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의 영국 총리 재임기(1828~1830)의 분석.

[Lord Arthur Wellesley, the Duke of Wellington, 1769~1852]


“이것 정말 기이한 일이군. 난 분명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그들은 그에 대해 토론을 하고 싶어했어.”
(An extraordinary affair. I gave them their orders and they wanted to stay and discuss them.)[1]

이것이 1828년 1월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의, 그가 영국의 총리Prime Minister 직을 수락하고나서 열린 최초의 내각 회의에 대한 소감이었다. 이에 대한 내각 구성원들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그들 대부분은 적어도 총리가 대단히 권위주의적이라는 것 하나는 동의할 수 있었다.”(Most of them were at least in agreement that the Prime Minister himself was ‘domineering’)[2] 국왕 죠지 4세의 반응은 대단히 호의적인 편이었으나, 그 국왕도 나중에는 이렇게 소리지르게 되었다. “아서왕이 지옥으로 가거나 죠지왕이 하노버로 가거나 둘 중 하나겠어!”(Either King Arthur must go to the Devil or King George to Hanover)[3]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웰링턴의 총리 재임기는 시작부터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총리 취임 2년 후에는 성난 군중들이 “우리는 더 이상 영웅 따위 필요없다!We need no more heroes!”며 공작의 거처인 앱슬리 저택에 돌을 던지는데까지 이른다. “영국 총리 열전”에서 그래험 워커 교수는 “그(웰링턴)는 그의 짧고도 인기 없었던 총리 재임기 ‘덕분’이 아니라, 재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적 영웅으로 남아있다”(despite, rather than because of) 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을 정도이다.[4]

웰링턴 공작은 그야말로 뼛속까지 군인인 인물이었고, 그의 정치적 감각은 기대에 못미치는 수준이었으며 그의 극보수적인 정책들과 반민주주의적 성향은 여러가지 논란과 ‘국론 분열’을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링턴이 2년의 총리직 재임 기간 동안 이룬 업적은 비록 그의 전장에서의 군사적 업적들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분명 특기할만한 것이고, 그의 리더쉽이 향후 정세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웰링턴 공작이 워털루 전투 종결 이후 프랑스 점령 연합군 총사령관 직에서 물러나고 처음 맡은 공직은 1819년 리버풀 백작 내각에서의 군수성 장관(Master-General of Ordnance)직이었다. 이는 전후 경제위기 상황에서 대중적 인기가 큰 웰링턴의 이름이 내각에 포함되는 것이 정부 지지율에 이로울 것이라 판단한 리버풀 백작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리버풀 정권은 이후 캐닝파와 반 캐닝파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몰락했으며, 그 기간동안 웰링턴은 토리당 내에서 반(反) 캐닝파의 거두로 떠올랐다. (캐닝파Canningites: 정권을 잡고있던 토리당 내부에서 죠지 캐닝의 지도 아래 나타난 내부 당파였던 자유무역주의/카톨릭옹호 세력) 그리고는 리버풀 백작 사임 후 총리직을 수행한 캐닝이 급사하고난 뒤 집권한 캐닝파의 고데릭자작이 지지를 결집하는데 실패한 상태에서, 1828년 1월 사임한 고데릭의 후임 후보 중 국왕 죠지 4세가 가장 큰 호감을 보인 정치적 거물은 웰링턴이 유일했다. 그렇게 아서 웰즐리는 1828년 1월 22일, 총리직 제의를 수락하고 취임하게 된다.

[죠지 캐닝. 그는 1827년 급사했지만 그가 만든 정치 세력은 그 후임자의 발목을 잡았다.]


이 신임 총리 웰링턴 공작이 정치에 대해 갖고 있던 사상들은 어떠하였는가. 웰링턴이 반 캐닝파의 거두로 떠오르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그가 캐닝파의 정책기조를 극렬 반대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곧 ‘토리당 내부의 휘그들’이라 불리우던 캐닝파의 [민주주의 추구/의회 체제 개혁/카톨릭 인권 신장]에 대한 큰 적대감을 뜻했다. 그는 특히나 ‘민중’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하원의원 선출선거 방식에서 일반 대중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일반 시민들을 위험한 존재로 봤는데, “약탈욕은 사방에 만연해 있으며, 하층으로 갈수록 약탈욕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plunder is everywhere, and the lower we go, the stronger we find the desire to plunder)가 그의 논지였다. [5] 웰링턴은 또한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와 권력집중을 중요시 했고, 대단히 권위주의적이었으며, 비판을 용납하지 못했으며, 카톨릭에 대해서도 적대적으로, 영국 국교회의 정부 장악 필요성을 강하게 강조하곤 했다.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으나 골수 영국 귀족이었고 강압적인 아일랜드 통치를 지지했다. 그의 아일랜드 출생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에게 그는 “사람이 마굿간에서 태어났다고 말이 되는건 아니다”는 비유로 대답하곤 했다.

