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안슨의 세계일주와 해군 제복

스페인 무역 갈레온. 드레이크와 롤리의 시대, 해적의 낭만이 존재하던 시절 영국인들에게 금은보화와 향신료, 희귀 공예품이나 직물 등으로 가득 찬 갈레온 선단은 온갖 꿈과 욕망을 자아내는 보물상자였고, 바다에 나서는 영국 남자들은 이 보물상자를 약탈할 기회를 꿈꿨다. 그러나 스페인이 몰락하고 국제관계의 주도자 역할을 잃자 이 금은보화의 갈레온 선단들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즉 1700년대에 이르면 이 갈레온은 마치 로또같은 존재처럼 여겨졌고, 많은 선장들은 스페인과 영국 간의 전쟁이 터질 때마다 이 ‘로또’를 기대했다.


1740년, 스페인과 영국간 적대관계가 성립되었을 때, 로열 네이비의 60문 전함 ‘센츄리온’의 지휘를 맡고 있던 인물은 당시37세의 함장 죠지 안슨George Anson이었다. 해군성은 안슨에게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방향 해안들을 공격하고 약탈해 영국 해군의 영향력을 태평양에서도 확대할 것을 명령한다. 안슨의 ‘센츄리온’과 함께 네 척의 동급 전함들과 한 척의 슬루프함, 그리고 수송선 두 척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위풍당당히 떠났다. 그러나 이 함대는 40년 11월 케이프 혼을 돌아 태평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큰 풍랑을 만나 두 척이 큰 피해를 입고 회항했으며 한 척은 침몰해 버렸다. 함대의 승조원들 1854명 중 대부분은 늙고 병들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던 퇴역병들 또는 이제 막 배치된 신병들로 이루어져 있어 제대로 항해도 못하는 상태에서 안슨의 함대는 결국 질병으로 괴멸하고, 종국에는 살아남은 200여명만이 기함 센츄리온에 모이고 나머지 배들은 잃거나 버려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원정은 실패했다.

[케이프 혼에서 침몰하는 안슨 함대 소속 HMS 'Wager']


그런데 이 실패한 원정의 끝에 안슨은 필리핀의 마닐라에 다다렀을 때 대담한 계획을 하나 세운다. 원정은 실패했으니 체면치례라도 하자는 것이였으니, 그것은 그 ‘로또’ 스페인 마닐라 무역선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한척의 전열함으로 줄어든 안슨의 ‘함대’는 1743년 3월에 중국 마카오까지 갔다가 마닐라 무역선의 이동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필리핀 남부로 이동, 정선한채 3주를 기다렸고, 드디어 그 갈레온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코바돈가’가 6월에 나타나자 공격했다. 현측 일제 사격을 할 선원이 없어 사람들은 포갑판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 달려가며 차례차례 대포를 장전하고 쏴야 할 정도였으나, 결국 ‘코바돈가’를 나포하는데 성공한다. ‘코바돈가’는 무역 갈레온 중에서는 작은편인 7백톤급이었으나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거의 90만 영국 파운드 상당의 은괴가 실려 있었다.


[HMS 'Centurion' attacking 'Nuestra Senora de Covadonga']



두 함은 잠깐 마카오에 들려 보급을 받고는, 인도양을 거치고 아프리카를 돌아 1744년 6월에 영국에 도착한다.

1740년 9월 스핏헤드 항을 떠났을 때 안슨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명의 함장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1743년에 그는 막중한 임무를 실패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앞날이 캄캄한 지휘관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센츄리온'과 '코바돈가'가 1744년 6월 스핏헤드에 입항했을 때 그는 전 영국민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군사적인 면에서 원정은 대참사로 끝난 것이었으나 그 갈레온선의 나포 하나가 이 실패한 세계일주를 당대 최고의 모험담으로 만들었고 안슨과 그 부관들은 국민적인 대 스타가 되어있었다. 안슨은 즉각 Rear Admiral(해군 소장)으로 승진되었고 Lieutenant 급이던 그의 부관들도 모두 함장급으로 올라갔다.

3년 후인 1747년 5월에 안슨 제독은 14척의 함대를 이끌고 포르투갈 북부 앞바다에서 프랑스 상선대와 그 호위함대를 공격, 전열함 여섯 척과 상선 일곱척을 나포하는 업적-Battle of Cape Finisterre-을 세워 다시 한번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이 전투에서 안슨의 1740년 항해 내내 부관이었던 필립 사우마레즈Philip Saumarez는 전열함 ‘노팅햄’을 지휘하다가 프랑스 전열함의 포격에 의해 전사한다.


