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웨스트와 레이디 버틀러의 역사화畵 접근 방식의 차이

18세기의 태동과 함께, 팽창적 제국주의와 근대적 의미에서의 민족국가 개념이 형성되어가던 유럽에서는, 그러한 국가 정체성의 확립과 국민들의 애국심 고취에 예술이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국의 군대가 보여준 군사적 무용담을 영웅적 광휘로 치장한 미화성 작품들이 여럿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영국 안에서도, ‘애국적 역사화’라는 동일한 주제를 가졌음에도 죠지 왕정 시대의 역사 화가들과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화가들은 다른 관점과 중심점을 가진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시대 당 각 한 명씩의 화가들을 예시로 꼽아 보자면, 벤자민 웨스트와 엘리자베스 버틀러가 대표적일 수 있다. 웨스트와 버틀러 둘 다 영국의 전승을 기념하는 대규모의 장대한 역사화들을 제작했으나, 그 둘의 화풍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당대의 주된 사조와 대중적 풍조의 차이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벤자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는 미국계 영국인 화가로, 식민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립 예술원장의 직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웨스트는 화가로써 대단히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며, 국왕 죠지 3세에 의해 왕실 전속 역사화가로 임명되기도 했다. 웨스트는 경력 내내 많은 초상화들과 종교화들을 만들어냈지만 그는 당대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그의 역사화들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웨스트의 작품들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울프 장군의 죽음The Death of General Wolfe (1770)으로, 7년 전쟁 중 1759년 북미 전역에서 벌어진 에이브러햄 평원 전투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제임스 울프 소장의 장렬한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를 상대로 한 영국의 가장 기념비적 승전 중 하나였던 이 전투와 그 지휘관의 영웅적 죽음은 당시 “영국민들 사이에 문학적이고도 가히 종교적인 수준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국가적인 대 사건”이었다.[1]


West, Benjamin. The Death of General Wolfe (1770), 캔버스에 유화. 151 cm × 213 cm


웨스트의 울프 장군의 죽음은 그 배경이 되는 전투가 벌어지고 11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얼마 후 신-고전주의로 분류될 화풍으로 그려져 대단히 극적이고 서사시적인 스타일을 가진 작품이었다. 죽어가는 울프 소장이 정 중앙에 배치되어 대단히 이상적인 자세와 얼굴 표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주위를 부하들이 존경심과 동시에 비탄 어린 표정으로 둘러싸고 있다. 각 인물들의 자세나 전체적인 분위기 등은 가히 성화聖畵를 방불케 한다. 이 작품은 당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인데, 이 작품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표한 사람들이 지적한 사안이 흥미롭다. 영웅적이고 서사시적 장면을 묘사하는데 대체 어째서 그림에 묘사된 인물들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갑주와 토가가 아닌 ‘현대적인’ 복장을 입고 있으며, 또 왜 (고대 지중해 세계에는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그림에 포함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도 웨스트의 동료들은 계속 현대적 의상이 아닌 고대의 의상을 그리라고 조언했으며 완성 후 작품을 주문한 죠지 3세는 현대적 의상이 작품의 품위를 떨어트린다면서 수령을 잠시 거부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는 당시 고전주의 풍조에서 기인한 비판들인데, 당시 역사화를 그릴 때는 그 역사화가 묘사하는 “사건의 시대적 배경과는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고대 그리스 시대의 복장과 건축 양식으로 사건을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었기 때문이다.[2]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웨스트는 ‘역사적 사건을 묘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으로 그린’ 자신의 선택을 해명하면서 자신은 ‘역사가의 법규Historian's Law’을 따르려 한다고 밝혔다. 당대 볼테르나 흄의 계몽주의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웨스트는 화가도 역사가처럼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the same truth which gives law to the historian should rule the painter)[3]

실제로 웨스트는 역사화를 그리는데 있어 마치 역사가가 하듯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디테일들- 즉, ‘고증’-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군의 제복을 정확하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당시 전장의 날씨라던지 주변 지형이라던지 하는 부분들도 묘사하려 했고, 심지어 실제로 전투에 참전한 동맹 보조병 인디언 전사, 프랑스군 패퇴 소식을 알리려고 온 전령의 모습까지 그림에 포함시킴으로써 작품의 역사 고증을 충실히 하려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고증과 세부사항들은 각자 상징성을 나타내기 위해 조금씩 변형되고 미화되어 재배치되었기에, 실제 역사와 고증의 관점에서 보자면 울프 장군의 전사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4] 그림에 묘사된 13명의 조연들 중 오직 3명만이 실제로 에이브러햄 평원의 전장에 있었던 인물들이라는 것부터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이것은 웨스트의 주 목적이, 그의 ‘역사가의 법규’ 운운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영웅과 그의 애국적인 자기희생이라는 주제를 대단히 고전주의적인 시각에서 미화해 묘사하는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웨스트 자신은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울프 소장의 전사라는 주제가 “대중에게 끼친 파장과 영웅에 대한 존경”이라는 점에서 고대 로마 제국의 장군 게르마니쿠스의 죽음과 거의 동일한 느낌을 준다고 표현했다.[5] 울프 장군은 비록 현재의 영웅임에도 마치 고대 로마 제국의 장군 같은 고전적 형상으로 표현되었고, 이에 따라 울프는 마치 기독교적 성자같은 느낌으로 죽음을 맞이하며 그 옆의 인디언 병사 또한 고대 그리스 스토익 철학자 같은 포즈를 취하게 된 것이다. 벤자민 웨스트는 이렇게 “고전 고대, 기독교 신앙, 그리고 현대적 시대 고증이라는 주제를 화폭에 한꺼번에” 담음으로써 애국주의적 감성의 이상적 장면을 그려내고자 하였다.[6]


