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전사 - 스트라포드의 처형과 갈등의 심화



1640년 4월에 소집되었다가 해체된 ‘단기 의회Short Parliament'가, 스코틀랜드가 국왕에게 요구한 스코틀랜드 정부 운영비. 군대 유지비 및 전쟁 배상금을 처리하기 위해 같은 해 11월 재소집 되었다. 그리고 의원들은 더 이상 왕의 의지에 끌려다닐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독하게 왕을 몰아 붙였고, 더 이상 왕에 의해 해산 당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장기 의회Long Parliament'라고 불리게 되었다.

장기 의회가 재결성된 그 순간 영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는 일치단결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두가 국왕의 지난 ‘개인 통치기’를 끝장내고 정치적, 종교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데에 뜻을 모았다. 1640년의 잉글랜드는 유럽의 급진 정치 이론가들의 안식처같은 곳이 된 상황이었고 사무엘 하트립, 존 코메니우스, 존 드러리같은 개혁 운동가들이 베드포드 백작 등의 정치적 거물들의 지원을 받으며 하원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그리고 존 핌의 주도하에 찰스 1세의 '개인 통치기'는 차례차례 해체되어 나갔다.

하지만 그 일치단결 밑에서는 큰 균열과 간극이 존재했다. 1630년대 찰스 1세의 통치정책에 대한 반대 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졌었다. 국왕의 독립적이고 독단적인 통치가 기존 사회 체제와 지방자율, 법치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 보수파와, 보편적인 정치적 도덕성의 문제로 국왕 통치를 부정하면서 사회 전체에 급진적인 체제적, 종교적 전면 개혁을 당행하려 한 급진파가 그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차, 사회적 입장차는 비록 1640년 장기 의회가 개회될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곧 큰 분열을 초래하게 될 터였다.

1640년과 1641년 사이 의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던 유력 정치가들은 대부분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 또는 부농 계층에 속해 있었다. 베드포드Bedford 백작 프란시스 러셀과 워릭Warwick 백작, 사이Saye 와 셀Sele의 남작 파인즈Fiennes, 브루크Brook 남작, 하원의원 존 핌John Pym, 올리버 샌존Oliver St-John 경, 존 함덴John Hampden 경 등이 그 훌륭한 예이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점은 급진 청교 혁명 같은 거창한 개념과는 광년 단위의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비록 이들이 정치적 개혁이나 단기적 이득을 위해 대중적 여론을 이용하고 또 조장하긴 하였어도, 이들의 목적은 언제나 중도적이고 또 실용적 노선을 향했다. 이들의 장기 의회 초기의 행보는 일단은 일상의 주요 의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스코틀랜드에 지불할 배상금고, 정부 운영을 위한 예산 확보를 위한 부동산 매입과 조합으로부터의 대출 등이 중하게 다루어졌다.


그러나 주된 목적이 어쨌든 재결성된 의회가 개회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왕에게 조언하던 스트라포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물론, 찰스의 종교 정책 입안, 실행자였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도 탄핵 당해 런던탑에 수감 당했고 다른 주요 대신들과 국왕의 신료들도 탄핵당해 재산이 몰수당하거나 추방당했으며 건함세 징세문제에서 국왕의 손을 들어주던 판관들도 탄핵소추 명단에 들어갔으나, 스트라포드에 대한 탄핵은 다른 문제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국왕의 주요 정책 결정에 관여해 왔던건 스트라포드가 아니었고, 그의 적즉적인 국정 관여는 ‘개인 통치기’ 후반에나 이뤄졌으나 중요한건 그러한 사실이 아니었다. 찰스 1세에게 아일랜드 주둔군 송환과 투입을 건의한 스트라포드. 총독으로 지내며 아일랜드 반란을 잔혹신속하게 진압하는 스트라포드. 의회 소집과 해산 모두에 관여하며 국왕 의견을 좌우하는 스트라포드. 의회 지도세력과 스코틀랜드 반란군 사이의 협상 내역을 파악하고 있어 폭로할지도 모르는 스트라포드. 그 스트라포드가 자신들의 안위와 장기 집권에 가장 큰 위험이 되리라 판단한 의회는 탄핵 절차를 순식간에 마무리 짓고 스트라포드 백작 토마스 웬트워스를 반역죄인 재판정에 세웠다.