죠지 안슨과 필립 사우마레즈가 1742년 12월 마카오에 잠깐 들렸을 때의 일이다. 영국 해군 함선이 아시아에 발을 들인 건 그것이 사상 최초의 일이었는데, 그때까지의 고난 때문에 다들 좀 누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를 방문하는 중국 사절을 대접할 때 화려한 의상의 중국 관료들에게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하기 위해, 사우마레즈는 장교들이 죽은 해병대원Royal Marines들의 빨간 제복을 입고 나가자고 제안한다. 안슨은 그 제안을 따랐고 중국 사절은 제복입은 장교들의 모습에 감탄했다고 한다.

필립 사우마레즈가 피니스테르 해전에서 전사하기 2개월 전의 일이다. 안슨 휘하 장교들이었던 자들은 1742년 12월 마카오에서 ‘제복’을 입었던 그 경험과 이에 놀라던 중국 관료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이들은 1747년 3월 런던의 유명한 커피숍인 ‘윌스 커피 하우스’에 모여 제복에 관한 자신들의 생각을 토론한다. 이 커피숍은 과거 해군성 장관 사뮤엘 피프스가 종종 들려 커피를 마시며 생각하던 곳이었다. 토론 끝에 필립 사우마레즈가 스케치를 하나 들고 나왔다. 허리까지 덮는 벽색(Dark Blue)의 긴 코트에 금색 줄과 단추를 단 디자인이었다.

[F2206-1, Royal Naval uniform: pattern 1748-58.
© National Maritime Museum, Greenwich, London]



사우마레즈 사후 그의 디자인은 해군성에 제출되었고, 1년 후, 이제 귀족이자 해군 대장이었던 안슨은 그 디자인을 체택한다. 1748년, 영국 해군 장교들은 사상 최초로 고유의 제복을 입게 되었다. (그 벽색 코트와 금줄 장식은 1890년까지 지속되다가 아예 검은색으로 바뀐다. 장교뿐만 아니라 일반 수병들도 제복을 입게 된 건 1857년의 일이다.)



그런데 죠지 안슨이 해군에 해준 일은 단지 해군 제복의 도입만이 아니었다.


[Lord George Anson, 1697~1762]



---

'로열 네이비의 탄생 - 05. 안슨의 시대' 를 준비하는 글이라 보면 무방하겠습니다.

ps. 본 기획의 모든 글들은 아래의 'RoyalNavy' 태그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핑백

  • '3월의 토끼집' : 로열 네이비의 탄생 - 5. 안슨의 시대 2010-09-21 14:43:02 #

    ... 톨롱 해전. 영국의 흑역사여서 그런지 이를 묘사한 영국측 그림이 없고 다 스페인측 그림만.] 이런 해군의 암울한 상황 때문에 해군성과 국민들은 죠지 안슨의 스페인 무역선 나포 사건에 더욱 열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슨의 그 세계일주 항행도 무역선과 그 화물의 나포라는 화려한 업적을 제하고 냉정히 보면, 바로 그 해군 ... more

덧글

  • ㅎㅎ 2010/09/17 15:57 # 삭제

    역시나 재미있군요.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
  • 월광토끼 2010/09/18 12:49 #

    감사합니다 ^^
  • Allenait 2010/09/17 16:24 #

    역시 인생은 한방이군요(?)
  • 월광토끼 2010/09/18 12:50 #

    하지만 너무 한방에 의존해서는 그건 나름대로 패가망신..
  • hyjoon 2010/09/17 16:36 #

    오오.....역시 한탕 해야 사는 세상.....(야!)
  • 월광토끼 2010/09/18 12:50 #

    하지만 너무 한방에 의존해서는 그건 나름대로 패가망신..의 지름길.
  • 검투사 2010/09/17 17:00 #

    아아... 역시 한 방에 삶이 바뀌죠...

    책 만드는 사람들도 그래서 베스트를 만들려고 애를 쓰지요. -ㅅ-

    경력이 저런 식으로 바뀌곤 하니까...
  • 월광토끼 2010/09/18 12:50 #

    하지만 너무 한방에 의존해서는 그건 나름대로 패가망신..의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 검투사 2010/09/18 14:37 #

    그래도 요즘 방송이며 신문이며... 저런 걸 은근히 조장하지요. 마치 "구린 방법으로라도 성공하기를 권하는 세상"이랄까...

