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 19 (1809~1814) : 니브와 오르테즈

전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면 "제 18편 - 니브유와 니브"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12월 10일 아침, 술트 원수 휘하 베르트랑 클로젤 중장과 샤를르 라이유 중장이 이끄는 총 8개 사단이 영국-연합군 전열 좌익으로 밀려 들어왔을 때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영국-연합군은 그야말로 기습을 당했다. 니브 강 동쪽까지 진출한 로울란드 힐 중장의 부대와 아직 강을 건너지 않고 있던 존 호프 중장의 부대, 그리고 후방에 있던 웰링턴의 본대가 각각 분산되어 있어 프랑스군에게는 큰 기회, 영국군에게는 큰 위기였다. 카알 알텐 공 지휘하의 경보병 사단만큼은 그 전날 밤 네이피어 소령의 정확한 판단으로 미리 발령된 경비태세 덕분에 쉽게 집결해 참전할 수 있었으나, 호프 중장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그 전날 웰링턴 원수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방어진지를 마련해 놓지 못한 상태였다. 호프 중장은 술트가 수세적 입장에 머물러 있을 거라는 확신이 지나쳤던 나머지 휘하 병력의 3할을 전선에서 물려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는 지시까지 내려놨었고, 호프의 부대는 라이유가 이끄는 프랑스군 선봉 2개 사단의 공격에 무너져 주요 거점을 내주며 후퇴해야 했다.

[존 호프John Hope 중장]


다만 이 와중에 4천명 규모에 불과했던 경보병 사단은 클로젤 휘하 프랑스군의 맹공을 격퇴하고 방어거점이었던 아르캉게 성당을 굳건히 지켰다. 경보병 사단 소속이었던 벨 중령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The Light Infantry and Rifles liked the tombstones- they said they were a steady rest for a pot shot and a good shield."(경보병 사단과 라이플 연대들은 [교회 뒷뜰의] 묘비들을 좋아했다. 그들은 그 묘비들이 좋은 사격 받침대이자 총알막이라고 했다.)

그러나 라이유의 공세도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저지 당했다. 공세에 참가한 8개 사단 중 절반은 충분히 휴식을 취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며칠 전 산발적인 교전과 긴 전술기동의 결과로 피로에 쩔어있는 부대들이였던 탓도 있었기에 영국군의 2개 사단과 경보병 사단을 압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웰링턴이 급파한 예비 부대가 주요 교전 지대에 투입되면서 결국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영국군 지휘하의 포르투갈 사단이 최전선으로 나서 대단히 용맹스럽게 싸우며 위치를 지켰고 덕분에 호프의 부대가 퇴각하는 와중에도 연합군의 전선은 유지될 수 있었다. 결국, 10일 초저녁 즈음에 술트가 공격명령을 취소함으로써 그 날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 날의 전투에서 양측은 각각 1천 6백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비등한 피해를 입었는데, 프랑스군 쪽에서는 그날밤 한가지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프랑스군 휘하 3개 독일 나싸우 공국 대대가 11월의 라이프치히 전투의 결과를 듣고 당장 변절한 나싸우 대공의 밀명을 듣고 집단 탈영을 감행하여, 2개 대대가 모조리 영국군에게 항복하였으며 1개 대대는 탈주 직전에 붙잡혀 무장해제 후 해산 당함으로써 1천 5백여명의 가용병력 추가 손실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인 11일에는 술트가 다시 호프의 관할 지역에 공격을 가했으나 양측이 명확한 교전 의사가 없었기에 산발적인 소규모 교전들에 국한되었고, 12일에는 주로 야포를 통한 포격전이 주가 되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13일에 재개되었다. 12일 밤 비가 쏟아져 임시가교가 끊겨, 힐 중장 휘하 병력 1만 4천여명이 니브 강 동쪽 '생 피에르'에 고립된 상태였고 술트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보아 호프가 아닌 힐의 부대로 주공을 가했다. 이 공격은 충분히 위력적이어 영국군 측에서 패닉한 대대장이 휘하 대대에게 전면 후퇴 명령을 내려 전선이탈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힐 중장의 1만 4천을 두들기는 술트의 병력은 3만 5천이었다. 그러나 힐 중장은 여기서 용병술의 재능을 보여주며 분투했고 휘하 병력을 적절히 운용했다.