이런 웰링턴이 총리 취임 직후 구성한 내각은 상당히 기묘한 조합의, 그리고 그의 개인 성향에 비추어볼 때 제대로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한 집단이었다. 그는 반 캐닝파임에도 토리당의 분열을 다시 봉합한다는 취지로, 다시 말해 초기 리버풀 정권의 재창출 격의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캐닝파의 주요인물들을 내각에 기용했다. 그래서 캐닝파의 지도자격이던 윌리엄 허스키슨이 전쟁과 식민지 장관(Secretary for War and Colonies)* 에 취임하고, 그외 주요 캐닝파 멤버들인 팔머스톤 자작이 육군성 장관(Secretary At War)에, 더들리 백작이 외무성 장관(Foreign Secretary)에, 그리고 찰스 그랜트가 상공 장관(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에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정치적 성향과 정책 방향등에 있어 서로 상극에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내각을 이루게 되었고, 이들은 뭐 하나 의견일치를 보는 일이 없었다. 웰링턴은 캐닝파 장관들 이외의 인물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우호적이었던 국무장관 로버트 필과의 관계도 불안한 것이었다. 초기 웰링턴 정권은 내정 문제는 물론이고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부조화와 잡음이 끊이지 않아, 이에 대한 팔머스턴 자작의 표현에 따르자면 “토론하고 논쟁하기 위해 만나서 결정은 내리지 않은채 헤어진다” (The Cabinet is meeting to debate and dispute and separating without deciding)고 까지 말할 지경이었다. [6]

*(번역이 대단히 애매한데, 육군의 전략과 인도 이외의 식민지 관할을 동시에 담당했다. 1854년에야 두 부서가 둘로 나뉘었다. 아래의 육군성 장관은 순수히 육군 조직과 유지에만 관여했다. 직역하면 대충 상업 진흥위원장 정도 될 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는 국가 예산을 담당하는 재무성 장관Lord Treasurer과는 별도로 상업과 산업등 경제를 관리했는데 시대가 지날수록 계속해서 명칭이 바뀌었고, 오늘날에는 경영혁신기술성 장관Secretary of Business, Innovation, and Skills이라는 긴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러한 내각을 구성하면서 웰링턴이 단 한명의 친인척이나 지인도 기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웰링턴 취임과 동시에 내각에 자리를 얻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그의 형제들과(리쳐드 웰즐리와 윌리엄 웰즐리), 그리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찰스 아버스놋 모두 대단히 실망하며 그에게 불평을 토로했다. 엘든 백작같은 토리 당의 주요 지도자들도 내각에 포함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졌다. 내각 구성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과의 친분이나 인연을 가지고 군대나 공직에서의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주길 바라는 사람들의 부탁이나 선물들을 매몰차게, 가끔은 대단히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며 내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도덕적으로는 올바를지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특히 정부의 수반으로서는 상당히 유연성이 결여된, 그다지 유리하지는 않은 자질이였다. 충돌이 계속되자 1828년 5월 상공 장관 찰스 그랜트가 취임 4개월만에 사임했고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윌리엄 허스키슨이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 총리는 이를 반려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부에서 캐닝파 인물들 모두가 사직해버렸다.

웰링턴은 저항이나 불만, 또는 그외 잡음들과는 상관없이 모든 일을 군대식으로, 원하는 바대로 행해버리는 총리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사 표명을 하급자의 명령 불복종이자 자신에 대한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었고, 이러한 태도에 분노하는 자들을 달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협상에 재능이 없었고 뉘앙스를 조절해 반대자들을 납득시키는 정치적 유연성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이 기껏 정권에 참여시켰던 캐닝파들을 모두 떠나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1828년 5월 이후 떠나간 캐닝파 임원들의 자리를 소위 ‘울트라-토리’라고 불리우는 극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채웠고, 휘그당 측은 웰링턴의 정책기조에 비추어 이를 ‘위험할 정도로 권위주의적’이라고, 심지어는 ‘군사독재’라고까지 비난했을 정도였다. [7] 이러한 의심은 국무장관 로버트 필이 1829년 입안한 도시 치안 유지대, 다시 말해 경찰 창설안이 총리의 적극적 지원아래 통과되었을 때 더욱 증폭되었다.

[1830년대의 런던 시경 'Bobbies']


그럼에도 이 경찰의 창설은 현대 시점에서 볼 때 웰링턴의 큰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었다. 법치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웰링턴은 거대도시가 되어가는 런던의 치안을 유지할, 육군과는 별도의 공권력을 투입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고, 로버트 필이 하원에서 해당 안건을 통과시키고 나자 이를 상원에서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렇게 해서 영국 최초의 정식 경찰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입안자 로버트 필Robert Peel의 이름을 따서 흔히 ‘필러즈Peelers’ 또는 ‘바비즈Bobbies’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런던 시경은 ‘바비즈’라고 불리운다. 비록 이렇게 입안자의 이름만 남았지만, 1829년 이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직된 치안조직의 탄생 배경에 총리 웰링턴 본인의 지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법치주의와 치안유지에 대한 신념은 민중에 대한 비동조적 시선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였고, 그를 일반 시민들의 요구나 바램을 억누르기만 하고 철저히 무시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가 ‘카톨릭 해방Catholic Emancipation’ 문제를 해결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카톨릭 해방은 웰링턴 집권 기간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었다. 명예혁명과 그로 인한 제임스 2세 폐위를 기점으로 영국에서는 법적으로 카톨릭 교도는 하원 선거에 나서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공직에도 진출할 수 없었다. 이는 전통적인 반 카톨릭적 기조 뿐 아니라 교황이 윌리엄 왕과 매리 여왕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은 탓이기도 했는데, 이는 이후 교황이 하노버 왕조를 영국의 적법한 왕조로 인정함으로서 해결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도의 권리들은 계속해서 제한되는 상태였다. 이는 카톨릭 교도가 전체 인구의 85%를 훌쩍 넘는 아일랜드에 있어서 대단히 큰 문제였는데, 1823년에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의 카톨릭 해방주의자 다니엘 오’코넬이 ‘카톨릭 협회Catholic Association’를 설립하고 카톨릭 권리 확보운동을 펼치면서 법안 개정 요구가 현실화되었다.

