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사 - 찰스 1세의 개인통치기와 스코틀랜드 반란

영토에서 쫓겨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복권이라는 문제의 외교적 해결 실패와, 대對 카톨릭 聖戰의 수행을 부르짖는 극렬 신교파의 여론에 떠밀린 것이 원인이 되어, 제임스 1세는, 그리고 영국은 1624년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30년 전쟁의 참전국이 되었다. 문제는 그 전쟁을 종용했고, 또 그 전쟁 비용을 마련하고 인가해 준 의회는 제임스 1세의 표현에 따르면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하나,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미심쩍은' 양의 예산만을 인가해 줬다는 것이다.

[라 로셸 포위를 지휘하는 프랑스 추기경 리슐리외]


제임스 1세 서거 후 들어선 찰스 1세의 궁정은 그 미심쩍은 양의 전비도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주장하고 그 대신 프랑스와의 동맹을 주선하던 실권자 버킹엄 공작은 여러 가지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실책을 거듭한 끝에 인망만 잃었으며 기껏 찰스 1세와 앙리에타 마리 공주의 결혼 성사에도 불구, 프랑스마저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했다. 버킹엄 공작이 개인적 책임을 지고 지도한 카디스 공략과 그 뒤를 이어 행해진 프랑스 내 위그노 반란군을 지원하려는 라 로셸 원정도 영국의 대 실패로 끝났다. 탄핵받는 버킹엄 공작을 구원하기 위해 찰스 1세는 패전 책임이 자신의 부하가 아닌 자기 자신에 있다고 선언하는, 정치적 실책을 범했으나, 이도 소용없이 버킹엄 공작은 불만을 품은 부하 장교에게 살해당했다. 공작의 죽음과 동시에 찰스 1세의 궁정은 민중과 의회로부터 더욱 괴리되어갔다.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왕권을 제한하라는 개혁 요구가 드높아가는 가운데 의회와의 충돌은 계속 발생했고 또 심화되었다. 1628년 6월에는 왕명에 의한 체포, 구금에 대한 제한과 민법에 의한 합법적인 재판, 군대의 민가 강제투숙 금지, 의회 인가 없는 과세의 금지 등을 요구하는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 제출되었다. 의회가 인가해주는 특별세가 급했던 찰스 1세는 진저리를 내면서도 이를 할 수 없이 재가 했으나, 1629년 의회 해산 이후 아주 오랫동안 의회를 재소집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왕은 11년 동안이나 의회 한 번 부르지 않고 별 큰 문제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이것이, 반대파에서는 ‘11년의 압제Eleven Years' Tyranny’라 불렀던 찰스 1세의 ‘개인통치기Personal Rule’다.

이 1630년대라는 시간대의 영국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은 언제나 이견이 분분해 왔다. 1640년대로 넘어가서 영국내전은 터져버렸고, 때문에 1630년대는 영국내전의 원인이고 모든 해악과 갈등의 씨앗을 뿌린 시기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를 가부장적이면서도 효율적이고 안정적이어 별 문제가 없었던, 찰스 1세의 통치력을 증명하는 시기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 외에도 여러 해석들이 있으며 어느 하나만의 ‘옳은’ 시각을 정할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국왕의 개인 통치기는 그 정부가 이루고자 했던 정책도 개혁도 온전히 이뤄내질 못했으며, 비록 확실히 내전의 근간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찰스 1세와 그의 궁정이 당대의 주류 종교적, 지적, 문화적 흐름과는 유리되어간 시기였다는 것이다. 왕의 정책들은 지지받지도 못했으며 설명되지도 않았다. 설명의 부재는 오해를 낳았으며, 당대의 역사적 조류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은 것을 바탕으로 흘러갔다.


[찰스 1세의 재정운영을 담당했던 리차드 웨스턴]


찰스 1세 개인 통치기에 가장 시급히 처리되어야 했던 것은 바로 예산 문제였다. 돈 쓸 곳이 많으니 의회에게 예산과 징세안 인가를 요청했던 것이고, 그 의회와 싸우고 해산시켰으니 이제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 것인가가 큰 과제였으며, 가장 쉬운 방법은 돈 쓸 일 자체를 줄이는 것이었다. 1629년에는 프랑스와 휴전했고, 1630년에는 스페인과 종전함으로써 영국은 30년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발을 뗐으며 그 외 외교 정책들도 소극적이 되었다. 회계총관Lord High Treasurer 웨스턴Weston과 재무대신Chancellor of the Exchequer 코팅턴Cottington의 지휘 아래 여러 가지 재정 개혁들이 단행되었고 의회의 동의 없이도 걷을 수 있는, 교묘하게 법의 제한을 피하는 세금들이 도입되었다. 또한 파운드/톤당 관세도 중요한 왕실 수입원이 되었으며 저항없이 수거되었다.