West, Benjamin. The Death of Nelson (1806). 캔버스에 유화. 182.5 cm × 247.5 cm


웨스트는 이렇게 울프 장군의 죽음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스타일을 다른 여러 역사화들에서도 되풀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자기복제적인 작품이 바로 넬슨의 죽음The Death of Nelson이다. 트라팔가 전투와 넬슨 제독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마자 당장 작업에 착수한 웨스트는, 이 작품에서 넬슨의 몸과 얼굴에서 마치 무대 조명이 비추듯 빛이 나게 묘사해 놓고, 모든 장교들과 선원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마치 숭배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게 한다. 혼란스럽고 격한 교전의 한가운데에서 말이다! 멀리 뒷 배경에서 보여지는 함대전의 모습이라던가 각 병과들의 제복 고증 같은 부분들은 ‘현실적’으로 되어 있지만, 장면 전체의 묘사는 대단히 이상화되어 있다. 울프처럼, 넬슨은 결코 그냥 죽지 않고, 마치 성자처럼, 영웅적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웨스트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그 사건의 주연이 맞는 죽음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의 죽음과는 그 궤를 달리해야 했다. 이 작품에 대해 그는 한 편지에서 영웅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은 “영웅 위인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전달하여, 장대하고 특출한 그 장면으로부터 감정이 고취되고 생각이 자극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발언했다. [7] 그러나 이 전형적 고전주의 사상에도 불구하고 웨스트의 작품들은 기존의 고전주의 화풍에서 탈피하여 사실주의적 요소들을 결합하고, 또 이를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또 이러한 방법을 당시 영국의 역사화 풍조 전반에 퍼트렸다는 점에서 나름 혁신적인 것이었다. 존 코플리의 피어슨 소령의 죽음The Death of Major Pierson (1786) 같은 작품들이 웨스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표현한 좋은 예시다.

그러나 웨스트 이후 19세기 들어서는 영국의 역사화들은 그 표현 양식과 주제에 있어 제한되고 또 정체되게 된다. 웨스트의 주장이 지나치게 잘 도입된 덕에, 역사/군사 기록화의 제작 목적이 오로지 “당장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맥락과 상황과 아무 상관없이 단순히 영웅 한명을 지정하는” 것에 그쳐버려,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전투의 세부사항들은 그림에서 “그저 장식적이고 또한 상징적인 역할을 할 뿐”인 수준에 그치게 된 것이다.[8] 이러한 풍조에서 벗어나 새롭고 혁신적인 주제와 관점을 영국 역사화에 가지고 온 것은 훗날 버틀러 부인으로 불리우게 된 엘리자베스 톰슨이였다.

버틀러 부인 엘리자베스 톰슨Elizabeth Thompson, Lady Butler, 1846~1933은 여류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제복 군인들과 그들이 참전한 전투들을 평생의 작품 주제로 삼은 화가였다. 버틀러는 원래 런던의 여성 예술학교Female School of Art에서 공부하였으나 이후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공부하게 된다. 그녀는 1870년에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파리로 옮겼다가 여기서 자크 메소니에Jacques-Louis-Meissonier의 나폴레옹 전쟁화들로 대표되는 프랑스 역사화풍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역사화와 전쟁화들이 영국에서보다 훨씬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륙국가적 성격과 상시 교전국이라는 상황 -1868년의 보불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시기이기도 했다-은 대중이 전쟁과 군대라는 주제를 가깝게 느끼게 하였고, 이 때문에 프랑스의 역사화들은 그저 이상적인 영웅이자 롤 모델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역사적 사건들과 그 평범한 참가자들 일반을 함께 표현하는 복합적인 장치라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당시 유행하던 사실주의Realism 기조는 역사화에도 예외 없이 영향을 끼쳐 ‘실제 역사의 고증’이라는 사항에 더 큰 비중을 두게 했다. 1877년 영국에 돌아와 (버틀러 장군과의 결혼으로 인해 버틀러 부인이 된) 엘리자베스 톰슨은, 프랑스 유학 기간 배운 바를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다수의 무명 범인들’을 중심에 둔 다수의 역사화들을 제작함으로써 표출했다.