[아일랜드 카톨릭 해방주의자 다니엘 오코넬]


토리 정권에서는 카톨릭 문제에 대한 타협을 거부했고 해가 갈수록 아일랜드인들의 불만도 커져서 아일랜드의 치안 유지가 점점 불가능해져갔다. 1828년 7월에는 다니엘 오코넬이 아예 아일랜드의 클레어 선거구에 하원의원 후보로 나서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당선되었고, 그가 카톨릭 권리 제한 법안에 따라 하원 의석에 착석하는 것이 거부되자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다. 웰링턴 공작은 그가 1790년대에 아일랜드에서 하원의원을 지낼 적에 카톨릭 교도에게 회사 소유권을 허락하는 법안에 찬성한 적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도의 하원 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 문제 때문에 반 캐닝파가 되어 총리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28년 여름과 가을에 걸친 다니엘 오코넬의 행동과 아일랜드의 상황은 그로 하여금 아일랜드를 계속 ‘연합왕국’의 일부로서 영국의 통치 하에 붙잡아두고 대규모 반란 또는 내전을 막는 유일한 방안이 카톨릭 권리제한의 철폐 뿐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토리당의 지도자이자 웰링턴 정권의 기둥이나 다름없었던 로버트 필은 독실한 프로테스턴트였고 카톨릭 해방안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웰링턴은 그를 간신히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필이 설득되자 하원은 카톨릭 해방 문제에 대해 대다수가 이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상원은 극렬 반대를 지속했는데, 이 상원의 기조는 국왕 죠지 4세 개인의 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애국자’ 죠지 4세는 카톨릭 해방에 대단히 적대적이었으며, 열성 개신교도인 그 동생 컴벌란드 대공이 그 곁에서 계속해서 국왕에게 극렬한 반 카톨릭 논지를 설파하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웰링턴 본인이 죠지 4세를 설득해야만 했다.

웰링턴과 국왕의 관계는 우호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였다.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 둘은 서로를 욕했다. 죠지 왕은 자신이 아니라 웰링턴이 연합왕국의 왕처럼 군다며 ‘아서 왕’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고, 웰링턴 본인도 죠지 왕의 우울증과 알콜 중독, 주기적 히스테리에 대해 짜증을 내며 사석에서는 왕에 대한 독설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국왕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전 영국에서 오로지 웰링턴 뿐이었다. 죠지 4세는 웰링턴을 대면한 자리에서는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으며 그가 웰링턴의 제안이나 의견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방법은 웰링턴과의 대면을 최대한 피하며 숨어지내는 것이였다. 반면 웰링턴은 죠지 4세의 히스테리를 견디고 그 허언들 -예를 들면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기병돌격을 이끌어 나폴레옹을 무찔렀다고 주장하는 등의- 을 침착하게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아, 그렇습니까. 대단하군요, 전하’ 라고 말하며 넘어가는 식으로 넘기며 주요 의제들을 제시, 설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8]

결국 웰링턴이 며칠에 걸쳐 국왕을 설득하고 마지막에는 사임 협박까지 하자 국왕은 그렇게 될 경우 꼼짝없이 휘그당의 집권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반대입장을 철회, 카톨릭 해방에 동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829년 4월, 카톨릭 해방 법안(Catholic Relief Act)이 통과되었다. 이 문제를 사회적 논제로 부각시킨 다니엘 오코넬은 하원의석에 앉게 되었고, 그 십 수년 후에는 더 나아가 제임스 2세 치세 이래 카톨릭 교도로서는 최초로 더블린의 시장직을 맡은 인물이 되었다. 카톨릭 해방은 영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크롬웰 시대부터 프로테스턴트 신교도 논리가 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영국 정계에서 신정분립을 이룩하고 카톨릭 신자들의 인권을 탈종교적 텍스트에서 신장시킨 것이다. 한편 아일랜드에서는 이를 기점으로 강한 카톨릭 중심의 “고립주의적 지역 정계가 형성되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점차 영국 본토로부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9] 여기서의 시너지 효과로 아일랜드는 더욱 민족주의적이 되어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기에, 웰링턴의 카톨릭 해방안이 아일랜드를 영국에 게속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아일랜드의 분리독립의 기반을 깔았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Protesting' Protestants.]