성공회 거부자, 즉 카톨릭 교도들에게 물리는 벌금도 그 누구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 강하게 시행되며 큰 수입을 올려, 1620년대 걷히던 연평균 5천파운드의 벌금이 1634년에는 2만 6천파운드로 늘어나 있었다. 그토록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던 건함세Ship Money조차 해안 지방들에서는 거의 100% 징수되었다. 다만 오래된 중세 봉건시대에 근원을 둔 거의 사문화된 봉건법들의 부활 -왕실 소유 토지와 산림에 관련된-을 통한 작위 판매나 벌금수거는 상인계층과 지주계층의 불만과 동요를 키웠다. 그래도 아직 왕의 재정 운영과 징세 행태가 법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판단한 법정 판결들의 비호 아래 왕은 통치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왕의 정책에 비로소 큰 불만이 나왔던 것은 1635년 건함세 부과지를 내륙 지방에까지 확대했을 때였다. 건함세 확대징수는 그 근거가 부족했고 국방비용 마련이라는 설명도 종전 후 평화롭던 영국의 외교적 처지에서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1638년 이전까지 건함세에 대해 심각한 대규모의 저항이 있었다고 볼 증거는 없다. 10여년에 걸친 개인 통치기 동안 찰스 왕에 대한 반대는 늘어 갔으나 1637년까지 찰스는 의회를 재개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며 어떻게든 정권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체제는 무너졌다.

[지방별 건함세 납부비]


