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S ‘Implacable’과 로열 네이비의 비참한 몰락

HMS ‘임플라카블Implacable’은 훌륭한 군함이였다. 1949년에도 이 배는 무수히 많은 명 전함들과 함께 영국 해군에서 오랜 세월 복무해 왔고 당당히 떠 있는 자랑스러운 배였다. 하지만 당시의 다른 배들과 가장 큰 차이점이 있었다면, ‘임플라카블’은 목조 전함이라는 것이였다.

1800년, 통령정부 치하의 프랑스 로슈포르 항에서 74문급 표준 전열함 한 척이 진수되었다. 이 배의 이름은 ‘뒤게 트루앵Dugay Trouin’이었다. 이 함은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했으나 다른 불운한 프랑스 전열함들과는 달리 그 대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뒤게 트루앵 함은 1805년 11월 3일, 통상파괴 임무를 위해 출항했다가 영국 프리깃함과 맞닥뜨려 교전, 함장이 전사하고 주돛대가 날아가는 피해를 입고서 나포당했다.

배의 선체 상태는 좋았고 프랑스의 74문급 표준 전열함들은 아주 훌륭한 조선기술의 표본으로 영국 해군으로서도 탐나는 전함들이었기에 이 배는 포츠머스 군항에서 개수되고 보강되었다. 그렇게 해서 ‘뒤게 트루앵’은 1807년, ‘임플라카블’로 개명되어 재 취역한다. 임플라카블은 발트해에서의 작전활동에 투입되었으며 1815년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퇴역, 예비함으로 돌려진다. 놀랍게도, 임플라카블은 ‘테메레르’나 ‘벨레로폰’ 같은 유명한 자매함들과는 달리 스크랩처리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1855년, ‘임플라카블’함은 약간의 개조를 거쳐 해군 생도들과 신병들을 위한 훈련함으로 취역되어 데본포트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해군의 학교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1908년에 이르면 그 구식의 범선 조종법은 필요가 없는 것으로 도태되었고 그해 해군성은 임플라카블을 함선 보유록에서 제적시키고 스크랩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 때 국왕 에드워드 7세가 개입해 그것을 막았고, 여기에 어느 백만장자가 자비를 들여 개장공사를 해준다. 그래서 임플라카블은 1932년에는 다시 한번 훈련함으로 포츠머스에 배치되었다. 1939년 전쟁이 터졌을 때, 임플라카블은 석탄 운반선으로 운용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임플라카블은 물 위에 떠 있는 최고最古의 군함이었다.

하지만 1947년, 해군성은 더 이상 이 고대의 유산을 계속 유지할 돈이 없다고 결정했다. 여론은 이 함을 이제와서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반발했으나 임플라카블함의 유지비에 대해서는 다들 입을 다물었다. 영국 정부는 그래서 임플라카블을 프랑스 정부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제의한다. 원래 프랑스의 전함이었으니 도로 가져가라는 거였으나 프랑스 정부는 이걸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린다.


그래서 1949년 12월 2일, HMS ‘임플라카블’은 포츠머스 군항을 떠나, 포츠머스 드라이독에 영구계류되어 있는 다른 유이한 트라팔가 참전 전함, HMS ‘빅토리Victory’ 앞을 지나, 유니온 잭과 삼색기를 동시에 계양한 채 바다로 견인되어 나갔다. 임플라카블의 저장고에는 4백톤 가량의 고철과 폭약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는 그 옆에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영국 국가 ‘갓 세이브 더 퀸’이 연주되었고, 음악이 끝나자 폭약을 점화, 배를 자침시키게 되었다.

하지만 폭약이 터졌는데도 임플라카블은 침몰하지 않았다. 현대의 철제 전함들과는 달리, 선체에 구멍이 났는데도 임플라카블은 끈질기게 물 위에 며칠이나 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해군성이 인부들을 보내어 그 용골들을 체계적으로 부수고 나서야 배는 물 속에 잠겼다.


