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사 - 신학적 입장차? 성공회를 둘러싼 문제

대단히 기초적인 내용이지만 한 번 복습하듯 짚고 넘어가 보자.



[칸터베리 대성당]



후대는 물론이고, 당대에도 영국사회에서의 찰스 1세의 사상과 정책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성향에 의해 왜곡된 악성 폄훼로 점철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바로 찰스 1세의 종교신앙에 대한 해석이다. 영국 내전기 의회파, 그리고 백수십년 후의 휘그정파의 프로파간다는 국왕과 친왕파가 광신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카톨릭교도 내지는 카톨릭 비호자들이었다고 선전하곤 했다. 그러나, 비록 국왕 충성파 내에 공공연한 카톨릭 신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전쟁 지도부 대부분과 국왕 본인이 독실한 영국 성공회 신자였으며 로마 카톨릭과는 확연하게 거리가 멀었던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스왕의 정책들은 카톨릭적 색체를 띈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국왕의 종교적 신앙이 아닌, 정치적 신념 때문에 추구되고, 또 오해받은 부분이었다.

제임스 1세는, 이미 살펴 본 대로 왕권신수설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러나 신수왕권Divine Right에 의한 절대왕정이 수립되기 위해서는 탄탄한 중앙집권적 정부구조와 상하수직적 체제가 필요했다. 행정관료 체제가 겨우 헨리 8세 시대나 되어서야 갓 탄생하였고, 봉건적 색체가 중세 이후에도 짙게 남아있던 잉글랜드 상황에서는 대륙국가스러운 중앙정부가 들어서기 힘든게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제임스 1세 치세에는, 영국의회Parliament가 그때까지의 단순한 '부정기 소집 자문기구'의 성격에서 탈피, 본격적인 국정관여를 통한 실력행사를 시도하기 시작함으로써 왕권강화라는 대의와 강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된 시기였다. -영국의회의 그와 같은 성향 변화는 비록 '청교도혁명'이란 개념이 논파되어버린 오늘날에도 종교개혁, 신학적 진보, 종교전쟁을 통한 사상의 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한데, 이것이 영국내전 발발원인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게 오류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임스 1세가, 그리고 그 아들 찰스 1세가 택한 문제해결 방안은 바로 영국 국교회 조직의 강화였다. 헨리 8세의 탈 카톨릭 선언과 영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의 수립은 교회를 왕의 통치도구로 하는 것에 그 본 목적이 있었다. 그 헨리 8세 이후 매리와 엘리자베스 대를 거치면서 성공회는 약간의 정체성의 혼란기를 겪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제임스 1세가 다시금 그 정체성을 바로잡고 통치체제를 확고히 하는데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헌데 여기서 문제는, 제임스 1세가 기획한 영국 국교의 모습이란 국왕-주교-사제-신도로 내려오는 수직구조의 재확립이라는 '왕영교회'적 성격을 띈 것이었다는데에 있다. 당시 30년 전쟁을 통해 전 유럽을 휩쓸며 영국에도 파장을 끼치고 있던 구호는 교회의 '교단' 구조 혁파와 신교 개혁의 지속 확장이였고 이와 함께 영국 내에서 세를 급격하게 키운 것이 칼뱅파 청교도였다는 점에서, 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성공회 재편 움직임은 '왕의 권력'에 대한 위기감 이전에, 반개혁적이고 반신교적이며 친카톨릭적인 행보로 비춰져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가 자기식 교권체제 수립을 큰 이변없이 행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그가 여러차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미 여러해 동안 느슨한 가문연합체제에 가깝게 운영되던 스코틀랜드 왕국을 별 탈 없이 다스려 온 노회한 정치꾼이였던 덕분이였다. 그는 협상과 회유를 통해 장로교가 굳건히 뿌리내린 스코틀랜드에 장로교의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성공회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성공했으며, 또한 스스로가 신학에 조예가 있어 토론에도 참가하고 일반 민중에 대한 선전효과를 위해 영역 성경King James Bible을 출간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구상을 어느정도 실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앙 문제가 더 격한 분쟁의 씨앗이 되고, 영국 국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전보다 더 중대한 논제로 떠오르게 되면서 제임스 1세가 시작한 '교권을 통한 왕권 강화 작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제임스 1세 치세 말기에 이르러, 대륙에서 터진 30년 전쟁이 격화될 수록 영국 내 위기감 또한 고조되었고, 카톨릭 세력에 대한 성전을 부르짖는 세력 또한 크게 증가하였다. 그와 동시에 영국 내 카톨릭 세력에 대한 가히 근거없는 공포심이 사회 내 만연하게 되었다. 17세기 초중엽 잉글랜드에 거주하던 인구 500만 중 카톨릭 인구 비율은 (추정치지만) 채 10만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대다수가 엘리자베스 여왕 대의 탄압 시기를 거치면서 탈정치화 하여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고립을 지향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쟁의 전화가 자극하고 칼비니즘으로 강화된 미신적 반감은 유언비어와 악성 데마고기 선동으로 이어졌다. 매리 여왕 치세 카톨릭의 득세와 신교 탄압에 대한 기억은 서적 등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카톨릭 재집권에 대한 과도한 공포로 이어졌다. 이런 국면에서 연로한 제임스 1세가 의회와의 불안정한 균형을 남겨둔 채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등극한 것이 찰스 1세였다. 그는 옹고집이였으며, 그의 프랑스인 왕비 앙리에타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다가 부부의 금실은 대단히 돈독했다.