[로울란드 힐Rowland Hill 중장]



평소 매우 신사적이고 점잖던 힐 중장이 평생 두번째로 욕설을 내뱉으며 부하들을 독려하는 이례적인 모습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영국군은 매서운 공격을 잘 버텨내었다. 힐은 방어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매서운 역공을 감행하였고고 이에 프랑스군 1개 사단이 완전히 전열을 무너뜨리고 패주하기도 했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 힐을 만난 웰링턴은 힐에게 "Hill, the day's your own." (힐, 오늘은 자네의 날일세)라고 치하했을 정도였다. 오후가 되자 쓸려 내려갔던 가교가 다시 재건설되어 웰링턴의 후속 병력들이 힐을 도우러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에 프랑스군은 공격 명령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술트는 전투를 포기하고 요새도시 바욘느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니브 전투Battle of Nive는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근 닷새에 걸쳐 벌어졌음에도 별 소득은 없이 끝났다. 영국-연합군 측은 1천 8백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프랑스군은 3천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뿐만 아니라 나싸우 연대의 예를 보아서도 더 이상 독일 동맹국 부대들은 신용할 수 없다는 인식에 의해 프랑스군 휘하 독일군 3천여명이 전투 후 해산되어, 병력 확보가 절실한 프랑스군에 큰 타격이 되었다. 술트는 비록 기회를 잘 포착했고 전투 구상을 잘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 지휘를 매끄럽게 하지 못해 기회를 놓쳤다. 그 동안 웰링턴은 다른 때와는 달리 전장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휘하 장군들에게 전투를 맡겼기 때문에 웰링턴이 니브 전투를 지휘했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이 때문인지 세월이 흐른 후 니브 전투에 대해 묻는 이에게 웰링턴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I will tell you the difference between Soult and me: when he gets into a difficulty, his troops don't get him out of it; mine always do."(술트와 나의 차이점에 대해 말해 보자면,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 그 부하들은 그를 구해주지 못하지만,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내 부하들은 언제나 날 구해준다는 점일세.)


니브 전투는 공격자와 방어자 양자에 별 성과가 없었는데, 12월 중순부터 한달간 내내 폭우가 쏟아졌고 그로인해 도로 사정이 엉망이 되면서 그 후 2월까지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술트의 병력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거의 1만명에 달하는 부대를 나폴레옹이 프랑스 동부 방어전을 휘해 더 차출해갔기 때문으로, 그에게 가용 야전 병력은 4만명에 불과했다. 반면 웰링턴에게는 바욘느와 주변 요새들을 공략할 3만명을 제하고도 5만명의 야전군이 있었다.

영국군을 몰아내려는 시도가 니브 전투에서 실패한 후로, 술트는 목적을 바꿔 이제는 영국군을 프랑스 최 남서부에 국한시키기라도 하려했다. 그 최종 방어선은 아두르 강과 아두르 강변의 요새도시 바욘느였다. 그러나 아두르 방어선 조차 오래 지켜지지 못했다. 비가 그치고 땅이 다시 굳자 웰링턴은 공세를 재개했고, 2월 14일 연합군 전 병력이 다시 동진을 시작했다. 로울란드 힐의 부대가 가장 먼저 진격해 교두보를 확보했고 2월 24일에는 존 호프의 부대는 바욘느의 성벽 앞까지 진출해 요새도시와 그 주둔 병력을 고립시키고 포위했다. 그동안 술트의 프랑스군 본대는 오르테즈로 후퇴해야 했다. 술트는 오르테즈에서 다시 한번 결전을 치르기로 결정하고 방어태세를 가다듬었는데, 그 휘하에는 이제 3만 6천명의 병력과 48문의 야포가 있었다. 반면 웰링턴에게는 4만 4천명의 병력(2만 7천명의 영국군과 1만 7천명의 포르투갈군)과 54문의 야포가 있었고, 숫자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서 있었다. 그렇게 1814년 2월 27일 아침 오르테즈 전투Battle of Orthez가 웰링턴 휘하 베레스포드 장군의 3개 사단의 공격과 함깨 개시되었다.





