페피스의 연대기를 주요 자료로 인용하는 일이 많지요.
    그런데 간혹 '핍스'라고 표기한 책들이 보이는데, 정확한 발음은 역시 페피스 였군요....
  • 월광토끼 2010/09/15 09:45 #

    핍스가 맞습니다.
  • 월광토끼 2010/09/15 09:45 #

    네이버 사전 보면 '페피스'라고 번역한 예문도 나오지만 핍스가 맞다는 듯 하네요 -_-;
  • 검투사 2010/09/15 10:44 #

    Pepys, Samuel#2피프스, 새뮤얼#3영국의 정치가(1633~1703).#4표준


    국립국어원 외래어사전 로마인명(2010년 8월 30일자)입니다.
  • 네비아찌 2010/09/15 11:14 #

    아아...핍스 쪽이 맞는거군요, 감사합니다~
  • 검투사 2010/09/15 14:13 #

    네비아찌 / ......................
  • young026 2010/09/15 03:20 #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Pepys의 발음은 (pronounced /ˈpiːps/ "peeps")라고 합니다.
  • 월광토끼 2010/09/15 09:42 #

    본문 마지막에 추가했습니다.
  • young026 2010/09/16 03:23 #

    여담인데, 제가 '핍스'의 이름을 처음 들은('본'인가?) 건 Jean Webster의 Daddy-Long-Legs(물론 원문은 아니고 계몽사문고판 <다리 긴 아저씨>였습니다. 요즘 번역제목은 보통 <키다리 아저씨>라고 하는 듯)에서입니다. 주인공 주디가 Pepys의 일기를 읽은 감상을 편지에 적는데, 당시 남자들은 옷에 매우 관심이 많았나 보다 그런 얘기를 하죠.
  • dyanos 2010/09/15 07:34 # 삭제

    음... 빽이 있어서 승진이 가능했다고 해야하는걸까요?

    물론 그전에 능력이 있었기에 훌륭한 일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 능력도 없는 인간들이 빽만믿고 출새를 하는 넘들이 많아서리...

    어떻게 보면 페피스가 부럽지만, ...
  • 위장효과 2010/09/15 07:38 #

    페피스 본인은 거기다가 미식가였는데 해군 선원들에게는 "갑판위의 토사물""벌레들의 성채-이빨 부수는 물건"이런 걸 지급하는 기준을 만들어줬지요.
    (당시 기술로 염장고기와 하드택만큼 보존성 좋은 식재료가 없고 그걸 또 정량대로 보급할 것을 지시했으니 역시나 업적임에는 분명합니다만...당시 해군사병입장에서는 "그로그"제독과 더불어 원망좀 샀을 거 같기도 합니다^^)

    사생활 면에서야 이전에 포스팅하신 요크대공보다는 100배 나은 거 같습니다만^^;;;.
  • 월광토끼 2010/09/15 09:46 #

    하하; 일단 요크 대공 처럼 놀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워낙 일하느라 바빠서..
  • ai8rs 2010/09/15 07:47 # 삭제

    으음, 여담입니다만 저는 Pepys를 "핍스"라고 읽는 것 밖에 듣지 못했는데요^^; 페피스인가요?
  • 월광토끼 2010/09/15 09:42 #

    본문 마지막에 추가했습니다.
  • 시스 2010/09/15 13:05 #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하거나 소신있거나 전문직에 앉으면 재앙이지만

    똑똑한 사람이 부지런하고 소신있고 전문직에 앉았으니

    영국에 있어서는 축복이군요^^
  • 아.... 2010/09/16 20:20 # 삭제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저 사람 얘기를 읽었던게 뇌물의 역사라는 책에서라서(당연히 초점이..) 공적에 대해서 몰랐는데 ...
    좋은 지식 감사합니다.
  • 이건 2010/09/21 15:37 # 삭제

    밀덕이 열심히 일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군요 ㅋ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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