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istorian이 아닌 The historian. 마르크 블로크.

원래는 '행동하는 지성'이라던지 하는 거창한 제목을 붙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은 오히려 블로크에게 죄를 짓는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크는 “희미해지고,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이 역사학자의 의무라고 믿은” 사람이였다.[1] 그럼에도 블로크는 ‘잊혀져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또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긴 역사학자였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a historian이 아닌 the historian이라고 하겠다. 그는 또한, 인간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한, 순수한 마음의 학자이자 군인이였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존경하는 이 학자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블로크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는 그의 글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마르크 레오폴 벙자맹 블로크Marc Léopold Benjamin Bloch 1886 ~ 1944는 1940년 6월, 프랑스가 나찌독일에게 패한 직후 쓴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내 인생 중 34년 동안 역사를 쓰고 가르쳤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과거 시대들로부터 나온 수많은 사료들을 연구해야 했고, 최선을 다해서 그로부터 참과 거짓을 가려내려고 했다. 나는 동시에 내 주변 세상을 주시하는 것에, 내 은사님이신 피렌느 선생의 말에 따르자면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역사가의 의무로 여기며 노력해왔다. (중략) 내 직업은 보통 모험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내가, 그리고 내 세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번 -각기 21년의 시차를 두고- 평화의 길로부터 난폭하게 떨어지게 했다. 평범한 교육자의 일상으로부터 일탈함으로써 얻은 여러가지가 뭐였던 간에, 그 중 확실한 것은 내게 전쟁 중인 국가를 여러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는 폭넓은 경험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였다. 나는 두차례의 전쟁에서 복무했다. 맨 처음은 1914년 8월 병장으로써였다. 그 후 4년 동안 나는 소대장이 되었고, 정보장교가 되었으며, 연대 사령부의 참모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군단 참모진의 대위가 되었다. 내 군인으로써의 두번째 경험은, 대부분 군 상층부에서 얻어졌다. 내 임무는 부관으로써 군 사령관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며, 군 총사령부(GHQ) 업무와 지속적인 관련을 짓게 했다. 그 결과 나는 상당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군대 뿐 아니라 인간성 전반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나,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던 기독교던 어떠한 신앙도 가진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인종적 형질'같은건 단순한 미신에 불과하며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제로 대입해 보면 더할 나위 없는 부조리라는 것을 이해할 만큼 괜찮은 역사학자라고 생각한다. (중략) 누군가는 내 인종적 배경을 두고 내가 '외인Alien'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내 논지들의 근거를 해하려 할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나는 내 증조부가 1793년 공화국의 군인이었다는 것과 내 아버지가 1870년 스트라스부르의 방어자들 중 한 사람이였다는 것, 내 친척들이 고향 알자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을 때 그곳을 떠났다는 점, 그리고 내가 전통적으로 가장 열렬한 애국자였던 알자스 지방 유대인들의 교육 아래 자랐다는 것, 그리고, 비록 지금 당장도 나를 추방하고 싶어하는 (그러는데 성공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프랑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내 마음이 가장 깊이 연결되어있는 단 하나의 나라라는 사실로 대답할 수 있다. 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그 문화의 물을 마시며 자랐다. 난 프랑스의 과거를 내 과거로 삼았다. 난 프랑스의 땅에서 자유로이 숨쉬고, 다른 이들과 함께 그 국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

이 글은 1940년 프랑스의 패망과정을 한 개인적 참여자의 관점이자 동시에 거시적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설명하는 책의 일부분이다. 블로크는 이 책이 출판될 날이 과연 올까 우려했었다. 다행히도, 이 책, L'Etrange defaite (이상한 패전)는 1946년에 출판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블로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마르크 블로크는 1886년, 리옹 대학의 고대사학과 교수였던 구스타브 블로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블로크는 역사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자랐고, 역사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다. 1914년에 그는 이미 농촌사와 중세 농노들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 중이었다. 그러나 블로크의 역사학자로써의 관점과 사상이 크게 변화하고 진보하게 된 것은, 그가 위에 적고 있는대로 그의 참전 경험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만 하며 살았던 그에게 있어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은 그가 멀리서 본 정도로만 알던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 –농부들, 광부들, 공장 노동자들, 상점 주인들- 을 바로 곁에서 깊이 알게해주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블로크는 최선을 다했다. 블로크는 자신이 그저 ‘부상을 입어 훈장을 몇개 받았다’ 정도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는 일개 사병으로 복무를 시작하여 전시 임관, 대위까지 진급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의 용기로 부하들을 이끌어 무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은 군인이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완전히 퇴역하는 대신 계속해서 예비역으로 남았다.