공격은 프랑스군 진영의 우익과 중앙 두 지점에 각각 베레스포드와 픽튼에 의해 가해졌다. 영국군의 초반 공격은 잠깐의 승세를 타다가 다시 라이유 중장이 지휘하는 역공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모습을 보던 웰링턴은 작전계획을 수정해 견제기동을 명령했던 사단들에게 전면공세를 명하며, 경보병 사단을 프랑스군 전선 우익과 중앙 사이 지점에 배치했다. 이 경보병 사단의 공격이 프랑스군 전열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고, 그 동안 전장을 우회해 접근하던 힐 휘하 2개 사단이 프랑스군 좌익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군 야포로부터의 산탄 포격에 의해 파편이 웰링턴 원수가 맞아 낙마했으나, (다행히도) 파편이 검신에 튕겨나가 부상은 약간 심한 찰과상에 그칠 수 있었다. 술트는 자신의 전선이 붕괴할 위험에 처하자 전면 후퇴를 명령했고 다행히 적절한 시점에서 잘 수행된 덕분에 프랑스군은 질서있게, 더 큰 피해 없이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이를 추격하던 영국군 기병대도 전장의 열악한 지면 상태 때문에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며 약 2백여명의 포로를 잡는데 그쳤다.

오르테즈에서의 인명피해는 니브 전투 때보다도 더욱 커서, 영국군은 2천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군은 2천 6백명의 사상자를 입고 1천 4백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나마 야포 손실만큼은 6문에 그쳤다. 사실 오르테즈에서 프랑스군의 진영은 그다지 방어에 유리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술트는 전투를 무릅쓰는 대신 차라리 더 효과적인 방어거점까지 후퇴했어야 했을 수도 있다. 피레네 산맥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 때부터 프랑스군은 조금씩 조금씩 영국군에게 땅을 내주며 조금씩 후퇴를 거듭해야 했고, 오르테즈 전투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을 뿐이여서, 프랑스군은 이제 방어선을 아두르 강보다도 훨씬 더 동북쪽까지 물려야 했다. 그나마 웰링턴에게 파죽지세의 진공이나 결정적 승리를 허용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싸움을 지속했다는 부분에서 술트는 칭찬받을만 하다. 그러나 그것도 곧 오래가지 못할 터였다.

3월 달에는 술트의 후퇴와 영국군의 추격이 계속되었다. 3월 2일에는 힐 중장이 이끄는 선봉부대가 술트의 후위를 따라잡아 격한 교전이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3백여명의 피해를 입음과 동시에 주요 병기창들을 그 안의 물자와 더불어 방기한채 퇴각해야 했다. 3월 12일에는 보르도가 영국군에게 항복했고, 그곳의 왕정복고파들이 영국군을 열렬히 환영하며 보나파르티스트들을 투옥하며 영국군에 협조한 덕분에 보르도와 인근 지역이 게릴라 준동의 위험없이 확실히 장악되었다. 프랑스군의 후퇴가 계속되는 가운데 3월 19일에 또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고, 20일에는 영국군 제 13 용기병 연대 소속 2개 전대가 두배가 넘는 규모의 프랑스군 경기병대를 격파하는 교전도 있었다. 이 20일에는 타르베Tarbes에서 경보병 사단의 라이플 연대가 수백명 규모의 작지만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트의 주력은 결국 3월 31일, 후퇴 목적지인 툴루즈에 세를 유지한채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 툴루즈의 시가지에서, 반도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본 연재기획 전체로 통하는 링크: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ps.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프랑스 남부를 계속 방어하려 했던 술트를 기리는 기념비는 있다.
바로 그 바욘느 시에 있는 어느 도로의 이름이다.

[술트 원수의 길]

덧글

  • hyjoon 2010/11/01 10:46 #

    오랜만에 올라온 반도전역 기획물이군요. 잘 읽고 갑니다. (^^)
  • Montcalm 2010/11/01 11:15 #

    승산없는 상황에서의 지연전만큼 고역이 없읍죠 .. 술트도 참 어떻게 보면 불쌍하군요 물론 반도전역 말아먹은 책임중 일부는 술트에게도 있습니다만 . ;
  • 행인1 2010/11/01 12:51 #

    12월 초의 공격은 술트에게는 참 좋은 기회였는데 상황이 안 따라주는군요.
  • Allenait 2010/11/01 20:27 #

    하마터면 웰링턴이 끝장날 뻔 했군요.. 술트는 참 운이 없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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