그러나 웰링턴 개인에게 있어 카톨릭 해방안은 뼈아픈 정치적 손실이 되었다. 이미 캐닝파를 내치고 적으로 돌린 상황에서, 이 카톨릭 문제로 나머지 토리당원들까지 적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프로테스턴트 성향의 국민여론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공작이 실은 카톨릭 교도라는 악성 루머까지 떠돌았다. 극단적인 울트라-토리파는 웰링턴 정권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여당은 크게 분열되었다. 또한 웰링턴의 언론과의 나쁜 관계는 여기서 독이 되어, 울트라-토리 계열 신문들이 총리에게 포문을 열자 정권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공격의 선두에 선 사람들 중 윈첼시 백작은, 웰링턴이 1828년 설립한 런던 킹스칼리지에 자신이 내던 지원금 기부를 중단하면서 비밀 카톨릭 신자인 웰링턴이 그 학교를 설립한 의도가 카톨릭을 국가 곳곳에 심고 양성하려는 것이라는 망언을 한다. 총리가 그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자 백작은 이를 거부했다. 모욕당한 웰링턴은 윈첼시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둘은 1829년 3월 21일 바터시 평원에서 만나 권총을 들었다. 결국 양측이 서로를 겨누지 않고 총을 쐈고, 윈첼시가 웰링턴에게 사과하는 걸로 일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큰 스캔들이 되었다.


[교황의 발에 키스하는 걸로 풍자된 총리 웰링턴과 국무장관 필]


[웰링턴과 윈첼시의 결투 장면 풍자화]



웰링턴 정권의 문제는 단순히 여당 내 계파의 반항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카톨릭 문제가종결된 후 1829년의 나머지는 경제 문제가 주 현안이 되었다. 1820년 말은 영국 경제가 수렁에 빠져 실업률은 올라가고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여 국민 불만이 컸고, 이에 따라 감세와 정부 지출 축소가 요구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총리의 보수적 정치 성향은 경제에 대한 그의 식견도 크게 제한했다. 국무장관 필이 1830년 초에 공산품 가격을 낮추기 위한 재산세 개정안과 예산안을 제출했을 때 웰링턴은 이를 거부했으며, 불안한 경제 상황을 타개하려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으며, 경제는 정부에서 손 댈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는 1830년 1월 22일 내각회의 서기였던 찰스 그레빌이 일기에 적은 내용이 잘 보여주고 있다. 서인도제도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다우닝 가에 찾아와 면담을 요청, 늘어난 적자와 세금 부담,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호소했을 때 “공작 각하께서는 그들의 말을 딱 끊고는, 그들에게 ‘그들은 현재 어떠한 어려움도 겪고 있지 않으며 정부에서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10] 당연히 상인들은 대단히 분노하며 다시는 공작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않으리라 선언했고, 이런 식으로 웰링턴 정권은 급격하게 지지를 잃어갔으며 하원에서의 영향력도 마찬가지로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 죠지 4세가 1830년 6월 26일 서거했다. 그리고는 윌리엄 4세가 즉위한 가운데 법에 따라, 왕위 교체 직후 시행하게 되어있는 하원 선거에서 휘그당이 압도적 우세로 토리를 무너뜨렸다. 1830년 여름의 승리를 바탕으로 그해 가을 휘그당은 당수 그레이 백작과 존 러셀 백작의 진두지휘 아래 의회 개혁안을 제출하고 광범위한 개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 자신들의 권익과 의견이 하원에서 대변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농촌 거주민들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신흥 공업 중심지들로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소외받던 영국 북부지역, 그리고 스코틀랜드 지역 –만체스터와 리버풀, 글라스고 등-의 시민들이 이러한 개혁안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1830년 9월에 그때까지 캐닝파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윌리엄 허스키슨이 역사상 최초의 기차 사고에 의해 (선로에서 기차에 치여) 급작스레 사망한다. 웰링턴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분열된 토리당 내에서 캐닝파의 협조가 필요했는데, 그나마 협상할 의지가 있었던 허스키슨이 급사하자 캐닝파는 아예 휘그당과 공조하는 쪽으로 당론이 기울어버린 덕에 이조차 무산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개혁안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활로가 되었다.


[자멸하는 웰링턴 정권의 모습]



하지만 웰링턴은 요지부동으로 개혁안을 극렬 반대하고 나섰다. 웰링턴은 런던 밖 영국민들의 삶이나 사회에 완전히 무지하였고 또 무심했다. 그는 정권의 목표가 시민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라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현 정치 체제가 이미 가장 적법한 체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웰링턴의 입장은 국외에서 벌어진 일련의 대사건들에 의해 굳어진 상태였다. 그 대사건이란 바로 프랑스의 ‘7월 혁명’이었다. 민중 혁명에 의해 국왕 샤를 10세가 왕좌에서 쫒겨나고 파리 시내 도처에서 가히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장면들에 감동받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웰링턴은 결코 그 중 하나가 아니었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개혁을 시작한다는 것은 곧 혁명을 시작한다는 거나 다름없어!” (Beginning Reform, is beginning Revolution)라고까지 발언했다. [11] 그리고 웰링턴이 그 반대 입장을 공적으로 표명하는 방식 또한, 결코 세련되지 못했다.