[하원을 이끌던 존 핌John Pym과 국왕을 조언하던 토마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 Earl of Straford.
이 둘은 원래 친구 사이였으나 존 핌은 스트라포드의 탄핵을 주도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한 찰스 1세의 대응은 협상의 여지를 줄이고 최대한 버티면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면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왕비 앙리에타 마리는 남편에게 강경책을 택하도록 간언했고 또 스트라포드에게 편지를 보내어 감옥에서도 강경하게 대처하고 협상에 응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왕비도, 국왕도, 자신들이 그렇게 버티면 사태를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찰스 1세는 1640년 12월에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솜씨 좋은 시계 장인은 고장난 시계를 고치면서 전부 분해하고 청소하더라도 다시 조립하면서 단 한 개의 핀이나 부품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조립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료들 중 파직 당하거나 탄핵 당할 인물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점차 강해져만 가는 의회의 요구와 스트라포드에 대한 악성 선동에 의한 대중적 요구는 왕에게 버틸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1641년 3월에 스트라포드는 국가 반역죄High Treason의 죄목으로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 재판 과정에서 국왕이 배석한 앞에 펼쳐진 좌석 분위기는 왕의 권위가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왕좌 뒤의 특석에 앉아있던 국왕에게 예의를 차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흥분하거나 담소를 나누었으며 참관인들은 빵과 고기와 맥주 등을 가지고 들어와 거리낌없이 요란하게 먹어대었다.


[1641년 4월 웨스트민스터 홀. 스트라포드의 재판]



그 재판에서, 피고석에 선 스트라포드 백작은 아직 50세도 되지 않았으나 이미 백발이 성성했고 피로로 등도 굽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질문들에 차분하고 침착하게, 용기있게 대답하며 당당하게 재판에 임했고, 결국 국가 반역죄 유죄 판정은 내려질 수 없었다. 의회는 그 대신 사권박탈법Bill of Attainder을 내세워 스트라포드의 존재 자체가 국정 불안정 요소임을 선언, 국가안보를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원에서는 204표 차이로 스트라포드의 처형안이 통과되었고 상원에서는 7표 차이로 간신히 통과되었으나 정국을 주도하는 것은 하원이었고, 이들은 왕의 최종승인을 강하게 종용했다. 찰스 왕은 끝까지 버텨보려 했고 스트라포드를 보호하려 했으나 왕가의 안위에 해가 올 수도 있다는 얘기에 결국 항복, 41년 5월 10일에 처형안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서명한다. 이틀 후, 스트라포드 백작 토마스 웬트워스는 공개적으로 처형된다. 런던 탑 앞을 지나 처형대로 향하는 스트라포드에게, 런던 탑에 수감되어 있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어 축복과 기도를 스트라포드에게 바쳤다.


[1641년 5월 12일, 타워 힐. 스트라포드의 처형]



처형을 지켜본 국왕은 왕비 앙리에타에게 (서명을 한) 자신이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고 한다. 사태가 그 지경까지 간 것은 그가 의회의 요구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너무 늦게 타협을 한 탓이였으나, 찰스 1세는 이 때 의회의 요구를 들어주는 행위 그 자체가 죄악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스트라포드의 처형은 사회적으로 혁명적, 개혁적 분위기를 더욱 더 고조시켰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팜플렛들이 런던 시내에 대량 배포되었으며 교회의 주교들은 폭도들에게 쫒겨 도망 다니고 옷이 찢겨지거나 하는 수모를 당했다. 온갖 새롭고 독특한 사상을 가진 설교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여러 종파를 만들어 설교했다. 전국 각지에서 교회 스테인드 글라스와 성모 마리아 상이 박살나 가루가 되고 파이프 오르간들이 잘게 해체되었다. 정계에서는 개인통치의 유산들이 하나하나 철폐당했다. 왕의 기업 시장독점권 수여권이 박탈당했고 왕실 예산 확보 수단들이 철폐 당했으며 성실청 등 교회 부속 재판소들도 폐지되었다. 왕이 의회 없이 통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번 해산 당한 의회는 반드시 3년 이내에 재소집 되어야 한다는 3년법Triennial Act이 통과되었다. 스트라포드 처형 결정이 내려진 그 날에는 의회가 해산하는 것은 왕이 아닌, 의회 자율로 결정한다는 법안이 동시에 인가되었다. 물론, 국왕이 이 모든 조처들을 인가하긴 했으나 한번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그러한 조처와 법안들을 준수하리라는 보장같은건 없었다.