[HMS Implacable, December 1949]




1945년 8월, 2차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난 순간 대영제국의 로열 네이비는 52척의 대형 항모들을 포함하는 9백여척의 군함들과 거의 9십만명에 달하는 장교들과 수병들로 구성된 엄청난 집단으로,영국 역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그리고 지브롤터, 수에즈, 싱가포르, 홍콩, 플리머스, 케이프타운, 아덴 등 전 세계에 그 해군의 기지와 주둔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게 한순간에 끝장났다. 식민지들이 떨어져나갔고, 탕진된 국고로는 차관 지불도 힘들었다. 그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핵심 전력과 가장 중요한 함대만은 유지할 여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철의 장막’과 동시에 NATO가 창립되었고 그것이 로열 네이비의 숨통을 끊어놨다. 전세계 바다를 호령하는 것은 이제 미국의 임무였고, 영국에게 주어진 임무는 바다가 아닌 유럽 평야에서 돌격해 들어올 수 있는 소련을 감시하고 상대하는 것이었다. 극동의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영국은 수만명의 육군을 투입했고 정치가들은 후에도 그런 일들이 빈번하리라 보았다. 영국은 이제 미국의 요구에 의해, NATO의 육전을 위한 대규모 육군을 유지해야 했고 해군’도’ 유지할 여력은 없었다.



HMS ‘임플라카블’의 자침은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의 유산마저도 유지할 수 없었던 영국 해군의 비참한 몰락이 어느 나락까지 떠러졌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고 몇년 안되었을 때 영국 해군.]

[임플라카블의 선수상]




마찬가지로, 비티 제독의 기함이었고 독일 제국의 대양함대 항복 서약식이 이뤄졌으며 왕가의 일원들을 실어나르기도 했던 HMS “퀸 엘리자베스Queen Elizabeth’도 1948년 스크랩처리되었고, ‘리노운Renown’, ‘비스마르크’를 격침시켰던 ‘로드니Rodney’와 ‘킹 죠지 5King George V’ 등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거대 전함들 모두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완성되어 혼자 남아 ‘영국 최후의 전함’으로서 복무하던 HMS ‘뱅가드Vanguard’도 오래 남아있지는 못했고, 1959년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예비함대에 있던 550척의 함선들이 모두 폐기, 해체, 매각 되었고, 1750명의 해군 장교들이 모두 ‘해고’당했다.

1945년에 거의 9십만에 달하던 해군 병력은 20년도 채 안되어 7만 5천명으로 줄어 있었다. 1950년에는 12척 남아있던 항모들이 1970년에 이르면 단 세 척 뿐이었다. 1956년에는 수에즈 해군기지가, 1967년에는 아덴 해군기지, 1971년에는 싱가포르 해군기지, 같은 해 바레인의 해군기지 모두 그곳의 식민지들 반환과 함께 사라졌다.

전함과 기지와 수병 뿐만 아니라, 전통마저도 해체되고 사라졌다.

1948년에는 나포한 적 전함에 대한 포상금 지급에 관한 5백년 전통의 해사법이 폐지되었고, 1950년에는 해군 장교들의 2세기 역사를 가진 의전예복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해군성과 3세기 동안 관계를 맺어온 그리니치 천문대의 마지막 통제권이 행정부의 과학기술부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1964년 3월 31일, 해군성이 사라졌다. 이제 해군성은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미국의 체제처럼 국방부 산하의 일개 부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2010년 현재. 영국 해군은 잠수함 하나 취역시키는데도 이걸 취역 하네 마네 하는 동안 벌벌 떨며 예산과 여론의 눈치를 봐야 한다.

덧글

  • 누군가의친구 2010/10/02 10:44 #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선박 설계면에서는 뛰어났지요. 영국은 개별 조선관들의 눈써림와 숙련도에 의존한 반면 프랑스는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관들을 육성하고 선박설계에 수학과 물리학 개념을 도입하여 나름대로 체계적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정책이 일관되지 못해서 승무원의 숙련도와 훈련량, 보급은 최악이었습니다. 트라팔카 해전의 승패 원인에는 이부분도 큰 영향을 미치지요.
    그러저나 임플라카블의 마지막 운명은 참 안습이군요. 그나마 빅토리함은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살아남았는데 말입니다.
  • 월광토끼 2010/10/03 11:06 #

    네 그렇습니다.
  • Allenait 2010/10/02 11:00 #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 해군이 참 비참한 위치에 놓였군요..
  • 공태훈 2010/10/02 11:01 #

    거대한 제국이나 조직의 침몰은 항상 가슴을 안타깝게 하는 뭔가가 있죠....

