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페브르의 대혁명사와 대혁명사관의 변화



죠르주 르페브르Georges Lefebvre, 1874~1959는 20세기의 대 역사학자들 중 하나로 프랑스 대혁명사에 있어 당대에 큰 영향력과 권위를 가졌던 학자다. 1924년 박사학위 논문 Les paysans du Nord pendant la Revolution francaise (대혁명 이전 노르 지방의 농민들)는 한세기 반 전의 공문서들에 대한 집중적이고 사회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프랑스 농촌사 연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를 시작으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후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소르본느 (그러니까, 빠리 #대학이 생기기 전)에서 대혁명사학회 회장을 지내며 르페브르는 대혁명사 연구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런 르페브르가 1939년 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출판한 Quatre-Vingt-Neuf는 르페브르의 혁명사에 대한 사관을 집대성한 책이다. Quatre-Vingt-Neuf꺄트흐-뱅-뇌프 (이하 「89」로 표기한다)는 1939년, 즉 프랑스 대혁명 150주년을 맞이한 해를 기념하는 르페브르의 헌정품같은 서적이었는데, 프랑스의 패전 후 나찌 점령군의 종용에 의해 비시 프랑스 정부에서 금서로 지정, 약 8천부가 수거되어 광장에서 불태워지게 된다. 그 덕에 1960년대에 재판되기 전까지는 이 책은 본토보다는 오히려 번역본이 영국에서 널리 읽히는 아이러니가 상황에 처한다. 한편, 그덕에 「89」는 당시 영국의 맑시스트 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르페브르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장 죠레Jean Jaures의 '민중사'적 접근과 '아래로부터의 역사' 관점에 큰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르페브르는 죠레의 영향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식 접근 -경제상황과 계급갈등에 초점을 맞추는-에도 감화되어 진보적 역사관을 형성했고, 그러한 역사관이 「89」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좌파적(친혁명, 친공화국, 친서민) 논조가 드러났기에 '사회주의 서적'이라는 죄목으로 비시 정부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한편, 르페브르는 소비에트 체제에는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했고 친소 역사가들을 "프로파간다와 역사학을 구분할줄도 모른다"며 비판했다-

영제로는 Coming of the French Revolution인「89」는 제목 그대로 1787년에서 1789년 혁명 전야까지 어떻게 대혁명 발발의 원인이 쌓이고 분위기가 고조되어갔나를 설명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대혁명을 계급갈등의 관점에서 설명한 점이다. 르페브르가 나누는 대혁명의 4단계는 제 1의 귀족 계급 혁명, 그 다음의 부르쥬아 혁명, 이후 도시 거주 평민들의 봉기, 마지막으로 농민 봉기다. 르페브르의 논지에 따르자면, 1787년에 몰락해가던 귀족 계급이 흐름에 반발해 왕권을 약화시켰고 1788년에 부르쥬아 계급이 강화된 귀족권력에 반격을 가했으며 1789년에는 분노한 일반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공격한 후 농촌에서의 농민 봉기가 결국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시작' 시켰다. 이는 르페브르가 책의 서장에서 인용하는 샤토브리앙의 "파트리키가 혁명을 시작했고 플레브스들이 혁명을 끝냈다"는 문장과 일맥상통한다. 르페브르가 이 논지에서 내내 강조하는 것은 평민 3계급의 귀족계급에 대한 공통된 증오와 루이 16세 정부의 무능함, 그리고 혁명의 필연성과 정당성이다. 당시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89년에서 92년 까지의 '올바른' 혁명 기간과 93년부터의 '공포'정치 시대를 따로 구분하여 정의하고 공포시대의 혼란상에 비판을 가하는 움직임이 일었었는데, 르페브르는 그러한 관점을 부정하고 대혁명을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자 무능과 압제에 대한 필연적 반응으로 설명한다. 이 논조는 르페브르가 1930년대 후반 널리 퍼져가는 우익 파시즘을 비판적으로 보고 좌익 혁명정신을 고취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책을 쓴, 저술의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되어 있다.

르페브르는 전후 1950년대에 Quatre-Vingt-Neuf의 확장판격 연구서로 2권짜리 La Révolution Française를 집필하는데, 여기서도 르페브르는 유사한 논지를 전개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부르쥬아 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의 꾸준한 증대와 그가 실질적인 혁명의 주도계층이라 보았던 부르쥬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 르페브르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스트라스부르 대학 시절 동료로 지냈던 뤼시앵 페브르나 마르크 블로크와 같은 아날학파의 시초들과 마찬가지로 통계 자료와 과학적 사료 분석을 통한 사회과학적 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완성된 르페브르의 저서는 이후 대혁명사를 논하고 연구하는데 있어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연구의 기반이 되기도 하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고등학교 수준 역사 시간에 배우는 '프랑스 혁명은 부르쥬아 혁명이었다'고 하는 인식의 확산도 결국은 르페브르의 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만큼 활발하게 행해지는 학술적 토론과 새로이 진행되는 연구들을 통해 르페브르의 오류와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지적되고 시정되기에 이른다.