영국을 방문해 하원 방청석에서 웰링턴의 연설을 직접 들은 프랑스 역사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총리의 화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무수히 많은 전투들에서 승리하고 보나파르트를 무찌른 저 남자가, 마치 엄격한 선생 앞에서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아이처럼 당혹해하는 모습은 정말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It was the most strangest sight to see the man who had won so many battles and defeated Bonaparte as embarrassed as a child reciting his lesson before a pitiless pedagogue) [12] 마찬가지로 방청석에서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던 토마스 칼라일 (프랑스 대혁명사의 저자) 또한 웰링턴 공작의 연설 실력이 자신이 들어본 사람들 중 최악이라고 논평했다.

이러한 연설 기술과 그의 비타협적 성향을 가지고, 1830년 11월 8일, 웰링턴은 하원에서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의 정권의 생명을 끊어 놓았다. 그 날 웰링턴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나는 의회개혁 따위에 신경쓸 여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개혁이 실행된다면 이는 우리가 대영제국이라고 부르는 이 사회 체제 전체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고 말 것이며, 내가 어떻게 그런 변화를 용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현재 이 나라가 모든 유익한 기능을 하고 있으며 세상 어떤 나라의 의회들보다도 더 적합한 입법부를 이미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나는 이 안건을 진전시킬 어떠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 나라의 정부에서 어떠한 공직에라도 남아있는 한, 다른 이들이 가져오는 그러한 변혁의 시도들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저항하는 것이 내 의무라 느끼고 있음을 단호하게 천명하는 바입니다.” (If it should be carried it must occasion a total change in the whole system of that society called the British Empire, and I don’t see how I could be a party to such changes… I am fully convinced that the country possesses at the present moment a legislature which answers all the good purposes of legislation, and this to a greater degree than any legislature ever has answered in any country whatever… I am not only not prepared to bring forward any measure of this narture, but I will at once declare that, as far as I am concerened, as long as I hold any station in the government of the country, I shall always feel it my duty to resist such measures when proposed by others.) [13]

웰링턴은 같은 내용의 연설을 상원에서도 반복했고, 그는 이를 대단히 전제적이고도 도전적이고 가장 귀족저인 어조로 전달했다. 그가 발언을 끝마치고 자리에 앉자 싸늘한 침묵이 뒤따랐다. 공작은 두리번 거리다가 옆에 앉아 있던 외무성 장관 애버딘 백작에게 “내가 너무 많이 말한건 아니겠지?” (I have not said too much, have I?)라고 물었다고 한다. 애버딘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그에 대해 곧 듣게 될 겁니다.”(You’ll hear of it soon)라고 답했다. 정말로 그들은 그 대답을 곧 듣게 되었다.

1830년 11월 12일 금요일 “가디언Guardian”지 기사가 그 홈페이지에 남아있어 웰링턴의 ‘자폭’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11월 8일 저녁 웰링턴의 발언 내용을 전해들은 군중은 분기탱천하였고, 천 수백여명의 시위대가 블랙프라이어스 다리를 통해 탬즈 강을 건너며 “개혁Reform" - "경찰은 꺼져라Down with the police" - "필은 물러나라No Peel" - "웰링턴은 물러나라No Wellington."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그대로 다우닝 가로 행진했으며 그곳에서 경찰들의 해산 경고에 불응하며 경찰과 폭력 충돌 사태를 벌였다. 그 다음날 저녁 또다른 시위대는 웰링턴 공작의 거주지인 압슬리 저택Apsley House에 몰려가 저택 창문에 돌팔매질을 가했다. [14]

["A Portrait: Framed but not yet glazed" -
돌팔매로 깨어진 압슬리 저택 창문 너머 보이는 웰링턴 공작의 굳은 얼굴. 존 도일John Doyle의 만평.]