Lady Butler, Elizabeth Thompson. Calling the Roll After an Engagement, Crimea (1874) 캔버스에 유화. 93.3cm × 183.5cm


버틀러 부인의 가장 유명하고 또 성공적이었던 작품은 교전 후 점호, 크리미아에서Calling the Roll After an Engagement, Crimea, 이후 일반적으로 ‘점호the Roll Call'라는 약칭으로 불리운 그림으로, 일군의 척탄병들이 크림 반도에서 전투를 치르고 재집결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어떠한 특정 전투라는 표시나 묘사도 없으며 전투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도 아닌 이 작품은 단순히 평범한 병사들 한 무리를 건조하면서 음울한 빛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어떠한 영웅적 존재를 집중 조명하는 신비한 서광도 없으며 판별 가능한 특정 유명 지휘관의 초상도 없다. 그저 냉혹한 전쟁의 디테일이 상세히 묘사될 뿐으로, 어떤 이는 얼어붙은 땅 위에 죽어 쓰러져 있고, 어떤 이는 부상을 입어 죽어가고 있으며, 어떤 이는 추위에 벌벌 떠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어떠한 찬미적 장치도 없이 현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나타나는 버틀러 부인의 전쟁 잔혹성에 대한 묘사는, 그녀의 말에 따르자면, “전쟁의 파괴적인dismembering 측면을 기록하고, 그럼으로써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 희생자이자 참가자였던victim-practitioners 이들을 다시 떠올리고 그 희생의 가치를 소중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10] 여기서 전쟁은 처참하고 섬뜩하다는 점은 표현되고 있지만, 버틀러는 결코 반전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그 전쟁의 참혹함 묘사도 평화주의 전파를 위함이 아니었다. ‘점호’는 그 음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나타난 개개인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무명의 병사들이 모두 각자 개성과 정체성이 뚜렷한 얼굴로, 마치 자신들이 처한 악상황 또는 싸워야 하는 적군에 대한 도전과 반항심, 그리고 용기를 표출하는 것 같은 표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이전까지의 역사화들에서 유명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조연들의 얼굴이 몰개성하게 얼버무려져 표현된 것과 뚜렷이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를 통해 버틀러는 "평범한 일개 보병이 가진 불굴의 용기와 그 희생이 대영영국의 영광을 위한 승리들을 가져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11] 여기서 버틀러의 목적은, 웨스트처럼,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지만, 버틀러의 ‘영웅’은 어떤 서사시적 성웅이 아닌 평범한 군인들이다. 버틀러의 이러한 접근 방식에 당시 영국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센세이션에 빅토리아 여왕조차도 개인적으로 점호를 구입하여 왕궁에 전시했을 정도였다.


Lady Butler, Elizabeth Thompson. The 28th Regiment at Quatre Bras (1875) 캔버스에 유화. 97.2cm × 216.2cm


버틀러의 역사적 고증에 대한 관심은 웨스트의 현대 군복 묘사의 정확성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어서, 그녀는 전투에 참가한 일반 보병이 느낀 고난, 감정, 분위기 등을 최대한 살리고 재현하고자 했다. 버틀러는 크림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역사화들을 제작하면서, 당시 군복들 수십벌을 구해다가 고증에 참조하는 건 물론이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사건들의 당사자들, 즉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수많은 참전용사들을 만나 인터뷰하여 그들의 회고를 크게 참고했다. 점호에서 그랬던 것처럼 버틀러는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캬트르 브라 전투에서의 제 28 보병 연대The 28th Regiment at Quatre-Bras에서도 그 실감나는 현장감과 평범한 영국 보병들의 용기에 대한 찬미, 그리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라는 요소들을 잘 복합하여 표현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출격시킨 폴란드 창기병 연대의 파상 공격을 사각 대형을 짜 견뎌내는 제 28 북부 글로스터셔 보병 연대의 모습과 연대원 개개인들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감정 묘사는 버틀러 특유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버틀러의 성공은 19세기가 끝나가면서 동시에 끝났는데, 이는 당시 대중 정서의 변화 -제국주의적 열정으로 인해 좀 더 영광적으로 미화된 작품을 선호한- 때문이었다. 버틀러는 유행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같은 화풍의 역사화들을 그려냈다.

