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치른 반도전쟁 - 20 : 툴루즈 전투


위 사진은 1814년 4월 26일 화요일, '런던 가제트London Gazette' (영국 정부의 공식 기관지)에 실린 영국 육군성의 공표다. 그 내용은 그날 반도 원정군 소속 윌리엄 러셀 소령이 프랑스로부터 가지고 온 웰링턴 후작의 보고서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1814년 4월 12일 툴루즈. 소관은 지난 밤 적이 소개한 툴루즈에 오늘 아침 입성하였다는 소식을 공께 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1814년 3월 30일. 프랑스 제국의 수도 파리는 연합군에게 포위되었고 짧은 전투 후 점령되었다. 파리 방어전에서 패배한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결국 4월 6일, 연합군 사령부에 무조건적인 항복과 자진 퇴위 의사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소식이 프랑스 남부까지 전달되는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고, 그저 통신 수단이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은 항복했고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도 군인들은 며칠 더 피를 흘려야 했다. 그래서 4월 10일 부활절 일요일, 프랑스군 3천 2백여명과 영-서-포 연합군 4천 6백여명의 피가 프랑스 남부의 유서깊은 도시 툴루즈에 뿌려졌다.


2월 27일 오르테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니꼴라 술트 원수와 그 휘하 프랑스군에게 남은 희망은 오직 하나뿐, 바로 스페인에서 빠져나와 북상중이던, 스셰 원수가 이끄는 카탈로니아 주둔군이 툴루즈까지 달려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셰의 북진은 지체되었고, 결국 4월 8일에 툴루즈의 성벽 망루에서 관측되었던 것은, 웰링턴 후작이자 육군 원수 아서 웰즐리 휘하 영국-포르투갈-스페인 연합군 5만명이 도시를 포위하는 모습이었다. 웰링턴도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을 스셰의 카탈로니아 주둔군의 존재를 의식하여 공격을 서둘렀다.

툴루즈 시를 지키는 것은 4만 2천명의 프랑스군이였고, 이들을 지휘하는 술트는 면밀하게 방어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도시의 서쪽과 한가운데를 지나는 가론느 강과 도시 외곽부는 강 그자체가 중요한 천연 방어물이었고, 술트는 이 강에 의지해, 북쪽과 동쪽을 빙 두르는 랑그도크 운하를 기점으로 방어를 집중했다. 랑그도크 운하 너머 동쪽에 위치한 카비네 언덕에도 방어 병력이 집중되어 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했다. 웰링턴은 이러한 방어태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가지 양동 작전과 전 전선에 걸친 동시다발적 공격을 계획했다.

[La Bataille de Toulouse, Avril 10, 1814]


4월 10일 오전 5시, 웰링턴은 공격 개시를 명령한다. 로울란드 힐 중장이 이끄는 병력이 툴루즈 서쪽의 생 시프리엉 방면으로 지원 포격 아래 접근하여 적의 주의를 끈 다음, 토머스 픽튼 소장이 이끄는 제 3 사단이 도시 북쪽에서 양동작전을 펴는 동안, 윌리엄 베레스포드 중장 지휘 하의 제 4 사단과 제 6 사단이 주공을 맡아, 적이 양동작전으로 분산된 틈을 타 동쪽으로부터 진격하고, 이를 스페인 사단이 지원하여 랑그도크 운하까지 돌파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오전 6시 30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전은 여러가지 혼선이 빚어지면서 난전으로 변하는데, 공격시늉만 맡기로 되어 있었던 픽튼이 명령을 무시하고 3사단 전체를 전면 공세에 투입한 것과, 주공인 베레스포드 부대가 험한 진창과 늪지대를 통과하면서 공격이 심각하게 지체된 탓이였다. 그동안 힐의 부대가 포격까지 해가며 벌인 양동작전에 술트는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술트는 공격이 지체되는 동쪽에 연합군의 공세가 집중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힐의 병력이동을 신경쓰지 않았으며, 북쪽은 굳건한 도시 방벽으로 잘 방어되어 픽튼의 공격은 금새 격퇴되었다. 픽튼의 제 3 사단이 큰 피해 (4백여명)를 입고 물러나는 동안 마누엘 프레이르 소장이 이끄는 스페인 사단은 베레스포드의 지체된 주력이 이미 도착해있다고 잘못 판단, 공격을 가하였고 이들 또한 격퇴되었다. 스페인 사단은 찰스 알텐 소장이 지휘하는 경보병 사단의 엄호 사격 덕분에 병력을 재규합해 다시 재돌격을 가했으나, 베레스포드가 아직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패퇴했다.