웰링턴은 그 무모한 연설로 반대자들을 도발했을 뿐만 아니라 지지자들의 등을 돌려버렸다. 내각은 의회에서의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웰링턴 정권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그 다음주인 11월 15일, 국무장관 로버트 필의 강한 제안이 받아들여져, 총리와 내각 전원이 사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웰링턴 정권의 퇴장과 함께 그레이 백작이 총리에 임명됨으로써 휘그당이 여당이 되었다. 1806년의 그렌빌 정권 1년 남짓한 기간을 제외하고, 1783년부터 1830년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토리당의 천하가 종결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레이의 지원 아래 의회 개혁안은 통과되었고 몇차례 개정을 통해 개선된 대의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살펴본 바대로, 웰링턴 공작의 총리 재임기는 논란과 사회적 불안이 만연한 시기였다.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반도전쟁과 워털루를 승리로 이끈, 영국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구원자(The Saviour of Europe)로 추앙받던 아서 웰즐리는 정치가로서는 우아하지 못했고 지도자로서는 실격이었다. 의견 조율과 협상, 설득에 서툴렀으며 극보수 성향에 전제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주에 가까워 모두의 불만을 샀다. 그의 태도는 반대자들을 달래지도 못했고 지지자들조차 적으로 돌리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정으로 나라에 봉사하려는 의무감으로 가득하고 정열적으로 일하는 일꾼이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종종 업무에 몰입해 건강을 헤칠 정도였고 그와 가까운 지인들은 그가 때로는 지나치게 피곤해 보인다고 걱정했다. 그 스스로는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이 딴 일 빨리 그만두고 싶다’ (I am anxious to quit this job)는 등의 불평 불만들을 수없이 토로하면서도 계속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주영 러시아 대사 부인이였던 도로테아 폰 리븐 대공비는 웰링턴에 대해 “그는 모든 일을 다 직접 처리하려 든다. 그는 전체가 되고 싶어한다.” (He will do everything himself. He wishes to be the universal man)고 평했으며 이는 사실에 가까웠다. 그는 실제로 행정업무와 국제정세에 대단히 밝았고 직접 나선 일들은 실제로 유능하게 처리했다. 그 결과 영국 내 정치적, 사회적 불만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치안과 행정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여기에 그 재임기간 동안 최초의 경찰이 창설되었으며 카톨릭 신자 권리가 신장되었고, 이는 그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 받을 만 하다. 아일랜드 더블린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그 후원금을 낸 사람들 목록에는 카톨릭 운동을 이끌었던 다니엘 오코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웰링턴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당익 ‘따위’는 전혀 돌보지 않는, 순수히 자기 신념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단점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1830년 이후 그가 야당의 지도자격 위치에 섰을 때 취한 태도들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정의에 일치하면 야당의 당익에 반하는 일일지라도 여당 정책을 지지했고, 자신의 신념과 불일치하는 경우에는 야당의 정책일지라도 반대했다. 그리고 스스로 야당 지도자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15] 자신은 국가를 위해 평생 봉사했는데 이제 와서 ‘일개 정당’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그의 이러한 태도가 토리당에 (곧 보수당으로 이름이 바뀐) '나름 합리적'이라는 이미지를 더해주었고, 그 덕분에 1834년 말에는 다시 토리가 로버트 필의 총리 취임과 함께 집권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도덕적이고 올곧은 사람이었고 이 점은 그의 성향과는 별개로 존경받을 만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35년, 웰링턴과 신임 총리 로버트 필의 모습.]



그리고 그의 총리 재임기의 논란과 그 당시의 심각한 인기 하락, 그 직후에도 개혁안 반대에 대한 대중적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세계적 대 전쟁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웅으로 남았으며, 총리 시절의 악명은 오래지 않아 잊혀졌다.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서면 그는 대영제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은 위인으로 추앙받게 된다. 1852년 11월 그가 노환으로 사망했을 때, 압슬리 하우스에 돌팔매질을 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지 런던 시내에서 열린 그의 국장에는 총 150만명의 시민들이 그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 때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공작'이 없는 영국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는 신하된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모두의 위에 섰었다. 온 나라가 그를 존경했고 군주가 신뢰할 수 있는 친우였다. 오늘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One cannot think of this country without 'the duke'. His position was the highest a subject ever had, above all party.. revered by the whole nation, the trusted friend of the sovereign... There will be few dry eyes in the country today) [17]

完.


인용:
[1]. Number10
[2]. Hibbert, 264
[3]. Hibbert, 265
[4]. Eccleshall and Walker, 127
[5]. Jenkins, 28
[6]. Hibbert, 266
[7]. Jenkins, 29
[8]. Hibbert, 270
[9]. Eccleshall and Walker, 126
[10]. Hibbert, 285
[11]. Gash, 211
[12]. Field, 132
[13]. Hibbert, 291
[14]. The Guardian, The 'Peelers' withstand riots in London. 12 November 1830.
[15]. Hibbert, 267
[16]. Hibbert, 293
[17]. Jenkins, 33


참고문헌:
Eccleshall, Robert, and Graham S. Walker. 1998. Biographical dictionary of British prime ministers. London: Routledge

Field, John. 2002. The story of Parliament in the Palace of Westminster. London: Politico's.

Gash, Norman. 1990. Wellington: studies in the military and political career of the first Duke of Wellington.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in association with the University of Southampton.

Hibbert, Christopher. 1997. Wellington: a personal history. London: HarperCollins

Jenkins, T A. 2002. "Wellington, Toryism and the nation". History Today. 52 (11): 26-33.


---

Duke of Wellington - Number10.gov.uk
http://www.number10.gov.uk/history-and-tour/prime-ministers-in-history/duke-of-wellington

“The 'Peelers' withstand riots in London” - The Guardian, 12 November 1830
http://www.guardian.co.uk/news/1830/nov/13/mainsection.fromthearchive



ps. 쓴다고 천명한 후 시간이 오래 지났고, 이제서야 간신히 완성해 올립니다. 3천 2백 단어가 넘는 분량이군요. 그만큼 충실한 내용이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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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행인1 2011/01/11 09:34 #