그가 참호 속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그를 통해 블로크가 얻은 감정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높으신 분들’ –정치가, 장군, 공무원-에 대한 혐오감이였다. [4] 그 후 20년 동안 블로크의 역사연구 중심에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 농부들이 있었다. 그래서 블로크는 당대 역사학계의 전통적인 정치사적 연구 방법을 떠나 일상적인 농법과 농경기술의 발전, 농경문화와 전통, 전반적인 농부들의 생활사와 사회적 구조에 주의를 기울여 연구했다. 그는 결코 농부 개개인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수세기에 걸친 봉건주의 사회 농촌과 농경사회 전반을 이해하고 소개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연구의 정점에 있는 저서가 Les caractères originaux de l'histoire rurale française (프랑스 농촌사의 기원과 성격)다. 그의 중세사 연구는 농촌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봉건주의 사회 지배층도 중하게 다루어졌다. 그 결과가 La Société féodale (봉건사회)인데, 여기서도 블로크는 ‘개인’ –왕, 영주, 기사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대신 그 개인들이 속하는 계급들과 사회 전반의 흐름과 구조를 파악하는데 집중한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처럼, 블로크는 사건/인물 중심적인 역사를 멀리했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 사건이나 인물이 아닌, 그러한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또 그 사건들의 결과로써 생성되는 전체에 있어서의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이었다. (블로크가 역사에 있어서개별 인물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블로크의 이러한 관점에는 그의 아버지 구스타브와 슈트라스부르 대학 시절 블로크의 선배교수였던 피렌느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던 블로크가 역사학계에 큰 변혁을 일으키게 된 것은 바로 아날 학파의 창립을 통해서였다. 그가 교수로 일하던 슈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동료 학자인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와 함께 블로크는 1929년에 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 (경제사와 사회사 연보)라는 계간 학술지를 창간한다. 블로크와 페브르는 자신들이 ‘학파’의 창립자라는 것을 늘 부정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저 ‘아날’이라는 학술지의 편집진 정도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브로델 등 그들의 방법론을 뒤따르던 다른 학자들을 통해 현대 역사학은 크게 변화한다. Longue durée (長期) 와 histoire totale (完全史), 이 두가지가 블로크와 페브르가 주창한 개념이었다. ‘아날’학파에게는 장시간에 걸쳐 느리게 변화하는 사회구조와 그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는 커다란 흐름이 중요했다. 거시적인, 넓은 차원에서의 역사해석. 그리고 그러한 역사인식은 경제와 사회의 역사를 주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미시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했다. 블로크는 에밀 뒤르켕의 객관적 사회학과 문화결정론에 영향을 받았고, 사회학 뿐만 아니라 폭넓은 분야에 걸쳐 영향을 받아,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 언어학, 문학, 민간설화, 지리학, 농경학 등의 분야들을 모두 고려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아날 학파의 창시자들은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 간의 연결성을 중요시했다. 역사학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태도는 "과거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현재를 연구하는 것 (formons-nous, en etudiant le present, a une intelligence plus aigue du passé)"이였다. [4] 그랬기에 유럽에 파시즘이 퍼져나가고 있을 때에 ‘아날’은 더욱더 전체주의와 독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아날’과 그 편집진은 학술적인 ‘객관성’과 ‘중립성’이 결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거대한 위협이 닥쳐오는 앞에 선 지식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블로크와 페브르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래서, 블로크는 1939년 폴란드가 나찌독일에게 침공당했을 때 즉각 현역복귀신청을 한다. 그의 나이 이미 52세였고 그는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였으며 그런 그에게 전선에 복귀할 의무는 없었다. 블로크는 전형적인 국수주의자와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였다. 다만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에 가해진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식이 블로크를 전선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했다.