[랑그도크 운하를 가운데 둔 영국군과 프랑스군간의 치열한 교전.]


[그 위치의 현재 모습.]



베레스포드의 주력이 제대로 카비네 고지에 공격을 가한건 오전 11시나 되어서였는데, 프랑스군은 이를 용맹하게 막아내어 이 공격도 실패했다. 오후 2시에 다시 전면 공세가 가해졌고, 그제서야 연합군은 고지를 장악하고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이에 오후 5시 경, 술트는 도시 밖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 전부를 툴루즈 안으로 후퇴시켰다.


툴루즈 전투는 거의 12시간 동안 이어진 격전이었다. 그러나 소요 시간과 병력 사상률에 비하면 승자가 명확하지 않은 전투이기도 했다. 프랑스군은 거점을 잃고 물러났으나, 툴루즈 시 자체는 아직도 굳건히 방비되고 있었으며, 연합군은 큰 피해(4천 6백여명)를 입은 상태였다. 사태는 4월 11일, 산발적 교전이 있은 후 프랑스군의 탈출로인 툴루즈 남쪽 대로에 연합군 기병대가 출몰하면서 급반전한다. 도시 안에 갇혀 수성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움직이며 스셰의 카탈로니아 방면군과 합류하는 가능성을 더 높이 친 술트는 더 지체하지 않고 그날 밤, 퇴로가 막히기 전에 전 병력을 툴루즈에서 빼내어 남쪽으로 움직였다.




웰링턴의 연합군은 바로 다음 날인 4월 12일 화요일 아침에 텅 빈 툴루즈에 입성, 도시를 점령한다. 툴루즈의 민간인 악단은 진주해 들어오는 점령군 앞에서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을 우렁차게 연주했다고 한다. 웰링턴과 술트 양측이 나폴레옹의 자진 퇴위 소식을 접한 건 그 날 저녁의 일이었다. 웰링턴은 이에 술트의 사령부에 전령을 보내, 휴전 협정을 제의했다. 술트는 퇴위 소식의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항복은 거부했으나, 휴전에는 동의했다.

툴루즈 전투는 엄밀히 말하자면 최후의 전투는 아니었다. 툴루즈 북서쪽의 군사도시 바욘느의 공성전은 계속되고 있었고, 4월 14일 밤에는 수비군 사령관 투브노 소장이 포위망을 뚫고자 영국군에 기습 공격을 가하여, 양측이 각자 8백여명의 사상자가 난 무익한 전투가 있었다. 이것이 정말 최후의 전투였다.

술트가 나폴레옹의 퇴위 소식이 진짜임을 확인하고 항복한 것은 4월 17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때까지 술트의 휘하에 남아 있던 것은 3만 6천여명의 병력이었고, 이들이 전쟁 최후로 항복한 프랑스 야전군이었다. 술트는 그와 동시에 그때까지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바욘느의 투브노 소장에게 연락하여 항복을 지시했고, 투브노 소장은 4월 26일 백기를 든다. 그렇게 반도 전쟁은 끝이 났다. 1808년 5월 2일, 스페인을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군에게 마드리드 시민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거대 전국 속 또다른 주요 전쟁이 딱 6년만에, 수십만명의 인명피해 끝에 종결된 것이다.