1959년 르페브르의 사망 이후 등장한 영국과 미국의 젋은 사학자들은 르페브르의 논지와 근거, 사료들에 이견을 제기하는데, 이 사학자들이 바로 '수정주의 학파'로 불리우게 되는 사람들로, 계속된 사료 발굴과 연구방법의 발전을 무기로 르페브르가 정립한 사관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르페브르의 부르쥬아 계층에 대한 정의는 경제적인 것으로, 산업혁명과 금융업발전으로 힘을 키운 상인과 은행가, 공장주들이 그 주류였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연구에 의해 3부의회의 '부르쥬아 출신' 의원들 중 10% 미만만이 경영경제활동에 종사했으며 나머지는 전부 변호사, 의사, 학자 계층이었다는 반론이 나오는 식이였다. 또한 르페브르의 귀족 계층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귀족 계층이 몰락해가는 중이었다는 르페브르의 논지는 사회의 구성과 인구비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평민출신 '신참자'들의 유입으로 귀족들의 인구가 계속 유지되었다는 연구로 반박되었고, 귀족 계층과 그 밑 농민들간의 증오와 반목이라는 주제도 89년 여름의 농민 봉기가 대단히 제한적인 지역들에서만 한정적으로, 그것도 귀족 뿐만 아니라 교회, 상인, 평민 부농등 경제적 부를 가진 누구나를 대상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통해 반박되었다. 그리고 르페브르가 숭앙한 '혁명사상'들과 그 모태인 계몽주의 사상들이 귀족들 그 자신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살롱들에서 태어났다는 점, 여기에 라파예트를 위시한 귀족 계급의 적극적인 혁명 참여활동 사실도 르페브르가 설명하는 '계급갈등'의 논지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르페브르는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새로운 트렌드 -수정주의를, 맑시스트 사관을, 아날학파를 넘어서 더욱 널리 뻗어가는-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이고 사회과학적인 대혁명사 연구의 시발점으로써 존중받으며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르페브르의 사관에 대한 반박도 르페브르 자신이 정립한 방법론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89」는 그 가치를 떠나서 읽는게 재밌는 책이다.


Davis, Lawrence Harvard. 2001. Georges Lefebvre: Historian and public intellectual, 1928--1959.

Jones, Peter M. 1990. "Georges Lefebvre and the Peasant Revolution: Fifty Years On". French Historical Studies. 16 (3).

Lefebvre, Georges. 1988. The coming of the French Revolu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Tackett, Timothy. 1989. The Introduction to the Coming of the French Revolution.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참조: Georges Lefebvre (1874-1959), ou une histoire sociale possible



ps. '먹고 사는데 바빴'고, 군 복무 문제와 1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예비군 소집 등으로 일정이 꼬였던 르페브르는 50세에 박사학위를얻었고 53세에야 대학 교수에 임용되었다. 앞날이 캄캄한 사학과 대학원생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인생역정... 인가?

덧글

  • 진성당거사 2011/05/11 06:57 #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카구츠치 2011/05/11 08:12 #

    흠 재밌겠네요. 찾아보니 역서도 있는 모양이고... 한 번 읽어볼 책으로 찜. 감사합니다.

    덧. 1924년의 논문 제목은 대혁명기 '이전'이 아니라 대혁명 '기간 중의' 여야 할 것 같군요.
  • 로르카 2011/05/11 08:25 #

    이 양반 학설 뒤집고 사수하는 문제로 혁명사학계 50~60년대가 피비린내 나는 (?!) 키배 투쟁이 벌어 졌으며 수 많은 학자들의 (코)피가 파리 (대학가) 거리를 물들였고 (골)머리가 댕겅 댕겅 굴러다녔습죠. 그런데 영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코반이나 퓌레 같은 수정주의자들이나 소불 같은 르페브르 빠들이나 맛깔나게 책 쓰는 능력 만큼은 후대 학자들 치고 르페브르 만한 사람은 없었는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날 학파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있나 의문입니다. 아날 학파 쪽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 같이 대대적인 수량과 통계를 통한 사회과학적 접근을 추구한건 색체가 비슷한데 결정적인 계급 분석 자체는 거부하고... 구체적인 학문적 교류나 상호 연관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 행인1 2011/05/11 09:54 #

    논점과 방법론 모두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로군요.
  • Allenait 2011/05/11 10:30 #

    나치 독일이 저걸 왜 금서로 했는지 좀 의아하군요. 저걸 읽고 반독 레지스탕스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걸까요..
  • dunkbear 2011/05/11 14:13 #

    본문 (정확히는 책표지 바로 아래 문단)에도 나와있지만 마르크스 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주의적 역사관이 비시 정부와 나찌에 "공산주의"로 낙인 찍혀져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레지스탕스 상당수가 공산주의자였던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 피두언냐 2011/05/11 10:33 #

    사학과 학부생 출신으로 이미 교편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린터라 p.s에 대한 착찹한 심경을 접을 길이 없네요. 에효~
  • 萬古獨龍 2011/05/11 13:13 #

    꼭 읽어보겠습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삼왕국 전쟁사 또는 단순히, 영국 내전사

7년전쟁 북미전역

말보로 공작의 일생

로열 네이비 이야기

이베리아 반도전쟁

라파예트 후작의 일생

영국육군 블랙왓치 부대史


통계 위젯 (화이트)

34155
973
4704093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1420

I Support ROKN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아지캉 최고

9mm Parabellum Bullet

the pill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