    웰링턴이 스코틀랜드 야드 창설에 한 몫하기도 했군요.(보통은 제안자 로버트 필만 알고 있는데)
  • 월광토끼 2011/01/12 05:33 #

    원래는 로버트 필이 조사 위원회를 하나 짜서 그 치안 조직의 필요성을 조사했는데 위원회 결정은 만장일치로 '그런건 필요없고 이미 잘 굴러가고 있으며 경찰을 만들면 영국 고유의 자유와 진보적 정신을 일어버릴 것이다'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이걸 웰링턴이 필에게 '다른 사람들로 구성해서 다시 조사시켜라'라고 지시했고, 그래서 재조사 결과는 '꼭 필요합니다!' 였었다는 거지요 ㅎ
  • 듀란달 2011/01/11 09:51 #

    꼬장꼬장한 고집불통 충신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08 #

    그런 느낌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 Allenait 2011/01/11 09:57 #

    정말 군사적인 수완은 당대의 명장이지만 정치적 수완은 그에 미치지 못한 모양이로군요. 그래도 전장에서 얻은 명성은 꽤 오래가는 모양이로군요.
  • 월광토끼 2011/01/12 06:09 #

    사람들이 흔히 잊어버리곤 하는데 영국민들에게 있어 넬슨과 동격의 취급을 받는게 웰링턴입니다. 넬슨이 드라마틱하게 죽은 것 때문에 인상을 남겨서 그렇지.
  • kidovelist 2011/01/11 10:35 #

    쓰시는 좋은 글들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이번 글도 역시 재밌고 유익한 내용이네요. 정치인으로의 "공작"이 어떠했는지 새삼 배우고 갑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10 #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유능한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지요..
  • 네비아찌 2011/01/11 10:41 #

    민중은 약탈을 좋아하고....운운 한 공작의 말씀은 아마 전쟁 기간 중에 병사들의 추태를 보고 생긴 신념이 아닐까 싶네요. 병사들에게 거지새끼들 운운 했을정도니까요.
  • 월광토끼 2011/01/12 06:11 #

    그런 점도 확실히 있지요. 반도전쟁 내내 병졸들의 약탈문제가 웰링턴을 괴롭혔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나중에 가면 그 병사들을 최고의 군대라고 칭송하기도 했지만말입니다.
  • hyjoon 2011/01/11 10:45 #

    그래도 남북전쟁의 명장 그랜트가 대통령이 된 후보다는 나은 모습이군요. -_-
  • 월광토끼 2011/01/12 06:12 #

    그랜트는 너무 순둥이여서 이리저리 끌려다닌 거니까 그랜트보다는 훨씬 나은 거지요.
  • 2011/01/11 11:3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11 #

    지적 감사합니다. 오타였고, 수정했습니다.
  • 리리안 2011/01/11 11:36 #

    역시 국가 지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군요. 여러가지 의미로^^;
  • 월광토끼 2011/01/12 06:13 #

    그렇지요. 결단력도 있어야 하고 포용력도 있어야 하고 지적이어야 하면서 동시에 친근하기도 해야하고 어쩌고 저쩌고 [...]
  • 까마귀옹 2011/01/11 11:37 #

    별명이 아이언 듀크( Iron Duke), 즉 철의 공작이었죠. 엄격하고 고집불통인건 군인 때나 정치가 때나...


    그리고 그를 가리켜 "철의 공작이라서 혀도 강철?"이란 표현도 있더군요. 평소 입맛이 하도 괴상해서..
    술트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군을 격파하고 술트가 먹으려던 요리를 먹는다는게 기껏 양념 잘 해놓은 양고기 요리에 식초 잔뜩 뿌려대고 먹는 거라니..
    (이 이야기는 영국 요리를 깔 때도 자주 인용되지요..)
  • 월광토끼 2011/01/12 06:16 #

    http://kalnaf.egloos.com/2291908
    이 글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부풀려져서 떠도는 얘기입니다.

    http://kalnaf.egloos.com/2311782
    물론 그가 '오로지 살기 위해서 먹을 뿐' 이라는 태도로 살았던건 사실.
  • 초록불 2011/01/11 11:44 #

    잘 보았습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18 #

    감사합니다.
  • 지나가던과객 2011/01/11 12:47 # 삭제

    꼬장꼬장한 꼰대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군요.
  • 월광토끼 2011/01/12 06:18 #

    어느 정도는 '꼰대'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나라를 구한 사람인건 사실이고, 그 나라를 구하는 걸 가능케 한 성격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 조이 2011/01/11 13:38 # 삭제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뛰어난 지휘관이 곧 뛰어난 정치가가 되는 것은 아니네요.
  • 월광토끼 2011/01/12 06:19 #

    그런 점에서 미국의 아이젠하워 같은 예는 참 신기한 것 같습니다.
  • 주코프 2011/01/11 13:55 #

    아카데미에서 의상상을 수상한 '여왕 빅토리아'에서도 등장하는데, 고집있는 인물이지만 충성심과 덕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더군요..