찰스 1세는 분명 카톨릭이 아니었으며, 교황에 대한 별 감정도 없었다. 아내를 사랑했고 또 아내가 자식들에게 친 카톨릭 성향을 불어 넣는 것을 막지 않았을 뿐더러 내전기에는 카톨릭 국가들에게 원조요청을 거리낌없이 했으나, 그 스스로는 성공회 신자였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가 남긴 개인적 글들과 선전선동문들에서 선언되는 그의 신앙 문제는 단순한 대국민 프로파간다의 측면을 떠나서 그의 진심어린 호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찰스 1세에게 있어 성공회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였고 사실 개인 신앙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심복인 대주교 윌리엄 로드William Laud를 통해 관여하고 강제한 성공회 개혁 정책, 즉 정해진 매뉴얼인 성공회 기도서The Prayer Book을 통해 획일화된 예배/미사의 준수와 예전/예복/주교제의 통제를 통한 교권 강화는 순수히 왕권 강화를 위해서 행해진 정책이었다. 그리고 이를 신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을 찰스 1세는 왕권 그 자체에 대한 반역자들로 받아들였다. 찰스 1세에 있어 반역이란 설득과 회유가 아닌 진압으로 다스려야 할 문제였다. 제임스 1세의 방식으로도 헤쳐가기 어려운 난세를 찰스 1세는 가히 우직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돌파하려 했다.



[칸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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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 펼친 강한 반 청교Anti-Puritan 정책과 함께 주교들의 교권 강화 정책과 성공회 기도서The Prayer Book의 전국 교회에서의 사용 강요는 이미 설명한 대로 잉글랜드 내에서 크나 큰 불신과 반감을 가져왔다. 1629년에는 비인가 방랑 설교가 금지되었고 1633년에는 성실법원을 통해 런던 중산층의 청교도 ... more

덧글

  • Allenait 2011/12/20 21:02 #

    제임스 1세 스타일은 어찌보면 가톨릭에서 교황을 떼고 그 자리에 영국왕을 넣은것과도 유사한것 같습니다
  • 당나귀형제 2011/12/20 21:13 #

    메리 튜더 시대엔 첨단기술인 인쇄술을 통해 엄청난 반 가톨릭 선전문들이 쏟아져 나왔고 친 여왕파는 이들의 논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는데(물론 여왕파도 인쇄술을 동원했지만 논리에서 한참 못 미치던)...

    찰스 1세 시대에 '반역자들' 못지 않게 논리정연하게 내용을 갖추고 배포시킨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통치기술이나 신학적 기반 모두 반발자들을 훨씬 세련되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진압과 처형이란 최종 해결책은 똑같았지만...


    성공회 기도서(그리고 종교개혁 이전, 중세말부터 등장한 시도서(Horae))의 대량 인쇄와 배포는 물론 통일된 전례와 기도양식을 대중에게 이식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전적인 왕권강화의 목적을 띄었다기 보단 종교생활이 개인화되는 경향과 함께 대중의 속어(중세 기준으론 라틴어를 해독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문맹으로 취급받겠지만) 해독력은 비약적으로 늘어가는 추세에 대한 능동적인 반응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모에시아 총독 2011/12/20 21:35 #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히 복잡한 문제였군요. 전 예전에는 그냥 단순하게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생각했습니다만, 월광아재 글을 보니 그것 말고도 여러가지 요인이 끼어있었군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 행인1 2011/12/20 23:37 #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는 왕권강화를 위해 당대에 그나마 전국적인 조직이라고 할만한 성공회를 이용하려 들였던 거군요. 헌데 이런 말많은 작업을 수행하기에는 찰스 1세는 너무나 정직(?)했던듯....
  • 누군가의친구 2011/12/21 02:49 #

    어찌되던 정치적 왜곡은 여전한 모양이군요.
  • gforce 2011/12/23 12:03 #

    "The Queen is inseparable from the Church of England. God is an optional ex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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