1813년 후반과 1814년 전반부에 걸쳐 진행된 반도전쟁의 막장은 당시 많은 이들의 기대와 오늘날의 인식과는 달리 동부전선 스타일의 대회전 (ex- Leipzig)을 통한 속전속결로 끝나지 않았다. 이 6개월여간이 니꼴라 술트 원수가 그의 군력 중 능력을 최대로 발휘한 시간이였고, 1813년 6월 21일의 비토리아 전투라는 결정적 전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동부전선은 나폴레옹이 서부에서 끝없이 밀리는 와중에도 계속 유지되었다는 점은 이를 잘 시사해 준다. 심지어 최후의 야전인 툴루즈 전투에서조차 프랑스군은 패배하지 않았고, 웰링턴은 본국에 보내는 그 날의 보고서에 "I cannot sufficiently applaud the ability and conduet of Marshal Sult." (본관이 이 날 술트 원수의 능력과 활약에 표하는 찬사는 어떻게 해도 충분치 못할 것입니다. - 웰링턴은 술트의 스펠링을 잘못 썼다.) 라고 썼을 정도였고, 툴루즈에서 퇴각하면서까지 술트는 예하 병력을 단위부대로써 계속 유지시켰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술트의 끈질긴 저항을 계속해서 돌파해내며 프랑스 깊숙히 몰아붙인 웰링턴의 업적 또한, 반도전쟁 전반과 중반에서의 그의 빛나는 승리들에 못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툴루즈에 세워져 있는 툴르즈 전투 기념비]




-그 웰링턴의 보고가 담긴 것은 The London Gazette Issue 16889 published on the 26 April 1814.


-본 기획 마지막 글 - 완결편은 제 21화가 되겠습니다. 그것도 곧 써내려 갈 예정입니다.



본 연재기획 전체로 통하는 링크
http://kalnaf.egloos.com/tag/PeninsularWar

덧글

  • ghistory 2010/12/12 20:55 #

    영국 전쟁성→영국 육군부(해군부는 별개로 존재했음).
  • 월광토끼 2010/12/15 10:06 #

    War Department를 직역했을 뿐이지만 육군성이라고 하는게 나았을려나요.

    해군성 Admiralty 이 70년대까지만 해도 다른 부서들과 동등한 등급과 권한을 지닌 Ministry였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 행인1 2010/12/12 21:23 #

    저 당시 파리의 소식이 툴루즈까지 전달되는데 12일이 넘게 걸렸군요. 어쩌면 난리통에 통신체계가 제대로 동작을 못했던건지도...
  • 월광토끼 2010/12/15 10:07 #

    그랬을 수도 있고 연락을 전달할 정신도 없었을 수 있겠지요..
  • Allenait 2010/12/12 21:35 #

    파리에서 툴루즈까지 열흘 넘게 걸렸다라.. 그만큼 난리통이어서 그랬던 걸까요
  • 월광토끼 2010/12/15 10:07 #

    프랑스 본토가 전장이 되어있다는게 보통 난리는 아니지요.
  • 엽기당주 2010/12/12 21:51 #

    끝까지 부대의 편제와 작전능력을 유지하면서 종전을 맞는걸 보니 역시 술트도 명장은 명장이군요.
  • 월광토끼 2010/12/15 10:08 #

    야전 사령관으로는 충분히 능력이 있었다는 거지요
  • 크핫군 2010/12/12 23:32 #

    ???? ,다리 그림 구조가 비슷한데요???
  • 크핫군 2010/12/12 23:32 #

    랑드도크운하, 그림이 비슷하네요;;;
  • 월광토끼 2010/12/15 10:09 #

    네 그렇습니다. 위는 하이랜더 연대, 아래는 경보병 연대지만 둘이 같은 구도죠.

    정확히 말하자면 하이랜더 판이 아래 그림을 소위 '트레이싱' 한 겁니다.
    트레이싱의 역사도 꽤나 오래되었지요 ㅎㅎ
  • hyjoon 2010/12/12 23:44 #

    술트도 범장 이상이긴 했지만, 상대가.......ㄷㄷㄷ.....;;;
  • 월광토끼 2010/12/15 10:09 #

    병력면에서도 열세였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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