즉시 전역하게 된 블로크는 프랑스가 그렇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이유를 논하면서 그 주 원인이 무능한 지도부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 설명을 쓴 책이 위의 L'Etrange defaite다. 그 후 블로크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비시 정부는 그가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국을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블로크의 8인 가족 전부에게 비자를 발급해주지는 않았고, 이산가족이 될 생각은 없었던 블로크는 그대로 프랑스에 남는다. [5] 블로크는 잠시동안은 역사 저술에 몰두했으나, 이후 그가 택한 길은 위험천만한 길이였다.

1942년, 마르크 블로크는 몽펠리에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한다. 얼마 안가 그는 리옹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가 되어 게릴라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비시 정부 휘하 경찰들에 의해 그는 1944년 3월 8일 체포되었고, 곧 나찌 게슈타포 측에 인도된다. 블로크는 필시 심한 고문을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단 며칠만이라도 더 살 수 있었다면 그는 살아남아 계속해서 역사학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블로크는, 오버로드 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16일, 프랑스가 해방되기 직전에 다른 레지스탕스 포로들과 함께 게슈타포에 의해 총살 처형당했다. 고국을 지키고자 펜이 아닌 총을 들고 싸웠고, 그 결과 총탄에 의해 목숨을 잃은 역사학자. 그게 블로크였다.





이상이 마르크 블로크란 학자에 대한 변변치 못한 설명이다. 그래도 이 설명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고무적 영감이 되었기를, 바란다. 오늘날 '아날 학파'와 그 실증주의적 사관은 르루아 라두리나 뻬르낭 브로델로 더 잘 알려지고 대표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단순히 과거를 연구할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며 그 현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블로크가 있었다.

블로크는 저서 Apologie pour l'histoire(역사학을 위한 변명) 첫 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빠, 역사란 뭔지 제게 설명해주세요.' 수년 전 어린 소년이 아버지인 내게, 역사학자에게 물었었다. '역사란 책을 읽어 나가야만 하는 거란다', 가 내 대답이었다. (Du livre qu’on va lire, j’aimerais pouvoir dire qu’il est ma réponse.)"

그의 말대로, 블로크를 존경하는 사학도로써, 나도 끝없는 독서를 계속해 나가야 겠지만,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온다면, 블로크처럼 직접 몸을 움직여 행동해야 할 수 있기를 빈다.




[1] Lyon, pg.196
[2] Bloch, pg.2~3
[3] Lyon, pg.199
[4] Huppert, pg.512
[5] Rutkoff and Scott, pg.278



참고문헌:

Bloch, Marc Léopold Benjamin. 1949. Strange defeat; a statement of evidence written in 1940.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Bloch, Marc Léopold Benjamin. 1974. Apologie pour l'histoire ou Métier d'historien. Paris: A. Colin.

Hill, Alette Olin, and Jr Boyd H. Hill. 1980. "Marc Bloch and Comparative History".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85 (4): 828-846.

Huppert, George. 1982. "Lucien Febvre and Marc Bloch: The Creation of the Annales". French Review. 55 (4): 510-513.

Lyon, Bryce. 1987. "Marc Bloch: Historian". French Historical Studies. 15 (2): 195-207.

Rutkoff, Peter M., William B. Scott, and Marc Bloch. 1981. "Letters to America: The Correspondence of Marc Bloch, 1940-41". French Historical Studies. 12 (2): 277-303.


덧글

  • 萬古獨龍 2011/05/20 16:05 #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이었군요.
  • 월광토끼 2011/05/20 16:45 #

    그렇습니다.
  • 초록불 2011/05/20 16:28 #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저런 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 월광토끼 2011/05/20 16:46 #

    역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건 저런 분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 누군가의친구 2011/05/20 16:44 #

    저는 『역사왜곡과 우리의 역사교육』(김한종 저, 책세상,2009.1) 37p~38p에서 블로흐에 대해 처음 접했습니다.
    그중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자 많은 프랑스 사람들은 역사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블로흐는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역사는 올바른 행동의 정당성을 증명해줄 것이다.'라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곳곳에서 블로흐는 '역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모습이다.',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이 구절 보니 참 범상치 않은 역사학자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날 우리도 배워야 할 자세이지만 말입니다.
  • 월광토끼 2011/05/20 16:48 #

    아, 공식 한글 표기는 블로흐인가요. '크'가 더 실 발음에 가깝다 생각해 '크'로 쓰긴 했는데.
    역사학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자세겠습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05/20 16:53 #

    그 표기에 대해 좀 혼동된듯 합니다. 제가 처음 접한 책은 블로흐로 표기되어 있었고,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에는 블로흐로는 검색되지만 블로크로 표기되어있습니다. 위키백과에는 항목은 없으나 블로크로 표기 되어있지요.ㄱ-

    이렇게 말입니다.