[1641년 아일랜드 반란]



이런 분위기 속에서 1641년 10월, 아일랜드에 다시 한번 대규모 반란(Éirí Amach 1641)이 터졌다. 얼스터에서는 잉글랜드 출신 대지주들이 흥분한 아일랜드 민중들에게 학살당했다. 사람들은 카톨릭 교도들인 아일랜드인들이 마찬가지로 카톨릭인 왕비 앙리에타 마리의 사주를 받아 국가를 전복하려 반란을 일으켰다면서 수군되었다. 사건에 '여왕(이 사주한) 반란Queen's Rebellion'이라는 명칭이 정착될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찰스 1세는 이를 기회로 보고 반란 진압을 위한 군대 소집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국왕 자신일 터였다. 찰스가 이 순간을 기회로 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의회를 이끌던 한 축인 베드포드 백작의 정치적 목적은 새로이 구성되는 정부와 내각에서 왕과의 타협을 이끌어 낸 자신과 그 계파가 중요한 자리들을 차지하고 '개인 통치기' 이전의 상태, 즉 스타투스 쿠오STATUS QUO로 돌아가는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러한 베드포드 백작과 그 일파의 움직임은 당시 대중에 만연한 급진 개혁적 기조와는 크게 대치되는 것이었다. (베드포드 백작 프란시스 러셀은 1641년 5월에 병사했으나 그 아들 윌리엄 러셀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여기서 생기는 불협화음은, 존 핌의 여론 규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이미 1641년 4월의 스트라포드 재판 과정에서부터 분열은 심화되었다. 신속하게 이루어진 스트라포드 처형 과정에서 불만과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이다. 스트라포드에 대한 사권박탈안이 상원에서는 고작 7표 차로 통과된 것에서부터 이를 엿볼 수 있다. 찰스 1세는 이러한 분열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강하게 나가면 성공을 거두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1642년 1월, 찰스 1세가 임명한 주교 12명이 탄핵당하고 의회가 왕비 앙리에타까지 탄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찰스 1세는 불명확한 여러 종류의 죄목 아래, 상원에서 청교 개혁 세력을 이끌던 만체스터 백작의 아들인 만드빌Mandeville 남작과, 하원의 주요 지도자들 - 핌, 함덴, 홀즈, 그리고 스트라포드 탄핵과 처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의원 윌리엄 스트로드, 아서 하셀리그 경의 체포를 지시했다. 중대한 순간이었다.



http://kalnaf.egloos.com/tag/EnglishCivilWar

덧글

  • 2012/01/08 15:4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월광토끼 2012/01/12 15:32 #

    그러고보니 웻지우드 여사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 스트라포드 전기였지요..
  • 행인1 2012/01/08 18:40 #

    찰스1세가 갈수록 일을 키우는군요.
  • 월광토끼 2012/01/12 15:32 #

    혼자 키운건 아니고 의회랑 서로 같이 키우긴 했지만 말입니다
  • akrso 2012/01/08 18:54 #

    일명 종교암흑세기의 사건들이네요~~~~

    http://youtu.be/zXKV78VERio

    위 영상 한 번 보세요^^
  • 월광토끼 2012/01/12 15:32 #

    댓글은 고마운데 님 봇인가요?
  • 셔먼 2012/01/08 21:00 #

    당시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의회가 분열되어 나타난 보수파가 곧 장로파가 되고, 급진파가 곧 독립파가 되는 건가요?
  • 월광토끼 2012/01/12 15:33 #

    아.... 그건 아닙니다. 장로파랑 독립파 얘기는 또 다른 얘기.
  • 모에시아 총독 2012/01/08 22:50 #

    상당히 복잡한 사항들이 여기저기 뒤섞여 있었군요. 역사를 한가지 면으로만 보면 안된다는 걸 매번 실감하네요.
  • 월광토끼 2012/01/12 15:33 #

    그런 주제를 전달하려 노력하는데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2/01/11 00:14 #

    이제 화승에 불이 붙으려고 하고 있습니다.(이미 붙었을지도 모르지만.ㄱ-)
  • 월광토끼 2012/01/12 15:33 #

    이 글에서 묘사하는게 바로 그 '불붙음' 이죠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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