    그러고 보면 하늘아래 돈문제 아닌 것이 없는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겠지요...
  • 월광토끼 2010/10/03 11:10 #

    물론 모든게 돈문제 '만'인 것으로 결론짓는 것도 지양해야 하는 바겠습니다만.
  • gforce 2010/10/02 11:24 #

    그리고 RN은 포클랜드에서 개쪽을 보고도 아직 QE급을 질질 끌고 있는데(...)
  • 월광토끼 2010/10/03 11:08 #

    QE급 나와 굴러갈라면 일단 프랑크푸르트로 간 주식거래가 런던으로 돌아와야... ㅠㅠ
  • 터미베어 2010/10/02 11:41 #

    로열네이비의 몰락이랄까...뭐랄까....
  • 대도서관 2010/10/02 11:41 #

    아 진짜 안습하네요(...)
  • 모에시아 총독 2010/10/02 12:16 #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해군제국의 몰락이라는 주제가 참 가슴에 와 닿네요.
  • 초효 2010/10/02 12:42 #

    그래도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포클랜드 전쟁때 보여줬지요.
    세필드 등 최신 구축함들이 엑조제의 분사연료와 멍텅구리 폭탄에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 월광토끼 2010/10/03 11:14 #

    셰필드 포함해서 구축함 두 척과 호위함 두 척에 수송선 한 척까지 격침당하고, 그 외 네척이 대파되기까지 하고, 사실 수난 정도가 아니라

    세간에서 말하는 제국의 역습은 참으로 과장된 표현입니다... 영국 해군이 얼마나 힘든 상태까지 떨어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전쟁이고 말입니다.
  • 들꽃향기 2010/10/02 13:13 #

    나포했던 전함을 다시 돌려주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뭔가 심히 아슷흐랄 하군요 =_=;;;

    그나저나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에서, 프랑스의 전함이 동시대의 영국 전함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면이 있었다고 주장했었는데, 언급하신 임플리카블의 사례를 보니 와닿는 것 같습니다.
  • 월광토끼 2010/10/03 11:14 #

    네. 프랑스가 건함기술만 놓고 보면 18세기 내내 상당한 우위에 있었습니다.
  • ArchDuke 2010/10/02 13:16 #

    결국 돈......ㅠㅠ
  • 비참이 아니라 2010/10/02 13:56 # 삭제

    이건 뭐 완전
  • Cheese_fry 2010/10/02 15:35 #

    정말 귀중한 유산인데, 전쟁을 모두 겪으며 살아남은 배를 침몰시키다니. ;ㅁ;
    눙물이;;
  • asianote 2010/10/02 15:39 #

    로열 네이비의 영광도 돈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 .......... 2010/10/02 16:31 # 삭제

    HMS Implacable도 죽기를 거부했는지....Warspite처럼...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24553
  • 월광토끼 2010/10/03 11:15 #

    네, 워스파이트와 비슷한 느낌의 암담한 사례죠.
  • 대한민국 친위대 2010/10/02 17:24 #

    콧수염 하사관 덕분에 왕립해군이 몰락하는군요.... 역사가 오래된 군함을 폭파시킬 정도면 도대체;;;;
  • 조이 2010/10/02 20:19 # 삭제

    잘 읽었습니다. 정말 우울한 결말이네요.....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예산. 즉 돈!!
  • 월광토끼 2010/10/03 11:16 #

    물론 이 경우는 예산 이전에 그 예산 분배의 원인이 된 '냉전'과 그 역할분담이라는 것이 근본적 문제겠습니다만
  • 행인1 2010/10/02 21:05 #

    임플라카블의 침몰은 그저 그런 에피소드가 아니라 영국 해군의 몰락을 상징하는듯 하네요. 영국 해군은 60년대 이후에도 축소에 축소를 거듭해 70년대에는 하나 있던 정규항모 아크로열까지 없애고 해리어 탑재 '경항모'로 가야하는 지경이 이르죠.
  • 월광토끼 2010/10/03 11:17 #

    지금도 퀸 엘리자베스급 항모 보유 계획도 제대로 진행 못시키는 형편
  • 배둘레햄 2010/10/03 02:00 #

    아...눙물이...ㅠㅠ
  • 동쪽나무 2010/10/03 22:03 # 삭제

    칼보다 강한것은 펜이 아니라 돈입니다
  • 함부르거 2010/10/04 01:18 #

    돈이 없으면 품위도 지킬 수 없는 것이 세상이라지만 이런 건 좀 서글프죠...
  • 냉동만두 2010/10/05 12:45 # 삭제

    당시엔 필요가 있어서 만들어졌던 집단인 NATO가 결과적으론 미국의 독주를 막을 다른 경쟁자를 완전히 배재해버린 격이군요. 전 유럽이 공산화되는거보다야 낫긴 하지만..

    헌데 트라팔가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전열함이 통상파괴를 나가고, 프리깃에게 나포당한거랍니까..
  • 후추 2011/10/06 02:31 # 삭제

    제국의 해는 비록 저물었으나 부디 연방은 오래가시길...

    그래도 HMS Astute는 매우 강력한 공격 원잠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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