벤자민 웨스트는 ‘역사가의 법규’라는 사상을 역사화의 표현에 접목시킴으로써 선구자적 역할을 했지만, 그도 결국은 주제의 이상화를 위해 사실을 다르게 연출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죠지 왕조 시대의 고전주의 화가였다. 웨스트는 한 때 친구와의 대화에서 영웅들은 “수풀 아래 평범한 병졸처럼 쓰러져 죽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움직이려면 마음을 고양시키고 따뜻하게 할 장관spectacle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사실의 묘사는 이러한 효과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며 자신 스스로가 주장한 ‘역사가의 법규’와 모순되는 발언을 했다.[12] 그리고는 웨스트로부터 한세기 후, 프랑스 화가들로부터 영향 받은 버틀러 부인이 영국의 역사화 기조에 발전을 가져왔다. 이는 웨스트가 그러했듯 당시 시대 풍조의 반영이기도 했다. 버틀러의 현실적인 전쟁 묘사와 일개 병졸들에 대한 호의적 감정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실주의 예술에 대한 기호의 영향으로 ‘단순한 사실의 묘사’ 만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충분했기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버틀러의 역사화들에서 시작된 풍조는, 비록 몇 세대 이후이긴 했지만, 예술 분야에서 역사를 관찰하고 또 묘사하는 태도에 근대적 객관성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충분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Montagna, p.38
[2]Montagna, p.73
[3]Prown, p.40
[4]Montagna, p.73
[5]Prown, p.40
[6]Prown, p.41
[7]Evans, p.89
[8]Bowen, p.127
[9]Bowen, p.128
[10]Bowen, p.130
[11]Lalumia, p.11
[12]Evans, p.69
[13]Lalumia, p.10


참고문헌:
Bowen, Claire. "Lady Butler: the Reinvention of Military History." Revue Lisa / Lisa E-Journal.(2003):127-137.
Evans, Grose. Benjamin West and the Taste of His Times. Carbondale: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59.
Lalumia, Matthew. "Lady Elizabeth Thompson Butler in the 1870's." Woman's Art Journal. 4.1 (1983):9-14
Montagna, Dennis. "Benjamin West's the Death of General Wolfe: a Nationalist Narrative." American Art Journal. 13.2 (1981): 72-88.
Prown, Jules D. "Benjamin West and the Use of Antiquity." American Art. 10.2 (1996): 28-49. Print.
Usherwood, Pual. "Elizabeth Thompson Butler: the Consequences of Marriage." Woman's Art Journal. 9.1 (1988): 30-34.
Wind, Edgar. "The Revolution of History Painting." Journal of the Warburg Institute. 2.2 (1938): 116-127.

덧글

  • Powers 2011/11/07 16:57 #

    관심이 가서 레이디 버틀러 태그를 클릭하니 왠 라노벨과 애니메이션이 -0-);;
  • 월광토끼 2011/11/09 13:36 #

  • 누군가의친구 2011/11/07 17:06 #

    두 화가가 복식등에 어느정도 고증을 하려 했지만 목표하는 바에 따라 그림 분위기가 확 다르네요. 웨스트의 두 작품은 시점이 가운데 인물로 집중되는 반면, 버틀러 부인의 두 작품은 시점이 개개인으로 분산되니까 느낌이 다릅니다.
  • 대공 2011/11/07 17:19 #

    전자도 작가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러한 구도를 설정한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가는군요. 그래도 충분히 혁신적이었군요.
    개인적 취향은 버틀러부인의 쪽입니다
  • 정호찬 2011/11/07 17:53 #

    역시 고증은 양덕이 지존......
  • Mr 스노우 2011/11/07 22:19 #

    잘 보았습니다 ^^
    <울프 장군의 죽음>은 저도 예전에 신고전주의 관련 포스팅을 할때 인용한 적이 있었지요. 본문에 쓰신 '성화'라는 표현이 더없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장군의 표정이나 자세, 전반적인 구도가 딱 피에타나 전형적인 순교자의 모습이지요.
  • 행인1 2011/11/07 23:40 #

    '전쟁'과 '영웅'이라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다른 접근법을 취한 두 화가로군요.(레이디 버틀러는 일전에도 한번 다뤄주신듯...)
  • 데프콘1 2011/11/08 00:24 #

    사실적으로 그리자면 위대한 영웅의 상륙 장면을 구토 범벅으로 그려야 하는 사태가
    그리고 병사들이 예쁘게 죽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끔찍하겠죠
  • 데프콘1 2011/11/08 00:25 #

    지금도 전장에서 병사들이 올리는 사진하고 기자들이 찍는 사진하고 수위가 천지차이인 걸요
  • 萬古獨龍 2011/11/08 02:15 #

    영웅사관과 민중사관의 비교로도 보이네요.
  • 식인양떼 2011/11/09 10:59 #

    잘 보았습니다. 19세기는 장군들 사진을 유명 아이돌마냥 수집할 정도로 군인 찬미가
    극에 달한 시기였는데 버틀러는 용케 저런 그림들을 그렸군요.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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