    (그래서 네이버 뉴스캐스트의 경우 대강 제목만 보고 넘어갑니다. 차라리 그냥 곧바로 검색창에 치지요...)
  • 크핫군 2010/09/17 17:17 #

    그러면 그 이전까지 공식적인 복장이 없었나요???
  • 월광토끼 2010/09/18 12:50 #

    넵 그런거 없었습니다.
  • 대한민국 친위대 2010/09/17 17:28 #

    역시 싸나이의 인생은 한방....(뭐?)
  • 월광토끼 2010/09/18 12:51 #

    하지만 그 한방도 용의주도면밀 해야 가능하지요
  • dunkbear 2010/09/17 21:08 #

    로또 한방의 위력이 영국 해군에도 영향을 끼치다니!!!
  • 월광토끼 2010/09/18 12:52 #

    이것이 나비효과!
  • 계원필경 2010/09/17 21:56 #

    한방에 해군 소장으로 갔군요 ㄷㄷ;;; (그나저나 해군 수병복이 19세기 들어와야 지급이 됬다는 건 좀 ㅎㄷㄷ 하군요;;;)
  • 월광토끼 2010/09/18 12:52 #

    그건 사실 다른 나라 해군들도 마찬가지 형편이겠습니다만
  • 행인1 2010/09/17 23:22 #

    어지간한 사람이면 낙담하고 무사히 돌아갈(그리고 처벌을 피할) 방도를 궁리했을텐데 안슨은 '근성'이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영국 해군 군복의 시초가 이렇게 되는군요. 외국 관리와의 접견이 시초라니.
  • 월광토끼 2010/09/18 12:53 #

    중국 관리들의 삐까번쩍한 복장에 주눅들기 싫어서 한게 제복이 되고..
  • 네비아찌 2010/09/18 00:37 #

    전 세계 해군 장교들이 거의 공통으로 입는 검은색에 금단추, 금줄 달린 해군 정복이 이런 기원을 갖고 있엇군요. 흥미롭습니다.
  • 월광토끼 2010/09/18 12:53 #

    이것도 영국 해군이 전세계에 남긴 유산 중 하나겠지요
  • Cheese_fry 2010/09/18 11:43 #

    잘 읽었어요. ^.^ 은괴 이야기를 보니까, 지금 현재 진행형인 보물선 케이스가 있는데요, 아디씨라는 탐사전문 회사가 투자를 받아서 지브롤터 근처 심해에서 블랙 스완이라는 명칭을 붙인 보물선을 찾아내서 5억달러 가치 상당의 금, 은화 등등을 건져 냈는데, 지금 스페인 정부와 소송 중이예요. 스페인에서는 페루에서 보물을 실어오던 스페인 군함이 침몰한 거라고 주장하고 있고, 아디씨는 민간선이라고 대치 중이고.. 요즘에도 이런 일이 있는게 흥미롭죠;;
  • 월광토끼 2010/09/18 12:54 #

    허허 정말 흥미롭군요. 이런 건은 영국 해사법에 의거하면 무조건 그 회사의 승소인데 말입니다..
  • 들꽃향기 2010/09/19 23:22 #

    잘 읽었습니다. ^^ 당시의 군복이 보통 훈련(drill)의 도입과 함께 군대 일원화의 작업으로 이뤄졌다고 통념적으로 설명되왔지만, 실제 군복의 착용 문제나, 또 그 군복의 화려함, 나아가 같은 복장으로서의 일원성이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는 수정주의적 지적이 말씀하신 사례를 통해서 와닿는 것 같네요 ^^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ㅎㅎ
  • 홍차도둑 2010/09/23 00:41 #

    앤슨에 대해서 '경도' 라는 책에서도 언급하더군요.
    당시 앤슨이 케이프 혼 근처에서의 항해에서 그렇게 많은 선원을 잃어버렸던 이유중 하나가 당시 '경도'를 정확히 찾는 방법이 실용화 된 것이 없어서 보급을 받아야 하는 섬을 바로 앞에 두고도 '여기가 아닌것 같은데' 하는 식으로 뺑이치다가 선원들을 많이 잃었다고...
    그런데 웃기는건 앤슨이 그때 탄 센추리온 호는 앤슨의 그 세계일주 이전 존 해리슨의 경도시계 1호 제품을 싣고 경도찾기 실험을 했던 배였다고...

    '경도' 라는 책에서는 영국 해군이 강해진 이유중 하나가 경도시계의 도입으로 이런 비효율적인 항해시의 인력과 배를 잃지 않은 것도 이유의 하나로 들고 있습니다. 물론 '경도찾기'라는 것만 전문적으로 본 입장의 책으로서야 당연한 것 같습니다.

    '경도'라는 책에서는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는 에피소드였는데 더 자세한 소개및 로얄 네이비의 그런 몸부림을 잘 알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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