    블로흐(Bloch)
    펠릭스 블로흐(Felix Bloch) - 스위스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에르네스트 블로흐(Ernest Bloch) - 스위스 태생의 미국 작곡가.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콘라트 에밀 블로흐(Konrad Emil Bloch) - 독일 태생의 미국 생화학자.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블로크(Bloch)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 프랑스의 역사가.
    장 리샤르 블로크(Jean-Richard Bloch) - 프랑스의 작가.

    아마 블로크가 맞질 않나 싶습니다.ㄱ-
  • 행인1 2011/05/20 17:05 #

    블로크가 전공으로 '훈장'을 받았다는건 알았지만 그게 레지옹 도뇌르 인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농촌'과 '농업'을 연구대상으로 한건 본인의 참호전 체험도 일정부분 기여할지도 모르겠네요.
  • 유월 2011/05/20 17:42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긁적 2011/05/20 18:50 #

    좋은 소개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을 보니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신학자가 생각나네요. 이 분도 신학계에서는 소문난 분이셨는데,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하셨다가 (신학자입니다-_- ㄷㄷ) 발각되어서 사형당하셨죠. 그 때에 정신차리고있던 사람은 다 비슷했나 봅니다.
  • hyjoon 2011/05/20 19:22 #

    블로크의 마지막 장면도 인상깊더군요. 집단 총살 당했는데 옆에 있던 17세 정도 되는 소년이 '아프겠지요?'라고 물으니까 '그렇지 않단다 얘야. 조금도 아프지 않을거야'라고 답했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쓰러지면서 'Viva la France!'를 외치며 쓰러졌답니다. (확인사살도 했는데 기적같이 살아남은 2명 덕분에 마지막 장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 모에시아 총독 2011/05/20 19:32 #

    최근 이분의 농업사관련 책을 읽고 있는데 알면 알수록 위대한 지성이었네요. 정말 '행동하는 지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걸 너무나도 잘 보여주셨습니다 ㅜㅜ
  • 진성당거사 2011/05/20 20:00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11/05/20 22:13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aquis 2011/05/20 22:15 #


    마르크 블로크 군요. 저 또한 존경하는 역사학자 입니다.

    '격동의 현장 속에 놓여졌던 역사학자의 회고록' 이라는 비슷한 느낌을 故김성칠 교수님의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 일기- 라는 책에서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두 분 모두, 역사학의 원초적 사명을 생각 하게 해주더군요.
  • 2011/05/20 23:0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r 스노우 2011/05/20 23:10 #

    저 역시도 진정으로 존경하는 학자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 historyjs 2011/05/21 03:00 #

    한길사 '역사를 위한 변명' 정남기 역 구판에서는 '블로흐'라고 표기하지만
    뒤에 나온 한길사 고봉만 역 신판에는 '블로크'라고 표기하더군요.
    까치에서 나온 '이상한 패배'도 블로크라고 표기합니다.

    저는 고봉만 역 숲길신서로 나온 걸 가지고 있는데, 그레이트북스로 바뀌어 나오면서
    가격이 두 배로 뛰었죠. 같은 책이 가격 오르는 것을 보면 참 무섭습니다.


    이름 표기 문제로 제일 골때리는 사람이
    기억 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Maurice Allbwachs인데
    논문들을 살펴보니 알박스, 올박스, 알브바슈, 알바쉬 등등....
    환상적이더군요.

    정말 짜증이 나더군요.
  • 당나귀형제 2011/05/21 09:43 #

    한길사는 오래된 번역을 전혀 수정하지도 않고 판형만 바꾸어 가격을 부풀리는 악덕 경영으로 유명하더군요.
  • 냉동만두 2011/05/21 13:17 # 삭제

    윗 분들이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는 지성. 그 자체로군요.
    고개가 숙여집니다.
  • 제연 2011/05/21 23:57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르크 블로크. 대단한 분이군요.
  • 김훈 2011/05/25 11:23 # 삭제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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