    사실 군사와 정치 둘 잘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는 않지요..예외가 있다면 이스라엘의 라빈 전 수상이랄까요..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20 #

    그런 예가 또 있다면 미국의 죠지 워싱턴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있겠지요..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 asianote 2011/01/11 15:18 #

    훌륭한 군인이 훌륭한 정치인은 되지 못하는 이야기를 이렇게 상세하게 서술하시다니 정말 잘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민중에 대한 강한 의심은 엘리트들의 속성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21 #

    웰링턴에 대해 서술하는 대부분의 글들은 그의 총리시기를 '나중에는 총리도 했다' 한 줄, 아니면 '그다지 인기는 없었다~' 한 문단으로 끝내버리기 일수지요. 그런 점을 안타까워 하면서이 글을 썼습니다.
  • 먼훗날언젠가 2011/01/11 16:32 #

    아.. 이런 양질의 포스팅을! 잘 읽었습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21 #

    감사합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01/11 19:44 #

    전쟁보다 정치가 더 어려운걸 증명하고 있군요.ㄱ-
  • 월광토끼 2011/01/12 06:21 #

    전쟁은 이겨버리면 그만이지만, 정치는 이기고 자시고 풍랑 속에서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과정의 연속이니까 그렇겠지요 ㄱ-
  • deadline 2011/01/11 19:46 #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 월광토끼 2011/01/12 06:22 #

    감사합니다.
  • 엽기당주 2011/01/11 22:38 #

    아서 웰즐리 총리재임기를 한편만에 끝장을 내시다니...-_-;

    얀웬리가 항상 주장하듯이 군인이 정치가가 되면 왜 안되는지를 역사가 실증해주는 한 예인것 같군요..-_-;;;

    뭐 군인의 결단력과 단호함이 몇몇 부분에서는 도움이 되지만 민주주의 시스템하에서는 타협을 거부하는 독단으로 나아가기 쉬우니..

    아무튼 잘 보았습니다.

    감상은 웰즐리 공께선 정치도 군대지휘하듯이 하시는군요...입니다. -_-;
  • 월광토끼 2011/01/12 06:23 #

    음, 여러편으로 할 걸 그랬나요...

    정치는 군대 지휘하듯 하면 안된다는 좋은 교훈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ㅎ
    이 교훈을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 위장효과 2011/01/12 08:14 #

    그래도 웰링턴은 누구보다는 훨씬 나은 편입니다.

    임기가 그야말로 복마전이었던 또 한사람의 전쟁영웅출신 국가원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 행인1 2011/01/12 09:00 #

    혹시 말년에 파산까지 겪으신 그분이신가요?
  • 위장효과 2011/01/12 09:02 #

    맞습니다. 바로 그분.
  • 골드핑거 2011/01/13 22:05 #

    위장효과님 설마 처칠 수상을 말하는 것인가요?
  • 월광토끼 2011/01/15 09:09 #

    불쌍한 알콜 중독자..
  • warspite 2011/01/12 11:06 # 삭제

    상원출신 총리도 하원에 출석이 가능했던가요? 하원대표가 대리하는 줄 알았
    는데 아닌가봅니다.
  • 월광토끼 2011/01/15 09:10 #

    그런 법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 함부르거 2011/01/12 22:52 #

    정치적으로는 무능했을 지 몰라도 나름 몇가지 성과는 거뒀군요.
    아무 신념 없이 정치술에만 능한 정치가보다는 서툴러도 신념이 있는 정치가가 역사에 남을 성과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 월광토끼 2011/01/15 09:11 #

    물론 신념만 있는 지도자가 나라를 말아먹은 것도 있지요. 예를 들자면... B모씨의 아들 G.W씨라던가...
  • crescental 2011/01/13 18:33 #

    좋은글 감사합니다.포스트를 볼 때마다 느끼는건데,딱딱한 내용을 참 잘 풀어내시는군요.^^
  • 월광토끼 2011/01/15 09:11 #

    칭찬해주셔 감사합니다 ^^
  • 골드핑거 2011/01/13 22:06 #

    좋은 장군이 좋은 정치인이 되는건 아니군요. 마치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처럼 말이죠. 여하튼 좋은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ㅎ
  • 위장효과 2011/01/14 08:00 #

    위에서 제가 언급한 국가원수가 바로 그랜트입니다. 미국역사상 최악의 대통령꼽을 때 항상 1,2위를 다투는 인물이죠^^;;;.
    (사실 개인적으로 피어스나 뷰캐넌은 시대가 그래놔서 어쩔 수 없이 밀려갔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앤드류 존슨은 고집불통인 성격이 문제이긴 했지만 만약 링컨이 살아있었다 해도 그가 맞닥뜨린 문제 해결하는데는 무지 고생했을 거 같아서 동정표를 줄만합니다만 하딩, 그랜트는 정말 답이 없는지라...)
  • 골드핑거 2011/01/14 19:13 #

    아 그 국가원수가 그랜트였군요ㄷㄷ 답변 감사합니다ㅎ
  • 월광토끼 2011/01/15 09:12 #

    좋은 장군이 좋은 정치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라고 말할려다가 생각해보니

    그건 장군이 좋은 군인이기 이전에 좋은 조율자이자 협상가여서 그렇군요.
  • 로르카 2011/01/17 23:39 #

    크롬웰 이후로 군인이 정치판에 나서는거 자체를 ('군 경험이 있는 정치인'하고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반 본능적으로 뿌리 깊게 불신했던 영국 정치판에 전쟁 영웅이라는 점 빼고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지지 기반도 없었던 웰링턴이 나섰다는거 부터 징조가 영 안 좋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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