찰스 1세에 의해 임명된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펼친 강한 반 청교Anti-Puritan 정책과 함께 주교들의 교권 강화 정책과 성공회 기도서The Prayer Book의 전국 교회에서의 사용 강요는 이미 설명한 대로 잉글랜드 내에서 크나 큰 불신과 반감을 가져왔다. 1629년에는 비인가 방랑 설교가 금지되었고 1633년에는 성실법원을 통해 런던 중산층의 청교도 회합이 금지되었으며 주교들이 법원 판사 등 고위 공직에 임명되었다. 주교들의 세속 권력이 커지고 유산 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비춰질 정책들도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행해지자 곧 대주교 로드는 사실상 전 잉글랜드에서 가장 규탄받는 인물로 부상했다. 사람들은 영락없는 카톨릭 교회와 교황 권력이 브리튼 섬에 귀환했다고 통탄했다. 그럼에도 잉글랜드 내에서의 불만이 청원 제출이나 민간 레벨에서는 소규모의 소요나 난동 정도 선에서 그쳤다는 점에서 보자면, 찰스 1세와 로드의 보수적 성향의 성공회 개혁안이, 나아가 찰스의 개인 통치가 계속 지속될 여지는 아직도 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일이 그 정도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성공회 기도서에 반발하는 스코틀랜드인들]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세웠던 타협적인 성공회 체제는 성공회적 요소와 토착 장로교 종파의 요소를 결합하여 스코틀랜드 일반 민중이 성공회를 받아들일 여지를 주었었지만, 찰스 1세는 그보다 더 과격한 왕권 중심의 주교제 강화를 촉구했으며 성공회 기도서의 일괄 적용을 스코틀랜드에도 강요했다. 이 정책 시행 과정에서는 어떠한 이해나 관용, 합의, 소통도 존재하지 않았고 반발할 민중들을 달랠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1637년 7월, 기도서가 도입되자 스코틀랜드 전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민족주의 열풍이 일어 전통적인 적이었던 잉글랜드에 대한 오랜 적대감이 강하게 되살아났다. 제임스 1세가 자랑스럽게 주창했던 ‘대 브리튼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개념이 무색하게도 ’외국의 압제자들을 무찌르고 자유를 되찾자‘는 부르짖음이 스코틀랜드를 뒤덮었다. 이 과정에서 찰스 1세는 어떠한 협상도 타협도 거부하며 노발대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반역자로 규정했다. 그때부터 스코틀랜드 내 찰스의 통치기반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1638년 2월에 에딘버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 맹약Scotland Covenant‘을 결성하며 잉글랜드 왕에 대한 충성 선언을 철회했으며, 1638년 11월에는 글라스고에서 스코틀랜드 의회가 결성되어 성공회의 종결을 선언,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주교 전쟁Bishops War‘으로 불리우는 스코틀랜드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군대가 소집되는 동안 잉글랜드인들은 전쟁을 준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왕과 그의 주교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인망을 완전히 잃은 상태라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조차 공공연히 제기되었다. 찰스의 민병대 소집에 많은 이들이 불응했고 불만불평을 담은 상소서들이 꼬리를 물었다. 찰스 1세의 왕실 재정은 그의 재정, 회계 대신들의 노력 덕에 그제껏 그럭저럭 꾸려온 수준이었으나 전쟁을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런던 시에 요청한 군자금 융자는 정중하나 완고하게 거부당했다. 그리고 이제는 건함세 납부율이 무지막지하게 떨어졌다. 1639년, 징세대상 중 오직 20%만이 실제로 금액을 납부했으며 징세원들에 대한 폭력적인 습격이 급증했다. 왕의 신료들은 스코틀랜드의 무력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간언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찰스 1세는 군대를 소집했고,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1639년 3월 왕의 지휘 하에 북진한 잉글랜드 군은 2만명에 달하는, 숫적으로나마 충분한 군대였다. 하지만 이 군대는 사기도 의욕도 무기도 없는 어중이 떠중이였다. 머스킷은커녕 파이크가 없어서 급조한 활과 화살이 지급되었으며 이들에게 지급할 급료도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들을 상대할 1만 2천명의 스코틀랜드군은 의욕이 충만하고 무기도 제대로 장비한 군대였다. 왕의 군대는 행군하면서도 조금씩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버윅Berwick에서 양군이 대치하였으나 한번의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왕은 화평제의에 응했다. 물론, 이 교섭은 그저 교섭이었을 뿐, 양측은 다시금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그때까지 아일랜드에서 반란을 진압하며 강압적 통치를 하고 있던 왕의 신료, 스트라포드 백작 토마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 the Earl of Strafford가 귀국하여 왕에게 간언했다. 반란을 진압하고 국가적 대사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금액이 필요했고, 따라서 의회는 반드시 재소집되어야 했다. 스트라포드의 건의는 받아들여졌고, 1640년 4월에, 잉글랜드 의회가 11년만에 다시 웨스트민스터에 소집되었다. 노회한 정치가 존 핌John Pym이 이끈 의회는 왕의 전비 예산 인가를 거부하며 국민의 불만부터 처리하고 왕의 정책들이 철회될 것을 요구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왕은 의회를 해산시켜버리고 군대를 출진시켰다. 그 명에 따라 잉글랜드 군대는 다시금 북진하였으나, 모두가 예상한대로 8월 28일, 뉴번Newburn에서 스코틀랜드 군대와 만나 교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찰스에게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요구했고, 이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의회가 필요했다. 1640년 11월에 잉글랜드 의회가 다시 소집되었고, 그렇게 해서...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The Board was set, and the Pieces began to move.

http://kalnaf.egloos.com/tag/EnglishCivilWar

ps. 앞의 두 글들도 함께 읽어 봅시다.

제임스 1세의 치세와 변화하는 영국의 상황
신학적 입장차? -성공회를 둘러싼 문제

덧글

  • 행인1 2011/12/27 21:09 #

    찰스1세는 본인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에는 '정치력'이 가장 부족하지 않았는지...(스튜어트 왕가의 고향에서 반란이라니)
  • Allenait 2011/12/27 21:15 #

    개인통치기라. 꽤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 로자노프 2011/12/27 22:17 #

    개인통치기라... 적절하군요.

    추신: 라로셸의 경우 처음에는 영국이 프랑스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전통적인 라로셸 위그노들과의 우호관계를 들먹인 의회 덕에 라로셸을 지원하게 됬다고도 하더군요.
  • 유리멘탈 2011/12/27 23:19 #

    폭풍전야인가요...
  • 모에시아 총독 2011/12/28 09:33 #

    어떠한 권력이고 간에 하부구조와의 소통이 부족하면 자신의 권력기반을 파괴하는 짓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네요. 그나저나 개인통치기라는 그 단어가 매우 적절하네요.
  • 월광토끼 2011/12/28 17:19 #

  • 냉동만두 2011/12/28 09:45 # 삭제

    중간중간 강조해 주신, 소통의 부재라는게 참 마음에 걸리네요.

    자기 일을 얼마나 잘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얼마나 잘 알리느냐도 만만찮게 중요하다는 좋은 예시 같습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12/28 14:27 #

    그러고보니 역시나 예산이 중요한건 그때나 지금이나...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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